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월영은 손끝이 떨려왔다.강현우 입가의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그는 고월영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갈대는 창창한데, 흰 이슬은 서리가 되었네."고월영은 마음이 덜컥 떨려왔다.이건 그와 강현우가 마음을 확인한 그날, 꽃바다에 앉아 밤을 지새운 그날.그 다음날 일출 시, 그가 읊어준 시다!고월영 마음속 마지막 의문이, 드디어 철저히 사그라졌다."여왕 전하, 앞으론, 다시는 절 떠나지 마세요."그녀는 그의 큰 손을 꼭 쥐었다.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현왕의 화를 내지 말게, 그는 악의가 없어."고월영은 고개를 저었다."제가 화를 내든 말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아니, 그에겐, 아주 큰 의미야."강현우가 확고히 답했다.고월영은 입술을 옴싹거렸다. 많은 말들을 하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결국, 그녀는 강현우를 놓아주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저와 현왕 전하는...""말할 필요 없어, 난 당신을 믿네.""여왕 전하...""내일 고 장군이 청성으로 출정하는데, 가고 싶은가?""예!"고월영의 주의력은 금세 이 일에 이끌렸다.강현우가 웃으며 답했다."그래, 그럼 나도 부인을 따라가야겠네. 처남을 대신해 청성을 앗아내, 공을 세워 죄를 갚도록 해야겠어."고월영의 눈이 그제야 밝아왔다."오늘 종일 식사도 하지 않았다면서?"강현우가 밖을 향해 말했다."저녁 식사를 준비하라 명하여라.""예!"연이수가 답한 뒤 몸을 돌려 떠났다.고월영은 조금 의아했다."현왕 전하의 사람을, 이리 마음대로 부리셔도 되는 것입니까?"12대는 현왕의 명만 듣는다 하지 않았나?12 대든, 현왕의 최측근인 시위 지언이든, 강현우가 부리는 데에, 전혀 이상함이 없어 보였다.강현우는 그녀를 감싸 안고 침대에서 내려오며 말했다."난 형님과 어려서부터 함께 있었는데, 형님의 사람도 부리지 못한다면, 내 곁에 쓸만한 사람이 없지 않은가?"
고월영은 이 말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강현우는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강현우의 가슴위에 지탱하고 있는 두 손은 사실 아무 저항력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월영은 그래도 그를 밀쳐내려고 하였다. 이는 일종의 본능이었다. 고월영은 자신이 어리둥절한 것 같았다. 왜 현우와의 입맞춤이 사황형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구분할 수가 없었다. 현우랑 결혼했을 당시 그녀가 느꼈던 입맞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였다.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내 몸 밑에서 설마 지금 딴생각 중이야?”라고 강현우는 실눈을 뜨더니 갑자기 그녀를 뒤집었다. 고월영은 순간 경악하면서 급한 목소리로 “현우씨, 이러지 마요, 저, 저는 당신을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무슨 영문인지 오늘 밤의 고월영은 이 자세를 각별히 거부하였다. 강현우를 등지고나니 그의 얼굴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고월영은 또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최근 들어 그의 심장은 조금 쇠약해진 것 같았다. 그녀 자신도 왜 이렇게 됐는지를 알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일 처리가 침착하였고 이럴 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강현준을 만나고 나서부터인가…“며칠동안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넌 확실히 나에 대해 예전같지가 않아.” 강현우의 커다란 손은 고월영의 허리를 스치며 위로 미끄러 올라가더니 말랑말랑한 몸매를 확 고정하였다. 고월영은 놀라 소리를 질렀으며 작은 얼굴은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아니예요.”“괜찮아, 나는 당신을 다시 한번 나한테만 집중하도록 만들거야!” 그는 머리를 숙으리며 입가에는 고월영이 볼 수 없는 웃음이 머금었다. 고월영의 어깨를 살짝 물었다.고월영은 뭐라고 말하려 했는데 뒤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횡포해지기 시작하였다. 강현우의 손이 힘껏 밑으로 내려갈 때 고월영은 힘껏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하는 자체가 불가능하였고 입만 벌려도 비
