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붙어먹더니, 결국 일 냈네.’‘유명 연예인이 형부를 꼬셔 혼전임신을 했다는 타이틀로 기사가 나면 파장이 어마어마하겠지?’간호사실을 나온 채림은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지수한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이원후 쪽에서 너희 약혼식에 작은 상황이 벌어져 일주일 내로 다시 치를 거라고 얘기하고 다니던데, 어떻게 생각해?][걱정하지 마.]채림은 빠른 속도로 문자를 작성했다.[내일이 지나서도 내가 이원후와 결혼하면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고 생각하게끔 할 거니까.][그 말은 설마 내일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는 뜻이야?]지수의 기대에 찬 문자에 채림은 덤덤하게 답변을 보냈다.[응, 하지만 네 협조가 필요해.][너 어디 있어?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두 사람은 중간 위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 30분 동안 계획을 세웠다.그러고 나서 채림은 예전에 원후한테서 받았던 사무실 키를 지수한테 넘겼다.키를 손에 넣은 지수는 기대에 찬 듯 말했다.“내일 점심쯤이면 이원후와 백사나가 H시 최대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을 거야.”...지수를 보내자마자 채림은 민해란의 비서 임승철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아가씨, 사모님께서 오늘 아가씨가 구상한 제품 계획서를 이사진한테 보여줬는데, 엄청 큰 반발이 일어났어요. 혹시 오늘 직접 회사에 오실 수 있나요?]“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임승철은 생전 백건호가 가장 신뢰하던 비서였다. 백건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민해란을 도와 회사 일을 처리해 왔다. 그만큼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기에,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채림은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택시를 잡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벤 한 대가 채림 옆에 멈춰 섰다. 곧이어 창문이 내려지며, 모자를 깊이 눌러쓴 윤재의 얼굴이 드러났다.사흘 뒤 발이 완치되면 윤재와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라는 지후의 말이 떠오르자, 채림은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무슨 일로 찾아왔어요?”“일 없으면 찾아오지
‘마침 잘 왔네. 이따가 찾아갈 수고도 덜어주고.’인파를 지나칠 때 채림의 귓가에 기자들의 질문이 들려왔다.“사나 씨, 백채림 씨는 사나 씨 매니저이자 언니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나 씨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 자격을 두고 경쟁을 벌인 건가요?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가요?”“백채림 씨는 어떻게 이번 오디션에 합격한 거죠? 혹시 내막이 있는 건가요?”기자들의 질문을 조용히 듣고 있던 사나는 착한 척하며 사람들을 일부러 유도했다.“그럴 리가요.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언니는 아이디어도 많고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에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했던 모든 계약도 언니가 추진했던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 BM 그룹 업무까지 신경 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그 말은 백채림 씨 뒤에 BM 그룹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번 오디션에서도 BM 그룹의 백을 빌렸나요?”기자들은 사나의 암시를 완벽하게 읽어냈다.그러자 사나는 실수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영이가 눈치를 보다가 때마침 끼어들어 사나를 감쌌다.“우리 사나는 단순해서 사업에 관한 걸 몰라요. 그러니 더 이상 물어보지 마세요.”인파 밖으로 지나치던 채림은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순진한 척하기는.’‘아직은 너를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계속 날뛰어 봐. 네가 한 더러운 짓거리가 폭로되면 더 이상 착한 척 연기해도 안 먹힐 거니까.’채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최상층 회의실로 향했다.하지만 이제 박 모퉁이를 돌았을 때, 멀리서부터 백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성 향수도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면서 남성 향수라니!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이딴 것도 계획안이라고 제안한 겁니까? 대체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면 이런 걸 생각해 냈답니까?”“그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바로 저예요.”채림이 문을 활짝 열더니 지팡이로 맑은 소리를 내며 회의실로 들어왔다.그러자 임승철이 얼른 다가가 채림을 반기면서 의
