온하랑은 목소리만 들어도 부시아인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자 인형처럼 예쁜 아이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부시아가 근처가 가까이 다가오자 온하랑은 손에 든 카메라를 흔들었다.“시아도 여기 있었어? 숙모는 일하러 왔어.”부시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그럼 이제 일 끝난 거예요? 숙모, 그럼 저랑 같이 놀면 안 돼요?”이때 윌슨이 헛기침하며 사무실에서 나타났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힐끗 보고선 입을 열었다.“카롤, 하랑 씨는 아직 일하는 중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윌슨은 두 사람의 접촉이 많아질수록 아이와 이엘리아의 관계가 멀어진다고 생각했다.중간에 끼인 온하랑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윌슨의 말을 들은 부시아가 입을 삐쭉인 채 울먹이며 서러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자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오늘 일은 다 끝났어요. 방해되지 않을 거예요.”부시아는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며 윌슨에게 말했다.“그럼 할아버지는 일 계속하세요. 전 오늘 숙모랑 놀게요.”그 말에 윌슨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왜 매번 끼어들고 난리야.’온하랑은 윌슨의 표정을 못 본 척하더니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시아는 제가 데려갈게요. 저녁에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온하랑이 윌슨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무조건 윌슨의 뜻을 따라줘야 하는 건 아니다.이엘리아와 부시아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모양인데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굳이 온하랑과 멀어지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만약 이엘리아가 바뀌지 않는다면 설령 온하랑이 부시아와 멀어진다 한들 이엘리아를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화이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이 꼬맹이는 윌슨의 외손녀였고 온하랑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걸 알아챘다.‘눈치가 없는 건가? 회장님은 아이를 데려가는 걸 원하지 않잖아. 어휴, 또 미운털 박히겠네.’
부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엄청 잘해줘요.”원하는 게 있으면 무조건 들어줬다.하지만 그렇게 지극정성을 쏟아도 부시아는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다행이네.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뭐 하고 놀까?”“다 좋아요.”온하랑과 함께 있는 거라면 집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도 즐거웠다.한참을 고민한 끝에 온하랑은 양현수에게 부탁하여 인근 마을로 가서 자연 풍경도 구경하고 동물원과 식물원도 방문했다.식물원에서 나오다가 공교롭게 임가희를 만났는데 그녀는 혼자였다.임가희는 그들을 발견하고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하랑아, 놀러 온 거니? 참 공교롭게 이런 곳에서 만나네.”말하면서도 임가희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부시아를 훑어보았다.‘이엘리아의 딸이구나. 어쩐지 예쁘고 똑똑하더라.’부시아는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재빨리 온하랑의 뒤로 숨으며 옷깃을 움켜쥐었다.“나쁜 사람. 저리 가요.”“시아야, 무서워하지 마. 숙모랑 저쪽으로 갈까?”임가희를 상대하는 것조차 귀찮았던 온하랑은 못 본 척하며 뒤를 돌아서서 떠났다.부시아는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돌려 확인하더니 임가희와 꽤 멀리 떨어지고서야 씩씩거리며 말했다.“흥. 또 나쁜 일을 저지르려고 찾아온 거겠죠?”부시아는 기억력이 아주 좋았다. 지난번에 임가희가 온하랑과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가 강제로 사과하게 만든 일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됐어. 신경 쓰지 마.”“숙모, 그런데 저 사람은 왜 ‘하랑’이라고 숙모를 부르는 거예요?”“시아야, 사실 저 아주머니는 숙모 엄마야.”부시아는 흠칫 놀랐다.“살아계셨어요?”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부시아는 온하랑이 부모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어서 당연히 사망한 줄로 알았다.부시아의 반응에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응. 살아계셔. 숙모가 엄청 어릴때 재혼해서 사이가 별로 안 좋아. 시아도 신경 쓰지 마.”“아...”부시아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이상한 이엘리아
온하랑이 사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 시각 부선월의 손에는 사진 두 장이 들려있었다. 하나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외의 작은 마음에서 찍힌 사진이었다.첫 번째 사진에는 온하랑, 임가희, 최국환 세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는 최국환의 옆에는 우아한 분위를 내뿜는 임가희가 앉아 있었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젊고 아름다운 온하랑이 있었다. 세 사람은 마치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했다.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로운 사진을 보니 부선월은 눈꼴이 사나웠다.남자에게 버림받고 아들마저 적대시하는 상황에 손녀도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오로지 최국환을 위해서 부선월은 모든 가족에게 등을 돌렸으나 임가희는 여전히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었다.온하랑과 관계를 회복하고 이제 부승민마저도 사돈어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임가희의 자리는 더욱 확고해졌다.부선월은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늘 그렇듯 그녀는 임가희가 가진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부선월을 질투심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두 눈으로 사진을 갈기갈기 찢었다.두 번째 사진은 모녀 3대가 식물원에 있는 모습이었다.부선월은 먹이를 노리는 사악한 독사처럼 싸늘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사진 속의 세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빌어먹을 것들. 다 죽었어야 하는데.’임가희는 최국환을 빼앗아 갔고, 온하랑은 부승민을 꼬셔 그들 사이를 망쳐버렸다.심지어 애지중지 키우던 부시아마저 등을 돌렸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부선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테이블 위의 모든 물건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와당탕 소리에 부랴부랴 달려온 비서는 아수라장이 된 바닥을 보고서도 차분함을 유지한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부선월은 불안한 마음이 그제야 진정된 듯 한결 차분한 태도로 비서를 바라봤다.“그래? 지금 바로 갈게.”말을 마친 후 부선월은 서둘러 떠났다.비서는 엉망진창이 된 현장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부선월의 기분은 갈수록 걷잡
