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림은 여전히 영업용 미소를 유지한 채, 차가운 눈빛으로 심사위원들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한준석 대표였다. 그는 지난번 처녀 파티에서 채림에게 뺨을 맞은 사나의 친구 한나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딸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채림에게 무안을 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그러나 채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준비해 온 자료를 띄우며, 차분하게 발표를 이어갔다. “이것은 제 이력의 일부입니다. 이번 미스 글로벌과 관련된 내용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슬라이드가 한 장씩 넘어갈 때마다, 채림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저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 서예, 동양화와 음악을 배웠으며, 9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습니다. 그중 발레가 저의 특기입니다.”“이것은 제가 14살 때 획득한 RAD 국제발레시험 최고 등급 자격증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제가 유명 발레 공연에 출연했을 때의 스틸컷입니다...”채림은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설명을 이어갔지만, 심사위원 중 누구도 그녀의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몇 마디 듣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 말을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그만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채림은 말을 멈추고는 덤덤하게 기회를 얻었다.하지만 가장 발언권이 있는 한준석이 눈살을 찡그린 채 귀찮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당장 내려가요! 정말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네요! 절름발이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한 대표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을 예선에서 통과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일을 너무 대충 하는 것 아닌가요?!”한준석의 양옆에 있는 심사위원들도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발은 치료하고 있습니다. 대회 전에 다 나을 수 있고요. 게다가 장애인은 꿈을 좇을 수 없나요? 장애인에 대한 격려의 의미가 담기면 H시 홍보에도 더 좋은 거 아닌가요?”“뭐 이런 억지가 다 있지?”한준석은 눈을 부릅뜨며 귀찮은 듯 말했다.“제발로 나갈 겁니까? 아니면 쫓겨날 겁니까?”점점 안 좋아지는 분위기
“맞아요.”최종 결과를 알리는 듯한 지후의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그 목소리에 지후 앞에서 자기를 알리기에 급급했던 한준석은 안도하며 양복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다음 분기에 MS 그룹 투자를 받을 수 있겠어.’“백채림 씨.”그때 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다음 달 MS 그룹과 함께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해요.”‘뭐?’지후의 의견에 백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한준석은 표정이 굳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지후를 바라봤다.“문... 문 대표님, 지금 최종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왜요? 내 눈이 삐었다고 생각하나요?”“제가 어찌 감히...”한준석은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회사 앞날이고 뭐고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그때 다른 심사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방금 전 한준석처럼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번 오디션을 위해 예선만 3개월을 치렀는데, 결국 한 명만 심사하고 바로 결정을 내리다니. 그것도 절름발이를. 역시 문 대표님 속내는 알지 못하겠다니까...’채림은 지후 외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오디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MS 그룹의 최종 패스권을 받았으니까.치마를 정리한 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침착하게 무대를 내려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 했다.“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는 걸 보면 한 대표님은 비즈니스 기회도 그닥 잘 엿보지 못할 것 같네요. 한 대표님이 MS 그룹의 투자를 쟁취하려고 애쓰고 있다던데, 문 대표님도 잘 고려하세요.”할 말을 마친 채림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문을 나섰다. 방문을 나가기 직전, 채림의 눈에는 지후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상황 수습하려고 진땀을 흘리는 한준석이 모습이 들어왔다...채림이 밖에 나왔을 때, 사나는 여전히 뭇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사나 언니, 오늘 아침 인터넷에 뜬 기사 때문에 악플에 시달렸겠는데, 영향 받은 건 아니죠?”“다들 이 바닥에서