“확실히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주동훈의 침착한 목소리는 단번에 떠들썩하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회장님께서 본인 명의로 된 지분 절반을 채림 씨한테 넘겨 어제부터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이번 표결은 과반수에 못 미칩니다.”“말도 안 돼!”백성호는 화가 치밀어 이미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형님이 채림을 회사에 들이지 말라고, 사업에 손대지 못하게 하라고 분명 말했다고! BM 그룹은 백씨 가문에 속하는 건데, 무슨 자격으로 당신들 모녀가 독차지해?”“BM 그룹은 제 아버지가 자수성가하여 설립한 회사예요. 삼촌을 회사에 들인 건 순전히 형제의 정을 봐서고요. 아버지가 세상을 뜬 순간부터 상속법에 의하면 회사는 저와 제 어머니가 물려받는 게 맞아요. 백씨 가문 사람이라고 어디든 다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니니 자중하세요!”채림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반격하고는 몸을 돌려 임원진한테 말했다.“여러분, 오늘 회의는 향수 사업으로 생겼던 적자를 어떻게 흑자로 돌릴 것인가 하는 주제로 진행되는 것이니, 다들 주제에서 벗어나지 마세요.”민해란을 지지하는 세력도 기회다 싶어 맞장구치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주변 사람들한테서 채림이 확실히 이사회에 들어왔다는 걸 확인한 백성호는 그제야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이 계획안은 제가 오랫동안 준비한 거예요.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도 될지 전문가들한테 확인도 마쳤고요. 여성 향수 시장에 포화가 왔기에 더더욱 방향을 바꾸어 남성 향수를 밀고 나가야 한다고 봐요. 이번에 출시할 남성 향수는 BM 그룹 향수 산업에 새로운 출로를 마련할 거라고 자신하고요.”채림의 침착한 설명이 끝나기 바쁘게 백성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뒤따랐다.“출로가 뭔지 알기나 해? 막다른 길이면 어떡하려고? 다른 걸 다 제쳐 두고 홍보모델만 봐도 문제야. 여성 향수를 개발한다면 그나마 사나를 홍보 모델로 내세울 수 있지만, 남성 향수 모델은 누구한테 맡길 건데?”“어우, 사나가 할 필요 없어요.”채림은 손을
“그렇다면 저는 상품 가치가 있을까요?”그때, 문이 열리더니 임승철 뒤에서 정말로 윤재가 나타났다.모든 임원들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황송한 표정으로 윤재를 바라봤다. 그들 눈에 윤재는 잘나가는 남자 연예인일 뿐만 아니라 MS 그룹 둘째 도련님이기도 했다.채림이 정말 윤재를 모셔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윤재 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도련님한테 한 말이 아니었어요.”백성호는 얼른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사나 역시 다급히 화장을 고치고는 수시로 다가가 대화를 나눌 준비를 했지만 윤재는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채림을 바라봤다.“조건 괜찮은 것 같아요. 계약할게요.”“좋아요!”채림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그때 윤재가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언짢은 듯 백성호를 흘끗거렸다.“그런데 방에 공기가 좀 탁하네요. 우리 다른 데로 갈까요?”채림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그럼 옆방으로 가죠.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 바로 계약하죠.”두 사람은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백성호는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채림을 불러 세웠다.“백채림! 윤재 도련님이 어떤 분인데 이렇게 함부로 굴 수 있어? 윤재 도련님은 모델료만 해도 국내 최고 수준인데, 그걸 지불할 능력이 있기는 한 거니?”백성호가 몇 번 눈치를 주자 그의 심복들도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윤재 도련님은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분이에요. 이러다 문제라도 생기면 결국 BM 그룹이 책임져야 하잖아요!”채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윤재를 바라봤다.“문윤재 씨께서 제 기획안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저희 쪽을 도와주신다는 의미로 제가 생각한 금액으로 모델료를 제안드려도 될까요?”윤재는 얼른 애교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에 백성호는 넋을 잃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윤재가 채림한테 홀린 것처럼 껌뻑 죽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백채림 저 계집애가 어떻게 MS 그룹 사람을 알게 된 거지?”백
