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선월은 운전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레스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표정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어 어느새 피범벅이 되었다.최국환과 임가희, 부승민과 온하랑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너무도 화목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부선월은 두 눈이 뒤집혔다.자신의 아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최국환, 임가희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임가희가 앉은 저 자리... 원래는 내꺼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지금 같이 밥을 먹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최국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야지. 왜 임가희랑 붙어먹은 거냐고 따져야지.’부선월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는데 이 모든 게 온하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온하랑의 존재로 인해 부승민이 점점 다른 길로 빠진 거라며 확신했고 이대로 가다간 버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이성을 잃은 부선월은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이 울리자 최국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이를 본 임가희가 물었다.“왜 안 받아요?”“스팸 전화야.”최국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 시각 차 안의 부선월은 뚝 끊긴 통화를 보고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이를 악문채 최국환을 노려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최국환은 여전히 전화를 끊었다.곧이어 부선월이 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꺼져있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지금 거신 번호는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부선월은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을 내던졌다.부승민도 짜증이 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사실 우연히 최국환의 발신자 번호를 언뜻 보았는데 너무도 익숙한 번호였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아니나 다를까 부선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부승민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침 그의 표정을 가렸다.부선월은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마치 악령에 빙의된 사람처럼 원수를 보듯 부승민을 노리더니 고함을 질렀다.“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자식. 애초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 그럼 지금까지 외롭게 홀로 해외에서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야.”며칠 전 부선월은 최국환이 필라시로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연출하려고 데이트 당시 입었던 드레스와 나이에 맞지 않는 메이크업을 하고선 필라시로 향했다. 그렇게 오는 길 내내 최국환이 다시 한번 본인에게 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최국환의 행방을 알아내 급히 레스토랑에 달려간 그녀는 임가희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심지어 최국환은 손수 스테이크를 썰어 임가희에게 건네주는 자상함을 보였다.잔뜩 기대하며 달려온 부선월의 얼굴은 한순간에 갈라졌다.그 후 며칠 동안 최국환의 뒤를 따라다닌 부선월은 그가 임가희와 함께 쇼핑하며 이것저것 사주는 걸 보게 되었다.고통이 밀려오고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부선월은 이 미련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시궁창 속의 바퀴벌레처럼 빛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들의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국환의 곁이 있는 사람이 본인이기를 바랐다.실망이 커질수록 임가희에 대한 질투심도 점점 더 커졌다.부선월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임가희를 지금껏 방치해둔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쌓아온 모든 감정은 그들 여섯 명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 최고조에 달했고, 점점 한계점까지 쌓여 마침내 폭발했다.부승민은 제정신이 아닌 부선월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미쳤네요.”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부승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이를 본 부선월은 흠칫하고선 목 놓아 소리쳤다.“멈춰. 당장 멈추라고. 넌 엄마가 안중에도 없니?”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건
온하랑이 연고를 다 바를 때쯤 부승민이 입을 열었다,“이제는 완전히 미쳤어.”그 말투에는 무기력함과 짜증이 가득했다.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식사 자리에서 회장님한테 전화한 것도...”“맞아.”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무슨 마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응? 뭔데?”“이미 회장님한테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어. 여기서 손을 놓는 건 수십 년의 시간을 포기한 셈이잖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면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걸 증명하기 위해 목숨도 바칠거야.”번호를 저장한 것도 아닌데 최국환은 일련의 숫자만 보고 부선월인 걸 알았다. 그 말인즉 두 사람은 예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고 최국환은 부선월의 번호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더 이상 부선월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번호를 차단했을 텐데 최국환은 그게 아닌 핸드폰을 꺼버렸다.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온 부승민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의 품에 안겼다.