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아와 눈이 마주친 외국인 할아버지는 곧바로 미소를 지었다.깜짝 놀란 부시아는 재빨리 시선을 거둔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이상한 사람이네.’낯선 나라에 오면 모든 게 어색할 법도 한데 외국인 할아버지는 마치 이곳이 익숙한 듯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고 그 어떤 긴장함도 느껴지지 않았다.어린아이의 입장에서 낯선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면 무섭기 마련인데 마치 부시아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심지어 이름을 얘기했을 땐 처음 듣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기에 뭔가 예전부터 부시아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하지만 부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자신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을 회상하자 부시아는 순간 알 수 없는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KFC를 먹은 후, 온하랑과 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쇼핑했고 저녁은 더원파크힐로 돌아가서 먹었다.그곳의 모든 건 변함이 없었고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과 똑같았다.저녁을 먹고 나서 세 사람은 함께 동네를 산책했다.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시계를 확인한 온하랑이 대뜸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제 돌아가야겠어.”“아니면... 오늘 밤 자고 갈래?”부승민은 기대하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봤다.그러나 온하랑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한편으로는 서운했지만 온하랑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부승민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입구에서 부승민을 기다렸다.그 시각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까지 데려다주고선 차 키를 챙겨 나온 뒤 곧바로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얼른 타.”온하랑이 차에 오르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점점 가까이 다가가더니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갈 거야?”온하랑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숨기려는 듯 재빨리 몸을 뒤로 기대며 피했다.부승민의 시선이 느껴질수록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 온하랑은 애써 시선을 돌린 채 답했다.“응. 갈 거야.”
온하랑은 앵두처럼 빨개진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제 그만 비켜봐.”“하랑아, 무조건 내 말대로 하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네가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데 시간을 정해줘. 얼마면 되는지.”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서는 온하랑을 향한 애틋함과 확고함이 느껴졌고 허리를 쓰다듬는 손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온하랑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듯 온몸의 신경이 허리에 집중되어 안절부절못했다.차마 부승민의 눈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이리저리 시선을 피했다.“일단... 나 좀 놔줘.”“싫어.”부승민은 뻔뻔하게 더 가까이 다가가 밀착했고 마치 온하랑을 몸속으로 넣으려는 듯 꽉 껴안았다.“대답하면 놓아줄게. 시간 얼마 정도 줄까?”온하랑은 화를 내며 부승민을 째려봤다.“알았어. 10년이야. 됐지? 이제 나 좀 풀어줘.”현재 이엘리아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인 건 맞지만 다시는 강남에 나타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게다가 부시아가 부승민의 아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 아무런 걱정없이 긍정적으로 이 일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했다.온하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지낼 때 자연스레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되었다. 당시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의 따님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혼남과 결혼했다. 남자와 전처 사이에는 서너 살된 아들이 있었는데 양육권이 남자 쪽에 있어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이가 아직 어리기에 잘 챙겨주고 보살펴주면 친모자보다 더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전처는 아이와 놀러 간다는 핑계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고 엄마를 만날 때마다 흔들렸던 아이는 결국 두 사람의 재결합을 원하며 떼를 썼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할머니의 따님이 현실을 알아차렸을 땐 세 식구는 이미 이혼하기 전으로 돌아가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었다.물론 그 남자는 부승민이 아니고 그 아이도 부시아가 아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불안함을 느꼈다. 부승민이 이엘리아에게
