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의 행동은 길시아에 대한 모욕이고 도발이었기에 그녀는 당장이라도 한지훈을 죽이고 싶었다. “한지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오늘 밤은 나와 진우철 씨의 약혼식인데 지금 죽은 사람의 위패를 꺼내는 건 뭐 하려는 거야? 우리 길 씨 가문과 H 시 진 씨 가문에 도전장이라도 내밀겠다는 거야? 집 잃은 개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옛정을 생각해서 목숨은 살려줄 테니까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우철 씨에게 사과해! 그리고 저 위패를 들고 당장 이곳에서 꺼져!”길시아는 얼음장 마냥 차가워진 얼굴로 한지훈을 죽일 듯이 째려보며 목청을 높였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한지훈의 반응을 살폈다.“길시아, 넌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무정하고 단호하네! 너와 내 옛정은 5년 전에 네가 결혼식에서 손수 찢어버렸어! 내 부모님이 길 씨 가문과 4대 가문 앞에 무릎 꿇고 애절하게 빌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해! 근데 그때의 넌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봐줬어? 내 부모님은 너와 4대 가문의 압박에 목숨을 잃은 거야!”한지훈은 덤덤한 모습으로 싸늘하게 말하다가 감정이 점점 격앙되기 시작했고 주먹을 꽉 쥔 채, 붉어진 눈시울로 살기 넘치게 말을 이어갔다.“길 씨 가문과 4대 가문은 오래전부터 내 데스노트에 올랐어! 난 반드시 그때의 복수를 제대로 할 거야! 그리고 오늘, 너희 길 씨 가문부터 손 봐줄 생각이야!”한지훈은 길시아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고 깜짝 놀란 길시아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5년 전에 반항조차 못하던 멍청이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강해져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으며 지금 한지훈의 모습은 마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과 같았다.“한지훈! 너 이 건방진 놈! 오늘은 내 딸의 약혼식이야! 넌 지금 우리 길 씨 가문과 원수를 맺는 거나 마찬가지야! 소속도 없는 망나니 주제에 갑자기 S 도시로 돌아와서 우리 길 씨 가문에 덤비려고 해? 아주 죽고 싶어서 환장했네!”길현민의 호통에 한지훈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길현민, 5년 전
갑자기 달려온 길 씨 가문의 보디가드들을 보자 용일은 재빨리 한지훈 앞을 막아서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주먹이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보디가드들은 테이블과 의자 위에 쓰러졌으며 연회장에는 이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로 가득했다.이를 보고 있던 하객들은 너도나도 충격에 빠져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고 한참 지나서야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정적을 깨며 말했다.“저놈 대체 누구야? 5년 전의 그 한 씨 가문의 멍청한 놈 맞아?”혹시라도 한지훈의 귀에 들릴까 봐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사람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용일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쓱 날리더니 칼날은 그대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람의 목을 정확히 그어버렸다.“감히 보스를 능멸하는 놈들은 죽음을 맛볼 것입니다!”용일은 언성을 높이며 경고의 눈빛으로 사람들을 살벌하게 쳐다보았고 조금 전까지 찻잔을 들고 중얼거리던 그 남자는 목에서 피를 뿜은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아악!”깜짝 놀란 하객들은 너도나도 연회장을 빠져나가려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연회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길시아는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뚝 서있는 한지훈을 쳐다보며 한순간, 5년 전에 자신이 저지른 짓을 살짝 후회했지만 아무리 그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길시아는 치맛자락을 꽉 잡은 채,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이는 한지훈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라 한지훈이 그녀의 약혼식을 망친 짓에 대한 분노였다.“한지훈! 너 그만해! 오늘은 내 약혼식이야! 나에게 엄청 중요한 일이라고! 그 어떤 사람도 절대 이 약혼식을 망칠 수는 없어! 한지훈 너도 포함이야! 넌 이곳에 나타나면 안 되는 거야! 네 존재 자체가 나한테는 모욕이고 실패야!”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길시아는 이미지 관리도 잊은 채, 한지훈을 보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테이블에 놓인 과도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한지훈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광경에 놀란 하객들은 더욱 우왕좌왕하며 이
