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환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부선월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말했다.최군환은 잔뜩 실망한 눈빛으로 부선월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그저 고집만 세다고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줄은 몰랐어. 너 정말 독한 여자였구나!”“군환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왜 이래?”부선월은 억울한 표정으로 최군환을 바라보았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내 앞에서까지 연기하고 싶어?”“... 군환아, 난 정말 네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최군환은 계속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부선월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한 가지만 묻자. 너 베로니카라는 여자 시켜서 무슨 짓 했어?!”잠시 멍 해있던 부선월의 눈빛이 갑자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설마 베로니카에게 시켰던 일을 최군환한테 들킨 걸까?최군환은 당황한 부선월의 표정을 보며 분노에 찬 비소를 흘렸다.“선월아, 부선월. 너 언제 이렇게 잔인해졌니? 온하랑이 배 속에 품고 있는 아이가 승민이 자식인데, 그런 짓까지 할 생각을 했어?!”부선월의 낯빛이 창백해졌다.역시 들킨 것 같았다.“군환아, 내가 다 설명할게...”당황한 부선월이 입술을 달싹이며 어떻게든 변명을 해보려 머리를 쥐어짜 냈지만 이내 최군환에 의해 말이 끊겼다.“무슨 설명? 경호원이 상황판단을 빨리해서 사고를 피했던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하랑이는 지금쯤 영안실에 누워있었을 거야!”부선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최군환을 바라보았다.“교통사고? 무슨 교통사고?”“아직도 발뺌하는 거야?!”최군환은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부선월의 모습에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하랑이가 공항으로 가던 차가 하마터면 마주 오던 밴에 치일 뻔했어. 그 차주는 경찰한테 체포됐고 경찰 조사 결과 베로니카가 지시한 거라고 하던데. 이런데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할 거야?!”“이건 정말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난 베로니카한테 온하랑을 교통사고로 다치게 하라는 지시는 내린 적이 없어!
“아아악!”분노에 휩싸인 부선월이 손으로 벽을 힘껏 쳤다.힘겹게 최군환의 마음을 돌려놓았건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 끝나버릴 거라고는 부선월도 예상하지 못했다.베로니카 이 쓸모없는 것!왜 이런 교통사고를 만든 걸까?벽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부선월은 발목에서 느껴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경찰서로 향했다.경찰서로 이동하는 길에 부선월은 교통사고의 경위와 온하랑의 상태까지 간단히 파악했다.경찰서에 도착한 부선월은 심문실에서 베로니카를 만날 수 있었다.부선월은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베로니카, 내가 너한테... 왜 굳이 사람까지 시켜서 온하랑이 탄 차를 친 거야?!”베로니카는 다급히 부선월의 눈을 피했다.“대표님, 제가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제 죄는 인정할 테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세요.”몇 년 동안이나 부선월의 곁에서 함께 일을 하며 항상 꼼꼼하게 일 처리를 해왔던 베로니카인데, 이렇게 갑자기 정신이 나갔다는 핑계를 낸다니. 분명 다른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부선월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그녀는 베로니카의 눈빛 속에 갇힌 죄책감을 본 것 같았다...“베로니카, 솔직히 얘기해. 누가 시킨 거야?!”부선월이 질문을 이어나갔다.“임가희 맞지?!”부선월은 빠르게 포인트를 집어냈다. 베로니카는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었다. 그 목적은 부선월과 최군환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서겠지!베로니카는 부선월의 말에 눈에 띄게 흠칫하며 어떻게든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내리깔았다.“아니에요, 누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온하랑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요!”베로니카의 말에 더 확신을 가진 부선월이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임가희가 널 어떻게 매수했는지 내가 한 번 맞혀볼까? 협박했나? 아니면 돈으로 유혹한 건가? 보나 마나 전자였겠지. 네 가족들을 인질 삼아 널 협박했을 거야. 맞지?”베로니카는 예전부터 부선월의 비밀스러
