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더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다음날 이른 아침, 고용기는 잠에서 깨고, 곧장 수성으로 돌아가려 했다.그리고 무아린도 글쎄, 그를 따라 남령에 가겠다고 했다.저 계집애, 그래도 고용기한테 진심인듯했다.하지만 오라버니의 독을 치료할 수 있는진 아직도 문제이다.고월영은 전날 밤 한시도 편히 자질 못하고, 계속 악몽을 꾸었다.그녀는 꿈속에 혼례를 올린 그날 밤으로 돌아갔다.꿈에는 그날,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미친 듯이 탐한 남자가 나타났다.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자가 차갑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어때? 본 왕에게 만족하느냐?"고월영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깨어났을 때, 온몸은 차가웠고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최대한 빨리 돌아가, 빨리 강현우를 만나야 한다!... 일행 다섯 명이 수성에 도착하자마자 소식 하나를 접했다. 어젯밤, 운조의 정예군 하나가 금강을 몰래 건너 기습을 하려 했다.다행히 연일이 빠르게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달했고, 그 정예 군은 전수 전멸되었다!"다 영이 덕이야!"고용기가 고월영의 어깨를 토닥였다."현왕 전하가 2일 전 수성에 도착하셨고, 지금은 현왕 전하의 대군마저 도착했으니, 수성은 잠시 안전할 거야."고용기는 한숨을 내쉬고 난감한 듯 말했다."이 오라버니는 현왕 전하에게 죄를 청하러 가야겠어, 무슨 일이든 내가 혼자 감당할게.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가 돌아가 나 대신 조부님을 잘 위로해 주거라.""조부님은 나이가 많으셔서 몸이 안 좋으시니, 네가 많이 챙겨드려야 해."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대군이 변경을 지날 때, 오라버니가 군영에 있지 않았으니, 주동적이든 피동적이든, 꼭 벌을 받아야 했다.고월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그저 강현준이 고용기에게 공을 세워 속죄할 기회를 주길 바랐다. 오라버니가 계속 수성을 지킬 수 있게.하지만 강현준이 일전 그들을 대한 태도로 보아, 은혜를 베풀지 말지는 아직도 미지의 수다.모두가 강현준을 잔인하고 냉정하다 했다.
고월영은 본능적으로 손끝에 두 개의 은침을 잡아, 긴 손가락으로 튕겨냈다.하지만 무안희의 장풍은 순식간에 사라졌다.철저하게 사라졌다!자유자재로 공제할 수 있다니, 무안희의 공력이 얼마나 강한지 엿볼 수 있었다.고월영은 무안희가 은침에 쏘인 걸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안희가 부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지는 걸 조용히 보고 있었다.무안희가 장력을 거둬간 순간, 고월영은 이미 자신이 꾀에 넘어간 걸 알아차렸다.정자 밖에서, 훤칠한 그림자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무안희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현왕 전하."강현준은 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고월영을 향한 시선은 빠르게 스쳐 지났고 무안희의 앞에 다가가 손을 내뻗었다.무안희는 가냘프게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바닥에 담긴 힘을 빌려 일어섰다.하지만 아직도 몸이 허약한 듯, 일어서자마자 나른히 강현준의 품속으로 넘어졌다.고월영은 강현준을 바라봤다.그는 계속 차가운 표정을 하고 팔을 뻗어 무안희에게 지탱할 힘을 주었다.무안희는 그의 품에 안겨있는 건 아니지만 그의 팔에 넘어져 있었다.무안희는 그걸로 만족스러웠다.과거 그는 그녀가 다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었다.무안희의 시선이 고월영에게로 옮겨졌다. 질투에 화나간 고월영의 모습이 보일 거라 예상했다.하지만 고월영은 그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연극이라도 보는듯했다.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눈빛에, 무안희는 승리로 인한 마음속의 희열감이 반으로 사라지는듯했다."현왕 전하, 전 그저..."무안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준이 차갑게 말했다."여왕비를 방에 가두어라, 내 명 없이는 외출을 금하도록!""예, 전하."연일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고월영을 보며 말했다."마마, 가시지요.""현왕 전하는 현명하고 모략이 뛰어나신 분인데, 정녕 무안희 씨의 수작을 못 알아보신 겁니까?"고월영은 여전히 강현준을 바라보고 있다.대체 저자는 강현우가 맞는 걸까?아니라면, 왜 내
