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그 어떤 이상함도 발견하지 못했다.충격을 받은 듯 정신 못 차리는 임가희의 표정을 보자 임연지는 한껏 비꼬며 말했다.“고모부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건 아니죠?”임가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지하게 생각했다.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임연지의 말을 믿게 되었다.심지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의혹들도 마침내 답을 얻었다.최국환은 부승민을 만나고 나서부터 갑자기 임연지를 포기하겠다 주장하며 경주에 돌아가자고 설득했다.생각해 보니 어쩌면 부씨 가문과의 다툼을 꺼렸던게 아니라 부승민의 아들이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온하랑을 기어코 최씨 가문에 들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네. 며느리 될 사람이라서 그랬던 거네?’임연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하랑의 훌륭함을 부정하며 자기 멋대로 생각했다.부승민은 자신을 둘러싼 비밀에 대해 모르거나, 이미 알고 있으면서 최씨 가문에 돌아갈 생각이 없어 거절했거나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부승민과의 관계를 좁히려면 온하랑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임가희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임연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모, 설마 이 일 때문에 절 버리실 건가요?”임연지는 초조하게 바라보며 내심 아니라는 답이 들려오기를 기대했다.최동림은 건강이 안 좋을 뿐만 아니라 최동철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났다.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절대 최동철을 이길 수가 없다.온하랑은 최동림의 누나다.만약 임가희가 최씨 가문에 대해 다른 계획이 있다면 얼마든지 온하랑을 받아들여도 된다. 심지어 최국환과 부승민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자연스레 부승민과 친해질 수 있다. 나중에 부승민과 손을 잡고 최동철을 맞선다면 본인과 최동림에게 더 많은 이익이 생기니 결코 불가능한 일인 건 아니다.그러나 알다시피 온하랑과 임연지는 절대 한배를 같이 탈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임연지도 걱정이 앞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임가희는 아련하게 임연지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잡
김시연의 웨딩 촬영을 마친 온하랑은 곧바로 다른 촬영장으로 넘어갔고 그렇게 부지런히 저녁까지 일하다가 간신히 시간을 빼내 부시아를 만나러 병원으로 향했다.온하랑은 침대 반대편에 앉아 간호사가 부시아의 상처를 살펴보는 걸 지켜봤다.“회복이 아주 잘됐어요. 내일 바로 실밥 제거해도 될 것 같아요.”간호사의 말에 부시아는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실밥만 풀면 퇴원할 수 있는 거죠?”“맞아요.”“아싸!”부시아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듯 신나게 춤을 추며 온하랑을 바라봤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부시아의 손을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산책했다.“어휴...”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온하랑은 고개를 숙였고 마침 애어른처럼 수심에 가득 찬 채 표정을 찌푸리고 있는 부시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온하랑은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 왜 한숨을 쉬는 거야?”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숙모, 실은 오전에 아저씨가 절 보러 오셨어요.”온하랑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저씨라는 사람이 이엘리아의 오빠를 가리킨다는 걸 알았다.윌슨 가문에서 강남을 방문했다는 건 이엘리아를 빼내기 위해 서정훈의 도움을 청하러 온 게 분명하다.“그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한숨을 쉬는 거야?”온하랑이 물었다.“돈을 엄청 많이 주면서 앞으로 누구랑 살고 싶은지 물어봤어요. 전 고민도 없이 삼촌이랑 살고 싶다고 얘기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이상한 아줌마가 경찰서에서 나오면 다시는 제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쫓아낸대요.”온하랑은 의아했다.“그럼 잘된 일 아니야?”이엘리아의 최측근마저도 그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모양이다.부시아는 초조하게 손톱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그쵸... 사실 처음에는 그 아줌마를 대신해서 부탁하러 온 줄 알고 엄청 쌀쌀맞게 대했거든요.”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다 이해해 주실 거야. 시아가 퇴원할 때 그분이 아직도 강남에 계신다면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게 어때? 이
딸이 아이를 돌보며 힘들게 사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평생 배우자를 찾지 못할까 봐 걱정이 들었다.말을 이렇게 해도 슬퍼할 딸을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미어졌다.의식을 되찾은 서수현은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어쩌면 하느님조차도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이제 서수현에게 남은 건 건강을 되찾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꽤 오랜 시간을 기대하고 있어서 그런지 후련한 느낌보다는 뭔가를 잃은 듯한 허탈함과 불편함이 밀려왔다.서석철은 옆에서 끊임없이 질문했으나 서수현은 입만 벙끗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답답함이 밀려왔던 서석철은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아빠한테 얘기해 봐. 도대체 애 아빠가 누구니?”서석철은 딸이 이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잘 남자를 생각하기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다.서수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몰라요.”“이런 상황에서도 그 남자를 감싸는 거야?”“정말 몰라요.”서수현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정말 누구의 아이인지 알지 못했다.설령 안다고 한들 자업자득인 셈이다. 돈을 위해서 경찰에 신고할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다.온하랑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서수현이 남들에게 말 못 할 병을 앓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걱정이 되었지만 서수현이 직접 별일 아니라고 했기에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다.온하랑은 부시아와 함께 산책하다가 다시 병실로 돌아왔고 안문희가 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부시아는 실밥을 제거한 후 부랴부랴 화장실로 달려갔다.말없이 뒤따라간 온하랑은 부시아가 세면대 앞의 의자를 밟고 올라서 거울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거울에 온하랑이 비치자 부시아는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걱정스레 물었다.“숙모, 이런 건 흉터가 남겠죠?”“아니야.”온하랑은 부시아에게 다가가 상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자국이 얕아서 몇 년만 지나면 없어질 거야.