원후와 사나가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그것은 다름 아닌 채림이 평소에 사용하던 그 브랜드의 향수였다.‘하.’채림은 눈을 내리깔며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사실 예전에 채림이 원후한테 낯선 여성 향수 냄새가 난다고 두 번이나 따져 물은 뒤로 사나가 찾아와 그녀의 말을 꿰어낸 적이 있다. 그것도 가식적으로 채림의 향수가 마음에 든다는 핑계로.그 뒤로 사나는 원후와 몰래 바람피우기 위해 항상 채림과 같은 향수를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가뜩이나 없는 머리를 이런 짓 하는데 모두 써버렸다는 게 한심할 정도였다.채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사나는 채림의 비위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언니, 내가 일부러 형부를 여기로 불러냈어. 우리 삼자대면으로 오해는 말끔히 풀자. 맺힌 응어리도 풀고.”“내가 미스 글로벌 파티 참석자로 선발됐는데. 따지고 보면 작은 응어리는 아니지 않아?”채림이 비아냥거리자 사나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미소 지었다.“그럴 리가. 오히려 너무 기쁜걸.”그때 원후가 앞으로 다가와 카리스마 있는 척 채림을 와락 끌어안았다.“채림아, 그날은 술 때문에 실수한 거야. 앞으로 절대 술 그렇게 많이 안 마실게. 하지만 나랑 사나 정말 결백해.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며칠 뒤 우리 다시 약혼식 올리자.”‘역시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나 보네. 내가 예전에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법에 놀아났다니.’채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겨우겨우 화를 억눌렀다.하지만 원후는 오히려 채림이 저를 믿었다고 착각해 은근슬쩍 찔러봤다.“채림아 내일이 드림캐슬 30주년 행사가 있는 날이야. 아버지가 정식으로 내 이름을 드림캐슬 이사회에 올리고 그걸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일이 지나면 내가 더 좋은 생활을 약속할게.”자기한테 차려질 이익을 생각하니 원후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러니 채림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행사에 참석해 줄 수 있어? 그래야 매체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 아니야...”
원후의 사무실에는 진작 카메라가 설치되어, 채림은 핸드폰으로 사무실 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나가 도착한 걸 확인한 채림은 이내 집으로 가자고 기사에게 부탁했다.잠시 뒤, 지수의 사람들이 파파라치 행세를 하며 드림캐슬 문 앞을 가로막았다. 원후의 사무실에서 밖을 확인하던 사나는 마침 그 장면을 목격했다.파파라치가 여기까지 쫓아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른 원후에게 전화했다.그때, 차에 있던 채림이 진동하는 원후의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원후 오빠, 나 드림캐슬에 갇혔어. 빨리 와줘...]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림은 컴퓨터에서 재생 버튼을 눌러 지수가 미리 준비해준 녹음 파일을 사나에게 들려주었다.[누구야?][중요하지 않아. 내 눈엔 자기밖에 없어.][그래?][당연하지. 자기랑 이사회 지지만 있으면 내가 바로 인생 승자인데, 다른 게 뭔 소용이겠어?][그런데 평소 사나랑 가까이 지냈잖아, 난 자기가 사나 같은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 걔는 연예계에 있어서 그런지 모든 남자들한테 다 애교 부리고 친한 척해. 그에 비해 자기는 우아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잖아. 내가 바보도 아니고 누가 더 좋은지 모르겠어? 걱정하지 마, 예전에는 회사 이익을 위해 잠깐 사나를 이용한 거야.]이건 채림과 원후의 목소리를 인터넷 기술을 이용하여 합성한 거다. 하지만 너무 진짜 같아 사나는 듣는 내내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주저앉았다.‘내일 있을 행사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연락하지 말라더니, 바쁜일이 이거였어?’사나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원후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그 소리는 사나한테 너무 익숙했기에 듣는 순간 진짜라고 확신했다.‘지금껏 백채림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다더니, 나랑 백채림 사이에서 간 보며 누릴 거 다 누리고 있었던 거였네!’‘감히 나를 속여?’사나는 화가 나고 원망스러워 당장이라도 원후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채림은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쥔 채 원후의 옆에 서 있었다. 그 꽃다발은 원후한테서 받은 건데, 너무 과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이원후 씨, 백채림 씨가 미스 글로벌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던데 정말인가요?”“맞아요!”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은 열띤 취재 끝에 두 사람의 약혼식이 깨진 상황에 이목을 집중했다.그러자 원후는 얼른 채림의 손을 잡으며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채림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혹시 약혼식은 나중에 다시 치르나요?”