한지훈이 마지막에 남긴 한 마디는 충분히 위협적이고 강렬했다.한참 지난 뒤, 길시아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진우철에게 다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우철 씨, 괜찮아요? 미안해요. 다 제 탓이에요…”팍!진우철은 길시아의 뺨을 힘껏 내리치더니 악독한 얼굴로 욕설을 퍼부었다.“나쁜 년! 우리 진 씨 가문에서 절대 오늘 이 일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말을 끝낸 진우철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채, 사람들을 거느리고 떠났고 길시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럽게 바닥을 내리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아악! 한지훈! 한지훈! 죽여버릴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모든 걸 망쳤어! 죽여버릴 거야!”밤 사이에 한 씨 가문의 망나니 한지훈이 길시아의 약혼식을 망쳤다는 소식이 S 도시의 상류층에 쫙 퍼졌고 사람들은 한지훈의 신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그러다가 결국, 누가 퍼트린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지훈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실력으로 열정만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S 도시의 상류층 가문들은 한지훈을 더욱 얕잡아 보게 되었다.또한 사람들은 5년 전에 사라진 망나니 하나조차 처리하지 못한 길 씨 가문에 대해서도 실망하고 S 도시의 체면에 흠집을 냈다고 언짢아 했다. 마침 그날 밤, H 시 진 씨 가문에서 길 씨 가문과의 혼약을 취소한다고 정식으로 발표했다.이 일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일으켰으며 길 씨 가문과 비즈니스 합작을 이어가고 있던 기업들마저 급하게 계약을 해지했다.하지만 정작 이번 일의 주인공인 한지훈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낭월 산장에서 깨어난 강우연의 곁을 지켰으며 곽 명의가 만든 보신탕을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강우연에게 먹여주었다.강우연은 행복에 가득 찬 얼굴로 한지훈을 보며 눈앞의 이 남자가 주는 든든함에 푹 빠져 있었다.“아 맞다. 지훈 씨, 고운이 눈 진짜 고칠 수 있어요?”강우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고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에는 기대와 긴장으로 가득했으며 고운이가
강우연이 한지훈의 팔을 잡아당겼다.“얼른 말해 줘요. 초대장은 어디서 받은 거예요? 누가 준 건데요? 설마 할아버지예요?”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한지훈이 피식 웃었다.“강희연이 직원 편에 보냈던데?”“언니가요? 언니가 왜...”강우연은 실망스러우면서도 의아했다.강희연이라면 누구보다 그녀를 증오하는 사람인데 왜 굳이 초대장까지 보낸 걸가?“강희연 그 여자는 널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널 아예 내치지 못하시는 게 아닐까? 괜한 걱정하지 마. 초대장도 받았겠다 내일 같이 가자. 너희 가족들한테 할 얘기도 있고.”“같이 가주겠다고요? 정말... 괜찮을까요? 할아버지는 지훈 씨 싫어하시잖아요. 내일 좋은 날인데 할아버지가 화라도 내시면...”강우연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가 되어 사라졌다.이에 한지훈이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괜찮아. 너 아직 다친 데도 다 안 나았고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잠깐 고민하던 강우연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하지만 그럼에도 강우연의 두려움은 딱히 가시지 않았다.지금까지 가족들에게 남자친구 한 번 소개해 준 적 없는 그녀이다.게다가 상대는 한지훈. 5년 전, 한지훈 때문에 강우연과 그 가족들이 당한 수모가 있으니 분명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그리고 한지훈 때문에 지난 5년간 미혼모로 살면서 당했던 모욕과 조롱들까지.솔직히 5년내내 강우연은 한지훈을 원망해 왔었다.하지만 한지훈이 나타난 그 순간, 원망과 증오는 놀랍게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으니 참 사람 감정이라는 게 덧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한동안 강우연과 시간을 가진 한지훈은 딸 방으로 향했다.창가에 서서 턱을 괸 채 햇살을 쬐고 있는 한고운의 모습은 동화속 백설공주가 현실세계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아빠 왔다.”“아빠!”그의 목소리에 쪼르르 달려온 한고운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딸을 번쩍 안아든 한지훈이 작은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내일 할아버지 생신이셔. 엄마랑 파티에
