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비행기 체크인이 시작되었다.약 30시간의 비행 끝에 비행기는 필라 국제공항에 도착했다.현지는 이미 밤이었고 부시아는 기대에 찬 표정으로 화려한 불빛이 가득 찬 필라시를 바라봤다.윌슨 가문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일찌감치 차를 보내와 공항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편집장도 온하랑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어시스던트를 보낸 건 물론 미리 호텔까지 예약해 줬다.윌슨은 오늘 바로 부시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부승민이 온하랑을 먼저 호텔에 보내야 한다며 다음날에 부시아와 찾아뵐 거라고 했다.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윌슨은 기분이 언짢은지 사악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훑어보고선 차에 올라탔다. 부시아와의 이별이 힘든 듯 떠나기 전에도 신신당부했다.“카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할아버지 만나러 와야 해. 알겠지?”“알겠어요. 할아버지, 조심히 들어가세요.”호텔에 도착한 부승민은 온하랑과 부시아를 소파에서 쉬게 한 후 온하랑의 캐리어를 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생활용품을 꺼내 손에 잡히는 대로 놓은 뒤 챙겨온 옷 몇 벌을 옷장에 걸어두었다.그러고선 텅 빈 캐리어를 벽 수석으로 밀어놓았다.비행기에서 한숨도 못 잔 온하랑은 간단하게 야식을 먹은후 잠에 들었다.다음 날 아침, 세 사람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온하랑은 잡지사 관계자의 픽업을 받았고,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윌슨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교외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버금갔는데 엄청 크고 경치마저 아름다웠다.새로운 곳에 도착한 부시아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저택의 도우미들은 일찍이 본부를 받고 공손히 그들은 내부의 본관으로 모셨다.윌슨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고 아내인 서희수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테라스에서 햇볕은 쬐며 외손녀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윌슨이 수시로 시간을 확인하자 서희수는 잔뜩 궁금해하며 물었다.“그렇게 사랑스럽나요? 이 정도로 아이를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이네요.”윌슨은 살며시 웃더니 확신에 차
서희수는 낯선 곳에서도 전혀 겁을 먹지 않는 부시아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난 너의 외할머니야.”“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저는 카롤이라고 합니다.”부시아는 뒤 돌아보며 부승민의 손을 잡아당겼다.“이분은 제 아빠예요.”서희수는 시선을 돌려 뒤에 있는 부승민을 보고선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지금처럼 따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우연히 강성의 연회에서 만났을 수도 있고, 오빠인 서정훈을 통해 들었을 수도 있는데 서희수는 예전부터 부승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BX 그룹 대표를 취임한 후 현재는 회장으로 지낸다고 한다.기억 속의 부승민은 그야말로 엄친아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손녀의 아버지인 건 맞지만 사위가 아니라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희수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방을 잘못 찾은 이엘리아가 인사불성이 된 부승민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 후 부선월의 속임수에 속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끝내 아이를 낳았다.사실 부승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된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서정훈에게 이미 수차례 진심을 표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딸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서희수는 부승민에게 썩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부승민은 예의 삼아 서희수에게 인사하였다. 곧이어 윌슨 부부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굳이 왕래가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시아가 잘 도착했으니 전 일 때문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캐리어에는 시아의 옷과 장난감이 들어있고 평소 습관 같은 건 제가 메모를 하였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럼 시아 잘 부탁드립니다. 보름 뒤에 데리러 올게요.”눈치는 빠른 편이었다.“그럼 멀리 안 나갈게요.”윌슨이 말했다.“아빠, 잘 가요.”부시아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하자 부승민은 부드럽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 말 잘듣어. 적응 안 되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연락해. 데리러 올게.”부시
온하랑은 점심때쯤 벨라에게 연락했다. 그녀가 필라에 왔다는걸 알게 된 벨라는 밥을 사주겠다며 적극적으로 약속을 잡았다.부승민은 눈살을 찌푸렸다.물어볼 것도 없이 친구와의 약속에 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어느 레스토랑인데? 내가 데려다줄게.”온하랑은 레스토랑의 이름을 말하며 그를 바라봤다.“너는 어떡할 거야?”“나?”부승민은 전방을 주시한 채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며 답했다.“호텔로 돌아가야지. 어차피 아무도 날 신경 안 쓰는데 저녁은 대충 먹으면 돼.”그 모습에 입꼬리가 씰룩인 온하랑은 말을 꺼내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려 다른 곳에 집중되었다.확인해 보니 어디 갔지 왔냐는 벨라의 문자였다.온하랑의 위로를 기대하고 있었던 부승민은 한참을 기다려도 목소리가 그녀의 들려오지 않자 빨간 불이 뜬 틈을 타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보고 있는 온하랑의 모습을 발견했다.부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문자에 답장한 온하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그럼 일찍 들어가서 쉬어. 내일 비행기 타려면 힘들잖아.”‘이게 다야?’“응.”부승민은 싸늘하게 답했다.그렇게 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온하랑은 눈치를 밥 말아 먹은 듯 계속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벨라와 수다를 떨었고 그럴수록 부승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느새 차는 레스토랑 입구에 멈춰 섰다.