부승민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답했다.“나보다 낫네.”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부시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결혼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어떻게 벌써 아이를 낳은 거죠?”“결혼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생긴 거야. 이런 걸 속도위반이라고 해.”온하랑이 친절하게 설명하자 부시아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은 걱정이 되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시아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 이러면 안 돼. 알았지?”벌써부터 딸 걱정하는 부승민을 보니 온하랑은 웃음이 나왔다.부시아는 고개를 들더니 순진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런데 삼촌이랑 숙모도 재혼 안 했잖아요.”부승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랑 하랑이는 다른 사람이랑 달라.”“뭐가 다른데요?”부승민은 온하랑을 힐끗 보고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시아야, 남동생 생겨서 기쁘지 않아? 우리 저번에 같이 동생 보러 갔잖아.”부시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좋아요.”부시아는 온하랑 품에 안기더니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그래도 전 숙모가 낳은 남동생이 더 좋아요.”“숙모가 여동생을 낳으면?”“여동생도 좋아요.”미용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헤어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일자 앞머리를 갖게 되었다.이마를 덮으니 자연스레 시선은 아래로 쏠렸고 부시아의 크고 똘망한 두 눈동자가 더욱 강조되었다.오똑한 콧날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까지 더해지니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옆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에 비하면 부시아는 말도 잘 듣고 너무 순했기에 헤어디자이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미용실에서 나온 세 사람은 곧장 KFC로 향했고 부시아는 먹고 싶은 메뉴를 전부 다 시켰다.음식을 기다리던 온하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숙모는 화장실 갈던데 시아도 갈래?”부시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했다.“저도 갈래요.”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KFC에는 화장실이 없었기에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표지판을 따
부시아와 눈이 마주친 외국인 할아버지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깜짝 놀란 부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둔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이상한 사람이네.’낯선 나라에 오면 모든 게 어색할 법도 한데 외국인 할아버지는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고 그 어떤 긴장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낯선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면 무섭기 마련인데 마치 부시아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심지어 이름을 얘기했을 땐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기에 뭔가 예전부터 부시아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하지만 부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을 회상하자 부시아는 순간 알 수 없는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KFC를 먹은 후, 온하랑과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쇼핑했고 저녁은 더원파크힐로 돌아가서 먹었다.그곳의 모든 건 변함이 없었고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과 똑같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세 사람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시계를 확인한 온하랑이 대뜸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어.”“아니면... 오늘 밤 자고 갈래?”부승민은 기대하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그러나 온하랑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온하랑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부승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입구에서 부승민을 기다렸다.그 시각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까지 데려다주고선 차 키를 챙겨 나온 뒤 곧바로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얼른 타.”온하랑이 차에 오르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갈 거야?”온하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몸을 뒤로 기대며 피했다.부승민의 시선이 느껴질수록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온하랑은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답했다.“응. 갈 거야.”