“아빠, 그만 좀 해! 얼굴 닳겠어!”얼굴을 찡그리는 한고운의 투정도 귀여워 한지훈의 입꼬리는 어느새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한고운의 방을 나서는 그를 발견한 용일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왜 실실거려?”“아, 죄송합니다.”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는 걸 인지한 용일이 바로 항상 보던 포커페이스로 표정을 가다듬었다.“형님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요.”이에 한지훈은 다시 씨익 웃어 보였다.“그래?”‘하긴 전에는 웃을 일도, 웃을 생각도 없었지.’“참, 내일 우연이 할아버지 생신이래. 우리도 파티에 초대받았으니까 선물 좀 준비해 줘. 사람들이 우리 우연이 절대 무시 못하게 최고의 선물로.”한지훈의 말에 용일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느 정도 선물이면 될까요?”“네가 알아서 해. 그냥...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 우리 우연이가 주인공이 될 정도의 선물이면 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우리 우연이를 내쫓은 거 후회하게 만들 거야. 제발 다시 돌아와달라고 애원하게 만들 거야.”집에서 쫓겨나고 힘들게 살았을 그녀를 생각하니 어느새 한지훈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사라졌다.‘두고 봐...’로열 호텔.오늘 강준상의 생일 잔치는 로열 호텔에서도 가장 럭셔리한 파티홀을 장소로 잡았고 S시의 유명 인사들이 온갖 진귀한 선물들을 들고 참석했다.하지만 강우연과 한지훈이 파티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손님들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그들을 향해 수군대며 조롱의 눈길을 보내왔다.강유리는 남자 때문에 내쫓긴 데다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강씨 집안의 죄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게다가 남자 때문에 그 망신을 당해 놓고 또 남자와 함께 오다니.“쟤 우연이 아니니? 저 옆에 있는 남자는 또 누구래?”“어르신께서 마음을 돌리신 건가? 쟤한테 초대장을 다 보내시고...”“그래봤자 이미 쫓겨난 애야. 어르신도 나이가 드시니 마음이 약해지신 거지.”“그런데... 저 남자 왠지 낯이 익은데. 한지훈... 아니야? 그 한씨
그리고 한지훈의 품에 안긴 한고운과 한지훈을 번갈아 바라보던 강신이 불만스레 물었다.“이 남자는 또 누구야? 왜? 여자 혼자 애 키우려니 좀 벅찼나 보지? 시커먼 때깔 보니까 대충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누나도 저 애도 이제 우리 집안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당장 꺼져.”악담만 잔뜩 내뱉은 채 돌아서려던 강신이 다시 홱 고개를 돌렸다.“허, 누나 설마 돈 떨어진 거야? 설마 구걸하려고 온 건 아니지? 미안한데... 누나한테 줄 돈은 한 푼도 없어. 몰래라도 누나 돕는 사람 역시 내쫓아버릴 거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셨거든.”이복동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가시돋친 반응에 강유리는 실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나... 초대장 받아서 온 거야. 할아버지가 초대해 주셔서 온 거라고...”이와 동시에 강우연이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내 강신에게 건네주었다.하지만 초대장을 홱 빼앗은 강신은 바로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됐고! 초대장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는 여기 올 자격없어.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누나 발로 나가. 경비 부르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이걸... 이걸 찢으면 어떡해. 이거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란 말이야...”바닥에 주저앉은 강우연이 다급하게 초대장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평범한 종이쪼가리일 테지만 강우연에겐 의미가 남달랐다.5년만에 처음 가족 행사에 초대받는 자리, 이제 드디어 그녀를 용서해 주는 건가 싶어서 기뻤고 이 초대장이 강우연에게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의 끈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그 희망이 산산조각 나버리다니...한편, 어두운 표정의 한지훈이 바닥에 엎어진 채 종이 조각을 주워모으는 강우연을 일으켜세웠다.하지만 강우연은 그의 손길을 힘껏 뿌리쳤다.“이거 놔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주신 초대장이란 말이에요...”“나도 알아.”그리고 고개를 돌린 한지훈이 여전히 건방진 표정의 강신을 향해 말했
‘하, 왜 이렇게 착한 거야...’착하다 못해 무르기까지 한 강우연을 힐끗 바라보던 한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결국 손에 힘을 풀어주었다.그러자 덜렁거리는 손목을 움켜잡은 강신이 바로 펄쩍 뛰더니 강우연과 한지훈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강우연! 하, 어디서 남자를 만나도 저런 깡패 같은 자식을... 그래. 안 가겠다 이거지? 여기서 딱 기다려.”말을 마친 강신이 부랴부랴 자리를 뜨고 소란에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저 남자는 누구야? 세상에... 지금 신이 때린 거 맞지?”“하, 신이가 얼마나 독한 애인데... 유리 쟤는 어쩜 남자를 만나도 저딴 애를 만나니?”“그런데 아까 저 남자... 여자애가 자기 딸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설마... 