사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의 진상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책임자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이제 막 합격한 채림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으니, 결국 사람들의 분노의 화살은 사나에게로 향했다.심지어 눈치 빠른 몇몇 유명하지 않은 연예인들은 채림에게 다가가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회주의자들을 상대하기 싫었던 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복도 끝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백채림 씨, 미스 글로벌 파티의 초대장은 저희가 최대한 빨리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건강 검진 보고서가 필요한데...”MS 그룹 직원은 강조했다.“알다시피 저희도 채림 씨가 건강하기를 바라니 지정된 항목에 따라 검진받으세요.”채림은 직원의 손에서 검진 항목 리스트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사실 MS 그룹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채림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혹시 모를 안 좋은 생활 습관을 미리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채림이 이번에 H시를 대표해 파티에 참석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MS 그룹 건물을 나선 채림은 택시를 잡아탄 후, 지후에게서 받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의사 이름도 없이 단지 한의원 주소만 적혀 있는 명함을 보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한의원은 유명 개인 병원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병원 건물을 통과하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하고 한참 기다리니, 개량 한복을 입은 노인이 나와 채림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침을 놓기 시작했다.약 30분 후, 채림이 다시 일어섰을 때, 2년 동안 힘을 쓰지 못했던 발에 힘이 실리며 걸을 수 있었다.“요즘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텐데, 내가 고약을 따로 처방할 테니 매일 저녁 잠자기 전 붙이세요. 그러면 사흘 지났을 때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거예요.”한의사의 당부에 채림은 애초의 의심을 던져버리고 진심 어린 감사를 전
‘그렇게 붙어먹더니, 결국 일 냈네.’‘유명 연예인이 형부를 꼬셔 혼전임신을 했다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면 파장이 어마어마하겠지?’간호사실을 나온 채림은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지수한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이원후 쪽에서 너희 약혼식에 작은 상황이 벌어져 일주일 내로 다시 치를 거라고 얘기하고 다니던데, 어떻게 생각해?][걱정하지 마.]채림은 빠른 속도로 문자를 작성했다.[내일이 지나서도 내가 이원후와 결혼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게끔 할 거니까.][그 말은 설마 내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는 뜻이야?]지수의 기대에 찬 문자에 채림은 덤덤하게 답변을 보냈다.[응, 하지만 네 협조가 필요해.][너 어디 있어?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두 사람은 중간 위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 30분 동안 계획을 세웠다.그러고 나서 채림은 예전에 원후한테서 받았던 사무실 키를 지수한테 넘겼다.키를 손에 넣은 지수는 기대에 찬 듯 말했다.“내일 점심쯤이면 이원후와 백사나가 H시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을 거야.”...지수를 보내자마자 채림은 민해란의 비서 임승철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사모님께서 오늘 아가씨가 구상한 제품 계획서를 이사진한테 보여줬는데, 엄청 큰 반발이 일어났어요. 혹시 오늘 직접 회사에 오실 수 있나요?]“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임승철은 생전 백건호가 가장 신뢰하던 비서였다. 백건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민해란을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 왔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기에,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채림은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벤 한 대가 채림 옆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창문이 내려지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윤재의 얼굴이 드러났다.사흘 뒤 발이 완치되면 윤재와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는 지후의 말이 떠오르자, 채림은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일 없으면 찾아오지
