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최종 결과를 알리는 듯한 지후의 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그 목소리에 지후 앞에서 자기를 알리기에 급급했던 한준석은 안도하며 양복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다음 분기에 MS 그룹 투자를 받을 수 있겠어.’“백채림 씨.”그때 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다음 달 MS 그룹과 함께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해요.”‘뭐?’지후의 의견에 백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한준석은 표정이 굳더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지후를 바라봤다.“문... 문 대표님, 지금 최종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왜요? 내 눈이 삐었다고 생각하나요?”“제가 어찌 감히...”한준석은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회사 앞날이고 뭐고 자기 목숨을 부지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그때 다른 심사위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방금 전 한준석처럼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번 오디션을 위해 예선만 3개월을 치렀는데, 결국 한 명만 심사하고 바로 결정을 내리다니. 그것도 절름발이를. 역시 문 대표님 속내는 알지 못하겠다니까...’채림은 지후 외에 가장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오디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MS 그룹의 최종 패스권을 받았으니까.치마를 정리한 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침착하게 무대를 내려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 했다.“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는 걸 보면 한 대표님은 비즈니스 기회도 그닥 잘 엿보지 못할 것 같네요. 한 대표님이 MS 그룹의 투자를 쟁취하려고 애쓰고 있다던데, 문 대표님도 잘 고려하세요.”할 말을 마친 채림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문을 나섰다. 방문을 나가기 직전, 채림의 눈에는 지후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상황 수습하려고 진땀을 흘리는 한준석이 모습이 들어왔다...채림이 밖에 나왔을 때, 사나는 여전히 뭇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사나 언니, 오늘 아침 인터넷에 뜬 기사 때문에 악플에 시달렸겠는데, 영향 받은 건 아니죠?”“다들 이 바닥에서
사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의 진상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책임자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이제 막 합격한 채림에게 화풀이를 할 수도 없으니, 결국 사람들의 분노의 화살은 사나에게로 향했다.심지어 눈치 빠른 몇몇 유명하지 않은 연예인들은 채림에게 다가가 아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회주의자들을 상대하기 싫었던 채림은 지팡이를 짚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복도 끝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며 말을 걸었다.“백채림 씨, 미스 글로벌 파티의 초대장은 저희가 최대한 빨리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건강 검진 보고서가 필요한데...”MS 그룹 직원은 강조했다.“알다시피 저희도 채림 씨가 건강하기를 바라니 지정된 항목에 따라 검진받으세요.”채림은 직원의 손에서 검진 항목 리스트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사실 MS 그룹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채림의 건강 상태를 걱정하는 것도 있지만, 혹시 모를 안 좋은 생활 습관을 미리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채림이 이번에 H시를 대표해 파티에 참석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MS 그룹 건물을 나선 채림은 택시를 잡아탄 후, 지후에게서 받은 명함을 꺼내 들었다. 의사 이름도 없이 단지 한의원 주소만 적혀 있는 명함을 보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한의원은 유명 개인 병원 안에 위치해 있었으며, 병원 건물을 통과하면 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름을 말하고 한참 기다리니, 개량 한복을 입은 노인이 나와 채림의 상처를 살펴보더니 침을 놓기 시작했다.약 30분 후, 채림이 다시 일어섰을 때, 2년 동안 힘을 쓰지 못했던 발에 힘이 실리며 걸을 수 있었다.“요즘 재활치료를 받고 있을 텐데, 내가 고약을 따로 처방할 테니 매일 저녁 잠자기 전 붙이세요. 그러면 사흘 지났을 때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거예요.”한의사의 당부에 채림은 애초의 의심을 던져버리고 진심 어린 감사를 전