저 자식이 바로 5년 전 그...”누군가의 목소리에 하객들의 술렁거림은 더 커져만 갔다.5년 전, 길시아의 집안에서 거금을 들여 소문이 퍼져나가는 걸 막은 뒤로 한지훈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어찌나 울었는지 어느새 눈시울이 빨개진 강우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지훈 씨, 괜찮겠죠? 신이는 워낙 자존심이 강한 애라... 아까 사람들 앞에서 그 망신을 당했으니 분명 복수하려고 들 거예요. 우리... 지금이라도 돌아갈까요?”하지만 싱긋 미소를 지은 한지훈은 역시나 똑같은 말로 강우연을 안심시켰다.“괜찮아. 내가 있잖아.”한바탕 소란끝에 세 식구가 드디어 좀 앉아보려던 그때 기세등등한 얼굴의 강신이 중년 남녀와 함께 다시 다가왔다.“엄마, 아빠. 이 자식이야! 이 자식이 내 팔을... 분명 강우연 쟤가 시킨 거라니까? 어떻게 좀 해봐!”강신과 함께 등장한 중년 남자는 근엄한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고 이목구비가 언뜻 강우연과 많이 닮아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자는 피부며 몸매며 장성한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는데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딱 봐도 부잣집 사모님 같아 보였다.“강우연! 네가 감히 여기가 어
강우연이 이렇게 놀랐으니 강학주를 비롯한 그녀의 가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한지훈?강우연에게 못된 짓을 저질러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 썩을 자식이 아닌가?“너 미쳤어! 저 범죄자 자식 경찰에 신고는 못할망정 뭐? 남편? 저 자식 때문에 우리가 무슨 수모를 당했는지 잊은 거야? 너... 설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니?”서경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표정이 안 좋긴 강학주 역시 마찬가지였다.“강우연,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우리 가족 중에 네 얼굴 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1”말을 마친 강학주가 돌아서려 했지만 부리나케 달려나간 강우연이 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애원했다.“아빠, 제발... 제발 내쫓지만 말아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가족들을 잊어본 적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가뜩이나 작은 그녀의 등이 더 불쌍하게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고...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지훈은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학주는 매정하게도 딸의 손을 내쳤다.“가족? 그래. 가족이니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저 자식더러 우리 신이한테 사과하라고 해!”쿠궁!‘사과? 지훈 씨가 잘못한 게 아닌데 사과를 어떻게... 하지만 여기서 거절하면 정말 영원히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혼란스러운 마음에 강우연은 말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흥. 지금 남자 때문에 가족을 버리겠다는 거니? 좋아. 오늘부터 집은 물론이고 강운그룹이 운영하는 그 어떤 곳에도 발을 들이지 못할 거다. 앞으로 딸 하나 잃었다 생각하고 살면 그만이야!”말을 마친 강학주가 단호하게 돌아서고 서경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우연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그래. 지금 그 자리가 네게 어울리는 곳이야. 기어오르지 말고 평생 그렇게 살아.”그리고 복수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강신은 심지어 그녀에게 침을 뱉기까지 했다.“퉷, 나 참 더러워서...”“아빠! 안 돼요! 제발 저 버리지 마세요... 제발...”엄
“흠, 아마 약탈당한 국가에서 복수를 위해 고수를 보낸 걸지도 몰라.”“에이? 혹시 용국의 한지훈 아니야? 그자가 예전에 오륙의 이성 천신계 강자 넷을 상대로 싸운 적 있잖아!”“말도 안 돼.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한지훈이 감히 함부로 나설 리가 없지.”사람들 눈에는 한지훈이 지금 숨기 바쁠 시점이었고, 신분을 드러낼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고 본 것이다.같은 시각, 허씨 가문의 대청 안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그들 중에는 곧 천신계 돌파를 앞둔 고수들도 있었지만, 수십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이때 흰옷을 입은 남자가 바깥에서 급히 들어오자, 허천지가 얼른 일어나 물었다.“소식이 있나?”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손을 쓸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전부 조사해 봤지만, 단서 하나 찾지 못한 것이다.“가주님, 설마 얼굴조차 못 보신 겁니까?”그가 물었다.얼굴을 봤느냐고?허천지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처음부터 끝까지 상대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뭘 봤겠는가?