“당연하죠!”원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렇다면 부인될 사람이 밖에 나도는 건 괜찮나요?”“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여자들도 자기 가치를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원후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채림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기쁘다면 저도 기뻐요.”그 순간 현장은 화기애애해졌고, 백씨 가문과 이씨 가문의 불화설과 원후가 결혼 전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원후 도련님은 역시 모범적인 남자 친구네요!”“어디 모범적인 남자 친구뿐이겠어요? 모범적인 후계자이기도 하죠!”그러자 기자들은 얼른 맞장구쳤다.“지금껏 H시 명문가 후계자 중에서 원후 도련님이 단연 돋보이네요!”“그러게요, 늘 겸손하고 성품 논란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잖아요!”이철민과 장선화는 제 아들을 칭찬하는 말에 흐뭇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긴 하죠, 우리 원후가 어릴 때부터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사리 분별을 잘했거든요.”“저는 어릴 때부터 우리 원후를 후계자로 키웠습니다. 원후의 품행이 제가 드림캐슬을 운영하는 품행입니다. 늘 당당하고 결백한 품행 말입니다.”맞장구 치며 아첨하는 기자들을 보며 채림은 감정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눈가에 싸늘한 냉기가 맴돌았다.‘이따가 이원후가 얼마나 결백한지 알게 될 거예요.’“다들 자리를 이동합시다. 10분 뒤에 강 건너편에 있는 제국 빌딩에서 드림캐슬 30주년 창립
쨍그랑!이철민이 들고 있던 와인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이 후레자식!”“당장! 당장 화면 돌려!”이미지 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럭 화를 내는 이철민에 부하 직원들은 겁에 질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도 원후와 사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제국 빌딩의 시스템마저 해킹을 당해 화면을 멈출 수 없었다.결국 H시 전체가 이씨 가문 도련님과 유명 연예인 백사나의 생방송 영상으로 떠들썩해졌다. 길 가던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두 사람을 욕했고, 창립 기념 행사에 초대받은 게스트들과 기자들마저 혀를 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인터넷이 순식간에 마비되었다.H시가 떠들썩하든 말든 이 난리를 전혀 모르는 원후와 사나는 건물 꼭대기에서 몸을 섞는 모습을 계속 생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어젯밤에 백채림과 함께 있었으면서 아직도 날 속일 생각이야?”“아니야! 너 미쳤어?”원후는 사나를 뿌리쳤지만, 사나는 오히려 그 틈에 달려들어 원후의 어깨를 깨물더니 그의 몸에 올라타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오빠 몸은 나한테만 반응한다며?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다며?”결국 사나의 유혹을 참지 못한 원후는 그대로 쾌락에 몸을 맡겼고, 곧이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상영되었다.순간 인터넷은 폭발하고 말았다.[평소에 청순한 이미지더니 뒤에서는 언니 약혼자를 꼬셔 붙어먹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혼전 임신에 중절 수술까지 하고는 대중을 속이려 들었다고? 인성 나락이네, 사람 맞아?][이원후도 약혼녀를 그렇게 사랑하는 척 떠들고 다니더니, 다 가짜였네! 백사나도 내연녀 주제에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 여자 친구와 자지 말라고 할 수 있지? 소름 끼쳐!]그로부터 약 10분 뒤, 드림캐슬 직원은 겨우 제국 빌딩 외곽에서 상영되는 영상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핸드폰과 머릿속에 방금까지의 영상이 저장된 상태였다.이철민과 장선화 그리고 드림캐슬 주주들은 황급히 회사 건물 내부로 도망쳐 문을
“채림 씨, 또 만났네요.”먼저 입을 연 건 건욱이었다.그러자 그레이스가 곧이어 비아냥거렸다.“그러게. 또 만났네. 참 인연이 깊어.”채림은 입꼬리를 움찔거렸다.“인연인지 아닌지는 그쪽이 더 잘 알 텐데.”감독과 PD는 차 안에서 촬영 절차를 설명했고 채림은 스태프들과 세부 사항을 논했다. 건욱도 그 사이에 끼고 싶었으나 끼지 못해 그레이스가 옆에서 눈짓을 하는 것도 무시했다.“채림 씨, 이번에 C시 소개 멘트는 원래 채림 씨가 하기로 했는데 그레이스 씨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인문 경관의 해설은 그레시스 씨가 하기로 했어요. 나중에 그 부분은 그레이스 씨한테 나눠주세요.” PD는 살짝 난감한 듯 말했다.“소개는 저희가 이미 써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나중에 경관 선택은 채림 씨가 먼저 할 거예요.”채림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먼저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번에 미스 글로벌 파티 주최 측에서 도시 홍보 영상을 찍는 건 순전히 공익성 활동이다. 