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가희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려는 듯 최군환의 팔을 꽉 잡았다.최군환의 얼굴도 급격히 어두워졌다.경찰은 온하랑의 진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이미 그 베로니카라는 여자는 체포했고 곧 심문 시작할 겁니다. 새로운 정도 나오면 바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당연한 말씀을요.”경찰은 임가희와 최군환을 지나 병실 밖으로 나갔다.임가희는 팔꿈치로 최군환을 툭툭 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자세히 좀 물어보세요. 누군가가 지시해서 일어난 사고라니, 정말 믿고 싶지 않아요...”“그래.”최군환이 임가희의 말에 대꾸하며 두세 걸음 만에 앞서가던 경찰의 뒤를 따라잡았다.부승민의 아버지로서 부승민이 없을 때 의붓딸 겸 며느리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임가희는 온하랑의 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하랑아, 지금은 좀 어때?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온하랑은 차가운 눈빛으로 임가희를 응시하며 물었다.“아줌마, 갑자기 왜 이러세요?”무슨 다정한 모녀 사이를 연출해내고 싶은 거지?“하랑아, 이러지 마. 엄마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잖아.”“그쪽 걱정은 필요 없으니까 이만 돌아가 주시죠.”말을 마친 온하랑은 자신의 경호원인 양현수와 그 파트너를 바라보았다.온하랑의 눈짓에 두 사람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임가희를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경찰에게서 사건의 경위에 대해 알아내고 다시 온하랑의 병실로 돌아오던 최군환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임가희를 발견했다.“왜 벌써 나와? 하랑이 몸은 좀 어때? 좀 더 있어 주다가 오지.”임가희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큰 문제는 없고 그냥 가벼운 찰과상만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기가 괜찮은지는 좀 더 입원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다네요. 조금 피곤해 보여서 우선 혼자 쉬게 내버려 뒀어요.”“그것도 나쁘진 않지.”최군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군환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부선월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말했다.최군환은 잔뜩 실망한 눈빛으로 부선월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그저 고집만 세다고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줄은 몰랐어. 너 정말 독한 여자였구나!”“군환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왜 이래?”부선월은 억울한 표정으로 최군환을 바라보았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고 싶어?”“... 군환아, 난 정말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최군환은 계속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부선월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한 가지만 묻자. 너 베로니카라는 여자 시켜서 무슨 짓 했어?!”잠시 멍 해있던 부선월의 눈빛이 갑자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설마 베로니카에게 시켰던 일을 최군환한테 들킨 걸까?최군환은 당황한 부선월의 표정을 보며 분노에 찬 비소를 흘렸다.“선월아, 부선월. 너 언제 이렇게 잔인해졌니? 온하랑이 배 속에 품고 있는 아이가 승민이 자식인데, 그런 짓까지 할 생각을 했어?!”부선월의 낯빛이 창백해졌다.역시 들킨 것 같았다.“군환아, 내가 다 설명할게...”당황한 부선월이 입술을 달싹이며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머리를 쥐어짜 냈지만 이내 최군환에 의해 말이 끊겼다.“무슨 설명? 경호원이 상황판단을 빨리해서 사고를 피했던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하랑이는 지금쯤 영안실에 누워있었을 거야!”부선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최군환을 바라보았다.“교통사고? 무슨 교통사고?”“아직도 발뺌하는 거야?!”최군환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부선월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하랑이가 공항으로 가던 차가 하마터면 마주 오던 밴에 치일 뻔했어. 그 차주는 경찰한테 체포됐고 경찰 조사 결과 베로니카가 지시한 거라고 하던데. 이런데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거야?!”“이건 정말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난 베로니카한테 온하랑을 교통사고로 다치게 하라는 지시는 내린 적이 없어!