“어젯밤, 그 자는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부끄럽게도, 누가 저희를 도운 건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허천지가 고개를 저었다.“가주님, 일성 준천신을 순식간에 죽인 실력이라면… 혹시 역외에서 귀환한 강자가 아닐까요? 설마 서천술 선배께서 은밀히 보낸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아닐세. 서천술 선배라면 사전에 반드시 통보가 있었을 테지. 그래야 우리가 마중을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몰래 들어올 이유가 없지 않나.”허천지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더 캐낼 게 없다면 그만두게. 당분간 모두 경계심을 늦추지 말도록 하고.”이때, 허천과 함께 방을 쓰는 허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할아버지, 혹시 천이가 데리고 온 그 친구 아닐까요? 어젯밤 그 친구 부탁으로, 천이가 할아버지를 뵈러 간 거잖아요.”허천지는 고개를 연신 저었다.“말도 안 된다! 한지훈이 그를 보낸 건 자기한테 불똥 튈까 봐
죽은 두 사람은 비록 이제 막 준천신계를 돌파한 강자이긴 했지만, 외부 세계에선 대륙 하나를 제압할 만한 존재였다.그런데 방금 전, 단 한 방에 살해당한 것이다!게다가 그 천성구요 진법은 그야말로 신의 경지였다!구하러 나섰던 허천지조차 넋을 잃었고, 방금 그 순간, 그는 하늘에 아홉 개의 태양이 뜬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그 뜨겁고 불타는 느낌은 너무나도 생생했다!바닥에 흩어진 투명한 살점들을 바라보며, 장령풍은 자신의 목숨을 간신히 건진 것에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피를 토하며 날아간 서영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허천지는 급히 다가가 서영호의 상처를 살폈고, 다행히 내장은 다치지 않아 하루이틀만 쉬면 회복될 수 있었다.사람들을 시켜 서영호를 옮기게 한 뒤, 허천지는 냉랭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방금 전, 그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을 느꼈다.즉, 지금 죽은 둘 외에도 또 한 사람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그러나 앞선 두 명이 순식간에 살해당하는 걸 보고는, 나머지 한 사람이 은둔하여 손을 쓰지 않은 것이다.방금 전 천성구요의 위력에 겁을 먹고 움직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허천지는 장령풍을 한 번 흘겨보았고, 방금 전 무릎 꿇고 살려달라 외쳤던 모습이 너무 또렷했다.과연 저자가 장씨 가문의 미래라고 할 수 있을까?무겁게 한숨을 쉰 허천지가 장령풍을 향해 말했다.“장 도련님,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경호원을 붙여드릴 테니, 돌아가 쉬세요.”그러곤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장령풍의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를 보았고,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민망함이 스쳤다.“예, 예, 허 선배님.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그 말을 남기고 장령풍은 서둘러 호텔 쪽으로 달려갔다.그날 밤, 진가복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죽은 자들 중에는 비륙의 고수뿐 아니라, 오륙 십 대 가문 중 하나인 로드 가문에서 파견한 강자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그들은 모두 무도학원 진법루에서 큰 수확을 얻은 자들이었지만, 운이 장령풍이나 서영호만큼은
하지만 그 누구도 정식 비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대학살극이 벌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서영호와 장령풍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을 때, 폭풍 같은 기류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서영호는 반응조차 못 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장령풍은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머리를 감싸며 소리쳤다.“살려주십시오! 저는 하등 쓸모없는 놈입니다! 단지 이곳에 구경하러 온 것뿐입니다......”“저…… 저 그냥 시중도 들겠습니다! 종이든 말이든 다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그들은 사실 특수한 단약을 써서 겨우 실력을 끌어올린 상태였을 뿐, 진짜 실전 경험은 전무했다.그런데 상대는 고작 기류 한 줄기로 서영호를 반쯤 죽여놨으니, 분명 최소 준천신 강자일 것이다!자신보다 강한 강자를 만나자, 장령풍은 그대로 오줌을 싸버렸다.몸은 덜덜 떨리고, 눈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휙!”그때,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한 명의 검은 복면을 찬 사람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왔고, 싸늘한 눈빛으로 장령풍을 노려보며 말했다.“진법루에서 가져온 진법 비책을 네가 갖고 있지?”장령풍은 이미 잔뜩 겁에 질린 상태였고, 지금 이 순간 목숨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그는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용국 무종의 미래 따위는 전혀 그와 무관한 일이 되었다!