“도착한 거야?”핸드폰에서 눈을 뗀 온하랑은 차창을 통해 주위를 둘러봤다.“그럼 갈게.”“응.”부승민은 나지막하게 답했다.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던 온하랑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몸을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맞다...”부승민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친구한테 너랑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그러라던데? 같이 갈래?”온하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이 모든 게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한 행동임을 깨달았다.어쩌면 온하랑은 처음부터 부승민의 생각을 예상하고 친구에게 물어봤을 수도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아저씨, 아주머니.”깜짝 놀란 진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언제 오셨어요? 연락이라도 해주시지.”온하랑은 그제야 임가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우아한 옷차림으로 최국환의 곁에 있었고 두 사람이 대화는 나누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최국환을 훑어보았다.비록 이미 쉰 살이 넘었지만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었고 균형 잡힌 몸매와 반듯한 미모를 보니 40대 중반의 잘생긴 아저씨나 다름없었다. 젊었을 때 얼마나 잘나갔을지 상상이 되었고 부선월이 줄곧 잊지 못하는 데는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부승민과 최동철의 카리스마는 그를 닮은 게 틀림없다.온하랑은 진도원과 대화를 나누는 최국환이 은연중에 부승민 쪽을 힐끗 쳐다본 걸 알아챘다.그러나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눈빛에서는 언짢음이 느껴졌다.최국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잠깐 볼일이 있어서 넘어온 김에 며칠만 놀다가 가려고. 네가 바쁠 것 같아서 따로 연락 안 했어.”“아주머니는 점점 더 젊어지시네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그런 농담은 넣어둬.”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진도원은 정식으로 소개했다.“이분은 동철이의 아버지인 최국환 씨, 그리고 곁에는 아내분인 임가희 씨야.”“벨라는 제 여자 친구예요. 이분은 온하랑이고 저희 모두 친구예요. 그리고 이쪽은 하랑이의 남편분이요.”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벨라와 함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임가희와 그녀의 관계는 아슬아슬했기에 지금 이 순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면 진도원만 난처하게 된다.그러니 온하랑은 임가희와 모르는척했고 임가희 역시나 공식석상에서 온하랑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소개받은 최국환은 온하랑을 힐끗 쳐다보더니 곧이어 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도원아, 너 요즘 잘나가네.”진도원이 웃으면서 말하려던 찰나 최국환이 말머리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봤다.“이런 우연이. 부 회장님도 필라에 계실 줄은 몰랐네요.”부승민은 그
부선월은 운전석에 앉아 차창 너머로 레스토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는 손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표정이 흉악하게 변하더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힘을 주어 어느새 피범벅이 되었다.최국환과 임가희, 부승민과 온하랑이 지금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다.너무도 화목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부선월은 두 눈이 뒤집혔다.자신의 아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최국환, 임가희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으니 울화가 치밀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임가희가 앉은 저 자리... 원래는 내꺼라고. 엄마를 대신해 복수해도 시원치 않을 마당에 지금 같이 밥을 먹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최국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야지. 왜 임가희랑 붙어먹은 거냐고 따져야지.’부선월은 깊은 배신감을 느꼈는데 이 모든 게 온하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온하랑의 존재로 인해 부승민이 점점 다른 길로 빠진 거라며 확신했고 이대로 가다간 버림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이성을 잃은 부선월은 감정에 휩싸여 무작정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핸드폰이 울리자 최국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발신자 번호를 보고선 망설임 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이를 본 임가희가 물었다.“왜 안 받아요?”“스팸 전화야.”최국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그 시각 차 안의 부선월은 뚝 끊긴 통화를 보고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이를 악문채 최국환을 노려보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최국환은 여전히 전화를 끊었다.곧이어 부선월이 또 전화를 걸었을 때는 이미 꺼져있었다.“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지금 거신 번호는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부선월은 미친 사람처럼 핸드폰을 내던졌다.부승민도 짜증이 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사실 우연히 최국환의 발신자 번호를 언뜻 보았는데 너무도 익숙한 번호였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바로 이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아니나 다를까 부선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부승민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마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침 그의 표정을 가렸다.부선월은 그의 답을 듣기도 전에 마치 악령에 빙의된 사람처럼 원수를 보듯 부승민을 노리더니 고함을 질렀다.“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자식. 애초에 널 목 졸라 죽여야 했어. 그럼 지금까지 외롭게 홀로 해외에서 고생하며 살지는 않았을 거야.”