“아아악!”분노에 휩싸인 부선월이 손으로 벽을 힘껏 쳤다.힘겹게 최군환의 마음을 돌려놓았건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끝나버릴 거라고는 부선월도 예상하지 못했다.베로니카 이 쓸모없는 것!왜 이런 교통사고를 만든 걸까?벽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부선월은 발목에서 느껴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경찰서로 향했다.경찰서로 이동하는 길에 부선월은 교통사고의 경위와 온하랑의 상태까지 간단히 파악했다.경찰서에 도착한 부선월은 심문실에서 베로니카를 만날 수 있었다.부선월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베로니카, 내가 너한테... 왜 굳이 사람까지 시켜서 온하랑이 탄 차를 친 거야?!”베로니카는 다급히 부선월의 눈을 피했다.“대표님,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제 죄는 인정할 테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세요.”몇 년 동안이나 부선월의 곁에서 함께 일을 하며 항상 꼼꼼하게 일 처리를 해왔던 베로니카인데, 이렇게 갑자기 정신이 나갔다는 핑계를 낸다니.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부선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그녀는 베로니카의 눈빛 속에 갇힌 죄책감을 본 것 같았다...“베로니카, 솔직히 얘기해. 누가 시킨 거야?!”부선월이 질문을 이어나갔다.“임가희 맞지?!”부선월은 빠르게 포인트를 집어냈다. 베로니카는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 목적은 부선월과 최군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겠지!베로니카는 부선월의 말에 눈에 띄게 흠칫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내리깔았다.“아니에요, 누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온하랑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요!”베로니카의 말에 더 확신을 가진 부선월이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임가희가 널 어떻게 매수했는지 내가 한 번 맞혀볼까? 협박했나? 아니면 돈으로 유혹한 건가? 보나 마나 전자였겠지. 네 가족들을 인질 삼아 널 협박했을 거야. 맞지?”베로니카는 예전부터 부선월의 비밀스러
병원 병실.임가희가 병실을 떠나자 온하랑은 양현수에게 베로니카의 신원을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그녀는 전혀 부선월을 용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엘리아를 따르는 사람들, 예를 들면 앨리스 같은 사람이 벌인 짓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현수가 다시 병실로 돌아와 한 서류 자료들을 온하랑에게 건네주었다. 베로니카의 기본적인 신상정보와 인간관계들이 적혀있는 서류였다.온하랑은 곧장 인간관계가 적힌 페이지로 서류를 넘겨보았다. 서류를 넘기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부선월이라는 이름에 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온하랑은 다시 서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며 결론을 내버렸다. 베로니카의 인맥에서 부선월을 제외하면 온하랑과는 접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굳이 그런 짓까지 독단적으로 꾸몄을까?그러니까... 부선월이 시킨 짓이라는 건가?온하랑은 부선월이 자신을 계속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선월은 그저 자신과 부승민의 사이를 갈라놓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초강수까지 두면서 온하랑의 목숨까지 앗아가려고 하는 걸까?최근 들어 부선월의 미움이라도 산 적이 있었나?설마 부승민과 부선월이 그날 저녁에 그런 식으로 불쾌한 이별을 맞이한 것에 대한 분노를 온하랑에게 풀려고 했던 건가?하지만 베로니카는 이미 자백을 끝냈고 경찰 측에서도 베로니카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를 못 찾았던 탓에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고 말았다.병원 관찰이 끝나고 퇴원한 온하랑은 곧장 비행기를 타고 강남으로 돌아왔다.필라에 있을 때부터 양현수가 모든 일을 부승민에게 전해주고 있었다.온하랑에게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부승민은 일찍 공항에 나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온하랑이 입국장을 나오는 것을 발견한 부승민은 곧바로 달려가 위아래로 그녀를 살펴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다.”온하랑의 손을 잡은 부승민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문질렀다.“하랑아, 네가 당한 일에 대한
게다가 당근 모양으로 된 기구도 함께 있었다.“...”김시연은 재빨리 선물 상자를 다시 닫고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두었다.결혼식 날이 되자 예약해두었던 호텔은 눈부시게 화려했고 수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다.서정훈과 그의 딸 서이안의 등장으로 예식장은 더욱 활기찼다.김웅은 서정훈을 보자마자 서둘러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김씨 가문의 영광이네요!”“과찬이십니다. 오늘은 사적인 자리니까 편하게 대해주시죠. 우선 김시연 씨의 백년해로를 기원합니다.”“덕담 감사합니다.”서정훈의 예의 있는 답변에 김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웃는 표정 그대로 얼굴 근육이 굳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여기 제 딸 이안이를 소개해 드리죠.”김웅의 시선은 서정훈에게서 바로 서이안에게 옮겨졌다.큰 키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서이안은 경멸 어린 냉랭한 시선으로 김웅을 내려보았다.김웅은 순간적으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 이유를 떠올리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 서이안에게 웃어 보였다.“이렇게 용모도 단정하시고 눈동자에도 생기가 가득하신 것이 정말 영특해 보이시네요. 역시 서 의원님 따님이십니다!”“아빠,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그러는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서이안은 그 말만을 남긴 채 혼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죠. 제 딸 성격이 원래 저래서, 단정이고 영특이고 방해만 안 되면 다행입니다.”“솔직한 성격인 거죠. 요즘 시대에 저런 성격 보기 드물죠.”“...”“의원님, 이쪽으로 오시죠.”김웅이 급히 서정훈과 서이안을 자리로 안내했다.온하랑은 무대와 가까운 자리를 선택해 영상통화로 부시아에게 식장 내부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부시아가 감탄했다.“와, 너무 예뻐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너무 아쉬워요.”“괜찮아, 네가 돌아오면 같이 시연 아줌마네 신혼집 놀러 가자. 200억짜리 별장이래. 엄청 커.”“우와! 너무 좋아요! 숙모, 결혼식 언제 시작해요?”“금방이야.”결혼