상대가 다시 묻기도 전에, 장령풍은 품속에서 두툼한 비책들을 꺼내 내밀었다.분명히 상대는 진법을 빼앗기 위해 온 것이니, 넘겨주기만 하면 자신의 목숨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검은 복면인은 그것을 낚아채며 한쪽 손으로 품었다.“멈춰라!!”“쉬익!”그 순간, 한 줄기 은빛이 스치며 주변 집들이 한바탕 흔들렸다.마침 이때 허천지가 검을 들고 있었다.진작에 진가복 전체가 진법에 쌓여 있었고, 이때 허천지는 즉시 진법을 가동했다.동쪽 하늘에서 솟은 눈부신 백광 아래, 진가복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수많은 살기가 일순간에 검은 복면을 쓴 사람을 겨눴다!그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허천지는 한눈에 필 칸트를 알아봤다.그는 오륙의 십 대 가문 중 하나인 칸트 가문의 가장 유망한 후계자였다!게다가 요즘은 역외의 강자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어, 칸트 가문에도 두 명의 강자가 상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그런데, 겨우 북양왕이라 불리는 자, 소문만 무성한 초라한 일성 준천신 경지의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그런 자격으로 오륙 십 대 가문의 정점에 선 젊은이에게 말을 건다고?만약 상대방이 기분이라도 상하면, 한지훈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겠지만 자신의 손녀까지 휘말리면 큰일이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허천지는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곁에 서 있던 허천을 확 잡아끌었다.“천아, 내가 뭐라고 했지? 밥 다 먹었으면 바로 한 선생을 모시고 돌아가서 쉬게 해드리라고 했잖아. 길거리에서 이러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할아버지, 이분이 먼저 한 선생님에게 아는 척하며 인사하셨어요. 우리가 무례할 수는 없잖아요.”허천은 억울하다는 듯 허천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긴 길 가다 아무나 붙잡아도 대단한 배경이 있는 사람들이야. 괜히 문제 생기면 누가 너희를 지켜주겠어? 게다가 저 사람, 오륙 십 대 가문에서 가장 유망한 젊은이라니까!”“한지훈이 먼저 인사했다고? 웃기고 있군! 그쪽에서 먼저 말 걸 일이 뭐가 있어! 당장 데리고 돌아가! 이런 곳에 더 있지 마!”“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우리 허씨 가문은 책임질 의무 따위 없다!”허천지는 싸늘하게 한지훈을 한번 흘겨보곤, 멀리 서 있는 몇 사람을 보고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말없이 돌아섰다.한지훈은 필 칸트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허천과 함께 허씨 가문에서 마련해 준 민박집으로 돌아갔다.하지만, 밤이 막 내려앉은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졌다!곧이어 수많은 빛줄기가 창문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사람 그림자들이 빠르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다녔고, 한지훈은 창밖으로 수십 명이 피웅덩이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한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절대 나오지 마십시오!”문을 두
장세풍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허천지는 눈빛이 번쩍였다.장세풍, 세속 세계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외 강자들과 오대 명산에겐 익히 알려진 이름이었다.이 사람은 바로 천사도 제7대 조사, 즉 장천사의 일곱 번째 제자였던 것이다!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설마 장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천사도 전승을 이은 그 장세풍을 말씀하시는 겁니까?!”허천지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맞습니다! 바로 우리 선조이지요.”장령풍은 허천지가 장세풍을 경외하는 태도를 보이자, 얼굴에 더한 자부심을 드러냈다.“흠, 장 선배께서 오신다면, 이번 대전은 틀림없이 압승이겠지요. 만약 당시 그분이 역외로 은둔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 후손의 변발 병사들이 용국을 차지했겠습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했군요, 이번 대회에 그분까지 속세에 돌아오시다니!”허천지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했다.“흥, 이번엔 반드시 우리 용국이 승리할 겁니다. 누구나 알고 있잖습니까, 대전에서 이기는 자는 명성을 떨칠 뿐 아니라, 용국의 국운까지 계승할 수 있다는걸!”서영호가 냉소하며 말했다.“한지훈 그 자식의 좋은 날도 이제 끝났습니다. 대전이 끝나는 날이 바로 그가 용심을 넘기고, 목숨을 내놓는 날이 될 겁니다!”이 말을 하며, 서영호의 눈에서는 살기가 번뜩였다.태어나서 지금껏 누가 그를 무릎 꿇게 한 적 있었던가?하지만 오륙에서, 한지훈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그때의 굴욕을 떠올릴 때마다 서영호는 이를 악물며 분노를 삼켰다.허천지는 서영호가 한지훈을 언급하며 증오를 품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매우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고 속으로 기뻐했다.한편, 한지훈 일행은 점심을 먹은 뒤 허천이 한지훈을 데리고 마을을 둘러보러 나섰다.과거엔 이 작은 마을이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었지만, 지금은 전혀 달랐다.각국의 거물들이 몰려오면서, 연예계 스타나 유명 국제 서커스단까지 이곳에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길을 걷는 동안에도 한지훈은 익숙한 얼굴들을 여럿
