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답했다.“나보다 낫네.”귀를 쫑긋 세우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부시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결혼한 지 얼마 안 지났는데 어떻게 벌써 아이를 낳은 거죠?”“결혼하기 전에 이미 아이가 생긴 거야. 이런 걸 속도위반이라고 해.”온하랑이 친절하게 설명하자 부시아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승민은 걱정이 되어 재빨리 입을 열었다.“시아는 어른이 되어도 절대 이러면 안 돼. 알았지?”벌써부터 딸 걱정하는 부승민을 보니 온하랑은 웃음이 나왔다.부시아는 고개를 들더니 순진한 눈빛으로 물었다.“그런데 삼촌이랑 숙모도 재혼 안 했잖아요.”부승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나랑 하랑이는 다른 사람이랑 달라.”“뭐가 다른데요?”부승민은 온하랑을 힐끗 보고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시아야, 남동생 생겨서 기쁘지 않아? 우리 저번에 같이 동생 보러 갔잖아.”부시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답했다.“좋아요.”부시아는 온하랑 품에 안기더니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그래도 전 숙모가 낳은 남동생이 더 좋아요.”“숙모가 여동생을 낳으면?”“여동생도 좋아요.”미용실에 도착한 부시아는 헤어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일자 앞머리를 갖게 되었다.이마를 덮으니 자연스레 시선은 아래로 쏠렸고 부시아의 크고 똘망한 두 눈동자가 더욱 강조되었다.오똑한 콧날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까지 더해지니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지경이었다.옆에서 울고 떼쓰는 아이에 비하면 부시아는 말도 잘 듣고 너무 순했기에 헤어디자이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미용실에서 나온 세 사람은 곧장 KFC로 향했고 부시아는 먹고 싶은 메뉴를 전부 다 시켰다.음식을 기다리던 온하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숙모는 화장실 갈던데 시아도 갈래?”부시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했다.“저도 갈래요.”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부시아는 온하랑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KFC에는 화장실이 없었기에 온하랑은 부시아를 데리고 표지판을 따
부시아와 눈이 마주친 외국인 할아버지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깜짝 놀란 부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둔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이상한 사람이네.’낯선 나라에 오면 모든 게 어색할 법도 한데 외국인 할아버지는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고 그 어떤 긴장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낯선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면 무섭기 마련인데 마치 부시아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심지어 이름을 얘기했을 땐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기에 뭔가 예전부터 부시아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하지만 부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을 회상하자 부시아는 순간 알 수 없는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KFC를 먹은 후, 온하랑과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쇼핑했고 저녁은 더원파크힐로 돌아가서 먹었다.그곳의 모든 건 변함이 없었고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과 똑같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세 사람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시계를 확인한 온하랑이 대뜸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어.”“아니면... 오늘 밤 자고 갈래?”부승민은 기대하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그러나 온하랑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온하랑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부승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입구에서 부승민을 기다렸다.그 시각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까지 데려다주고선 차 키를 챙겨 나온 뒤 곧바로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얼른 타.”온하랑이 차에 오르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갈 거야?”온하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몸을 뒤로 기대며 피했다.부승민의 시선이 느껴질수록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온하랑은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답했다.“응. 갈 거야.”