온하랑은 앵두처럼 빨개진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제 그만 비켜봐.”“하랑아, 무조건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데 시간을 정해줘. 얼마면 되는지.”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는 온하랑을 향한 애틋함과 확고함이 느껴졌고 허리를 쓰다듬는 손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온하랑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듯 온몸의 신경이 허리에 집중되어 안절부절못했다.차마 부승민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일단... 나 좀 놔줘.”“싫어.”부승민은 뻔뻔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밀착했고 마치 온하랑을 몸속으로 넣으려는 듯 꽉 껴안았다.“대답하면 놓아줄게. 시간 얼마 정도 줄까?”온하랑은 화를 내며 부승민을 째려봤다.“알았어. 10년이야. 됐지? 이제 나 좀 풀어줘.”현재 이엘리아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건 맞지만 다시는 강남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게다가 부시아가 부승민의 아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아무런 걱정없이 긍정적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했다.온하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지낼 때 자연스레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당시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따님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남과 결혼했다. 남자와 전처 사이에는 서너 살된 아들이 있었는데 양육권이 남자 쪽에 있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잘 챙겨주고 보살펴주면 친모자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처는 아이와 놀러 간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고 엄마를 만날 때마다 흔들렸던 아이는 결국 두 사람의 재결합을 원하며 떼를 썼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따님이 현실을 알아차렸을 땐 세 식구는 이미 이혼하기 전으로 돌아가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었다.물론 그 남자는 부승민이 아니고 그 아이도 부시아가 아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부승민이 이엘리아에게
온하랑은 심상치 않은 부승민의 눈빛을 보고선 입술을 깨문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4년.”“4년?”“됐어. 그럼 3년. 더 이상은 안돼.”온하랑은 부승민의 옷깃을 잡고 화를 내며 명령하다시피 말했다.“한 달.”그 말에 깜짝 놀란 온하랑은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건 안돼.”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안고 별장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문이 열려있었기에 별장 안의 따스한 조명이 마당을 밝게 비췄고 거실과 가까워질수록 부시아와 안문희의 대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렸다.만약 이대로 부승민에게 안긴 채로 별장으로 들어간다면 너무 수치스러워서 부시아와 안문희를 볼 면목이 없을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재빨리 부승민의 어깨를 내리치며 말했다.“부승민! 뭐 하는 거야. 이제 그만해.”부승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입구에 멈춰 문 쪽으로 밀어붙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이제 다시 한번 얘기해 봐. 시간 얼마 줄까?”“두...”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민은 또다시 다가왔다.“나 이제 지쳤어. 그만해.”온하랑은 발버둥 치며 부승민의 입술을 깨물었고 순간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진동했다.하지만 부승민은 고통을 느낄수록 더욱 흥분했다.“차가 왜 아직도 있는 거지? 삼촌이랑 숙모 아직 안 갔나?”그때 마침 거실에서 부시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온하랑은 심장이 터질 듯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달싹 못 했다.부시아는 차가 아직 마당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궁금해서 밖으로 나오는듯했다.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이제 몇 걸음이면 문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부승민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품에 안긴 앙증맞은 온하랑의 체구를 느끼며 팔을 조였다. 그 후 박력 있게 입맞춤하더니 큰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파고들어 이리저리 휘저었다.두 볼이 붉어지며 머리가 하얘진 온하랑은 발버둥 치는 대신 모든 걸 부승민에게 맡겼다.심지어 터질듯한 본인의 심장 소리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만 맴돌았다.부승민은 신호등 빨간불을 틈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그 시각 온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에 탄 이후로 이 자세를 유지하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은 멋쩍은 듯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도심 속 먹자골목을 지나며 물었다.“야식 먹을래?”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승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차는 어느새 클래식 캐슬의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온하랑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곧장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마지못해 부승민을 바라봤다.부승민은 온하랑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하랑아, 아직도 화났어?”“문 열어. 나 내릴 거야”싸늘하게 말하는 온하랑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부승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큰 손으로 턱을 움켜쥐고 또 입을 맞췄다.“너 정말...”온하랑은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닦았다.“화 풀릴 때까지 계속 뽀뽀할 거야.”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차창에 기댔다.“나 화난 거 아니야.”부승민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화가 난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부끄러웠던 온하랑은 시선을 놀리며 침착하게 말했다.“얼른 문 열어줘. 들어가서 쉬고 싶어.”“앞까지 데려다줄게.”부승민은 차에서 내린 뒤 반대쪽으로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다른 한 손으로 온하랑이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막아줬다.“됐어. 이제 가.”18층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손님인데 안 들여보내 줘?”기대하는듯한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 같은 소릴 하고 앉았네.”온하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닫았고 부승민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막 걸음을 옮기려고 움직였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부승민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을 바라봤다.“후회했어?”“아니거든? 나 며칠 뒤에 필라시로 출장 가. 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