허천지가 멀리 떠나기 전에 허천은 서둘러 뒤쫓아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할아버지, 한 선생님은 그래도 용국의 북양왕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허름한 민박에 머물게 할 수는 없잖아요!”“민박이면 어때서?”허천지는 고개를 돌려 허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 고급 호텔들, 그게 누굴 위해 준비된 거라고 생각하느냐? 전부 다 역외 강자들과 오대 명산의 친척들을 위한 거다. 한지훈을 민박에 재우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오륙의 육군 원수도 민박에서 자고 있다. 그 사람들은 불평도 안 하는데, 뭘 그리 유난이냐!”그 말에 허천은 울컥했다.“할아버지, 한 선생님도 천신계 강자잖아요. 게다가 예전에 혼자 힘으로 오륙의 천신계 강자 넷을 죽이기도 했어요. 그 전력만으로도 민박에서 묵일 이유는 없잖아요!”“천아, 넌 아직 몰라서 그래. 한지훈이 천신계이라지만, 역외 강자들이 돌아오기 전이나 천신계가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못하는 계약이 유효하던 시절에는 그 신분이 귀중했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 그의 수준은 고작 일성 준천신계일 뿐, 진짜 강자들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게다가 그는 아직 스물 몇 살밖에 안 됐다. 천신계라는 건, 한 단계 오르기도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는 전에 오대 명산에 무례한 짓을 저질렀으니 그 순간부터 그의 앞길은 막힌 거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정을 줄 필요는 없어.”“오히려 그런 자와는 선을 확실히 그어야 한다, 괜히 엮였다가 불똥 튈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그가 널 도운 목적도 의심스럽다. 우리 허씨 가문과 엮이려는 의도가 아니면 뭐겠느냐? 하지만 그가 잘못 생각한 거지.”“됐고, 이제 그만 돌아가 봐라. 난 지금 장씨 가문의 장령풍과 서천술 선배의 자손인 서영호를 맞이하러 가야 해. 그런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지나간 북양왕에게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다!”“기억해라. 식사가 끝나면 한지훈을 민박으로 데려가. 조용히 머물게 하고, 절대 밖으로 나돌지 않게 해. 괜히 감당 못 할 인물을 건
허천은 노인을 향해 서둘러 소개했다.노인은 고개를 돌려 한지훈을 힐끗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하지만 북양왕이라는 이 세 글자가 1년 전이었다면 값진 칭호였을 터였다.그때 노인이 한지훈을 봤다면 몸을 숙여 예를 표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이제는 북양왕은커녕, 국왕조차도 그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그래서 노인은 단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런 예도 취하지 않았다.“한 선생님, 천이가 철없어 한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린놈의 말이니, 너무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됩니다.”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며 한지훈에게 말했고, 한지훈은 고개를 들고 노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그 노인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희고, 새하얀 장삼을 입고 있어 멀리서 보기엔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게다가 실력도 오성 용급 천왕계 정도였으며, 진법에도 능하여 거의 진천왕계라 불릴 만한 고수였다.“저는 허천지라 합니다. 한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노인은 자리에 앉은 후, 가볍게 주먹을 쥐고 한지훈에게 인사했다.말로는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그 표정엔 오만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사실, 아까 허천이 한 말은 결코 어린 아이의 허튼소리가 아니었고, 허씨 가문은 실제로 공수반의 유일한 전승자였던 것이다!지금 용국 내에서도 무도의 대가라 불릴 만한 존재는 손에 꼽히고, 게다가 진법에 능하면서 완전한 진법 전승을 지닌 가문은 거의 없었다.오히려 오대 명산의 고위 인사들조차도 허씨 가문에게는 고개를 숙일 지경이었다.장씨 가문을 제외하면, 허씨 가문은 오대 명산 내부에서도 흔들릴 수 없는 입지를 자랑하는 존재였다.그러니, 한지훈이 아무리 북양왕이라 한들 허천지의 눈엔 아무런 값어치도 없었던 것이다.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일로 인해 서천술까지 직접 사람을 보내어 자신을 초청하기까지 했다.그건 어떤 경지의 예우인가?서천술이 언제 남에게 부탁 같은 걸 한 적 있었단 말인가?적어도 이 진가복 내에선,