‘그렇게 붙어먹더니, 결국 일 냈네.’‘유명 연예인이 형부를 꼬셔 혼전임신을 했다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면 파장이 어마어마하겠지?’간호사실을 나온 채림은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지수한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이원후 쪽에서 너희 약혼식에 작은 상황이 벌어져 일주일 내로 다시 치를 거라고 얘기하고 다니던데, 어떻게 생각해?][걱정하지 마.]채림은 빠른 속도로 문자를 작성했다.[내일이 지나서도 내가 이원후와 결혼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게끔 할 거니까.][그 말은 설마 내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는 뜻이야?]지수의 기대에 찬 문자에 채림은 덤덤하게 답변을 보냈다.[응, 하지만 네 협조가 필요해.][너 어디 있어?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두 사람은 중간 위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 30분 동안 계획을 세웠다.그러고 나서 채림은 예전에 원후한테서 받았던 사무실 키를 지수한테 넘겼다.키를 손에 넣은 지수는 기대에 찬 듯 말했다.“내일 점심쯤이면 이원후와 백사나가 H시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을 거야.”...지수를 보내자마자 채림은 민해란의 비서 임승철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사모님께서 오늘 아가씨가 구상한 제품 계획서를 이사진한테 보여줬는데, 엄청 큰 반발이 일어났어요. 혹시 오늘 직접 회사에 오실 수 있나요?]“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임승철은 생전 백건호가 가장 신뢰하던 비서였다. 백건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민해란을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 왔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기에,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채림은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벤 한 대가 채림 옆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창문이 내려지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윤재의 얼굴이 드러났다.사흘 뒤 발이 완치되면 윤재와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는 지후의 말이 떠오르자, 채림은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일 없으면 찾아오지
‘마침 잘 왔네. 이따가 찾아갈 수고도 덜어주고.’인파를 지나칠 때 채림의 귓가에 기자들의 질문이 들려왔다.“사나 씨, 백채림 씨는 사나 씨 매니저이자 언니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나 씨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 자격을 두고 경쟁을 벌인 건가요?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가요?”“백채림 씨는 어떻게 이번 오디션에 합격한 거죠? 혹시 내막이 있는 건가요?”기자들의 질문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나는 착한 척하며 사람들을 일부러 유도했다.“그럴 리가요.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언니는 아이디어도 많고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에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했던 모든 계약도 언니가 추진했던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 BM 그룹 업무까지 신경 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그 말은 백채림 씨 뒤에 BM 그룹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번 오디션에서도 BM 그룹의 백을 빌렸나요?”기자들은 사나의 암시를 완벽하게 읽어냈다.그러자 사나는 실수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영이가 눈치를 보다가 때마침 끼어들어 사나를 감쌌다.“우리 사나는 단순해서 사업에 관한 걸 몰라요. 그러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마세요.”인파 밖으로 지나치던 채림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순진한 척하기는.’‘아직은 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계속 날뛰어 봐. 네가 한 더러운 짓거리가 폭로되면 더 이상 착한 척 연기해도 안 먹힐 거니까.’채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최상층 회의실로 향했다.하지만 이제 박 모퉁이를 돌았을 때, 멀리서부터 백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성 향수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면서 남성 향수라니!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이딴 것도 계획안이라고 제안한 겁니까? 대체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면 이런 걸 생각해 냈답니까?”“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저예요.”채림이 문을 활짝 열더니 지팡이로 맑은 소리를 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그러자 임승철이 얼른 다가가 채림을 반기면서 의