병원 병실.임가희가 병실을 떠나자 온하랑은 양현수에게 베로니카의 신원을 조사해볼 것을 지시했다.그녀는 전혀 부선월을 용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엘리아를 따르는 사람들, 예를 들면 앨리스 같은 사람이 벌인 짓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현수가 다시 병실로 돌아와 한 서류 자료들을 온하랑에게 건네주었다. 베로니카의 기본적인 신상정보와 인간관계들이 적혀있는 서류였다.온하랑은 곧장 인간관계가 적힌 페이지로 서류를 넘겨보았다. 서류를 넘기자마자 한눈에 들어오는 부선월이라는 이름에 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온하랑은 다시 서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으며 결론을 내버렸다. 베로니카의 인맥에서 부선월을 제외하면 온하랑과는 접점이라고는 전혀 없었는데 굳이 그런 짓까지 독단적으로 꾸몄을까?그러니까... 부선월이 시킨 짓이라는 건가?온하랑은 부선월이 자신을 계속 싫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선월은 그저 자신과 부승민의 사이를 갈라놓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초강수까지 두면서 온하랑의 목숨까지 앗아가려고 하는 걸까?최근 들어 부선월의 미움이라도 산 적이 있었나?설마 부승민과 부선월이 그날 저녁에 그런 식으로 불쾌한 이별을 맞이한 것에 대한 분노를 온하랑에게 풀려고 했던 건가?하지만 베로니카는 이미 자백을 끝냈고 경찰 측에서도 베로니카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를 못 찾았던 탓에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고 말았다.병원 관찰이 끝나고 퇴원한 온하랑은 곧장 비행기를 타고 강남으로 돌아왔다.필라에 있을 때부터 양현수가 모든 일을 부승민에게 전해주고 있었다.온하랑에게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부승민은 일찍 공항에 나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온하랑이 입국장을 나오는 것을 발견한 부승민은 곧바로 달려가 위아래로 그녀를 살펴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다.”온하랑의 손을 잡은 부승민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문질렀다.“하랑아, 네가 당한 일에 대한
게다가 당근 모양으로 된 기구도 함께 있었다.“...”김시연은 재빨리 선물 상자를 다시 닫고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두었다.결혼식 날이 되자 예약해두었던 호텔은 눈부시게 화려했고 수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다.서정훈과 그의 딸 서이안의 등장으로 예식장은 더욱 활기찼다.김웅은 서정훈을 보자마자 서둘러 악수를 건네며 인사했다.“여기까지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김씨 가문의 영광이네요!”“과찬이십니다. 오늘은 사적인 자리니까 편하게 대해주시죠. 우선 김시연 씨의 백년해로를 기원합니다.”“덕담 감사합니다.”서정훈의 예의 있는 답변에 김웅은 너무 기쁜 나머지 웃는 표정 그대로 얼굴 근육이 굳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여기 제 딸 이안이를 소개해 드리죠.”김웅의 시선은 서정훈에게서 바로 서이안에게 옮겨졌다.큰 키에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서이안은 경멸 어린 냉랭한 시선으로 김웅을 내려보았다.김웅은 순간적으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 이유를 떠올리고는 뒤늦게 정신을 차려 서이안에게 웃어 보였다.“이렇게 용모도 단정하시고 눈동자에도 생기가 가득하신 것이 정말 영특해 보이시네요. 역시 서 의원님 따님이십니다!”“아빠,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그러는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서이안은 그 말만을 남긴 채 혼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너무 신경 쓰지는 마시죠. 제 딸 성격이 원래 저래서, 단정이고 영특이고 방해만 안 되면 다행입니다.”“솔직한 성격인 거죠. 요즘 시대에 저런 성격 보기 드물죠.”“...”“의원님, 이쪽으로 오시죠.”김웅이 급히 서정훈과 서이안을 자리로 안내했다.온하랑은 무대와 가까운 자리를 선택해 영상통화로 부시아에게 식장 내부 구조를 보여주고 있었다.부시아가 감탄했다.“와, 너무 예뻐요! 저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너무 아쉬워요.”“괜찮아, 네가 돌아오면 같이 시연 아줌마네 신혼집 놀러 가자. 200억짜리 별장이래. 엄청 커.”“우와! 너무 좋아요! 숙모, 결혼식 언제 시작해요?”“금방이야.”결혼