부시아와 윌슨이 휴대폰 화면 앞에 모여 결혼식을 보고 있었다.금방 약을 먹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던 서희수는 늙은이와 어린아이의 집중한 것 같은 뒤통수를 발견하자 호기심이 발동해 물었다.“뭘 보길래 그렇게 진지하게 봐요?”“아무것도 아니야...”부시아가 고개를 들어 윌슨의 말을 가로막았다.“저희 숙모 친구 결혼식 보고 있어요, 외할머니. 외할머니도 와서 같이 보실래요? 신랑이 외삼촌이랑 닮은 것 같아서요...”그 말을 들은 서희수가 다가와 휴대폰 화면에 나온 신혼부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랑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서희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이거 연도진 아니야?아들이 밖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엄마인 서희수가 모를 수 있다니.서희수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윌슨을 바라보았다.윌슨은 서희수에게 진정하라는 듯한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서희수는 입술을 깨물며 부시아의 곁에 앉아 함께 그 결혼식을 보기 시작했다.김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연도진에게 김시연의 손을 넘겨주었다. 진한 포옹을 나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꽃길을 따라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결혼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러 걸어갔다.“시아야, 외할아버지한테 물 한 잔만 떠다 줄래?”윌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윌슨의 심부름에 부시아가 몸을 일으켰다.서희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윌슨을 바라보았다.반지를 교환한 두 사람은 선서를 시작했다.“연도진 군은 여기 있는 김시연 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까?”“맹세합니다!”“김시연 양은 여기 있는 연도진 군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까?”“...맹세합니다.”연도진의 열정 어린 시선에 김시연이 눈을 피했다.분명 둘이 하는 것도 위장 결혼이었고 이 결혼식도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김시연의 심장은 쉴 새 없이 쿵쿵 뛰었다.“네, 이
부승민이 입술을 삐죽이며 온하랑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하랑 씨도 나한텐 생명이야. 아니,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해.”“허.”휴대폰과 가까이 있었던 부승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생중계를 보고 있던 부시아, 윌슨과 서희수의 귀에 부승민의 목소리가 똑똑히 때려 박혔다.부시아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 목소리는 아빠 목소리인데요!”“...”사회자가 다시 물었다.“신부는 신랑의 진심 어린 말에 어떤 대답을 하고 싶으신가요?”“그동안 모든 걸 다 감싸줘서 고마웠어. 앞으로 우리가 모든 순간을 함께 할 거라고 믿어.”한 마디만 남기고 재빨리 마이크를 내려놓는 김시연의 모습에 당황한 사회자가 물었다.“더 없으신가요?”“네, 없습니다.”김시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그저 형식적인 결혼식이라고만 생각했던 김시연은 멘트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연도진이 이렇게 긴 멘트를 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했을까!“...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순서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가 퇴장하자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온하랑은 부시아에게 작별 인사를 간단히 건네고는 영상통화를 종료했다.서희수는 부시아를 거실에서 혼자 놀도록 내버려 두고 따로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윌슨을 위층으로 불러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봐요.”서희수는 연도진의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평소 냉정하게 철저히 표정을 숨기며 살던 아들이 한 번이라도 이렇게 감정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나?“아직도 모르겠어? 시연 양은 도진이가 한국에 있을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야. 필라에 온 이후에도 계속 시연 양만 생각했고. 그러다가 시연 양이랑 다시 사귀겠다고 작년부터 계속 강남으로 가더라고.”윌슨이 김시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연도진이 필라에 온 지 2년이 지난 후였다.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탓에 윌
“쟨 이미 힘이 너무 막강해졌어. 게다가 당신 오빠도 도진이 편을 드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고 묶어서 데려올 수는 없잖아.”윌슨이 무기력하게 말했다.연도진의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자신의 곁에서만 자랐다면 윌슨은 분명 그 모습에 흡족해했을 것이다.연도진은 훌륭한 후계자였으니 말이다.여동생도 아낄 줄 알았고 어머니에게도 효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모든 부분에서 윌슨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사람이었다.연도진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문의 사업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 내의 입지를 굳히고 본인의 라인을 타려는 사람들까지 만들어놓았다. 그 후로부터 윌슨은 연도진에게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기 점점 어려워졌다.마치 나는 법을 배운 독수리가 혼자 사냥을 시작하듯 연도진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출장 핑계를 대며 자주 강남을 드나들면서부터였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윌슨은 그저 묵인해주었다.