‘마침 잘 왔네. 이따가 찾아갈 수고도 덜어주고.’인파를 지나칠 때 채림의 귓가에 기자들의 질문이 들려왔다.“사나 씨, 백채림 씨는 사나 씨 매니저이자 언니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나 씨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 자격을 두고 경쟁을 벌인 건가요?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가요?”“백채림 씨는 어떻게 이번 오디션에 합격한 거죠? 혹시 내막이 있는 건가요?”기자들의 질문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나는 착한 척하며 사람들을 일부러 유도했다.“그럴 리가요.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언니는 아이디어도 많고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에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했던 모든 계약도 언니가 추진했던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 BM 그룹 업무까지 신경 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그 말은 백채림 씨 뒤에 BM 그룹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번 오디션에서도 BM 그룹의 백을 빌렸나요?”기자들은 사나의 암시를 완벽하게 읽어냈다.그러자 사나는 실수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영이가 눈치를 보다가 때마침 끼어들어 사나를 감쌌다.“우리 사나는 단순해서 사업에 관한 걸 몰라요. 그러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마세요.”인파 밖으로 지나치던 채림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순진한 척하기는.’‘아직은 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계속 날뛰어 봐. 네가 한 더러운 짓거리가 폭로되면 더 이상 착한 척 연기해도 안 먹힐 거니까.’채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최상층 회의실로 향했다.하지만 이제 박 모퉁이를 돌았을 때, 멀리서부터 백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성 향수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면서 남성 향수라니!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이딴 것도 계획안이라고 제안한 겁니까? 대체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면 이런 걸 생각해 냈답니까?”“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저예요.”채림이 문을 활짝 열더니 지팡이로 맑은 소리를 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그러자 임승철이 얼른 다가가 채림을 반기면서 의
“확실히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주동훈의 침착한 목소리는 단번에 떠들썩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회장님께서 본인 명의로 된 지분 절반을 채림 씨한테 넘겨 어제부터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표결은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말도 안 돼!”백성호는 화가 치밀어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형님이 채림을 회사에 들이지 말라고, 사업에 손대지 못하게 하라고 분명 말했다고! BM 그룹은 백씨 가문에 속하는 건데, 무슨 자격으로 당신들 모녀가 독차지해?”“BM 그룹은 제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설립한 회사예요. 삼촌을 회사에 들인 건 순전히 형제의 정을 봐서고요. 아버지가 세상을 뜬 순간부터 상속법에 의하면 회사는 저와 제 어머니가 물려받는 게 맞아요. 백씨 가문 사람이라고 어디든 다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니니 자중하세요!”채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반격하고는 몸을 돌려 임원진한테 말했다.“여러분, 오늘 회의는 향수 사업으로 생겼던 적자를 어떻게 흑자로 돌릴 것인가 하는 주제로 진행되는 것이니, 다들 주제에서 벗어나지 마세요.”민해란을 지지하는 세력도 기회다 싶어 맞장구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주변 사람들한테서 채림이 확실히 이사회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한 백성호는 그제야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이 계획안은 제가 오랫동안 준비한 거예요.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도 될지 전문가들한테 확인도 마쳤고요. 여성 향수 시장에 포화가 왔기에 더더욱 방향을 바꾸어 남성 향수를 밀고 나가야 한다고 봐요. 이번에 출시할 남성 향수는 BM 그룹 향수 산업에 새로운 출로를 마련할 거라고 자신하고요.”채림의 침착한 설명이 끝나기 바쁘게 백성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뒤따랐다.“출로가 뭔지 알기나 해? 막다른 길이면 어떡하려고?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홍보모델만 봐도 문제야. 여성 향수를 개발한다면 그나마 사나를 홍보 모델로 내세울 수 있지만, 남성 향수 모델은 누구한테 맡길 건데?”“어우, 사나가 할 필요 없어요.”채림은 손을