부선월은 애틋한 손길로 그 옥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국환아, 네가 이걸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난 아직도 이걸 갖고 있더라.”최국환은 멍하니 부선월의 손에 들려있는 그 옥패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선월이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난 아직도 기억나는데. 이거 네가 내 생일 선물로 줬던 거잖아. 나한테 이거 만들어주겠다고 남양까지 가서 보름 동안이나 거기 명인님한테 배웠었지.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다 순조롭게 잘 풀리길 바란다면서 말이야. 근데 그거 아니? 내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불행 중에 제일 큰 불행이 네 옆에 같이 있어 줄 수 없다는 거야...”부선월의 말에 옛 기억이 떠오른 최국환이 입술을 달싹였다.“선월아...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아니!”부선월은 손을 뻗어 최국환이 뿌리칠 수도 없게 그의 손을 꽉 잡았다.“국환아, 다 지난 일이라고 해도 난 아직 똑똑히 기억해. 우리가 용기만 낸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 충분히 행복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부선월이 낮게 울먹였다.“넌 모르겠지, 승민이가 날 얼마나 미워하는지. 엄마도 날 미워하고 아빠도 돌아가셨어. 국환아, 이제 나한테는 정말 너밖에 없단 말이야! 내가 널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이렇게 평생 날 외롭게 둘 거야?”최국환은 목울대가 울렁이는 기분이 들었다.오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빠른 결단을 내리고 말겠다며 다짐했건만.하지만 지금, 부선월의 눈물로 흐릿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보니 단호함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다.최국환과 사귄 적이 있던 부선월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제일 약해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예전에 임가희도 최국환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하다가 침대까지 함께 올라간 것 아니겠나?!부선월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국환아, 지금 네가 뭘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 너한테 이혼을 강요하는 건 아니야. 나도 서로 얼굴 붉힐 일 만들고 싶지 않거든. 그냥 내가 그동안 너
임가희가 눈썹을 들썩이며 부선월을 슬쩍 쳐다보고는 하이힐을 신은 채 우아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그 눈빛에 부선월은 임가희가 자신과 최국환의 진짜 사이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닐 거다. 단순한 착각이겠지.임가희가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다 최국환 덕분이었다.만약 최국환에게 버림받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절대 저런 평정심을 유지하지는 못 할 것이다.임가희가 카페에서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선월이 입을 열었다.“국환아, 왜 아직도 서 있어?”최국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조금 전, 임가희는 분명 온하랑과 약속을 잡았다고 얘기했다.만약 조금 있다가 온하랑이 이곳에서 부승민과 최국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본다면 서로 불편해질 게 뻔했다.“나랑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다음에, 너도 이제 돌아가.”말을 마친 최국환이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분노에 휩싸인 부선월이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임가희!온하랑!부선월이 순간적으로 뭔가를 떠올렸다.온하랑이 아직 부승민의 아내로 있는 한, 최국환은 온하랑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임가희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부선월은 엄연히 부승민의 어머니인데, 부승민의 인정을 받고 싶다 했던 최국환이면서 왜 그녀가 아닌 임가희와 온하랑 모녀에게만 자꾸 신경을 쓰는 걸까?부승민부터 최국환과 부선월의 화해를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온하랑을 두고 여러 번의 다툼이 있었던 후부터 부선월과 부승민 모자 사이는 점점 악화되어갔다.하지만 부승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내 온하랑은 최국환이 봤을 때, 부승민에게 그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이게 다 온하랑 그 천한 것 때문이었다!부선월이 최국환과 다시 잘 된다면 부승민에게도 완벽한 가정을 선물해줄 수 있었다. 게다가 사업 쪽으로도 최씨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인데 부승민은 왜 그토록 반기지 않는 걸까?분명 온하랑이 뒤에서 부추긴 게 틀림없다!온하랑이