서희수는 테이블 옆에 앉아 카메라에 잡혔던 서정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도진이 예전에는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애가 아니었는데. 오빠도 갑자기 한심해졌어요. 어떻게 도진이가 그렇게 제멋대로 구는 걸 내버려 두고만 있는 거죠?! 지금 당장 전화해서 돌아오라고 해야겠어요!”서희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똑한 연도진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이건 명백한 사기였다!연도진도 자신의 정체를 평생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었다.그때가 되면 김시연은 연도진을 용서해줄 수 있을까?서희수는 며느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이엘리아를 받아들이고 시누이와 며느리가 원만하게 지내주길 바랐다. 그 탓에 서희수는 연도진과 앨리스의 결혼을 주선하고 싶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연도진이 앨리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만약 김시연이 평범한 강남 여자였다면 서희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엘
최동철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 내일 아이가 도착하면 다시 연락할게.” “알겠어요.” “하랑아, 아직 아이 이름까지는 모르지? 메이슨이래.” “메이슨? 좋은 이름은 아니네요.” “응. 나중에 경계심이 조금 풀리면 이름부터 바꿔야지. 일단은 메이슨이라고 부르자.” “알겠어요.” “하랑아, 잘 자.” 온하랑이 답을 하기 도전에 부승민은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온하랑은 부승민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선 웃으며 물었다. “화가 나? 마음이 아파?” “넌 웃음이 나오냐?” 온하랑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하면 이제 안 아플 거야.” 깃털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몸에 닿자 마치 고양이가 꾹꾹이를 하는 듯 간질거렸다. 온하랑의 얼굴은 유난히 차분하고 청순해 보였는데 살짝 찌푸린 인상마저 매혹적이었다. 부승민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것만으로는 안돼.” 온하랑은 재빨리 손을 빼내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안 할게.” 그러자 부승민은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이것만으로는 안된다고. 다른 위로도 필요해.” “뭐?” 온하랑을 마주 보던 그의 시선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부승민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온하랑은 괘씸함에 그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부승민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5분만.” 뜨거운 숨결이 닿자 온하랑은 온몸이 간질거렸다. “3분.” “그럼 10분.” “내가 졌다. 5분이야.” “콜.” “잠깐만.” 온하랑은 핸드폰을 꺼내 타이머를 설정했다. “이제 됐어.” 그녀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소파에 기댄 채 두 손을 부승민의 어깨에 올렸다. “그냥 먹기만 해. 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응.” 온하랑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분... 2분... 3분...” “이제 마지막이야. 5, 4, 3, 2, 1... 됐어, 이제 일어나.” 부승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분노의 불길이 강렬하게 타오를수록 부승민은 가슴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때의 온하랑이 최동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됐다면 고통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로 인해 생긴 우발적인 사고였다. 온하랑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부승민을 바라보고선 부드럽게 그의 등을 토닥이며 진정시켰다. 온하랑은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최동철이 ‘너’가 아닌 ‘하랑’이라고 얘기하니 마치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방관하는듯한 느낌이었다. 대학교 3학년때의 온하랑을 대입하지 않아서인지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이런 해프닝이 일어났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때의 온하랑이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부승민이 당사자가 된 듯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는 온하랑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승민의 질책에도 최동철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때는 나도 술을 마셨어.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 잘못된 행동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알아. 다음날 하랑이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단호하게 선을 그었어. 내가 소개해준 방도 빼고 한순간에 사라진 거지. 모든 게 내 업보라고 생각했어.” “임신한 얘기는 나한테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어. 나도 며칠 전에 알았거든. 하랑이가 내 아이를 낳았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누군가 사진을 보내왔어.” “누군데?” “몰라. 낯선 번호여서 다시 걸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뜨더라고.” 최동철은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람을 보내 조사했는데 사실이었던 거야. 하랑아, 왜 나한테 임신했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저도 몰라요.” 온하랑도 본인이 왜 아이를 낳았는지 몰랐다. 최동철의 말에 따르면 짝사랑 상대에게 상처를 받아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한다. ‘부승민이랑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나 보네.