온하랑은 심상치 않은 부승민의 눈빛을 보고선 입술을 깨문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4년.”“4년?”“됐어. 그럼 3년. 더 이상은 안돼.”온하랑은 부승민의 옷깃을 잡고 화를 내며 명령하다시피 말했다.“한 달.”그 말에 깜짝 놀란 온하랑은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건 안돼.”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안고 별장의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문이 열려있었기에 별장 안의 따스한 조명이 마당을 밝게 비췄고 거실과 가까워질수록 부시아와 안문희의 대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렸다.만약 이대로 부승민에게 안긴 채로 별장으로 들어간다면 너무 수치스러워서 부시아와 안문희를 볼 면목이 없을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재빨리 부승민의 어깨를 내리치며 말했다.“부승민! 뭐 하는 거야. 이제 그만해.”부승민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바로 입구에 멈춰 문 쪽으로 밀어붙이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이제 다시 한번 얘기해 봐. 시간 얼마 줄까?”“두...”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민은 또다시 다가왔다.“나 이제 지쳤어. 그만해.”온하랑은 발버둥 치며 부승민의 입술을 깨물었고 순간 피비린내가 입안 가득 진동했다.하지만 부승민은 고통을 느낄수록 더욱 흥분했다.“차가 왜 아직도 있는 거지? 삼촌이랑 숙모 아직 안 갔나?”그때 마침 거실에서 부시아의 목소리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온하랑은 심장이 터질 듯 온몸이 얼어붙어 꼼짝달싹 못 했다.부시아는 차가 아직 마당에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궁금해서 밖으로 나오는듯했다.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이제 몇 걸음이면 문에 다다르는 것 같았다.부승민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품에 안긴 앙증맞은 온하랑의 체구를 느끼며 팔을 조였다. 그 후 박력 있게 입맞춤하더니 큰손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파고들어 이리저리 휘저었다.두 볼이 붉어지며 머리가 하얘진 온하랑은 발버둥 치는 대신 모든 걸 부승민에게 맡겼다.심지어 터질듯한 본인의 심장 소리
차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만 맴돌았다.부승민은 신호등 빨간불을 틈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봤다.그 시각 온하랑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차에 탄 이후로 이 자세를 유지하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은 멋쩍은 듯 코를 만지작거리더니 도심 속 먹자골목을 지나며 물었다.“야식 먹을래?”온하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부승민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차는 어느새 클래식 캐슬의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온하랑은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곧장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마지못해 부승민을 바라봤다.부승민은 온하랑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하랑아, 아직도 화났어?”“문 열어. 나 내릴 거야”싸늘하게 말하는 온하랑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부승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큰 손으로 턱을 움켜쥐고 또 입을 맞췄다.“너 정말...”온하랑은 그를 노려보며 입술을 닦았다.“화 풀릴 때까지 계속 뽀뽀할 거야.”그 말을 들은 온하랑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혀 차창에 기댔다.“나 화난 거 아니야.”부승민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화가 난 게 아니라 이 상황이 부끄러웠던 온하랑은 시선을 놀리며 침착하게 말했다.“얼른 문 열어줘. 들어가서 쉬고 싶어.”“앞까지 데려다줄게.”부승민은 차에서 내린 뒤 반대쪽으로 걸어가 조수석의 문을 열며 다른 한 손으로 온하랑이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막아줬다.“됐어. 이제 가.”18층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부승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손님인데 안 들여보내 줘?”기대하는듯한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 같은 소릴 하고 앉았네.”온하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문을 닫았고 부승민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막 걸음을 옮기려고 움직였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부승민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온하랑을 바라봤다.