"왕비마마!"연일은 바로 쫓아가 고월영의 눈앞에 막아섰다."연일, 내 부군이 왔네. 무슨 자격과 이유로 날 막아서는 건가?"고월영이 그를 노려봤다.연일은 난감한 표정을 띠었다."왕비마마, 현왕 전하께서 방에 계시라고, 마마...""시비도 가리지 않는 사람을 어찌 형이라 할 수 있겠나? 저런 남자가, 무슨 자격으로 날 상관한단 말이냐."고월영은 앞으로 한걸음 내디뎠다."비키거라!"연일은 여전히 꼿꼿이 서 있었다.현왕 전하가 방으로 보내라 명하셨으니, 주둔 처에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연일, 정녕 네가,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날 죽일 담이 있다면!고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갑자기 그의 품을 향해 부딪혀갔다.자칫 잘못하면 부딪힐 뻔했다!연일은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몸을 비켰다.왕비의 몸은 그가 다칠 수 있는 게 아니다!고월영은 그 틈을 타, 그의 앞에서 달려 지나갔다.그녀는 주둔 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오는 길에 이미 물은 적 있었다.이 세상엔, 진짜 강현우와 진짜 강현준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 두 사람의 신분이 그녀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반드시 강현우를 만나야 한다!그래서 똑바로 알아야 한다!왜 모두가 강현우는 합방을 못 한다고 하는 것인지.정녕 안된다면, 그날 그녀와 함께인 건 도대체 누구인지?그녀는 혼란스러웠고 마음이 복잡했다.자신의 추측이 진실이 될까 두려웠다."왕비마마!"연일은 당황한 마음을 이끌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나섰다.하지만 문을 나서자, 고월영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왕비의 경공이 언제부터 이렇게 좋았던가? 순식간에 그림자도 없이 사라지다니?연일은 조금 망설이다 바로 몸을 돌려 주둔 처를 향해 쫓아갔다.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 밖 큰 나무 뒤에서 연약한 그림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고월영은 연일이 멀어져 가는 걸 냉랭히 바라보다 다른 방향으로 돌아 군영을 향해갔다....강현준은 무안희를 부축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그녀에게 기회를 준 적 없었다!한 번도, 자신을 믿어준 적 없었다!무안희는 손끝을 움켜쥐었고 마음은 점점 처량해져갔다."한 번도 다치는 걸 허락하신 적 없었는데, 그날, 제가 안으려 하자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왕비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그런 겁니까?"무안희는 왜 그때 고월영이 주변에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10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녀의 피가 강현우의 독성을 억제할 수 있기에, 강현준은 그동안 그래도 태도가 좋았었다.적어도 우호적인 편이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여러 번 마음을 표했지만, 그는 냉정하게 대했었다.항상 거절을 했고, 절대 그녀가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어머니가 백교단을 계승해야 한다 하자, 이후 만날 기회가 적을 것 같았다.그래서 그저 안아만 보고 싶었고, 그걸로 그에 대한 잡념을 잘라버리려 했다.처음엔 거절을 했던 그가, 돌연 동의를 했다.무안희는 강현준도 본인에 대한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걸로 이해했다.하지만 그 동의가, 다른 여자를 화나게 하기 위함이었을 줄은!그리고 자신은, 그저 이용당한 도구일 뿐!고개를 들어 강현준을 바라보는 무안희의 눈빛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고고하고 매정하신 현왕 전하께서도, 이토록 유치할 때가 있을 줄은."고월영, 그녀는 대체 어떤 여자인 거지?어떻게 이걸 해낸 거지?왜, 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던 강현준마저, 그녀를 위해 자신의 원칙을 바꾸는 거지?"그녀는 여왕비입니다! 이렇게 그녀와 함께 있으면, 현왕께 미안하지도 않습니까?"강현준은 말을 하지 않았고 안색은 푸르르게 변했다.무안희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그의 침묵이 그녀에게 모든 답안을 알려줬다.그 여자를 위해서라면, 그는 모든 것을 마다할 수 있다!"왜입니까?"무안희의 목소리를 잠겼고, 감정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얼굴 하나 빼고 나면, 대체 어디가 더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왜 그토록 왕비를 신경 쓰시는 겁니까?"한 나라