온하랑은 앵두처럼 빨개진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제 그만 비켜봐.”“하랑아, 무조건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데 시간을 정해줘. 얼마면 되는지.”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는 온하랑을 향한 애틋함과 확고함이 느껴졌고 허리를 쓰다듬는 손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온하랑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듯 온몸의 신경이 허리에 집중되어 안절부절못했다.차마 부승민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일단... 나 좀 놔줘.”“싫어.”부승민은 뻔뻔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밀착했고 마치 온하랑을 몸속으로 넣으려는 듯 꽉 껴안았다.“대답하면 놓아줄게. 시간 얼마 정도 줄까?”온하랑은 화를 내며 부승민을 째려봤다.“알았어. 10년이야. 됐지? 이제 나 좀 풀어줘.”현재 이엘리아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건 맞지만 다시는 강남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게다가 부시아가 부승민의 아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아무런 걱정없이 긍정적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했다.온하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지낼 때 자연스레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당시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따님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남과 결혼했다. 남자와 전처 사이에는 서너 살된 아들이 있었는데 양육권이 남자 쪽에 있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잘 챙겨주고 보살펴주면 친모자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처는 아이와 놀러 간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고 엄마를 만날 때마다 흔들렸던 아이는 결국 두 사람의 재결합을 원하며 떼를 썼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따님이 현실을 알아차렸을 땐 세 식구는 이미 이혼하기 전으로 돌아가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었다.물론 그 남자는 부승민이 아니고 그 아이도 부시아가 아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부승민이 이엘리아에게
온하랑은 심상치 않은 부승민의 눈빛을 보고선 입술을 깨문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4년.”“4년?”“됐어. 그럼 3년. 더 이상은 안돼.”온하랑은 부승민의 옷깃을 잡고 화를 내며 명령하다시피 말했다.“한 달.”그 말에 깜짝 놀란 온하랑은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건 안돼.”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안고 별장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문이 열려있었기에 별장 안의 따스한 조명이 마당을 밝게 비췄고 거실과 가까워질수록 부시아와 안문희의 대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렸다.만약 이대로 부승민에게 안긴 채로 별장으로 들어간다면 너무 수치스러워서 부시아와 안문희를 볼 면목이 없을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재빨리 부승민의 어깨를 내리치며 말했다.“부승민! 뭐 하는 거야. 이제 그만해.”부승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입구에 멈춰 문 쪽으로 밀어붙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이제 다시 한번 얘기해 봐. 시간 얼마 줄까?”“두...”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민은 또다시 다가왔다.“나 이제 지쳤어. 그만해.”온하랑은 발버둥 치며 부승민의 입술을 깨물었고 순간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진동했다.하지만 부승민은 고통을 느낄수록 더욱 흥분했다.“차가 왜 아직도 있는 거지? 삼촌이랑 숙모 아직 안 갔나?”그때 마침 거실에서 부시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온하랑은 심장이 터질 듯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달싹 못 했다.부시아는 차가 아직 마당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궁금해서 밖으로 나오는듯했다.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이제 몇 걸음이면 문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부승민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품에 안긴 앙증맞은 온하랑의 체구를 느끼며 팔을 조였다. 그 후 박력 있게 입맞춤하더니 큰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파고들어 이리저리 휘저었다.두 볼이 붉어지며 머리가 하얘진 온하랑은 발버둥 치는 대신 모든 걸 부승민에게 맡겼다.심지어 터질듯한 본인의 심장 소리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만 맴돌았다.부승민은 신호등 빨간불을 틈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그 시각 온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에 탄 이후로 이 자세를 유지하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은 멋쩍은 듯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도심 속 먹자골목을 지나며 물었다.“야식 먹을래?”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승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차는 어느새 클래식 캐슬의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온하랑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곧장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마지못해 부승민을 바라봤다.부승민은 온하랑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하랑아, 아직도 화났어?”“문 열어. 나 내릴 거야”싸늘하게 말하는 온하랑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부승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큰 손으로 턱을 움켜쥐고 또 입을 맞췄다.“너 정말...”온하랑은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닦았다.“화 풀릴 때까지 계속 뽀뽀할 거야.”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차창에 기댔다.“나 화난 거 아니야.”부승민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화가 난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부끄러웠던 온하랑은 시선을 놀리며 침착하게 말했다.“얼른 문 열어줘. 들어가서 쉬고 싶어.”“앞까지 데려다줄게.”부승민은 차에서 내린 뒤 반대쪽으로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다른 한 손으로 온하랑이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막아줬다.“됐어. 이제 가.”18층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손님인데 안 들여보내 줘?”기대하는듯한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 같은 소릴 하고 앉았네.”온하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닫았고 부승민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막 걸음을 옮기려고 움직였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부승민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을 바라봤다.“후회했어?”“아니거든? 나 며칠 뒤에 필라시로 출장 가. 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아는 왜 안 보이지?”