때문에 채림은 각 지역의 인문경관과 민속 습관을 더 통속적인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보급하고 싶은 마음이지 절대 노이즈마케팅 할 생각이 없었다.한참 뒤, 차는 어느새 C시 호텔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린 그레이스는 겨우 기회를 잡아 채림에게 다가갔다.“C시는 정말 좋은 곳이야. 사람들 인심은 후하고 경치는 아름답고. 네티즌들도 C시 홍보 영상에 기대가 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촬영 온 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뭐?”채림은 헛웃음이 나왔다.“본인이 가장 주목받는 글로벌 퀸이 되었다고 후원사가 가장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인터넷에 우리의 불화설이 떠도는 바람에 주최 측에서 일부러 우리를 같은 조에 배정했고, 그 덕에 너도 C시에 오게 된 거야.”“아하.”채림은 두 손을 들어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뒤 차갑게 웃었다.“그 자신감에 박수를 보내. 하지만 한 가지 잘못 말한 게 있어.”“뭔데?”그레이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불화설이 아니라 우리는 진짜 안 맞는 거
채림은 순간 가슴이 멎는 기분이었다. 지후가 사람들 앞에서 저를 희롱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하지만 둘의 대화를 듣지 못한 주위 사람들은 지후가 채림을 협박한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채림은 한마디만 듣고 고개를 푹 숙였으니까.지후의 입가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현장 스태프들을 바라볼 때 눈빛은 다시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일이죠?”“문 대표님, 그게 사실은 제가 기획안이 별로인 것 같아... 의견을 조금 냈거든요...”지후 앞에서 미아는 순한 양이 되어 누구보다 예의를 차렸다.“지후는 차가운 눈빛을 보내더니 불만 투로 물었다.“그쪽은 누구죠?”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삐 눈알을 굴렸다. 지후가 미나를 아예 모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전에 미나는 분명 자기를 MS 그룹이 띄워주는 연예인이라고 소개했다. 게다가 문지후 여자 친구라는 스캔들도 터졌었고. 그런데 그 모든 게 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니...미나는 불편함을 애써 참으며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비웃음을 못 들은 척 무시한 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뭐가 어찌 됐든, 이번이야말로 자기를 소개할 좋은 기회였다.“문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지후는 미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얼굴로 명령했다.“기획안에 어떻게 나왔으면 그대로 촬영해요. MS 그룹 소속 연예인은 많아요. 미나 씨가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말을 마친 지후는 성큼성큼 채림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따라와요.”채림은 잠깐 망설이다가 얼른 지후를 따라 나갔다.“기획안은 수정할 거 없으니 나랑 같이 집에 가요.”지후는 문을 나서자마자 말했다.“전 조금만 더 지켜보다가 따로 갈게요.”“가면서 데려다줄게요.”지후는 채림에게 바짝 다가가면서 그녀의 맑은 두 눈에 질투가 드리웠는지 자세히 보려고 했다.하지만 채림은 오히려 고개를 더 숙이며 입술을 오므린 채 여전히 거절했다.“문 대표님 회사에 여자 연예인도 많을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미나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자 쪽팔렸는지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아니요, 사실을 서술한 것뿐입니다.”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이번 기획안은 계약하기 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촬영 중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면 저희 측 문제는 아닌 거죠.”미나는 여우 같은 눈매를 치켜 올리며 채림을 날카롭게 째려봤다.“지금 계약서로 날 압박하겠다는 거야?”“만약 미나 씨는 계약서도 안중에 없다면, 계속 협력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채림은 상대의 협박 따위가 두렵지 않았다.“안 찍으면 안 찍었지!”미나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빽 소리쳤다.“내가 촬영 안 하면 당신들 일정에 차질이 생기잖아!”막무가내로 나오는 미나를 보고 유미를 포함한 기타 BM그룹 직원들은 모두 초조해 났다. 하지만 채림은 그들에게 속지 말라고, 자기한테 방법이 있다고 눈빛을 보냈다.“미나 씨가 촬영 안 하면 우리 일정에만 차질이 생기는 게 아니라 윤재 씨 일정에도 차질이 생겨요.”채림은 침착하게 대답했다.“윤재 선배 들먹이지 마! 나 윤재 선배님 직속 후배야. 우리 사이가 설마 스캔들을 조작해 엮인 두 사람보다 못할까?”미나는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우리 회사가 계약한 상대가 윤재 씨인데, 윤재 씨를 들먹이지 않으면 누구를 들먹이겠어요?”