강현준의 웃음은 너무나 시렸다.시리다 못해 두렵게 했다.무안희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웃음을 보니 저도 몰래 뒤로 두 걸음 물러갔다."현왕 전하,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여왕은 지금 본 왕의 군영에 있다."강현준이 냉랭히 말했다.무안희는 손을 들어 심장을 움켜쥐었다.아니, 현왕 전하가, 나한테 이렇게 매정할 리가 없어!말도 안 돼!그러나 그의 태도가 그녀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있다. 안되는 건, 없다고!"그래서, 저를 데려가 신게, 절 구해주려는 게 아니라, 아껴주는 게 아니라, 전하께선... 그저 제 피를 이용해 여왕 전하의 독성을 억제하려는 겁니까?"강현준은 침묵했다.무안희는 미칠 지경이었다."왜 절 이렇게 대하시는 겁니까!"그가 돌아섰다.무안희가 소리쳤다."만약 제가, 다신 여왕 전하를 돕지 않는다 하면..."갑자기 강현준이 몸을 돌려 큰손을 휘둘렀다.무안희는 강력한 장풍이 본인을 향해 오는 걸 느꼈다.그녀도 막아 나섰다.‘펑’소리와 함께 두 갈래의 장풍이 부딪혔다.무안희가 상대를 이기기 어려운 건 명백했다.강현준의 장풍은 그녀의 방어를 뚫고 ‘퍽’소리를 내며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무안희는 바닥에 쓰러졌고 다시 손을 쓰자 보니 진기가 모이질 않았다.강현준이 그녀의 혈자리를 봉인한 것이다!강현준은 그저 담담히 그녀를 보다, 이번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무안희는 그가 밖에서 내리는 명령을 들었다."잘 보고 있거라, 도망간다면, 죽여도 좋다."죽여도 좋다!무안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이게 자신이 사모하는 남자가 그녀에게 준 대답이었다.그에게 있어 그녀의 존재는, 과거 한 가지 가치뿐이었다. 그건 바로 여왕의 독성을 억제하는 것.하지만 지금은 한 가지 더 늘었다. 그를 도와 다른 여자를 화나게 하는 것.그녀의 인생은 왜 이토록 비참한 걸까?전심전의로 그를 사랑했는데, 왜 그는 자신에게 일말의 연민도 없는 걸까?"후, 저한테 참으로 매정하시네요!"현왕이 난폭하고
"여왕 전하!"고월영은 단번에 거처의 가림막을 들어 올렸다.갑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자리에 앉아 지형도를 보고 있었다.그는 부름 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하지만 고월영은 넋을 잃고야 말았다.왜 저 사람인 거지?"넌..."고월영은 자리에 선 채 얼어있었다. 그녀는 강현우와 똑같지만, 차디찬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일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강현준은 지형도를 내려놓고 냉랭하게 그녀를 쳐다봤다."본 왕이 말하지 않았나? 허락 없인 침소를 떠나지 말라고?""연일!"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밖에서, 연일이 황급히 도착했다.그는 곧장 가림막을 올리고 들어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현왕 전하!""저절로 가서 벌을 받거라!""예!"연일은 몸을 돌려 나갔다.그리고 밖에서 곤장을 치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고월영은 급해났다."제가 혼자 나온 것입니다, 연일과 무슨 상관인 겁니까?"벌하더라도, 자신을 벌해야지!하지만, 그녀는 그저 자신의 부군을 보러 왔을 뿐, 또 무슨 잘못이 있는 걸까?"본 왕은 여왕비를 잘 보고 있으라 했고, 그걸 못해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법."강현준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너무... 너무 매정하십니다!"고월영은 뛰쳐나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 두 명이 두꺼운 곤장을 들어, 힘껏 연일의 몸을 때리는 게 보였다."그자와 상관없다, 때리지 말거라!"고월영은 달려가 손을 뻗어 연일의 옆을 막아섰다.두 병사는 서로 마주 보며, 난감해했다.연일의 이마엔 식은땀이 나고 있었지만 시종 신음 소리 한 번을 내지 않았다.그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왕비마마, 제가 일을 못다 한 탓입니다. 저는 벌을 받아야 하오니, 왕비마마께선 비켜주십시오.""현왕 전하."주둔처에서 나오는 그 그림자를 보며, 두 병사는 숨을 내쉬고 빠르게 인사를 올렸다."왜 때리지 않느냐?"강현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두 병사가 난감한 듯 답했다."전, 전하, 왕비께서...""감히 누가 막아서면,