가식적이다. 온하랑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아참, 얘기 못한 게 있는데 얼마 전 아이를 낳았어요. 예쁜 딸이에요.” “정말? 축하해. 출산 예정일이 두 달 정도 남았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빨리 낳았네. 조카는 건강하지?” ‘조카?’ 듣도 보도 못한 호칭에 부승민은 어이가 없었다. ‘조카 같은 소리 하네.’ “조산이다 보니 다른 신생아에 비해서 많이 약해요. 두어 달은 인큐베이터에서 지내야 하거든요.” “아이는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자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 돌잔치 때 꼭 연락해 줘. 시간 내서 우리 조카 보러 가야지.” 부승민은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딸 보러 온다고? X랄하네.’ “알겠어요. 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래. 연락 기다릴게.” 겉치레 인사를 주고받은 후 온하랑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필라시에서 아이를 데려갔다면서요?” 최동철은 당황한 듯 흠칫하더니 무기력함과 허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알고 있었어?” “네.” “누구의 아이인지는 알아?” 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제가 알기론... 제 아이입니다.” “우리의 아이지.” 부승민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보고선 재빨리 그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진정시켰다. “동철 씨, 그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요.” “정말 알고 싶어?” “네.” 최동철은 몇 초간 침묵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부 대표도 옆에 있지?”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으며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말해.” “솔직하게 말할게.” 최동철은 옛 추억을 회상하는 듯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랑이가 필라시에 왔을 때 마침 내가 휴가였어. 그래서 시간도 많았고 마침 도움이 필요한 것 같길래 한몫 거들었지.” “중점만 얘기해.” 부승민은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최동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승민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어가 온하랑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하랑아, 내가 그 아이를 찾으려고 필라시에 사람을 보냈거든? 찾은 것 같아.” 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정말?” “응.” “아이 데려오라고 하면 안 돼?” 부승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한발 늦었어. 다른 사람이 먼저 데려갔대.” “누구?” 온하랑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최동철...” 충격받은 온하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양부모의 말에 따르면 최동철이 그 아이의 아빠래.” 곧이어 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의 눈을 마주한 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 벨라한테 물어봤는데 그 사람일 가능성이 제일 크대.” “가능성?” “응... 필라시에서 연애를 해본 적은 없지만 동철 씨랑 가깝게 지냈다고 벨라가 얘기해 줬어.” “동철 씨?” “최동철.” 부승민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빠?” 온하랑은 부승민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승민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고 소파 팔걸이에 놓은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 사람일 줄은 상상도 못 해서...” 처음 이 일을 알게 되었을 때 최동철이 떠오르긴 했지만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지 결코 믿지 않았다. “아니라고?” 온하랑은 그의 손을 잡고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장난을 쳤다. “뭔가 질투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부승민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을 돌렸다. “아이가 몇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는 건 최동철도 이 일에 대해 몰랐다는 얘기인데... 갑자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러니까. 그 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궁금해. 뭐 좀 알아낸 거 없어?” “연 비서가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네가 필라시에 처음 갔을 때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대. 그래서 직접 요리할 생각으로 방을 알아봤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최동철