부시아의 옆에 있던 윌슨은 깜짝 놀랐다.“...!”그가 작게 속삭였다.“숙모는 일도 해야 하니까 바쁘잖니.”온하랑은 모깃소리처럼 들려오는 윌슨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무슨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윌슨의 모습이 우스웠다.“숙모는 또 일해야지. 너도 얘기했었잖아.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잘 챙겨주신다고. 그분들이랑 며칠만 더 지내면 되는 거 아니야?”온하랑도 충분히 부시아를 데리고 나가 같이 놀아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부승민과 윌슨 사이에 맺은 약속을 본인 마음대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알겠어요. 조금 아쉽네요. 시연 아줌마 결혼식엔 참석 하고 싶었거든요. 숙모, 저 대신 시연 아줌마한테 신혼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꼭... 퍽...”수화기 너머로 온하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끊겨버렸다.부시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숙모! 숙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아직 끊기지 않은 덕에 수화기 너머에서는 계속 쿵쿵거리는 소리와 여러 어수선한 잡음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온하랑의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숙모?! 외할아버지, 설마 숙모한테 교통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죠?!”온하랑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부시아가 잔뜩 긴장한 채 윌슨의 팔을 잡고 말했다.“외할아버지, 어떻게 해야 하죠? 숙모가 너무 걱정돼요!”윌슨이 아이를 달래며 말했다.“카롤, 일단 진정하렴.”그는 전화를 앨런에게 넘겨 무슨 일인지 조사해보라는 명령을 내렸다.10분 정도 지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온하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아야? 아직 들려?”“숙모?! 숙모 괜찮아요? 깜짝 놀랐잖아요!”부시아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괜찮아,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지금 병원 가는 길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괜찮다니까 다행이에요. 어느 병원으로 가는데요? 지금 보러 가고 싶어요.”“...!!”결국... 막을 수 없는 건가.걱정하던 일이 결국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도 온하랑의 탓을
계획된 사고인데 온하랑은 단순한 찰과상만 입었다고?누굴 속이는 거야?누가 일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한단 말인가? 그렇게 간단한 교통사고 하나도 이렇게 실패를 하다니?윌슨이 말했다.“흥, 계좌 확인은 해봤어? 저 여자 자작극 아니고?”“...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앨런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송금 계좌는 베로니카라는 여자의 이름으로 된 계좌였습니다. 부선월의 비서라고 하더군요.”부선월이 누구인지 윌슨도 알고는 있었다. 그녀는 부승민의 친모로서 과거 이엘리아가 방을 잘못 들어간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하고는 경찰 신고까지 못 하게 이엘리아를 속였던 사람이었다.얼마 전 강남에 있을 때도 그 여자가 이엘리아를 데리고 부씨 가문으로 찾아가 부시아를 데려왔다.이런 교활한 여자에게 윌슨은 별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온하랑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번 교통사고도 온하랑을 제거하려던 부선월의 계략이었을 가능성이 컸다.온하랑이 죽으면 이엘리아에게도 이득이었다.잠시 생각하던 윌슨이 말했다.“이 사건은 더 이상 관여하지 말고, 경찰한테 맡겨.”카롤의 체면을 봐서라도 온하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을 예정이었지만 자신과 연관 없는 다른 사람의 일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경찰이 조사로 밝혀내면 그만이고 못 밝혀내도 그건 단순히 온하랑의 운이 나쁜 것이었다.“네.”윌슨이 전화를 끊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온하랑을 만난 자신의 외손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윌슨은 온하랑의 휴식을 핑계로 부시아를 설득해 간신히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공항에서 온하랑을 배웅하려고 했던 벨라도 그녀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무사한 온하랑을 확인하고 나서야 벨라는 뒤늦게 마음을 놓았다....지사에서 업무를 보던 최국환은 갑자기 임가희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를 받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임가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군환 씨
임가희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려는 듯 최군환의 팔을 꽉 잡았다.최군환의 얼굴도 급격히 어두워졌다.경찰은 온하랑의 진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이미 그 베로니카라는 여자는 체포했고 곧 심문 시작할 겁니다. 새로운 정도 나오면 바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당연한 말씀을요.”경찰은 임가희와 최군환을 지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임가희는 팔꿈치로 최군환을 툭툭 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자세히 좀 물어보세요. 누군가가 지시해서 일어난 사고라니, 정말 믿고 싶지 않아요...”“그래.”최군환이 임가희의 말에 대꾸하며 두세 걸음 만에 앞서가던 경찰의 뒤를 따라잡았다.부승민의 아버지로서 부승민이 없을 때 의붓딸 겸 며느리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임가희는 온하랑의 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하랑아, 지금은 좀 어때?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온하랑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가희를 응시하며 물었다.“아줌마, 갑자기 왜 이러세요?”무슨 다정한 모녀 사이를 연출해내고 싶은 거지?“하랑아, 이러지 마. 엄마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그쪽 걱정은 필요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 주시죠.”말을 마친 온하랑은 자신의 경호원인 양현수와 그 파트너를 바라보았다.온하랑의 눈짓에 두 사람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임가희를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경찰에게서 사건의 경위에 대해 알아내고 다시 온하랑의 병실로 돌아오던 최군환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임가희를 발견했다.“왜 벌써 나와? 하랑이 몸은 좀 어때? 좀 더 있어 주다가 오지.”임가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큰 문제는 없고 그냥 가벼운 찰과상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기가 괜찮은지는 좀 더 입원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다네요. 조금 피곤해 보여서 우선 혼자 쉬게 내버려 뒀어요.”“그것도 나쁘진 않지.”최군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