“그렇다면 저는 상품 가치가 있을까요?”그때, 문이 열리더니 임승철 뒤에서 정말로 윤재가 나타났다.모든 임원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황송한 표정으로 윤재를 바라봤다. 그들 눈에 윤재는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일 뿐만 아니라 MS 그룹 둘째 도련님이기도 했다.채림이 정말 윤재를 모셔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윤재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도련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요.”백성호는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사나 역시 다급히 화장을 고치고는 수시로 다가가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지만 윤재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채림을 바라봤다.“조건 괜찮은 것 같아요. 계약할게요.”“좋아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그때 윤재가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듯 백성호를 흘끗거렸다.“그런데 방에 공기가 좀 탁하네요. 우리 다른 데로 갈까요?”채림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그럼 옆방으로 가죠.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 바로 계약하죠.”두 사람은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백성호는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채림을 불러 세웠다.“백채림! 윤재 도련님이 어떤 분인데 이렇게 함부로 굴 수 있어? 윤재 도련님은 모델료만 해도 국내 최고 수준인데, 그걸 지불할 능력이 있기는 한 거니?”백성호가 몇 번 눈치를 주자 그의 심복들도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윤재 도련님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분이에요. 이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결국 BM 그룹이 책임져야 하잖아요!”채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윤재를 바라봤다.“문윤재 씨께서 제 기획안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저희 쪽을 도와주신다는 의미로 제가 생각한 금액으로 모델료를 제안드려도 될까요?”윤재는 얼른 애교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에 백성호는 넋을 잃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윤재가 채림한테 홀린 것처럼 껌뻑 죽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백채림 저 계집애가 어떻게 MS 그룹 사람을 알게 된 거지?”백
원후와 사나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그것은 다름 아닌 채림이 평소에 사용하던 그 브랜드의 향수였다.‘하.’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사실 예전에 채림이 원후한테 낯선 여성 향수 냄새가 난다고 두 번이나 따져 물은 뒤로 사나가 찾아와 그녀의 말을 꿰어낸 적이 있다. 그것도 가식적으로 채림의 향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로.그 뒤로 사나는 원후와 몰래 바람피우기 위해 항상 채림과 같은 향수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뜩이나 없는 머리를 이런 짓 하는데 모두 써버렸다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채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사나는 채림의 비위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언니, 내가 일부러 형부를 여기로 불러냈어. 우리 삼자대면으로 오해는 말끔히 풀자. 맺힌 응어리도 풀고.”“내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자로 선발됐는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응어리는 아니지 않아?”채림이 비아냥거리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기쁜걸.”그때 원후가 앞으로 다가와 카리스마 있는 척 채림을 와락 끌어안았다.“채림아, 그날은 술 때문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절대 술 그렇게 많이 안 마실게. 하지만 나랑 사나 정말 결백해.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며칠 뒤 우리 다시 약혼식 올리자.”‘역시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나 보네. 내가 예전에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에 놀아났다니.’채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겨우겨우 화를 억눌렀다.하지만 원후는 오히려 채림이 저를 믿었다고 착각해 은근슬쩍 찔러봤다.“채림아 내일이 드림캐슬 3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야. 아버지가 정식으로 내 이름을 드림캐슬 이사회에 올리고 그걸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내가 더 좋은 생활을 약속할게.”자기한테 차려질 이익을 생각하니 원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 채림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그래야 매체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