채림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 씨와 친하다니 더 잘됐네요. 미나 씨가 대신 말 좀 전해줘요. 이따 윤재 씨 스케줄 뒤로 미뤄졌다고.”“뭐?”미나는 순간 허리를 곧게 폈다.“윤재 씨 촬영은 미나 씨 촬영 마치고 나서 시작할 거거든요. 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했으면서 설마 모르는 건 아니죠? 윤재 씨 곧 도착해요.”채림은 고개를 숙인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시간 다 됐네요. 아마 도착했을 거예요.”미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채림이 이토록 말주변이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물러서지
채림은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H시로 돌아갔다.윤재의 1분기 광고 촬영도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채림은 사전에 윤재의 매니저먼트팀과 소통하고, 암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향수 기획팀 직원 두 명더러 촬영을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그러고 본인은 사무실에서 조향 대회를 준비했다.저녁 무렵.강원의 자사도우미, 김선주한테서 전화가 왔다.“사모님, 오늘 저녁 집에 돌아와 식사하실 겁니까?”채림은 약 1초간 반응하고는 물었다.“둘째 삼촌은 집에 있나요?”“네, 돌아오셨습니다. 만약 사모님도 돌아오신다면 문 대표님도 기다리겠다고 합니다.”김선주는 재빨리 대답했다.채림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이런 말을 들어 본지도 참 오래된다. 집에서... 누군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이고...채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한테 선물한 진주 왕관이 떠올라, 집에 돌아가 직접 감사 인사를 하려고 결심했다.“그래요. 이따 바로 갈게요.”채림이 대답했다.한편, 전화를 끊은 김선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주인어른의 머리 위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단번에 가시고 강원에 다시 봄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가 찾아왔으니까.채림의 마음도 가벼웠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정리하고는 문을 닫고 퇴근했다.하지만 그때, 핸드폰이 울리면서 향수팀 직원 소유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백 대표님, 한번 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촬영 진행이 안 되고 있어요...”“다 얘기 끝난 거 아니었나요? 윤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채림은 의아했다.“윤재 씨가 아니라 같은 소속사 윤미나 씨가 문제예요... 상대는 문지후 대표님 여자 친구라고 소문난 스캔들 상대인데 우리를 계속 괴롭혀요. 저희도 더 이상 시중들기 힘들어요...”소유미가 억울한 듯 말했다.‘하.’채림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흔들림 없는 눈을 깜빡거렸다. ‘스캔들 상대도 있었어?’“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채림은 전
사실 백성호는 J시에 온 지 며칠이 된다. BM 그룹에서의 지위를 잃은 그는 변씨 가문에 빌붙으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다른 살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찾은 목표가 바로 방민수다. 하지만 여러 번 방문 요청을 드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만나지는 못했다.결국 그는 큰돈을 들여 파티 초대장 한 장을 구했고, 그 파티에서 겨우 방민수를 만나 안부 좀 전하고 명함을 건넸다. 그게 끝이다.“마침 잘됐네. 그럼 우리 아빠 앞에서 그렇게 말해 봐. 아빠가 당신을 어떻게 할지 궁금하니까.”은솔은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발버둥치던 백성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은솔을 바라봤다.이 작고 여린 여자애가 방 회장 따님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미처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방씨 가문 경호원에게 끌려 나갔다.변형빈은 밖으로 끌려 나가는 백성호를 보자마자 모든 더러운 물을 그에게 뿌렸다.“협회장님, 보세요. 백성호는 궁지에 빠지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 프롬프트도 분명 백성호가 사람을 시켜 망가뜨린 게 틀림없어요. 그랬으면서 나를 모함하다니...”“변형빈! 이 사람도 아닌 놈! 내가 네놈이 한 파렴치한 짓을 모두 까발릴 거야!”백성호는 이미 나갔으면서도 형빈의 목소리를 듣고 고래고래 소리쳤다.그 순간 형빈은 눈동자가 축소되면서 겁을 먹었다.“하...”고강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변형빈은 역시 싹수가 노래서 약이 없었다. 그래도 공을 세워 잘못을 덮을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이토록 식견이 짧으니 채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고강섭은 몸을 돌려 채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백 대표님, 위급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처리하는 모습 잘 봤습니다. 제 주변 교수님들이 백 대표님 칭찬뿐이에요.”“과찬이십니다.”채림은 대범하게 말했다.고강섭은 웃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아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선 증거를 찾고 조사해 봐야 한다.협회에 DL그룹을 지지하는 세력