“확실히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주동훈의 침착한 목소리는 단번에 떠들썩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회장님께서 본인 명의로 된 지분 절반을 채림 씨한테 넘겨 어제부터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표결은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말도 안 돼!”백성호는 화가 치밀어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형님이 채림을 회사에 들이지 말라고, 사업에 손대지 못하게 하라고 분명 말했다고! BM 그룹은 백씨 가문에 속하는 건데, 무슨 자격으로 당신들 모녀가 독차지해?”“BM 그룹은 제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설립한 회사예요. 삼촌을 회사에 들인 건 순전히 형제의 정을 봐서고요. 아버지가 세상을 뜬 순간부터 상속법에 의하면 회사는 저와 제 어머니가 물려받는 게 맞아요. 백씨 가문 사람이라고 어디든 다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니니 자중하세요!”채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반격하고는 몸을 돌려 임원진한테 말했다.“여러분, 오늘 회의는 향수 사업으로 생겼던 적자를 어떻게 흑자로 돌릴 것인가 하는 주제로 진행되는 것이니, 다들 주제에서 벗어나지 마세요.”민해란을 지지하는 세력도 기회다 싶어 맞장구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주변 사람들한테서 채림이 확실히 이사회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한 백성호는 그제야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이 계획안은 제가 오랫동안 준비한 거예요.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도 될지 전문가들한테 확인도 마쳤고요. 여성 향수 시장에 포화가 왔기에 더더욱 방향을 바꾸어 남성 향수를 밀고 나가야 한다고 봐요. 이번에 출시할 남성 향수는 BM 그룹 향수 산업에 새로운 출로를 마련할 거라고 자신하고요.”채림의 침착한 설명이 끝나기 바쁘게 백성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뒤따랐다.“출로가 뭔지 알기나 해? 막다른 길이면 어떡하려고?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홍보모델만 봐도 문제야. 여성 향수를 개발한다면 그나마 사나를 홍보 모델로 내세울 수 있지만, 남성 향수 모델은 누구한테 맡길 건데?”“어우, 사나가 할 필요 없어요.”채림은 손을
“그렇다면 저는 상품 가치가 있을까요?”그때, 문이 열리더니 임승철 뒤에서 정말로 윤재가 나타났다.모든 임원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황송한 표정으로 윤재를 바라봤다. 그들 눈에 윤재는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일 뿐만 아니라 MS 그룹 둘째 도련님이기도 했다.채림이 정말 윤재를 모셔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윤재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도련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요.”백성호는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사나 역시 다급히 화장을 고치고는 수시로 다가가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지만 윤재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채림을 바라봤다.“조건 괜찮은 것 같아요. 계약할게요.”“좋아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그때 윤재가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듯 백성호를 흘끗거렸다.“그런데 방에 공기가 좀 탁하네요. 우리 다른 데로 갈까요?”채림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그럼 옆방으로 가죠.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 바로 계약하죠.”두 사람은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백성호는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채림을 불러 세웠다.“백채림! 윤재 도련님이 어떤 분인데 이렇게 함부로 굴 수 있어? 윤재 도련님은 모델료만 해도 국내 최고 수준인데, 그걸 지불할 능력이 있기는 한 거니?”백성호가 몇 번 눈치를 주자 그의 심복들도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윤재 도련님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분이에요. 이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결국 BM 그룹이 책임져야 하잖아요!”채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윤재를 바라봤다.“문윤재 씨께서 제 기획안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저희 쪽을 도와주신다는 의미로 제가 생각한 금액으로 모델료를 제안드려도 될까요?”윤재는 얼른 애교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에 백성호는 넋을 잃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윤재가 채림한테 홀린 것처럼 껌뻑 죽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백채림 저 계집애가 어떻게 MS 그룹 사람을 알게 된 거지?”백