급히 진행된 모임이 끝나자, 강숙자는 특별히 차를 준비해 채림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침 그 시각은 증권소 거래가 막 마감된 시간이었다. 채림은 서둘러 드림캐슬 주식 상황을 확인했지만, 놀랍게도 주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백성호와 이철민이 손을 잡고 여론을 막아보려 했지만, 제국 빌딩에서 생중계된 영상이 너무 충격적이었던 탓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기사 대부분은 사나가 홍보 모델과 드라마, 예능에서 퇴출되었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심지어 국제적인 유명 브랜드들마저 계약 위반을 빌미로 사나에게 터무니없는 위약금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게다가 사나와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과 동료들이 하나둘씩 사나의 인성을 폭로하는 글을 올리면서 여론은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채림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들을 확인하며 입가에 냉소를 띄웠다.‘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그랬나. 얼마나 최악이었으면 편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까?’채림은 집 대신 회사로 향해 향수 라인을 담당하는 동료들과 신제품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가 끝난 후, 폰을 확인해 보니 수많은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사나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채림은 이를 가볍게 무시하려 했지만, 마침 또다시 사나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국 채림은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전화를 받았다.[언니.]전화 건너편에서 사나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어...]“하.”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빌어 봐.”[그래, 내가 이렇게 빌게.]사나는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교통사고를 꾸며 내 다리를 망가뜨리고, 가짜 약을 복용하게 해 회복하지 못하게 하고, 내 약혼자를 꼬셔 2년 동안이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건 너야. 난 오히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채림은 이를 악물고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그러자 한참 뒤 건너편에서 사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잘못했어. 그런데 우리 자매잖아...]“
“이게 정말인가요? 정말 절름발이를 H시 대표로 선정한 거예요?”옆에 있던 귀부인들도 수군대기 시작했다.“크흠.”하지만 강숙자의 헛기침 한방에 귀부인들은 바로 조용해졌다.“혹시 아는 사람인가?”강숙자의 물음에, 나영은 강숙자가 채림한테 화가 났다고 착각해 얼른 부채질했다.“아니요. 몰라요. 하지만 화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 H시에서 저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요. 오늘 오전만 해도 저 여자의 약혼자가 저 여자 사촌 동생이랑 몸을 섞는 영상이 제국 빌딩에 생중계됐거든요...”“저 아가씨가 백씨 가문 아가씨였군요. 하긴, 최근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유명해지긴 했죠. 다들 제국 빌딩에서 상영된 영상을 못 보셨나요?”“그럴 리가요. 생방송이라 보고 싶지 않아도 안 볼 수가 없었어요...”귀부인들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눈살을 찌푸렸다.사람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더 자신감을 얻은 나영은 이미 어두워진 강숙자의 표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부채질 해댔다.“어르신, 너무 우습지 않나요? 집에 그런 추한 일이 벌어졌으면서 어르신께 줄을 대려고 쪼르르 달려오다니요.”“상대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동정하는 게 아니라 비웃는 건가?”쩌렁쩌렁한 강숙자의 목소리에 수군대며 떠들던 사람들은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나영도 너무 난감해 다급히 핑계를 댔다.“저... 어르신, 개인사는 제쳐 두더라도 절름발이가 H시를 대표하여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하는 걸 두고 보실 건가요? 그러면 백채림이 웃음거리가 되는 건 물론, H시까지 웃음거리로 전락할 거라고요!”안으로 들어오던 채림은 마침 나영의 발언을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강숙자에게 다가갔다.채림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나영은 눈을 땡그랗게 뜨며 삿대질했다.“어르신, 이것 보세요. 얼마나 교양 없나. 어르신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왔잖아요!”강숙자는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그 순간 강숙자가 자기 의견을 동의했다고 착각한 나영은 다급히 저한테로 뻗어 온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