“후회했어?”“아니거든? 나 며칠 뒤에 필라시로 출장 가. 미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시아는 왜 안 보이지?”“혼자 어디 가던데.”“...”이 꼬맹이가 정말!부승민이 말했다.“걱정하지 마, 시아는 워낙 똑똑한 아이니까 딱히 별일은 없을 거야. 오해일지도 몰라.”“응,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알려줘. 일단 너 볼 일부터 봐.”온하랑이 대답했다.온하랑이 간다고 해도 별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차라리 부승민이 있는 게 그녀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식사를 마친 후 온하랑은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일을 하면서 현관에서 무슨 인기척이라도 있을까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휴대폰도 노트북 옆에 두고 언제든지 연락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마음속으로 계속 부시아를 걱정하고 있던 탓에 온하랑은 전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일을 하다 말고 수시로 휴대폰을 들어 알림창을 확인했다.원장이 온하랑에게 전화를 건 지는 이미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부시아가 온하랑에게 갈 것 같지는 않았다.그럼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한 시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더 기다릴 수 없었던 온하랑은 휴대폰을 들어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승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온하랑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시아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어?”“아직.”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는 약간의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부승민은 계속해서 온하랑을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경찰들도 찾고 있고 내가 푼 사람들도 다 같이 시아 찾는 중이니까. 의원님께서도 소식 전해 들으셨으니까 시아한텐 아무 일 없을 거야.”“알겠어,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부승민의 답변에 온하랑이 전화를 끊었다.부시아의 친아버지인 부승민보다 아이의 행방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집으로 돌아온 김시연이 거실에 앉아있는 온하랑을 발견하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온하랑은 김시연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온하랑에게서 부시아의 얘기를 들은 김시연도 소파에 앉았다.“같이 기다려줄게. 시아한테 아무 일도 없길 빌어야지.”이엘리아가 극도로 혐오하는 탓에 그녀의 딸인 부시아에게도 약간의 반감이 생
연도진은 태연하게 영어로 윌슨에게 “Father”이라고 부르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시아가 왜 여기 있어?”부시아는 윌슨을 한 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외할아버지께서 데리고 오셨어요.”“너희 아빠는 알아?”부시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무서워? 저 아저씨가 인신매매범이면 어쩔 뻔했어? 너 팔려가면 어쩌려고?”연도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안 무서워요.”부시아는 진지하게 윌슨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살살 깨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외할아버지는 전혀 인신매매범처럼 안 보여요.”“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야. 나쁜 사람이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는 않거든. 앞으로는 절대 이렇게 따라오면 안 돼, 알겠지?”부시아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윌슨이 연도진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갑게 냉소를 흘리더니 시선을 부시아에게 돌렸다.그의 푸른 눈동자는 자신의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카롤, 정말 할아버지랑 같이 필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니?”윌슨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연도진이 흠칫 놀라더니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윌슨은 분노만 가득 안은 채 Z 국으로 왔지만 손녀를 처음 본 순간, 아내를 똑 닮은 작은 여자아이에게 사랑에 빠졌다.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2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부시아를 보자마자 역시 윌슨 가문의 아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떤 감정들은 소통으로 형성되는 것이다.만약 부시아가 윌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눈앞의 이방인을 무서워만 했다면 윌슨이 아이를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이렇게 보면 이엘리아는 대체 누굴 닮은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외모나 지능 모두 윌슨과 서희수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윌슨과 서희수 모두 수십 년 전 명문대를 졸업했다. 그의 동창들 대부분이 이미 연구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미 교수나 학자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정치계에서도 윌슨의 동창들은 대부분이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외딴곳에 홀로 떨어진 카이사