원후와 사나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그것은 다름 아닌 채림이 평소에 사용하던 그 브랜드의 향수였다.‘하.’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사실 예전에 채림이 원후한테 낯선 여성 향수 냄새가 난다고 두 번이나 따져 물은 뒤로 사나가 찾아와 그녀의 말을 꿰어낸 적이 있다. 그것도 가식적으로 채림의 향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로.그 뒤로 사나는 원후와 몰래 바람피우기 위해 항상 채림과 같은 향수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뜩이나 없는 머리를 이런 짓 하는데 모두 써버렸다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채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사나는 채림의 비위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언니, 내가 일부러 형부를 여기로 불러냈어. 우리 삼자대면으로 오해는 말끔히 풀자. 맺힌 응어리도 풀고.”“내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자로 선발됐는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응어리는 아니지 않아?”채림이 비아냥거리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기쁜걸.”그때 원후가 앞으로 다가와 카리스마 있는 척 채림을 와락 끌어안았다.“채림아, 그날은 술 때문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절대 술 그렇게 많이 안 마실게. 하지만 나랑 사나 정말 결백해.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며칠 뒤 우리 다시 약혼식 올리자.”‘역시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나 보네. 내가 예전에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에 놀아났다니.’채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겨우겨우 화를 억눌렀다.하지만 원후는 오히려 채림이 저를 믿었다고 착각해 은근슬쩍 찔러봤다.“채림아 내일이 드림캐슬 3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야. 아버지가 정식으로 내 이름을 드림캐슬 이사회에 올리고 그걸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내가 더 좋은 생활을 약속할게.”자기한테 차려질 이익을 생각하니 원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 채림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그래야 매체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
원후의 사무실에는 진작 카메라가 설치되어, 채림은 핸드폰으로 사무실 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나가 도착한 걸 확인한 채림은 이내 집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부탁했다.잠시 뒤, 지수의 사람들이 파파라치 행세를 하며 드림캐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원후의 사무실에서 밖을 확인하던 사나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파파라치가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른 원후에게 전화했다.그때, 차에 있던 채림이 진동하는 원후의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원후 오빠, 나 드림캐슬에 갇혔어. 빨리 와줘...]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림은 컴퓨터에서 재생 버튼을 눌러 지수가 미리 준비해준 녹음 파일을 사나에게 들려주었다.[누구야?][중요하지 않아. 내 눈엔 자기밖에 없어.][그래?][당연하지. 자기랑 이사회 지지만 있으면 내가 바로 인생 승자인데, 다른 게 뭔 소용이겠어?][그런데 평소 사나랑 가까이 지냈잖아, 난 자기가 사나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걔는 연예계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남자들한테 다 애교 부리고 친한 척해. 그에 비해 자기는 우아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누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예전에는 회사 이익을 위해 잠깐 사나를 이용한 거야.]이건 채림과 원후의 목소리를 인터넷 기술을 이용하여 합성한 거다. 하지만 너무 진짜 같아 사나는 듣는 내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주저앉았다.‘내일 있을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연락하지 말라더니, 바쁜일이 이거였어?’사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원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나한테 너무 익숙했기에 듣는 순간 진짜라고 확신했다.‘지금껏 백채림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다더니, 나랑 백채림 사이에서 간 보며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던 거였네!’‘감히 나를 속여?’사나는 화가 나고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원후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양아치들입니다.”사립탐정은 간단하게 요약했다.“하지만 백채림 씨 외모나 재산을 보고 노리는 건 아닌 듯합니다. 경매장에서 손쓰는 게 좋은 선택도 아니고요.”“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채림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저 사람들의 배후가 누군지 아직 모르니, 당분간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요. 상대가 오히려 경계할 지도 모르니까요. 몰래 저 둘을 감시하면 돼요.”