나영의 어머니 최영애는 경멸하는 듯 채림을 바라봤다.“절름발이 주제에 아부해 봤지. 무서워할 거 뭐 있어?”그 말에 안심한 나영은 최영애의 팔을 꽉 끌어안았다.“엄마 말이 맞아요. 국내에서 강숙자 어르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이 엄마잖아요.”“걱정하지 마. 문 대표님이 효성이 지극한 분이라고 하니 이따가 너만 얌전하게 굴어. 어르신의 동의만 떨어지면 네 아빠 회사도 정상 가동될 거야. 그러면 미스 글로벌 파티에 가게 될 사람도 자연스럽게 네가 될 거고.”최영애는 손을 들어 어깨에 걸친 숄을 정리하며 말했다.그 말에 더욱 자신감이 생겨난 나영은 최영애와 함께 가슴을 편 채 앞으로 걸어갔다....나영 모녀가 밖에서 한참을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두 사람을 안으로 모시러 오지 않았다. 결국 짜증이 난 나영은 목표를 돌려 벚꽃 나무 아래에 있는 채림을 찾아갔다.“어머, 이게 누구야? 백씨 가문 아가씨잖아. 문씨 저택에 오면서 예의 갖춰 차려입지 않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오더니, 백씨 가문이 이 정도로 몰락했나?”고개를 돌린 채림의 눈에는 보석을 칭칭 휘감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를 몰아세우는 여자가 들어왔다.‘한나영?’‘한나영도 여기 올 줄이야.’채림은 남의 집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지만 나영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동생한테 약혼자를 뺏겼는데도 슬픈 기색 하나 없네? 게다가 은근히 야망 있네? 곧바로 어르신한테 줄을 대러 달려오다니.”“엄마, 그런 남녀랑 한데 엮여서 사람들 입에 오른 사람의 인성이 어디 가겠어요, 안 그래요?”채림은 싸늘한 눈빛을 내뿜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렇게 죽고 못 사는 베프인 척하더니, 벌써 선을 긋는 거야? 쓸모 없어지니 자기 친구도 버리는 사람은 수준이 얼마나 높을까?”“지금 나 욕했어?”나영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누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제 발 저리니 바로 인정하네. 그래도 본인 주제는 좀 아나 봐!”“백채림! 아직 좋아하
어찌 됐든 윤재가 어르신 앞에서는 독서를 즐기고 명상을 즐기는 이미지인 터라 채림은 적절한 표현을 골라 대답했다.“웃음이 헤프고 자유분방하거든요.”강숙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고개를 돌려 류옥화를 바라봤다.그러자 류옥화도 진땀을 빼며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다가 강숙자의 귓가에 소곤댔다.“문 대표님이 채림 씨 앞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모양이네요...”‘그럴 수 있지.’강숙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8년 전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후도 이렇게 무뚝뚝한 성격으로 변하지 않았을 텐데. 진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을 열 수도 있지.’“그거참 좋네.”강숙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네, 참 좋아. 어쩜 이렇게 참한지. 그런데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고 해서 많이 속상했지?”“아니요. 속상하지 않아요. 이것도 다 대의를 위한 거잖아요.”‘오히려 계속 숨겼으면 좋겠는데요.’강숙자는 채림이 너무 만족스러웠다.‘문씨 가문에서는 어떻게 딸을 이렇게 이해심 많고 착하고 귀엽게 키웠지? 지후가 그런 일을 당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줄 알았는데 복은 역시 따라오는군.’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숙자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이 할미가 강원에 집 한 채 마련했는데, 앞으로 둘이 거기서 지내.”아무 생각 없이 거절하려던 채림은 결혼까지 했는데 따로 사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몇 달간 윤재의 스케줄을 몰래 확인해 봤는데, 집에 돌아올 가능성의 거의 없었기에 안심이 되었다.얼마 뒤, 가사도우미 한 명이 들어와 손님이 도착했다고 알리자마자 강숙자의 표정은 어두워졌다.채림이 밖을 내다봤더니 정원에 거의 소규모 파티를 열어도 될 만한 인원이 모여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휴식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할머니의 귀국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아부하러 줄지어 왔나 보네. 그러니까 할머니 얼굴이 바로 어두워지지.’강숙자가 손님들을 상대하기 시작하자 지후는 시간 낭비를 하기 싫어 바로 휠체어를 돌렸다. 그러면서
차에서 누군가 내리더니 공손한 자세로 지수의 차 앞에 멈춰 섰다. 채림은 그 사람이 오디션 때 지후 휠체어 뒤에 서 있던 비서라는 걸 한눈에 알아봤다.어제 윤재의 약속을 떠올린 채림은 지수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얼른 차에서 내려 그 사람을 따라갔다.“백채림 씨, 문씨 고택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르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현은 말하면서 채림에게 자료를 건넸다.“주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어르신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셔서 당장 채림 씨를 보고 싶다고 하십니다.”“알겠어요.”채림은 자기가 입은 드레스를 보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죄송하지만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야 해서 집에 데려다줄래요?”강현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 얼른 전화를 걸더니 지후한테 상황 설명을 하고 나서 폰을 채림에게 건넸다.“채림 씨, 대표님이 전화 바꾸랍니다.”채림이 전화를 받자 지후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분부했다.“나중에 심문당하더라도 넘길 수 있도록 차에 있는 자료 미리 숙지해 둬요.”채림은 미간을 팍 구겼다.‘문윤재는 역시 믿으면 안 되겠네. 자이언트 베이비도 아니고, 나더러 자기 아내인 척하라고 부탁했으면서 뭐든 산촌이 해주다니.’