부시아가 깜짝 놀라더니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어떻게 그래요? 외삼촌은 외삼촌이고 아빠는 아빠예요. 아무도 제 마음속에서 아빠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요.”“이 일은 카롤 네가 다시 한번 생각해봤으면 좋겠구나.”부시아의 단호한 모습에 윌슨은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섰다.“외할아버지는 며칠 후면 떠날 거야. 나는 네가 나와 함께 필라로 가서 외할머니를 만났으면 좋겠어. 외할머니도 분명 널 아주 마음에 들어할 거야. 만약 네가 거기서 한동안 지내고 나서도 돌아오고 싶어 한다면 그땐 외할아버지가 다시 널 이곳으로 데려다줄게, 어때?”부시아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이 일은, 제가 아빠랑 따로 상의해봐야 해요.”윌슨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다. 그럼 외할아버지랑 같이 저녁이나 먹자. 다 먹고 나면 외삼촌이 너 데려다줄 거야. 외할아버지는 시아가 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주길 바란단다.”“노력해볼게요.”윌슨도 더 말을 얹지 않고는 옆에 있던 백인 비서를 힐끗 쳐다보았다.비서는 윌슨의 눈빛을 읽고 곧바로 호텔 메뉴판을 가져왔다.“카롤, 뭐 먹고 싶어?”윌슨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부시아는 진지하게 메뉴판을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좋아하는 요리 몇 가지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자 아이는 공손한 태도로 윌슨에게 메뉴판을 넘겨주었다.“외할아버지, 이제 외할아버지께서 고르실 차례예요.”“좋아, 좋아. 정말 기특하구나, 카롤.”이렇게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외손녀를 데리고 간다면 그 늙은이들이 어찌 감히 윌슨을 비웃을 수 있을까!윌슨의 외손녀는 그 늙은이들의 손자들보다 백 배는 뛰어났다.윌슨은 자신의 몫까지 주문을 마치고 나서야 옆에 앉아있던 사람의 존재를 떠올렸다.그는 고개를 들어 덤덤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보다가 메뉴판을 던져주며 딱딱하게 말했다.“뭐 먹을지 알아서 골라.”부시아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윌슨과 연도진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연도진의 평온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접었다.“오기 전에 이미 먹고 왔습니다
부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서 시킨 저녁 식사 메뉴가 하나씩 도착해 테이블 위에 놓였다.부시아는 작은 손을 뻗어 에그타르트 한 조각을 들어 윌슨에게 건넸다.“외할아버지, 에그타르트 드세요.”“알겠다, 카롤 정말 기특하구나.”윌슨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도 얼른 먹으렴. 자꾸 할아버지한테만 신경 쓰지 말고.”“외할아버지, 이 샐러드도 진짜 맛있어요, 한 번 드셔보세요...”“이 치즈도 진짜 고소해요, 외할아버지. 한 입 드셔보세요...”“...”“...”윌슨은 이제야 왜 부승민이 아내와 떨어져 지낼 위험도 감수하며 이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했다.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윌슨은 귀여운 외손녀의 달콤한 말에 온종일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옆에 있던 비서 앨런이 속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윌슨 가문의 수장으로서 윌슨은 항상 엄하고 단호한 이미지였다. 그는 오직 아내와 이엘리아의 앞에서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친아들 카이사르조차도 윌슨의 미소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이엘리아의 딸이 윌슨을 이토록 기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앨런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옆에 있던 연도진을 바라보았다.저녁 식사 후, 부시아는 돌아가려 했지만 윌슨은 계속 아쉬워하는 눈치였다.하지만 부승민이 이미 사랑스러운 외손녀의 마음속에서 미처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치를 선점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었다.기특하고 사랑스러운 외손녀는 외할아버지의 슬픈 표정을 보자 바로 그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외할아버지, 나중에 카롤이 보고 싶어 지면 언제든 보러 오세요.”그 말에 윌슨은 더더욱 부시아를 보내기 싫어졌다.“카롤, 돌아가서 아빠랑 잘 상의해보렴. 네가 필라에서 잠깐 사는 게 어떤지 말이야.”윌슨은 “상의”라는 단어를 썼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결심을 끝낸 상태였다. 만약 부승민이 거절한다면 직접 그를 찾아가 “상담”을 해볼 생각이었다.