“혼자 어디 가던데.”“...”이 꼬맹이가 정말!부승민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시아는 워낙 똑똑한 아이니까 딱히 별일은 없을 거야. 오해일지도 몰라.”“응,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려줘. 일단 너 볼 일부터 봐.”온하랑이 대답했다.온하랑이 간다고 해도 별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부승민이 있는 게 그녀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면서 현관에서 무슨 인기척이라도 있을까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휴대폰도 노트북 옆에 두고 언제든지 연락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마음속으로 계속 부시아를 걱정하고 있던 탓에 온하랑은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을 하다 말고 수시로 휴대폰을 들어 알림창을 확인했다.원장이 온하랑에게 전화를 건 지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부시아가 온하랑에게 갈 것 같지는 않았다.그럼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한 시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더 기다릴 수 없었던 온하랑은 휴대폰을 들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승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온하랑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시아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어?”“아직.”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부승민은 계속해서 온하랑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경찰들도 찾고 있고 내가 푼 사람들도 다 같이 시아 찾는 중이니까. 의원님께서도 소식 전해 들으셨으니까 시아한텐 아무 일 없을 거야.”“알겠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부승민의 답변에 온하랑이 전화를 끊었다.부시아의 친아버지인 부승민보다 아이의 행방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김시연이 거실에 앉아있는 온하랑을 발견하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온하랑은 김시연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온하랑에게서 부시아의 얘기를 들은 김시연도 소파에 앉았다.“같이 기다려줄게. 시아한테 아무 일도 없길 빌어야지.”이엘리아가 극도로 혐오하는 탓에 그녀의 딸인 부시아에게도 약간의 반감이 생
연도진은 태연하게 영어로 윌슨에게 “Father”이라고 부르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시아가 왜 여기 있어?”부시아는 윌슨을 한 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외할아버지께서 데리고 오셨어요.”“너희 아빠는 알아?”부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무서워? 저 아저씨가 인신매매범이면 어쩔 뻔했어? 너 팔려가면 어쩌려고?”연도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안 무서워요.”부시아는 진지하게 윌슨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살살 깨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외할아버지는 전혀 인신매매범처럼 안 보여요.”“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야. 나쁜 사람이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거든.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따라오면 안 돼, 알겠지?”부시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윌슨이 연도진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냉소를 흘리더니 시선을 부시아에게 돌렸다.그의 푸른 눈동자는 자신의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카롤, 정말 할아버지랑 같이 필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니?”윌슨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연도진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윌슨은 분노만 가득 안은 채 Z 국으로 왔지만 손녀를 처음 본 순간, 아내를 똑 닮은 작은 여자아이에게 사랑에 빠졌다.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2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부시아를 보자마자 역시 윌슨 가문의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감정들은 소통으로 형성되는 것이다.만약 부시아가 윌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이방인을 무서워만 했다면 윌슨이 아이를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렇게 보면 이엘리아는 대체 누굴 닮은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외모나 지능 모두 윌슨과 서희수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윌슨과 서희수 모두 수십 년 전 명문대를 졸업했다. 그의 동창들 대부분이 이미 연구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미 교수나 학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정치계에서도 윌슨의 동창들은 대부분이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외딴곳에 홀로 떨어진 카이사
부시아가 깜짝 놀라더니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래요? 외삼촌은 외삼촌이고 아빠는 아빠예요. 아무도 제 마음속에서 아빠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이 일은 카롤 네가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구나.”부시아의 단호한 모습에 윌슨은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외할아버지는 며칠 후면 떠날 거야. 나는 네가 나와 함께 필라로 가서 외할머니를 만났으면 좋겠어. 외할머니도 분명 널 아주 마음에 들어할 거야. 만약 네가 거기서 한동안 지내고 나서도 돌아오고 싶어 한다면 그땐 외할아버지가 다시 널 이곳으로 데려다줄게, 어때?”부시아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이 일은, 제가 아빠랑 따로 상의해봐야 해요.”윌슨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다. 그럼 외할아버지랑 같이 저녁이나 먹자. 다 먹고 나면 외삼촌이 너 데려다줄 거야. 외할아버지는 시아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길 바란단다.”“노력해볼게요.”윌슨도 더 말을 얹지 않고는 옆에 있던 백인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비서는 윌슨의 눈빛을 읽고 곧바로 호텔 메뉴판을 가져왔다.“카롤, 뭐 먹고 싶어?”윌슨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부시아는 진지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자 아이는 공손한 태도로 윌슨에게 메뉴판을 넘겨주었다.“외할아버지, 이제 외할아버지께서 고르실 차례예요.”“좋아, 좋아. 정말 기특하구나, 카롤.”이렇게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외손녀를 데리고 간다면 그 늙은이들이 어찌 감히 윌슨을 비웃을 수 있을까!윌슨의 외손녀는 그 늙은이들의 손자들보다 백 배는 뛰어났다.윌슨은 자신의 몫까지 주문을 마치고 나서야 옆에 앉아있던 사람의 존재를 떠올렸다.그는 고개를 들어 덤덤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보다가 메뉴판을 던져주며 딱딱하게 말했다.“뭐 먹을지 알아서 골라.”부시아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윌슨과 연도진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연도진의 평온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접었다.“오기 전에 이미 먹고 왔습니다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