“그런데 저놈들 위치가 하필 백채림 씨와 인접해 있어, 만일의 경우는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사립탐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그럴 거예요.”채림은 확신했다.“저들을 지시한 사람은 내가 망신당하기를 원하니, 경매장에서 악랄한 수법은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 암호부터 정해요. 이따 내가 모자를 벗으면 그때 기회를 봐서 움직여요.”“네.”사립탐정은 짤막하게 답하고 뒤돌아서더니 자리에 들어서는 사람들 속에 재빨리 숨었다.채림도 얼른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얼마 뒤, 두 남자도 잇따라 그녀 곁에 앉았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공개된 처음 몇 경매품을 채림은 그냥 지나쳤다.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수중에 있는 가이드북만 살폈다. 그때, 경매사가 무대에 올라 말했다.“다음 경매품입니다.”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대형 스크린에 아름다운 디자인의 왕관이 펼쳐졌다.이윽고 현장 스태프가 경매품을 무대 위로 가져왔다. 오래된 왕관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유백색 진주들이 박혀 있어, 독특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뽐냈다.“여러분이 기대하셨던 왕관입니다. 왕자와 왕비의 50년 넘는 사랑을 증명한 물건이죠. 게스트분들 모두 이 왕관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거라는 걸 잘 압니다. 그러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열정적으로 경매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으로부터 진주 왕관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경매사가 무대 위에서 나무망치를 두드렸다.“경매가 4억부터 호가 시작하겠습니다. 번호판을 들 때마다 2,000만 원씩 올라갑니다.”경매사의 목소리는
“사나야, 그동안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편히 몸조리해. 오경수의 화가 가라앉으면 이 일도 지나갈 거야.”진옥경도 딸을 위로했다.“우선 마음을 가라앉혀. 너도 다시 백씨 가문 아가씨 신분을 되찾아야지. 나와 네 아버지도 퇴로를 찾고, 새로운 백을 찾으면, 더 이상 백채림 모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정말이에요?”그 말을 들은 사나의 눈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당연하지, 엄마 아빠가 나서는데, 뭔들 못 하겠어?”진옥경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한가족은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그때, 병실 티비에서 갑자기 BM 그룹 의료팀에 관한 뉴스를 보도했다.그런데 맨 처음에 BM 그룹을 손가락질해대던 국면은 채림이 나타난 뒤 180도로 뒤바뀌었다. 백승호 부부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와 대책을 논의했다.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BM 그룹에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DL 그룹에 아부하려고 생각했던 계략도 채림한테 완전히 간파 당할 줄은 몰랐다. 물론 CS 바이오 일은 아직 진옥경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DL 그룹과 계속 손을 잡는 건 이미 물 건너 갔다. 때문에 백승호는 DL 그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야 했다.병상에 누워 있던 사나는 뉴스를 보면서 리모컨을 들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채림이 대중 앞에서 우쭐대는 꼴을 눈으로 직접 보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더욱이 인터넷에는 백채림과 BM 그룹 칭찬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다.대중들은 백채림이 BM 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마저 예쁜 데다 마음씨까지 착하고, 지혜롭기까지 하다며, H시가 이런 훌륭한 여성 후계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에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사나는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얼른 채널을 돌렸다. 그러다 마침 지금 방송되고 있는 현지 뉴스를 보게 되었다. 오늘 H시 전시회장에서 마침 그 진주 왕관을 경매품으로 내놓았다.채림이 그 왕관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던 사나는 머리를 굴