“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온하랑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타일렀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생각하고 일찍 자자.”그 시각 또 다른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밤이 깊어가자 임가희는 어느새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최국환이 관계자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임가희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이제 그만하고 얼른 쉬어요.”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인 후 화장실로 가려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보는 건... 지금요? 알겠어요. 바로 나갈게요.”누우려던 임가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왜요? 지금 또 나가봐야 하는 거예요?”“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최
최국환은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재빨리 부선월을 밀어냈다.“그만해요.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래요.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부선월은 최국환을 있는 힘껏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아니요. 그동안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세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뿐인 인생을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갈 수는 없잖아요? 저 국환 씨 좋아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한테 손가락질해도 절대 후회 안 할 자신있어요. 국환 씨는 절 이해해 줄 거죠?”부선월은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매우 진지하고 집요했다.예전과 마찬가지로 부선월의 두 눈에는 온통 최국환뿐이었다.최국환은 흔들린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그녀를 밀어냈다.그 반응을 본 부선월은 이때다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그래도 이성이 남아있었던 최국환은 정신을 다잡고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지금 많이 취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말을 마친 그는 부선월이 뭐라고 하든 무작정 끌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실은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사고가 생길 것 같아 회피하는 중이었다.“국환 씨, 왜 내 두 눈을 못 보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요?”부선월은 최국환에게 끌려가며 물었다.최국환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어느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말 돌리지 말고요.”부선월을 재빨리 최국환의 앞을 가로막았다.“국환 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마음속에 아직도 제가 있잖아요. 남은 인생을 후회하며 살 거예요?”“제발 그만 좀 해요. 어디 살고 있는지부터 말해요.”“국환 씨 옆방이요.”최국환이 걸음을 멈추자 부선월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왜요? 아내분한테 들킬까 봐 겁나요?”최국환은 묵묵히 그녀를 계속 끌고 내려갔다.“어지러우니까 부축해 줘요.”부선월은 술에 취한 듯 그에게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밀
눈을 뜨고 소파에서 일어나 앉은 부선월은 불안해하는 최국환을 바라봤다.“누구예요?”최국환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정한 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가희?”부선월은 할 말을 잃었다.“응. 회사에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별일 없어. 금방 돌아갈게.”대화를 엿들은 부선월은 최국환이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본인을 만나러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최국환은 전화를 끊자마자 싸늘한 표정으로 부선월을 바라봤다.“이제 가봐야 해.”“국환 씨...”이번에는 부선월이 따라잡기도 전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마치 귀신이라도 쫓아오는 것마냥 부랴부랴 도망쳤다.굳게 닫혀진 문짝을 바라보던 부선월은 살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불끈 쥐었고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조금만 더 버텼으면 성공인데... 임가희...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최국환은 옥상에서 30여 분 동안 찬 바람을 쐬고 나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잠이 옅었던 임가희는 인기척을 듣고 깬 듯 졸린 두 눈으로 물었다.“왔어요? 일은 해결됐어요?”“응.”최국환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옷을 벗었다.그가 침대에 눕자 은은한 술 냄새가 느껴진 임가희는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최국환의 품에 안겼다.“도원이는 하랑이와 사이가 좋은가 봐요. 도원이를 통해서 하랑이랑 식사 자리 한번 만드는 게 어때요? 관계도 풀 겸.”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진도원은 온하랑이 임가희와 전남편 사이의 딸이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는데 지금껏 풀지 못해서 어제도 모른척했다고 말하자 진도원은 망설임 없이 도와주겠다고 했다.임가희가 딸인 온하랑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씨 가문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에 최씨 가문의 지원이 필요하여 승낙한 것도 있다.부승민이 떠난 후 온하랑은 스튜디오에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진도원의 연락을 받게 되었