협회장은 ‘고맙다’는 단어를 강조하더니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뒤돌아 형빈을 꾸짖었다.“변 대표님, 남을 모함하기 전에 머리를 쓸 수는 없나요?”“협회장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형빈은 뜬금없이 꾸지람을 들어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데 말이다.“무슨 말이냐고?”고강섭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세미나 시작 전, 내 비서가 분명 여러 번 강조했을 텐데요? 내 연설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연설문은 그동안 우리 업계에 도움을 준 제조 업체와 해외 업체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요한 시간에 프롬프트조차 없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게 세미나를 차질 없이 준비하겠다고 장담한 결과인가요?”“그럴 리가 없어요.”형빈은 조급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프롬프트는 분명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쳐 놨어요.”“그러니까 프롬프트는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 고장 났다는 거네요?”채림은 형빈의 말실수를 잡고 늘어졌다.그 순간 형빈은 멍해졌다. 그제야 본인이 함정에 빠졌다는 게 실감 났다.고강섭은 연신 한숨을 쉬며 뒷짐을 쥔 채 형빈을 비난했다.“변 대표님, 내가 세미나 주최 권한을 변 대표님께 맡기면서 연신 강조했을 텐데요? 동종 업계 사이 경쟁이 필요하긴 하다지만 건전하게 경쟁해야죠. 어쩜 매번 이렇게 남의 등에 칼 꽂는 짓을 할 수 있죠?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요.”그때 형빈의 비서 엄태식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의 귀에 아까 전 발생한 일을 설명했다. 프롬프트는 협회장님이 무대에 오르기 전 고치지 못했다고.”“아까는 어디 갔었어? 왜 그걸 바로 보고하지 않았어?”형빈은 쪽팔리는 한편 화가 났다.“저도 그동안 잡혀 있어서 올 수 없었어요...”태식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래도 백 대표님이 결단을 내려 협회장님 연설문을 무대 위에 준비해 두어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어요.”고강섭의 비서가 옆에서 말했다.“변 대표님, 이번 일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고강
협회장이 해야 할 멘트는 무척 길기에 프롬프트도 없이 멘트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본인이 아무리 상투적인 말로 억지로 짜 집기 해서 지어낸다고 해도, 오늘 현장에 수많은 파트너가 와 한 분 한 분 감사 인사드리려면 회사 이름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을 모두 외울 리는 만무했다.‘DL그룹!’며칠 전 DL그룹 회장이 직접 고강섭을 찾아와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사정했었다. 결국 마음 약해진 그는 마지막 기회를 줬다. 하지만 DL그룹이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다니!’고강섭은 난처하기도 하고 화도 나 얼굴이 자줏빛을 띄었다. 그때 그의 옆에 있던 채림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협회장님, 저를 따라 세컨드 스테이지로 갑시다.”고강섭 눈에는 혼란스러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채림이 계속 웃는 바람에 그는 마지 못해 채림을 따라 나섰다.그러다 세컨드 스테이지 위에 도착했을 때, 고강섭은 무대 바닥에 자신이 해야 할 멘트가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고강섭은 카메라 뒤에서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무대를 내려가는 채림을 대견스러운 듯 바라봤다.잠시 당황했던 고강섭은 무사히 연설을 마치며 세미나의 막바지를 알렸다.채림이 백스테이지에 도착하자 변형빈이 부르는 것처럼 다가와 버럭 소리쳤다.“백채림, 뭐 하는 거야? 왜 협회장님을 데리고 빙빙 돌았어? 협회장님이 너 때문에 어지러워하셨잖아!”“내가 왜 협회장님을 모시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겼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 텐데?”채림은 침착하게 반격했다.은솔의 경호원이 일을 깔끔히 처리했는지 형빈은 아직도 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걸 모른 채 어릿광대처럼 채림을 비난했다.“어디서 변명이야!”형빈은 사나운 말투로 윽박지르더니 뭔가 기대하는 듯 눈을 반짝였다.“그만!”그때 노기가 담긴 나지막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형빈은 뒤돌아서서 잔뜩 화가 난 고강섭을 바라보더니 얼른 다가가