자료를 확인하니 생년월일, 취미, 습과 등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취미가 독서와 명상이라는 걸 본 순간 채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래요?”이상함을 느낀 지후가 바로 물었다.그러자 채림은 얼른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잘 기억해 둘 테니.”‘문씨 가문 어르신 눈에 문윤재 취미가 독서와 명상이라고? 집에서 연기를 참 잘하나 보네.’...한참 뒤, 문씨 고택에 도착하자 눈앞에는 고풍스러운 정원이 펼쳐졌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채림의 눈에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지후가 보였다.매번 지후를 볼 때마다 채림은 저도 모르게 B국 가든 호텔에서 있었던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그 상대가 지후가 아닌 걸 알면서도 자꾸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아무
쨍그랑!이철민이 들고 있던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이 후레자식!”“당장! 당장 화면 돌려!”이미지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럭 화를 내는 이철민에 부하 직원들은 겁에 질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원후와 사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제국 빌딩의 시스템마저 해킹을 당해 화면을 멈출 수 없었다.결국 H시 전체가 이씨 가문 도련님과 유명 연예인 백사나의 생방송 영상으로 떠들썩해졌다. 길 가던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두 사람을 욕했고, 창립 기념 행사에 초대받은 게스트들과 기자들마저 혀를 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넷이 순식간에 마비되었다.H시가 떠들썩하든 말든 이 난리를 전혀 모르는 원후와 사나는 건물 꼭대기에서 몸을 섞는 모습을 계속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어젯밤에 백채림과 함께 있었으면서 아직도 날 속일 생각이야?”“아니야! 너 미쳤어?”원후는 사나를 뿌리쳤지만, 사나는 오히려 그 틈에 달려들어 원후의 어깨를 깨물더니 그의 몸에 올라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오빠 몸은 나한테만 반응한다며?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다며?”결국 사나의 유혹을 참지 못한 원후는 그대로 쾌락에 몸을 맡겼고, 곧이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상영되었다.순간 인터넷은 폭발하고 말았다.[평소에 청순한 이미지더니 뒤에서는 언니 약혼자를 꼬셔 붙어먹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혼전 임신에 중절 수술까지 하고는 대중을 속이려 들었다고? 인성 나락이네, 사람 맞아?][이원후도 약혼녀를 그렇게 사랑하는 척 떠들고 다니더니, 다 가짜였네! 백사나도 내연녀 주제에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 여자 친구와 자지 말라고 할 수 있지? 소름 끼쳐!]그로부터 약 10분 뒤, 드림캐슬 직원은 겨우 제국 빌딩 외곽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핸드폰과 머릿속에 방금까지의 영상이 저장된 상태였다.이철민과 장선화 그리고 드림캐슬 주주들은 황급히 회사 건물 내부로 도망쳐 문을
채림은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쥔 채 원후의 옆에 서 있었다. 그 꽃다발은 원후한테서 받은 건데, 너무 과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이원후 씨, 백채림 씨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던데 정말인가요?”“맞아요!”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은 열띤 취재 끝에 두 사람의 약혼식이 깨진 상황에 이목을 집중했다.그러자 원후는 얼른 채림의 손을 잡으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채림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혹시 약혼식은 나중에 다시 치르나요?”“당연하죠!”원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다면 부인될 사람이 밖에 나도는 건 괜찮나요?”“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여자들도 자기 가치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원후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채림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기쁘다면 저도 기뻐요.”그 순간 현장은 화기애애해졌고,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과 원후가 결혼 전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원후 도련님은 역시 모범적인 남자 친구네요!”“어디 모범적인 남자 친구뿐이겠어요? 모범적인 후계자이기도 하죠!”그러자 기자들은 얼른 맞장구쳤다.“지금껏 H시 명문가 후계자 중에서 원후 도련님이 단연 돋보이네요!”“그러게요, 늘 겸손하고 성품 논란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잖아요!”이철민과 장선화는 제 아들을 칭찬하는 말에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죠, 우리 원후가 어릴 때부터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사리 분별을 잘했거든요.”“저는 어릴 때부터 우리 원후를 후계자로 키웠습니다. 원후의 품행이 제가 드림캐슬을 운영하는 품행입니다. 늘 당당하고 결백한 품행 말입니다.”맞장구 치며 아첨하는 기자들을 보며 채림은 감정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 싸늘한 냉기가 맴돌았다.‘이따가 이원후가 얼마나 결백한지 알게 될 거예요.’“다들 자리를 이동합시다. 10분 뒤에 강 건너편에 있는 제국 빌딩에서 드림캐슬 30주년 창립