온하랑이 고민에 잠긴 그때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이번 출장 촬영은 전부 마무리 되었고 이제 편집만 남았으니 각자 작업하고 최종본을 제출하라고 했다. 편집은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그 말인즉 귀국해도 된다는 얘기였다.하지만 곧이어 편집장이 또 문자를 보내왔다. 금융잡지사에서 인터뷰 관련하여 긴급 촬영이 잡혔는데 사진작가가 필요하다고 했다.“페이, 이번 한 번만 도좌워. 시간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 취재하는 전문 기자들도 있고 화이트도 그 자리에 있으니까 넌 사진 몇 장만 찍으면 끝나.”온하랑은 흔쾌히 동의했다.편집장은 끊임없이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인터뷰 대상자의 정보와 촬영 주소를 보내왔다.이번 촬영은 스튜디오가 아닌 인터뷰 대상자의 사무실인 비어 빌딩 15층이었다.인터뷰 대상자의 이름은 빈센트 윌슨이고 어느 한 회사의 회장님이라고 한다.온하랑은 그 이름을 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세상은 역시나 너무 좁았다.빈센트 윌슨이 곧 부시아의 외할아버지인 그 윌슨이었다.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교로운 상황에 온하랑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지금이라도 못한다고 연락해 볼까?’아침 식사 후 온하랑은 화이트 일행을 만나 비어 빌딩으로 향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는 온하랑의 모습을 본 금융 잡지 편집장 화이트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 찰스 인터뷰에 무례함을 범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이번에도 함부로 행동하여 윌슨을 언짢게 만든다면 다시는 함께 일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비어 빌딩에 도착하자 프런트 직원과 윌슨의 여비서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여비서는 그들은 대기실로 안내하며 다짜고짜 사과했다.“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아직 도착하지 않아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답했다.비서는 커피를 그들에게 타 주고선 재빨리 사무실로 가서 다른 비서에게 물었다.“에리브릴, 오늘 일정 회장님께 말씀드렸어요?”윌슨이 Z 국 출장을
“우웩...”거절하고 싶은 건 부시아가 아니라 앨런이었다.부시아는 고통스러워하는 앨런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앨런 삼촌이 몸 안 좋으니까 저도 갈래요.”“그럼 할아버지랑 같이 회사로 갈까? 일 끝나면 할아버지랑 계속 같이 노는 거야.”“얼마나 걸려요?”“오래 안 걸려. 30분 정도?”“그럼 같이 갈래요.”부시아는 윌슨과 함께 회사로 향했다.오매불망 윌슨을 기다리고 있던 여비서는 그를 보자마자 감격을 금치 못했다.“회장님, 드디어 오셨네요. 인터뷰 관계자분이 꽤 오랜 시간 기다리셨어요.”그 시각 온하랑을 포함한 관계자들은 30분 넘게 기다렸다. 그들은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수차례 조정하고 인터뷰 원고를 수십번 외웠지만 윌슨은 나타나지 않았다.기다리다 못한 화이트가 비서에게 물을 때마다 그녀는 시찰 나갔다는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차마 손녀랑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다.윌슨은 사무실로 걸어가며 말했다.“사무실로 오시라고 해. 시간은 30분이라고 미리 얘기했지? 그동안 카롤이랑 라운지에서 놀고 있어. 간식이랑 아이패드도 챙겨가고.”“알겠습니다.”부시아는 에이브릴과 함께 라운지로 향했고 여비서는 대기실로 들어가 온하랑과 기타 관계자분들을 안내했다.“회장님께서 시찰을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한 무리의 사람이 비서를 따라 사무실로 걸어갔고 그 와중에 비서는 잊지 않고 강조했다.“30분밖에 시간이 없으니 인터뷰는 최대한 서둘러 주세요.”“알겠습니다.”화이트가 말을 이었다.“촬영이 끝나고 회장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싶은데...”“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는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다.”“아쉽게 됐네요.”그 시각 윌슨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상체는 금방 갈아입은 셔츠와 정장 차림이었는데 하체는 캐주얼한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비서는 기자들을 안내하며 화이트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그럼 시작하시죠.”기자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윌슨 옆 소파에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안녕하세요. 이번
온하랑은 목소리만 들어도 부시아인 걸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자 인형처럼 예쁜 아이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부시아가 근처가 가까이 다가오자 온하랑은 손에 든 카메라를 흔들었다.“시아도 여기 있었어? 숙모는 일하러 왔어.”부시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그럼 이제 일 끝난 거예요? 숙모, 그럼 저랑 같이 놀면 안 돼요?”이때 윌슨이 헛기침하며 사무실에서 나타났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힐끗 보고선 입을 열었다.“카롤, 하랑 씨는 아직 일하는 중이니까 방해하면 안 돼.”윌슨은 두 사람의 접촉이 많아질수록 아이와 이엘리아의 관계가 멀어진다고 생각했다.중간에 끼인 온하랑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윌슨의 말을 들은 부시아가 입을 삐쭉인 채 울먹이며 서러운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자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오늘 일은 다 끝났어요. 방해되지 않을 거예요.”부시아는 신이 난 듯 폴짝폴짝 뛰며 윌슨에게 말했다.“그럼 할아버지는 일 계속하세요. 전 오늘 숙모랑 놀게요.”그 말에 윌슨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왜 매번 끼어들고 난리야.’온하랑은 윌슨의 표정을 못 본 척하더니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시아는 제가 데려갈게요. 저녁에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온하랑이 윌슨의 뜻을 모를 리가 없다.그런데 그걸 안다고 해서 무조건 윌슨의 뜻을 따라줘야 하는 건 아니다.이엘리아와 부시아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모양인데 더 많은 정성과 시간을 쏟을 생각은 하지 않고 굳이 온하랑과 멀어지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만약 이엘리아가 바뀌지 않는다면 설령 온하랑이 부시아와 멀어진다 한들 이엘리아를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화이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사실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듣고 보니 이 꼬맹이는 윌슨의 외손녀였고 온하랑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인 걸 알아챘다.‘눈치가 없는 건가? 회장님은 아이를 데려가는 걸 원하지 않잖아. 어휴, 또 미운털 박히겠네.’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