추종현은 격분한 듯 말하고는 뒤돌아 민해란에게 말했다.“민 회장님, 가시죠.”“교수님, 먼저 가시면 제가 뒤따르겠습니다.”민해란은 경호원들에게 눈치를 주어 추종현을 모셔가게 하고는 대뜸 돌아서서 채림에게 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한다던 건 또 뭔 소리고? 너 어디 다쳤어? 또 엄마한테 뭐 속이는 거 없어?”“엄마.”채림은 을른 웃으며 어머니를 달랬다.“봐요,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확실히 말해.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민해란은 채림을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한 뒤 채림은 의료팀이 산지에서 겪었던 일을 대충 말해주었다.물론 산사태가 벌어진 상황을 조금 약화시켰지만, 민해란은 여전히 걱정되어 몇 번이고 캐묻고 나서야 긴장을 조금 늦추었다.“임 실장 얘기를 들어보니 네가 직접 산지에 약을 날랐다던데. 산길이 위험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위험할 줄은...”민해란은 한숨을 푹 쉬었다.“네가 총명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오늘 추 교수님을 그냥 빼앗겼을 거야. 우리 채림이 많이 컸네.”채림은 활짝 웃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니까 엄마를 도와 부담을 덜어주는 건 당연하잖아요.”“이미 충분해.”민해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네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서 우승을 따낸 뒤로, BM 그룹이 해외에서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몰라. 최근에 엄마가 사업을 두 건 추진했는데, 상대가 글쎄 네 덕분에 BM 그룹을 알았대.”“그래요?”채림은 눈웃음을 쳤다.“그런데 명성이 높을수록 시기와 공격을 받을 거야.”민해란은 소중한 듯 제 딸의 손을 꼭 잡았다.“네가 BM 그룹에 가져다주는 이익이 많을수록 질투하는 사람도 많아질 테니까 조심해.”“걱정하지 마요. 엄마 딸 총명해요.”채림은 턱을 살짝 쳐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약혼식에서 그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난 뒤, 채림은 이원후를 떠나고 백사나의 얼굴을 진짜 얼굴을 알아봤으며 다친 발도 고쳤다. 그것도 모자라 혼자서 향수
한편, 스크린 속.기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인터뷰에 열기를 더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민은 오히려 놀라우리만치 냉정했고, 심지어 뜬금없이 피식 웃었다.결국 기자는 마지 못해 산지 주민이 손에 든 약을 카메라에 담았다.약병이 점점 확대되자 티비와 컴퓨터 앞에서 생방송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하지만...약병에 적힌 생산 날짜와 마감 날짜는 아무 문제 없었다.공상에서 민해란과 추종현을 둘러싼 기자들은 본인이 잘못 봤을까 봐 안경을 밀어 올리는가 하면, 눈을 비비댔다.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도 당황한 듯 물었다.“어르신, 이 약이 혹시 BM 그룹 의료팀이 나눠준 건가요?”어르신들은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이런 약을 얻겠어요?”“여기에 외부인이 전혀 없는데, 누가 우리를 위해 병을 고쳐주겠어요?”기자는 살짝 당황했다. 사실 그들은 DL 그룹 제보를 받고 BM 그룹이 유통 기한이 지난 약물을 사용한다는 소식을 취재하러 나왔다. 그런데 취재 도중 이런 반전이 숨어 있어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때, 다른 매체 기자가 나서서 말했다.“저희 측에서 방금 현지에 남아 있는 BM 그룹 의료팀 담당자와 연락이 닿아 그동안 의료팀이 현지 주민을 위해 진찰하고 처방한 영상과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저와 동료들이 비교해본 결과, BM 그룹이 이번에 주민들에게 나눠준 약품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유통기한 마감일은 2년 뒤였습니다.”“권 박사님, 한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기자는 마이크를 권경민에게 건넸다.그러자 경민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산지 주민들이 방금 두 가지 고혈압약을 드시고 기침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셨는데, 이건 정상 반응입니다. 캡토프릴을 복용 시 나타나는 부작용이거든요. 현재 의학적으로 이런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끔 하는 기침은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H시 국제공항.민해란이 추종현을 모시고 공항을 나올 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지 모를 기자들이 갑자기 몰려와 그들을 겹겹이 에워쌌다.“추 교수님, 4년 만에 귀국하시는데 BM 그룹 회장님과 함께 귀국하신 건, 앞으로 BM 그룹을 위해 일한다는 뜻입니까?”“네.”민해란이 추종현 대신 대답했다.“추 교수님은 BM 그룹 약물 연구팀 고문을 맡아 BM 그룹의 발전을 도울 겁니다.”“일전에 DL 그룹도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고 들었는데, 왜 결국 BM 그룹을 선택했나요?”기자의 끈질긴 질문에 추종현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했다.“BM 그룹의 발전 계획에 마음이 동했습니다. 저와 BM 그룹의 이념 역시 일치하고요.”“혹시 DL 그룹과는 이념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기자들은 말끝마다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이에 민해란이 나서서 추종현을 도왔다.“죄송하지만, 추 교수님은 말주변이 뛰어나지 않습니다.”경호원더러 길을 트라는 눈짓을 보낸 민해란은 추종현을 데리고 떠나려 했지만, 그때 변형빈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들 앞에 막아섰다. 이윽고 그는 추종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추 교수님, BM 그룹의 위선적인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저희 DL 그룹은 비록 노이즈 마케팅에 능하지 않지만 절대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변 대표, 그게 무슨 말이죠?”민해란은 불쾌한 듯 따져 물었다.