부시아와 윌슨이 휴대폰 화면 앞에 모여 결혼식을 보고 있었다.금방 약을 먹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던 서희수는 늙은이와 어린아이의 집중한 것 같은 뒤통수를 발견하자 호기심이 발동해 물었다.“뭘 보길래 그렇게 진지하게 봐요?”“아무것도 아니야...”부시아가 고개를 들어 윌슨의 말을 가로막았다.“저희 숙모 친구 결혼식 보고 있어요, 외할머니. 외할머니도 와서 같이 보실래요? 신랑이 외삼촌이랑 닮은 것 같아서요...”그 말을 들은 서희수가 다가와 휴대폰 화면에 나온 신혼부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랑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한 서희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이거 연도진 아니야?아들이 밖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엄마인 서희수가 모를 수 있다니.서희수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윌슨을 바라보았다.윌슨은 서희수에게 진정하라는 듯한 눈빛만 보낼 뿐이었다.서희수는 입술을 깨물며 부시아의 곁에 앉아 함께 그 결혼식을 보기 시작했다.김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연도진에게 김시연의 손을 넘겨주었다. 진한 포옹을 나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꽃길을 따라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결혼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러 걸어갔다.“시아야, 외할아버지한테 물 한 잔만 떠다 줄래?”윌슨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윌슨의 심부름에 부시아가 몸을 일으켰다.서희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윌슨을 바라보았다.반지를 교환한 두 사람은 선서를 시작했다.“연도진 군은 여기 있는 김시연 양을 아내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까?”“맹세합니다!”“김시연 양은 여기 있는 연도진 군을 남편으로 맞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며 존경하고 배려하면서 일생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까?”“...맹세합니다.”연도진의 열정 어린 시선에 김시연이 눈을 피했다.분명 둘이 하는 것도 위장 결혼이었고 이 결혼식도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김시연의 심장은 쉴 새 없이 쿵쿵 뛰었다.“네, 이
부승민이 입술을 삐죽이며 온하랑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하랑 씨도 나한텐 생명이야. 아니,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해.”“허.”휴대폰과 가까이 있었던 부승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생중계를 보고 있던 부시아, 윌슨과 서희수의 귀에 부승민의 목소리가 똑똑히 때려 박혔다.부시아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이 목소리는 아빠 목소리인데요!”“...”사회자가 다시 물었다.“신부는 신랑의 진심 어린 말에 어떤 대답을 하고 싶으신가요?”“그동안 모든 걸 다 감싸줘서 고마웠어. 앞으로 우리가 모든 순간을 함께 할 거라고 믿어.”한 마디만 남기고 재빨리 마이크를 내려놓는 김시연의 모습에 당황한 사회자가 물었다.“더 없으신가요?”“네, 없습니다.”김시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그저 형식적인 결혼식이라고만 생각했던 김시연은 멘트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연도진이 이렇게 긴 멘트를 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상상했을까!“...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순서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가 퇴장하자 본격적인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온하랑은 부시아에게 작별 인사를 간단히 건네고는 영상통화를 종료했다.서희수는 부시아를 거실에서 혼자 놀도록 내버려 두고 따로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윌슨을 위층으로 불러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봐요.”서희수는 연도진의 고백이 진심에서 우러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평소 냉정하게 철저히 표정을 숨기며 살던 아들이 한 번이라도 이렇게 감정을 드러냈던 적이 있었나?“아직도 모르겠어? 시연 양은 도진이가 한국에 있을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야. 필라에 온 이후에도 계속 시연 양만 생각했고. 그러다가 시연 양이랑 다시 사귀겠다고 작년부터 계속 강남으로 가더라고.”윌슨이 김시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연도진이 필라에 온 지 2년이 지난 후였다.가족의 정이라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탓에 윌