며칠 전 부선월은 최국환이 필라시로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녀는 우연한 만남을 연출하려고 데이트 당시 입었던 드레스와 나이에 맞지 않는 메이크업을 하고선 필라시로 향했다. 그렇게 오는 길 내내 최국환이 다시 한번 본인에게 반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최국환의 행방을 알아내 급히 레스토랑에 달려간 그녀는 임가희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심지어 최국환은 손수 스테이크를 썰어 임가희에게 건네주는 자상함을 보였다.잔뜩 기대하며 달려온 부선월의 얼굴은 한순간에 갈라졌다.그 후 며칠 동안 최국환의 뒤를 따라다닌 부선월은 그가 임가희와 함께 쇼핑하며 이것저것 사주는 걸 보게 되었다.고통이 밀려오고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부선월은 이 미련을 놓기가 너무 힘들었다. 시궁창 속의 바퀴벌레처럼 빛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들의 사랑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국환의 곁이 있는 사람이 본인이기를 바랐다.실망이 커질수록 임가희에 대한 질투심도 점점 더 커졌다.부선월은 운 좋게 목숨을 구한 임가희를 지금껏 방치해둔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쌓아온 모든 감정은 그들 여섯 명이 함께 앉아 식사하는 것을 보고 최고조에 달했고, 점점 한계점까지 쌓여 마침내 폭발했다.부승민은 제정신이 아닌 부선월을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미쳤네요.”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부승민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이를 본 부선월은 흠칫하고선 목 놓아 소리쳤다.“멈춰. 당장 멈추라고. 넌 엄마가 안중에도 없니?”그녀의 질문에 답하는 건
온하랑이 연고를 다 바를 때쯤 부승민이 입을 열었다,“이제는 완전히 미쳤어.”그 말투에는 무기력함과 짜증이 가득했다.부승민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문뜩 생각이 떠올랐다.“설마 식사 자리에서 회장님한테 전화한 것도...”“맞아.”온하랑은 부승민을 바라보며 손에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에 버렸다.“무슨 마음인지 조금 알 것 같아.”“응? 뭔데?”“이미 회장님한테 너무 많은 걸 쏟아부었어. 여기서 손을 놓는 건 수십 년의 시간을 포기한 셈이잖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이대로 물러선다면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하겠지.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마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걸 증명하기 위해 목숨도 바칠거야.”번호를 저장한 것도 아닌데 최국환은 일련의 숫자만 보고 부선월인 걸 알았다. 그 말인즉 두 사람은 예전에도 연락을 주고받았고 최국환은 부선월의 번호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더 이상 부선월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번호를 차단했을 텐데 최국환은 그게 아닌 핸드폰을 꺼버렸다.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온 부승민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의 품에 안겼다.“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 않아.”온하랑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타일렀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생각하고 일찍 자자.”그 시각 또 다른 5성급 호텔의 스위트룸.밤이 깊어가자 임가희는 어느새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최국환이 관계자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임가희가 입을 열었다.“늦었는데 이제 그만하고 얼른 쉬어요.”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인 후 화장실로 가려는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아... 시간이 늦었는데 내일 보는 건... 지금요? 알겠어요. 바로 나갈게요.”누우려던 임가희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왜요? 지금 또 나가봐야 하는 거예요?”“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최
최국환은 상황 파악을 못한 듯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재빨리 부선월을 밀어냈다.“그만해요.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래요.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요?”부선월은 최국환을 있는 힘껏 껴안은 채 놓지 않았다.“아니요. 그동안 제가 어떻게 버텼는지 아세요?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자본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요. 한 번뿐인 인생을 지금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갈 수는 없잖아요? 저 국환 씨 좋아해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나한테 손가락질해도 절대 후회 안 할 자신있어요. 국환 씨는 절 이해해 줄 거죠?”부선월은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매우 진지하고 집요했다.예전과 마찬가지로 부선월의 두 눈에는 온통 최국환뿐이었다.최국환은 흔들린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그녀를 밀어냈다.그 반응을 본 부선월은 이때다 싶어 까치발을 들고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그에게 입을 맞췄다.그래도 이성이 남아있었던 최국환은 정신을 다잡고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지금 많이 취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말을 마친 그는 부선월이 뭐라고 하든 무작정 끌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실은 이대로 있다가는 결국 사고가 생길 것 같아 회피하는 중이었다.“국환 씨, 왜 내 두 눈을 못 보는 거예요? 도대체 뭐가 그렇게 겁나는데요?”부선월은 최국환에게 끌려가며 물었다.최국환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어느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말 돌리지 말고요.”부선월을 재빨리 최국환의 앞을 가로막았다.“국환 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마음속에 아직도 제가 있잖아요. 남은 인생을 후회하며 살 거예요?”“제발 그만 좀 해요. 어디 살고 있는지부터 말해요.”“국환 씨 옆방이요.”최국환이 걸음을 멈추자 부선월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왜요? 아내분한테 들킬까 봐 겁나요?”최국환은 묵묵히 그녀를 계속 끌고 내려갔다.“어지러우니까 부축해 줘요.”부선월은 술에 취한 듯 그에게 몸을 기댔다.이번에도 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