왜 하필 최동철일까?비록 온하랑과 만나고 있고 둘 사람 사이에는 딸까지 생겼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질투가 났다.그는 다른 사람과 나눈 게 아닌 온하랑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하지만 부승민을 알고 있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는 것을.그 아이의 존재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어떤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부승민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일찌감치 아이를 찾아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만드는 건데...부승민은 현명한 선택을 내리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온하랑은 부씨 가문에 온 이후로 줄곧 부승민만을 바라봤다. 유학할 때도 변함없이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그런 사람이 필라시에서 최동철과 가까워진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중 하나를 차지하는 게 부승민과 닮은 최동철의 외모일지도 모른다.짝사랑하는 사람과 꼭 닮은 얼굴이라면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동철이 수작을 부렸다면...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부승민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이는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고 최동철은 이제서야 아이를 데려갔다. 그 말인즉 최동철은 온하랑의 임신 사실을 몰랐다는 뜻이기도 하다.만약 온하랑이 정말로 최동철과 만났던 사이라면 어떻게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조차 모를 수가 있냐는 말이다.남녀 사이에 아이가 생긴 순간 두 사람은 평생 엮여야 하는 운명이다. 게다가 양측 모두 아이를 향한 책임감이 있다면 감정이 다시 생기는 건 시간문제다.현재 상황에서는 최동철이 아이를 데려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아이가 눈앞에 없으면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온하랑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하지만 온하랑이 그걸 원할까?과연 순순히 아이의 양육권을 최동철에게 넘길까?부승민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친 부승민은 얼떨결에 악몽을 꾼듯한데 깨어나 보니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다음날, 부승민은 아침 일찍 회사로 향했다.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
부승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랑 얘기는 해봤어? 성격은 어때?” “얘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아예 입을 열지 않습니다.” “양부모랑 협의해서 아이 데리고 와.” 온하랑과 약속한 게 있으니 절대 어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은 내려놓은 부승민은 착잡함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참을 고민한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19층, 부시아는 거실에서 그림 숙제를 하고 있었다. 부승민이 안으로 들어오자 부시아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아빠, 갑자기 왜 왔어요?” “내일 출근해야 돼서 일찍 들어왔어.”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다니, 너무 불쌍하네요. 그럼 시아가 내일 병원에 가서 숙모랑 놀게요.” “그래.” “아빠, 어때요? 그림 엄청 잘 그렸죠?” 부시아는 펜을 내려놓고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부승민에게 도화지를 내밀었다. 부승민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웃으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박을 그린 거야? 시아 엄청 대단하네.” “아빠... 이건 사과예요.” 부시아는 서운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못생겼어요?” “아니야... 아빠가 피곤해서 잘 안 보였어.” 부승민은 목을 가다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시아야, 며칠 후에 남동생 한 명이 올 거야.” “여동생 아니에요?” “병원에는 있는 동생 말고, 시아랑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아이가 올 거야.” 시아는 5월생이다. 온하랑의 기억에 따르면 그 아이는 6월 말에 태어났으니 부시아 보다 한 달 정도 어린 셈이다. 고작 한 달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을 봤을 땐 심각한 영양실조로 말라있어 적어도 한두 살은 어려 보였다. 부시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군데요?” “숙모의 아이인데 예전에 좀 힘들게 지내서 데려오기로 했어. 남동생이랑 잘 지낼 수 있지?” ‘숙모의 아이라면 아빠의 아이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럼 나랑 똑같네? 난
병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유정화는 온하랑과 부승민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 명은 핸드폰, 다른 한 명은 노트북.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유정화가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부승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분... 싸웠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침묵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온하랑의 산후조리를 돌봐주기 위해 이곳에 왔고, 산후조리가 끝나는 동시에 계약도 종료이니 굳이 이런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유정화는 알지 못했다. 부승민의 노트북 화면은 온하랑과의 채팅창에 멈춰있다는 것을. [읽씹? 왜 갑자기 답장 안 해.] 답장할 생각이 없었던 온하랑은 실수로 메시지를 눌렀고 ‘1’이 사라지니 답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맛볼 기회가 또 있을까?] [나중에 모유 짜내면 먹던가...] [그럼 그 맛이 안 날 텐데?] 콜록. 온하랑의 기침소리가 병실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부승민을 바라봤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부승민은 고개를 들고선 희미롭다는 듯이 온하랑을 바라봤다.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아주머니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회사도 며칠이나 비웠잖아. 푹 쉬고 출근해서 일 봐야지.”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하랑아, 내일 토요일이야. 난 며칠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은 여기서 해도 돼.” “평소 토요일에도 출근했잖아? 얼른 일해서 우리 아이 분유값 벌어야지. 그리고 겸사겸사 인테리어 공사가 잘되는지도 확인해 줘.” 이때 유정화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들어가세요.” 사실 유정화는 부승민이 병실에 있는 게 많이 불편했다. “알겠어요.” 부승민은 마지못해 한발 물러섰다. “퇴근하고 보러 올게.” “응.” 부승민은 대충 물건을 챙긴 뒤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아쉬운 눈빛을 보냈