“BM 그룹 의료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설마 몰라서 그래요?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변형빈은 자신만만한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기자가 갑자기 떠들썩해졌다.핸드폰으로 기사를 확인한 기자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민해란을 바라보더니 결국 추종현에게 따져 물었다.“추 교수님, BM 그룹 의료팀이 가난한 산지 주민들에게 유효기간이 지난 약품을 사용한 소식이 터졌습니다. 본인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마음대로 짓밟은 BM 그룹이 추구하는 이념이 정녕 추 교수님 이념과 일치한가요?”“뭐요?”추종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채림은 희고도 깨끗한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제야 채림은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이곳 의료 시설은 그 시골 마을 조건으로 갖출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살짝 움직여보니 사지가 쑤시고 머리가 어지러웠다.옆 병실에 앉아 있던 경민은 그 인기척을 듣고 달려오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이제 정신이 들어요? 어때요? 몸은 좀 괜찮아요?”채림은 제 느낌을 대충 말했다. 그러자 경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럼 문제없네요. 머리가 어지러운 건 너무 오래 자고 오래 굶어서 그런 거예요.”“우리 안 죽었어요?”채림이 다급히 물었다.“당연하죠. 설마 지금 우리가 천당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경민은 농담조로 말하며 피식 웃었다.“여기 천당이 아니라 병원이에요.”“그럼 문... 제 둘째 삼촌은요?”채림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섞였다.“그분은 어제 가셨어요.”“안 다쳤어요?”“채림 씨와 비슷하게 가벼운 부상이에요. 그분은 더 빨리 회복했어요.”경민이 말했다.채림은 그제야 한시름 놓더니 한참 생각고는 다시 물었다.“그때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어요? 기억아 하나도 없어서 이미 죽은 줄 알았어요.”“말하자면 참 운이 따라줬어요.”경민은 감개했다.“사실 저도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우리를 구해준 마을 주민이 말해줬어요. 저희가 도망칠 때 마침 큰 구덩이를 지났었잖아요, 먼저 굴러 떨어진 바위가 그 구덩이에 들어가면서 나중에 멈춰서 뒤에서 굴러 내린 돌멩이를 막아줬대요. 만약 그런 우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바위에 깔려 죽었을 거예요.”“그럼 다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걱정 섞인 채림의 물음에 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채림 씨 둘째 삼촌의 부하 두 명이 좀 심하게 다쳤어요. 다리가 골절됐거든요. 그것도 그나마 다행이에요. 채림 씨 둘째 삼촌이 이미 그 두 분을 큰 병원으로 옮겼어요.”“아.”채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시름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우리가 입원해 있으면 의료팀은 일을 어떻게 해요?”
날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채림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미 지후와 강현은 먼저 깨어나 채림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채림은 그들을 보자마자 서둘러 짐을 챙기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얼마 걷지 않았을 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경민이었고, 그의 뒤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백 대표님!”“여긴 어떻게 왔어요?”채림은 사람들과 가까워진 뒤 물었다.“이틀 동안 돌아오지 않아 현지 주민들이 찾아왔었어요. 하루 전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이 일대는 산사태가 쉽게 일어나는 곳이라 지난 2년간 수차례 사고가 났다고 하면서요. 그 말에 다들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경민의 설명에 채림은 싱긋 웃으며 그와 그 뒤에 있는 마을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고마워요.”“이분은 누구세요?”경민은 채림 옆에 서 있는 지후를 보며 물었다. 그저께 소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카리스마 있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미처 누구인지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이 분은...”채림은 고개를 들어 지후를 바라봤다. 지후 역시 고개를 숙인 채 채림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경민은 아무래도 연예인 덕질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니, 당연히 윤재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채림 역시 지후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참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제 둘째 삼촌이에요.”“아, 둘째 삼촌. 안녕하세요.”