원후의 사무실에는 진작 카메라가 설치되어, 채림은 핸드폰으로 사무실 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나가 도착한 걸 확인한 채림은 이내 집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부탁했다.잠시 뒤, 지수의 사람들이 파파라치 행세를 하며 드림캐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원후의 사무실에서 밖을 확인하던 사나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파파라치가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른 원후에게 전화했다.그때, 차에 있던 채림이 진동하는 원후의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원후 오빠, 나 드림캐슬에 갇혔어. 빨리 와줘...]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림은 컴퓨터에서 재생 버튼을 눌러 지수가 미리 준비해준 녹음 파일을 사나에게 들려주었다.[누구야?][중요하지 않아. 내 눈엔 자기밖에 없어.][그래?][당연하지. 자기랑 이사회 지지만 있으면 내가 바로 인생 승자인데, 다른 게 뭔 소용이겠어?][그런데 평소 사나랑 가까이 지냈잖아, 난 자기가 사나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걔는 연예계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남자들한테 다 애교 부리고 친한 척해. 그에 비해 자기는 우아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누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예전에는 회사 이익을 위해 잠깐 사나를 이용한 거야.]이건 채림과 원후의 목소리를 인터넷 기술을 이용하여 합성한 거다. 하지만 너무 진짜 같아 사나는 듣는 내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주저앉았다.‘내일 있을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연락하지 말라더니, 바쁜일이 이거였어?’사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원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나한테 너무 익숙했기에 듣는 순간 진짜라고 확신했다.‘지금껏 백채림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다더니, 나랑 백채림 사이에서 간 보며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던 거였네!’‘감히 나를 속여?’사나는 화가 나고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원후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원후와 사나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그것은 다름 아닌 채림이 평소에 사용하던 그 브랜드의 향수였다.‘하.’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사실 예전에 채림이 원후한테 낯선 여성 향수 냄새가 난다고 두 번이나 따져 물은 뒤로 사나가 찾아와 그녀의 말을 꿰어낸 적이 있다. 그것도 가식적으로 채림의 향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로.그 뒤로 사나는 원후와 몰래 바람피우기 위해 항상 채림과 같은 향수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뜩이나 없는 머리를 이런 짓 하는데 모두 써버렸다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채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사나는 채림의 비위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언니, 내가 일부러 형부를 여기로 불러냈어. 우리 삼자대면으로 오해는 말끔히 풀자. 맺힌 응어리도 풀고.”“내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자로 선발됐는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응어리는 아니지 않아?”채림이 비아냥거리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기쁜걸.”그때 원후가 앞으로 다가와 카리스마 있는 척 채림을 와락 끌어안았다.“채림아, 그날은 술 때문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절대 술 그렇게 많이 안 마실게. 하지만 나랑 사나 정말 결백해.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며칠 뒤 우리 다시 약혼식 올리자.”‘역시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나 보네. 내가 예전에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에 놀아났다니.’채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겨우겨우 화를 억눌렀다.하지만 원후는 오히려 채림이 저를 믿었다고 착각해 은근슬쩍 찔러봤다.“채림아 내일이 드림캐슬 3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야. 아버지가 정식으로 내 이름을 드림캐슬 이사회에 올리고 그걸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내가 더 좋은 생활을 약속할게.”자기한테 차려질 이익을 생각하니 원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 채림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그래야 매체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