부승민은 젖병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손바닥만 한 애가 이걸 다 마실 수 있을까?” 온하랑은 그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기면 간호사가 따로 보관하니까 이상한 걱정 좀 하지 마.” 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 “보통은 아이가 분유에 적응할 수 있게 간호사들이 모유랑 번갈아 가면서 먹이잖아. 그럼 너무 낭비 아닌가?”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유를 냉장 보관하면 3,4개월까지 가능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온하랑은 단번에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네.” “부승민!” “알았어. 지금 바로 주고 올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은 병실로 돌아왔고 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놀고 있었다. 이를 본 부승민은 노트북을 꺼내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그러던 중 노트북 바로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화면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침대에 있는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 시각 온하랑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초집중했는데 반응만 봤을 땐 카톡을 보낸 사람이 온하랑은 아닌듯했다. ‘바로 앞에 있는데 그냥 말하면 될걸 왜 카톡을 보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은 뭔가 재밌는 내용을 공유한 것 같지도 않았다. 부승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카톡을 클릭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하랑이 보내온 메시지였는데 고작 세 글자가 담겨있었다. [맛있어?] 앞뒤 주어를 잘랐지만 부승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았다. [응. 또 먹고 싶어.] 메시지를 전송한 후 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 여전히 핸드폰 화면만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귀는 점점 빨개졌다. 온하랑은 타이핑을 하는 듯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행동에 부승민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고 곧이어 카톡 알림 창이 떠올랐다. [내가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비릿한 맛이래.] [살짝 비리긴 한데 맛있어.] 부승민은 그 맛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카톡
2분 뒤 부승민이 수건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온하랑과 눈이 마주친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사지하기 전에 온찜질을 하는 게 좋대.” “생각보다 능숙한데?” 부승민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온하랑에게 건네주고선 큰 손을 뻗어 천천히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그 후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했고 잠깐 사이에 온하랑은 가슴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부승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도 묘했다. “얼마동안 해야 돼?” “십분.” 그 말을 끝으로 부승민은 다시 화장실로 가서 따뜻한 수건 하나를 더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두 수건을 맞바꾸며 찜질을 했다. 10분 후, 수건을 거두었다. 뭉친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으슬으슬한 서늘함이 찾아왔다. “조금 춥네? 이불 덮을래.” 온하랑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러면 마사지가 잘 안돼.” 부승민은 푹신한 담요를 두 번 접어 온하랑에게 덮어주었다. “그럼... 시작할게.” “응...” 그는 담요 밑으로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운뒤 네 손가락으로 가볍게 주물 었다. “아주머니가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적당한 힘으로 천천히 눌러야 된다고 했어.” 부승민의 움직임에 따라 담요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모호한 분위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지 마.” “아주머니가 이렇게 열 번 반복하면 된대. 하루에는 적어도 두세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해.” “느낌이 어때?” “조금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온하랑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맞아. 그런 느낌이래. 금방 나오겠는데? 이번이 열 번째야. 됐어.” “끝난 거야?” “그리고...” 부승민은 손가락을 살살 비틀며 말했다. “이렇게 유방을 자극하면 모유가 훨씬 더 많이 나온댔어.” “그게... 사실이야? 네가 지어낸 건 아니지?” 온하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못 믿겠으면 직접 아주머니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