한 시간 전,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다른 여자를 도와 자신을 괴롭혔고.한 시간 뒤인 지금, 그는 자신을 침대에 누르고 있다!참 뻔뻔한 남자야!"놓아주세요!"고월영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강현준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고월영은 급해 나며 화가 난 투로 말했다."당신은 여왕 전하의 형님이십니다! 여왕 전하가 아니신데 어찌 저한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강현준은 조금 빨개진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단단한 마음이 조금 수그러지기 시작했다.아마 본인조차도 왜 이런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를 일이다.그러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만약 본 왕이... 너의 여왕 전하 라면?"고월영은 멈칫했다.다시 눈을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도대체 그는 진짜 강현우가 맞는 걸까?만약 강현우가 맞는다면, 왜 이렇게 그녀를 대하는 걸까?그녀는 무서웠다.대체 그는 알고 있을까?"현왕 전하, 절 그만 농락하십시오, 제가 전하 함께하면, 약하게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더 나아가 구족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전하는 저를 위해 생각해 본 적 있으신 겁니까?"강현준 눈 안에 비치던 이상한 빛이 순식간에 꺼져들었다.다시 고월영을 바라볼 땐, 이미 일전의 싸늘함을 회복했다."알고 있으면서도, 본 왕에게 희망을 품고 있는 건가?""아닙니다...""정녕 아닌가?"그가 갑자기 몸을 눌러왔다.몸과 몸 사이가 밀접히 붙은 그 순간, 그의 눈빛에, 분명 빛이 끼얹어졌다.고월영은 그저 답답했다.심지어, 웃음이 났다."제가 전하에게 매달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께서 절 놓아주지 않는 겁니까?"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걸 알고 있는 고월영은 버둥대는 걸 포기했다.차갑게 그를 바라보는 고월영의 눈빛엔 광택이 하나도 없었다."여왕 전하께서도 오시지 않으셨나요? 전하와 여왕 전하는 도대체 무슨 비밀을 제게 숨기고 계신 겁니까?"그들 때문에 그녀를 미칠 것
고월영은 강현준이 화를 낼 것이라 확신했다.심지어 수시로 그녀의 목숨을 앗아갈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틀렸다.강현준은 그저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얼마를 보았을까,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그리고 떠났다.고월영은 다시금 감금되었다.하지만 이번엔, 그녀를 감시하던 자가 연이수로 바뀌었다.그녀도 다시 나가겠다고 애를 쓰지 않았다.지쳤다.몸과 마음, 모두.시녀가 음식을 세 번 가져왔으나, 고월영은 다치지도 않았다.그저 침대에 누워, 머릿속을 하얗게 비웠다.쉬는 건지, 인생을 사고하는 건지도 알 길이 없다.그러다 저녁이 다가올 무렵, 밖에서 움직임이 들려왔다."전하."연이수가 공경하게 인사를 올렸다.고월영은 이불자락을 꽉 쥐고 돌아누워 들어온 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가 침대맡으로 다가왔다.고월영은 착잡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봤다."그만 좀 괴롭..."그녀는 갑자기 넋을 잃었다.빤히 그의 눈가에 있는 눈물점을 쳐다보았다.그녀는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눈 안엔 비아냥이 가득 찼다."현왕 전하, 눈물점 하나를 그리시고, 여왕 전하의 옷을 입으시면, 진정 여왕 전하가 되실수 있다 생각하십니까?"하!이 눈매, 이 체구, 그리고 이 숨결!언제까지 날 속이려는 거지?하지만 백의의 남자는 살랑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다른 이들이 알려주지 않았는가, 나와 현왕은 똑같이 생겼다고?"고월영은 모르고 있었다!그녀의 심장이 심히 떨려왔다!이 웃음, 이 다정한 눈빛, 그리고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그의 온도까지...그는 분명 강현우였다!그들은 일 년 동안이나 함께 지내왔다.현왕을 따라 출정을 자주 가는 터라, 그와 만나는 시일은 많지 않았다.하지만 그들은 분명 함께였었다.그는 진짜 강현우였다.진짜!"손이 이리도 찬 건, 이불이 너무 얇아서인가, 아니면 옷이 부족한 건가?"강현우는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건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