채림과 같은 줄에 앉은 변형빈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그녀를 도발하는 듯 바라봤다. 보아하니 이따 또 그녀에게 덫을 놓은 게 틀림없었다.하지만 지금 채림은 밝은 곳에 있고 상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기에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저 조심을 다하는 수밖에.채림이 경계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채림 씨! 뭘 그렇게 걱정해요?”채림은 고개를 돌려 흘긋 바라봤다.“은솔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채림 씨가 연설한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죠.”은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을 보탰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저 오늘 혼자 온 거 아니에요.”은솔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을 따라 보니 시선 끝에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몇 명 서 있었다. 심지어는 모두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모양인지 분위기가 남달랐다.채림은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오늘 정말 은솔 씨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어요.”“너무 잘됐네요!”은솔은 기대되어 미칠 지경이었다.채림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뭔 일을 당하는 게 그렇게 기대되나?’채림이 은솔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당부하자 은솔은 이내 옆에 앉은 변형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러고는 또 이내 흉악한 얼굴을 한 백성호를 보더니 호언장담했다.“걱정하지 마요. 제가 오늘 이 두 사람 죽어라 감시할게요! 만약 두 사람이 채림 씨한테 뭔 짓을 하려 한다면 오늘 내 손에 죽었어요!”채림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우리가 뭐 깡패도 아니고, 적당히 해요.”“그래요. 채림 씨 말대로 할게요.”은솔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인이 데려온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채림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대 아래에 조용히 앉아 청중이 되었다.세미나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시상 순서가 되자 채림을 포함한 몇몇 기업 대표는 함께 무대에 올라 업계 청년 공로상을 수상했다.수상을 마친 뒤 바로 채림의 연설이 시작되었다.사회자의 짧은 멘트가 끝나자, 은솔은
[우리 참 안 맞아. 어쩜 내가 도착하자마 H시를 떠났어?]건너편 상대는 계속 농담조로 말했다.“왜 돌아왔어?”문지후는 방금 풀었던 미간을 다시 찌푸렸다.[산사태 때 본인 목숨도 상관하지 않고 그 여자를 구했다던데? 상대한테 홀리기라도 했어? 오히려 바위 아래로 밀어야 하는 거 아니야?]상대의 목소리는 음흉하고 섬뜩했다.“정말 그 여자가 죽길 바라는 거야?”지후는 차갑게 되물었다.“그 여자는 이 세상에서 예진과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는 사람인데?’[예지는 예지고 그 여자는 그 여자야! 그 계집이 예지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살려 둬야 해?]상대는 조급해졌는지 소리 질렀다.하지만 지후는 귓가에 들려오는 으르렁거림을 무시한 채 냉정을 되찾았다.“우리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달랐어. 난 그때의 진실을 알아내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할 거야!”[하하!]전화 건너편에서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칼 같은 문 대표가 언제부터 이렇게 꾸물대는 성격이 된 거야?]“내가 칼 같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까지 베어 버리는 건 아니야!”지후는 차가운 말투로 위협했다.[정말 그 여자한테 푹 빠지기라도 했어? 계속 계획을 미룬다면,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어디 그래 봐!”지후의 몸은 순간 팽팽하게 힘이 들어가더니 협박과 경고를 날렸다.“내가 귀국을 결심한 날부터 그 여자는 내 사람이었어! 어떻게 처리할지는 내가 결정해. 만약 내 계획을 망치면 그게 당신이라도 가만 안 둬!”지후는 말을 마친 뒤 전화를 팍 끊었다. 그러다 한참 뒤 어디론가 전화했다. 2분 뒤, 강현은 그의 방에 나타났다.“차 대기시켜. H시로 돌아갈 거야.”지후가 대답했다.“하지만, 대표님...”강현은 말을 더듬다가 지후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 입을 열었다.“방금 소식을 접했는데, 사모님께서 내일 향수 업계 세미나에 참석한답니다. 주최 측이 DL그룹이라 사모님께 불리할 것 같습니다.”지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했다.“동방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