그 후 며칠 동안 한지훈은 집에 머물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또한 한씨 공관에서 작은 연회를 열어 작은 아들의 백일을 축하했다.가문의 족보에 따라 작은 아들의 이름을 한진천, 아명은 천천이라 정했다.그리고 관례대로 작은 아들의 이름도 정식으로 족보에 등재되었다.강우연은 갓 백일을 넘긴 천천이를 안고,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늘 한씨 가문의 대를 잇지 못했다는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던 터였다.하지만 이제, 막내아들의 이름이 족보에 올라간 이상 그 무거웠던 돌덩이가 비로소 내려앉은 셈이었다.그 후, 한지훈은 용월과 용운에게 명을 내려 귀환한 역외 강자들과 각국에서 온 참관 사절단들의 동향을 면밀히 감시하도록 지시했다.조정이든, 용국 무종이든, 이번 역외 강자 간의 대결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번만큼은 각국의 역외 강자들이 모두 용경 근방에 집결했고, 겉으로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곳곳에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한지훈은 도청전인을 데리고 용경으로 향했고, 집안은 용월에게 맡겼다.이런 배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전하기 위함이었다.도청전인은 이미 수일 전 천신경으로 돌파한 상태였고, 만일 용경 쪽에서 무슨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도청전인은 분명 한지훈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용경에서 80리 떨어진 진가복에 도착했을 때, 이 이름 없던 작은 마을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주변 곳곳에는 각국 강자들의 수행원과 호위병들, 그리고 용국 무종에서 파견한 순찰병들로 가득했다.이들이 비록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전투력만큼은 정규군 이상이었고 한지훈은 그들 사이에서 일성 준천왕계 강자를 목격하기도 했다!예전 같으면 천왕계 강자는 한 나라를 좌우할 존재였지만 지금은 고작 순찰병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이 또한, 이번에 역외에서 돌아온 강자들이 하나같이 당세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임을 방증하는 바였다.그리고
“사실 우리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두들 알다시피 우린 그저 자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용심을 얻고 용족 유적지에 들어가야만 한 단계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거지!”이천성은 매혹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한지훈을 쳐다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확실히 매우 솔깃하긴 했다.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한지훈이다. “나에 대해서 꽤나 잘 아는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어떤 걸 가장 싫어하는지도 알려줄게. 난 남한테 비겁한 협박을 받는걸 가장 싫어해! 그리고 난 너랑 같은 편이 아니야!”“난 너와는 달리 더 강해지기 위해서 남은 일생을 사는 게 아니야. 내 인생은 오직 용국을 위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거야!”한지훈은 단 두 마디로 이천성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말에 이천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지훈을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 “네 얘기를 들어보니 우린 더 이상 깊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 같네. 이렇게 된 이상 난 이만 돌아갈게!”“부디 앞으로, 네가 방금 내린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래!”이천성은 말을 마치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이천성이 떠나는 모습에 도청 천진의 표정은 굳어졌다. “한 선생님, 헌팅 리스트는 매우 위험한 겁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도맹약의 타깃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제가 보기에는 일단은 잠시라도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다시 천천히 협상해 보는 것도 상책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자 한지훈은 고개를 들어 도청 전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놈이 말한 헌팅 리스트란게 정말 그렇게 대단해?”도청 전인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제 스승님께서 살아계실 때 일찍이 저한테 얘기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예비는 확실히 헌팅 리스트에 올라 죽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원승환도 그 리스트에 올라 죽은 겁니다.” “하지만 오기의 죽음은 아직 확실치 않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