헤어스타일이 바뀐 최동철을 위아래로 훑어본 온하랑은 그는 다소 야위고 피곤해 보일 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최동철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괜찮아. 작은 상처일 뿐이야, 별일 아니야.”“다행이에요. 마침 잘 오셨어요. 앉아서 함께 식사하시면서 얘기 나누죠.”온하랑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최동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앉자 아줌마는 그릇과 젓가락을 추가하고 요리하러 갔다.흥분한 메이슨은 최동철의 옆에 앉아 계속 질문을 했다최동철은 인내심 있게 대답하며 가끔 메이슨과 장난도 했다.이 모습을 본 온하랑은 마음이 복잡했다.최동철의 모습을 자세히 본 온하랑은 그가 메이슨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식사 후 메이슨은 아줌마에 이끌려 낮잠을 자러 가고 거실에는 온하랑과 최동철만 남았다.아줌마가 차를 들고 오자 그들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온하랑은 그제야 최동철에게 물었다.“동철 오빠, 경찰이 오빠가 실종됐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일 이예요? 요즘 어디로 가셨던 거예요?”“누군가가 나를 해치려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어. 다쳐서 잠시 숨을 수밖에 없었어.”최동철은 간단히 몇 마디를 건네고 화제를 돌렸다.“며칠 동안 메이슨을 돌봐주느라 고생했어.”“아니에요. 당연한걸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었다.최동철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다정하게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지환이가 말하는데 급히 나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던데 혹시 무슨 일 있는 거야?”심호흡을 한 온 하랑은 최동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표정에서 한 가닥의 단서를 포착하려고 했다.“동철 오빠,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을 계속하라고 했다.“메이슨...진짜 우리 아이예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하게 잘 들렸다.온하랑의 말에 최동철은 순간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 안정을 되찾았다.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최동철은 온하랑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하지, 하랑아
온하랑은 머리가 복잡했다.‘메이슨이 나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메이슨에게 감정이 없었던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를 보러 왔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메이슨에게 정들기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가 메이슨이 그녀의 친자가 아니라며 진짜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온하랑의 마음은 지쳐있었다.한순간 그녀는 지금처럼 메이슨을 자기 친자식처럼 키우며 모두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이가 지금 어딘가에서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만약 그 아이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전화를 걸어온 부승민은 부드럽게 말했다.“다 봤어?”온하랑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응, 봤어...동철 씨한테 잘 물어볼게.”“동철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어.”“그러나 혈연관계는 옳으면 옳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유전자 검사를 다시 의뢰할 거야.”“그래, 내가 내일 갈게. 나와 함께 동철이를 만나러 가자.”부승민이 말했다.만약 계략이 탄로 나 화가 치밀어 오르면 최동철은 온하랑을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부승민은 철저하게 최동철을 방어하며 그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럴 일 없을 거야.”“불안해서 안 돼.”“...”부승민은 화제를 바꾸었다.“병원에 다녀왔는데 간호사가 원녕이의 검사 수치가 서서히 정상 수치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어. 보름 정도 지나면 퇴원할 가능성이 있대.”부승민에게서 원녕의 소식을 전해 들은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어. 수고했어, 승민아.”통화를 마치고 온하랑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메이슨은 이미 여러 개의 곰 모형 쿠키를 만들어 놓았다.그 남자는 최동철이 유전자 검사서를 위조했다고 했다.하지만 온하랑은 메이슨의 신분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동철은 친자확인서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온하랑은 메이슨이 그녀에게 경계심이 없기에 모낭이
반죽을 열심히 다루는 메이슨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온하랑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부승민의 말에 그녀는 마치 큰 바위에 가슴을 짓눌린 듯 숨이 막혔다.‘메이슨이 친자가 아니라면 최동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최동철은 어떻게 먼저 메이슨을 찾아서 그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러면 진짜 아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그녀는 메이슨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도록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엄마, 이것 보세요. 곰돌이 같아요?”메이슨은 갓 눌러놓은 곰돌이 쿠키 틀을 들어 올리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온하랑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곰돌이와 똑같아. 참 잘했어, 메이슨.”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메이슨은 머리를 숙여 계속 쿠키를 만들었다.그러나 온하랑은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부승민이 그녀 몰래 핸드폰 설정을 변경했을 당시 그 남자는 서우현의 핸드폰을 훔쳐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비록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었으나 그의 등장은 여전히 수상했다.‘예를 들어 그는 누구일까? 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왜 이제야 모든 진실을 알려주는 것일까?’심호흡을 한 그녀는 잠시 마음속의 의심을 가라앉혔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온하랑은 그 남자가 메이슨이 겪었던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불쌍하고 죄가 없는 어린 메이슨은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에 휘말리지 말아야 했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괜찮아, 아빠가 돌아오시면 네가 만든 쿠키를 보고 기뻐하실 거야.”그녀는 멈칫했다.“메이슨, 먼저 천천히 쿠키를 만들고 있어. 엄마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위층에 다녀올게.”“네.”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태연하게 위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닫자 온하랑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메일을 열고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부승민이 보낸 동영상을 클릭했다.영상 속 심문실에는 마른 얼굴에 몇 군데가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의자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