“쟨 이미 힘이 너무 막강해졌어. 게다가 당신 오빠도 도진이 편을 드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고 묶어서 데려올 수는 없잖아.”윌슨이 무기력하게 말했다.연도진의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자신의 곁에서만 자랐다면 윌슨은 분명 그 모습에 흡족해했을 것이다.연도진은 훌륭한 후계자였으니 말이다.여동생도 아낄 줄 알았고 어머니에게도 효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모든 부분에서 윌슨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사람이었다.연도진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가문의 사업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 내의 입지를 굳히고 본인의 라인을 타려는 사람들까지 만들어놓았다. 그 후로부터 윌슨은 연도진에게 마음에도 없는 일을 시키기 점점 어려워졌다.마치 나는 법을 배운 독수리가 혼자 사냥을 시작하듯 연도진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출장 핑계를 대며 자주 강남을 드나들면서부터였다.그 사실을 알면서도 윌슨은 그저 묵인해주었다.서희수는 테이블 옆에 앉아 카메라에 잡혔던 서정훈의 모습을 떠올리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도진이 예전에는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애가 아니었는데. 오빠도 갑자기 한심해졌어요. 어떻게 도진이가 그렇게 제멋대로 구는 걸 내버려 두고만 있는 거죠?! 지금 당장 전화해서 돌아오라고 해야겠어요!”서희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똑한 연도진이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이건 명백한 사기였다!연도진도 자신의 정체를 평생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기 마련이었다.그때가 되면 김시연은 연도진을 용서해줄 수 있을까?서희수는 며느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진심으로 이엘리아를 받아들이고 시누이와 며느리가 원만하게 지내주길 바랐다. 그 탓에 서희수는 연도진과 앨리스의 결혼을 주선하고 싶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연도진이 앨리스에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다.만약 김시연이 평범한 강남 여자였다면 서희수도 별다른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엘
서희수의 머리가 지끈거렸다.“...”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이엘리아의 성격은 다시 바로 잡을 수 없게 된 탓에 서희수의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이엘리아가 이번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조금 자제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다른 용건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어머니.”그렇게 말하면서도 연도진은 서희수가 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수화기에서 뚜뚜 들려오는 신호음을 들으며 서희수가 한숨을 내쉬고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떻게 됐어?”윌슨이 물었다.“안 돌아오고 싶다고 했겠지?”“도진이 말 들어보니까 결혼에 대해서 우리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에요.”서희수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됐어요. 자식 복이 없는 거겠죠. 이엘리아가 돌아오면 당신이 잘 타일러 보세요.”연도진은 효자가 맞았다. 서희수가 아플 때,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간호해주었고 평소 그녀의 말에 반대 의견을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순종적인 태도 속에도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존재했고 둘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연도진이 몇 년 동안이나 김시연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감정이 꽤나 깊은 모양이었다. 모자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까 항상 전전긍긍하는 서희수가 어떻게 연도진에게 헤어질 것을 강요할 수 있을까?“왜, 또 머리 아파?”...결혼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연도진은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김시연과 함께 신혼집으로 돌아왔다.“힘들어 죽겠네.”김시연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지개를 켜며 하품했다.“나 좀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줘.”오늘 아침, 김시연은 무려 새벽 3시에 기상했다!결혼식 한 번 하기 정말 힘들었다!“그래, 좀 자.”연도진이 다정한 눈빛으로 김시연을 바라보았다.김시연은 그런 연도진의 눈빛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순간 연도진이 결혼식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네가 이미 날 잊고 잘살고 있을까 봐. 그래서 억지로 차갑게 굴면서 비열하게도 마음을 숨겨왔어...”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