지후는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팔로 허리를 짚은 채 한참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등 뒤에 서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실수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연말 보너스라도 깎일까 봐 참느라 애를 먹었다.“우선 나가서 얘기해요.”채림은 어색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경민도 뒤에 있던 현지 주민들에게 말했다.“그럼 저희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따라 푹 꺼진 땅과 흔들리지는 출렁다리를 지나 옆 마을로 향했다.하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마침 도착한 이춘덕은 명훈네 집 마당에 들어와 소리쳤다.“이게 다 뭐 하는 겁니까? 백채림 씨는 우리 마을 은인의 따님입니다. 자선 활동하러 이곳에 온 분한테 무슨 무례입니까!”“그런데 저 여자가 명훈의 새색시를 풀어줬어요.”성훈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백 대표님이 없었더라면 새색시를 살 돈이나 있었겠어요?”이춘덕의 말은 힘이 있었다.현장 사람들은 모두 냉정을 되찾았다. 생각해보니 이장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낫과 호미를 들고 달려들던 사람들은 손에 든 도구를 모두 내려놨다.“사람이 도망쳤으면 쫓아가서 찾아와야지, 여기서 왜 시간만 낭비하고 있어요?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사람이 돌아오겠어요?”이춘덕이 말했다.“이장님 말이 맞아요.”성훈도 어느새 진정했는지 얼른 이웃을 불러 손전등을 들고 길을 나섰다.“이장님, 고마워요.”채림은 앞으로 다가가 진심이 담긴 인사를 건넸다.“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다들 좋은 일 하는 건데요.”이춘덕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가요. 저 사람들이 이따가 사람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또 시비를 걸 거예요.”채림은 연신 감사 인사를 하고 지후와 함께 집을 나섰다. 밖에 있던 강현과 경호원들은 얼른 두 사람을 엄호하며 산계 마을을 떠났다.이제 막 마을을 빠져나왔을 때, 채림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지후에게 말했다.“둘째 삼촌, 한 가지 일이 떠올랐는데, 혹시 삼촌 부하더러 사람을 끝까지 도와주라고 할 수 있어요?”“또 뭘 하려는 겁니까?”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채림은 얼른 애교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새색시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불가능할 거고, 그 집안 사람들도 우리를 찾지 못하면 결국 또 인신매매를 할 거예요. 이런 악랄한 집단은 뿌리 채 뽑아서 감옥에 처넣어야 해요.”“우리 문씨 가문에서 아주 부처님을 들였군요.”지후는 불호령을 내리더니 손을 저으며 이 일을 강현에게 맡겼다.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 이어서 그 명령을 다른 경호원들에게 전달한 뒤, 조용히 채림
“음, 힘이 없다면 내가 도와주지.”부인은 인내심 있게 말하면서 채림이 입고 있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채림은 순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상대가 저를 마음대로 다루도록 가만히 있었다.지금은 그저 옷장 안에 있는 사람의 인성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알아서 눈을 감았으리라고...옷을 갈아입은 채림은,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이미 발그르슴해졌다.부인은 채림을 거울 앞에 앉히더니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또 처음 보네. 명훈이 물론 바보라지만, 바보에게도 복은 있나 보네!”여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며 낡은 싸구려 화장품을 채림의 얼굴에 펴 발랐다. 파우더를 바른 뒤 블러셔를 바르고, 풀어진 채림의 머리를 얹더니 싸구려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모양을 고정했다. 결국 부인의 손길을 거친 채림은 빛 바랜 벽화 속 도자기 인형처럼 변했다.약 30분 뒤, 부인은 만족스러운 듯 화장품 상자를 닫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신부 준비 끝났어. 명훈아, 첫날밤 보내야지.”바깥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던 명훈을 끌고 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명훈의 눈이 크게 휘둥그레졌다.“저 여자가 네 새색시야. 얼른 봐. 예쁘지?”부인이 조롱하듯 물었다.“예뻐요! 예뻐요!”명훈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채림을 덮쳤다.“어머머, 우리는 이만 가자고.”부인은 주위 구경꾼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 순간, 명훈은 방 안에 있던 남자의 발에 걷어차여 멀리 내동댕이쳐졌다.“내 색시! 새색시!”명훈은 끊임없이 반복하며 채림을 덮치려고 했다.지후는 명훈을 또다시 발로 찼다. 명훈은 지후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후는 얼른 채림을 제 뒤에 보호했다.그때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인기척을 듣고 다시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역시 얌전하게 있지 않을 줄 알았어! 약 더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