강현우가 갑옷을 착용하고 대도를 손에 들고 나올 때 고월영의 심장은 마치 무언가에 심하게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분명 사황형인데!더우기는 은색두구를 착용하고 나니 얼굴은 거의 다 가려 눈가의 눈물짐도 보이지 않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 갑옷과 이 누를 수 없는 기세, 두 눈으로 강현우가 갑옷을 입고 나오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고월영은 자기가 본 사람이 강현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옷차림에 현왕전하라고 하면 누가 못믿겠는가?강현우는 손을 흔들었다. 지언은 곧장 큰 소리로 “장수기를 바꾸라!”라고 외쳤다. 전방에는 ‘고’라고 씌어있던 장수기가 순식간에 “현”자로 변경되었다. 현왕전하가 친히 출정하는데 그가 탈취 못 하는게 과연 있을까? 대군은 수성에서 출발하였는데 나갈 때 운조의 대군이 이미 철수한 후였다. 사실상 현왕전하의 부대가 도착한 그날부터 운조의 부대는 철수할 기미를 보였던것이다. 그 뒤로 현왕전하가 청성을 가지련다고 선포하였는데 운조의 부대가 어찌 감히 남아있겠는가?일부분은 자기들의 경성으로 돌아가 방어하고 일부분은 청성에 지원하러 갔던 것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듯이 자그마한 수성에 현왕전하가 친히 전투를 원조하러 나왔던 것이다. 성문을 나설 때 고월영의 눈길은 강현우의 갑옷을 떠나 저도 모르게 뒤돌아보았다. 성문은 곧 닫길 예정이었는데 성안에는 무릎 꿇고 배웅하는 백성들과 사병들 외에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황형은 무엇을 하고 있을가?그녀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현우가 나타난 뒤로 사황형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고월영은 힘껏 눈을 감고 심호흡하였다. 생각하지 말자. 이 모든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현우는 이미 그녀의 옆에 돌아왔으니 이로써 만족해야 한다. “출발!” 지언은 큰 소리로 명령하였다. 강현우는 말을 타고 앞서있었는데 그 뒤로 12대는 6명을 출동시켜 뒤따르게 하였다. 고용기는 말을 타고 고월영옆으로 와서 말하
그의 대도는 그 누구든지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강현우도 허락못받았다. 온종일 고월영의 머릿속에는 이 말만 맴돌고 있었다. 그는 분명 강현우인데…하지만 그의 손에 잡고 있는 대도도 현월대도가 맞고…그는 또 어리둥절해져 마음까지 말 못 할 무거움에 눌려있었다. 강현우를 찾아 물어보려고 해도 이후로의 3박3일은 강현우를 볼 기회가 없었다. 이 3일은 무아린과 함께 보냈었다. 강현우와 고용기는 선두 부대에 있었는데 셋째 날의 오시에 선두부대는 이미 청성에 5리정도되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 후 야영을 준비하고 휴식을 시작하였다. 고월영은 여전히 강현우를 볼 기회를 찾지 못했다. 밤이 될 무렵에 무아린은 밖에 나가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시작됐어요!”“무슨 의미에요?”하고 고월영은 사색에 잠기더니 벌떡 일어났다. “개전했다구요?”“선두부대는 현왕전하의 인솔하에 청성에까지 쳐들어갔어요! 저희는 빨리 출진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도 됩니다. 저희는 전선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후방에서 그들이 개선하여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고용기가 전에 말하기를 고월영은 가족의 아가씨로서 전장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으며 전장의 무서움도 잘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무아린은 고월영을 반드시 잘 보호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장의 그 피 튀는 화면마저 무아린은 절대 고월영한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월영은 급하게 막사에서 걸어 나오더니 말에 훌쩍 올라타더니 “아린씨, 저도 전방에 가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안 됩니다, 전선은 위험해요!”라고 무아린은 고월영의 말고삐를 당겼다. 고월영은 무아린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아린씨, 오라버니는 지금 전선에서 피 흘리면 싸우고 계신데 가서 보고 싶지 않아요?”“그래도 전선에 가서 보면 안돼요!”무아린은 사색에 잠기더니 눈앞이 번쩍 빛이 났다. “잠시만요!”그는 몸돌려 막사로 급히 뛰어 들어가더니 얼마 안 되어 두 가
청성은 뚫렸다. 운조부대는 크게 패하고 살상자도 많이 나오였다. 고씨군은 청성에 남았으며 대부대는 수성과 연결되었다. 청성성벽에는 다른 한 수령기가 꽂혀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현’자였다. 현왕전하는 청성에 남지 않았지만 청성은 이제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누가 이 수령기를 건드리면 수령기는 그의 성루에 꽂히게 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청성을 뚫는데 하루밤이라는 시간밖에 안걸렸네.”고용기는 무아린이 건네준 따뜻한 수건을 받아 얼굴의 핏자국을 닦았다. 고월영은 전장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생각하느니 지금까지 마음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래도 월영의 체면이 서는구나, 현왕전하를 요청하여 성루를 공파하다니! 나도 이렇게 큰 성을 하루밤사이에 차지할 거라고 생각못했네.”“아니, 준확하게 말한다면 현왕전하는 두어시간만에 성문을 뚫어버렸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야!” 고용기의 현왕전하에 대한 숭배는 흐르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느껴졌다. 현왕전하는 남령의 전신으로서 손색이 없으며 전투하는 모습 또한 진정한 신을 연상케하였다. “당신도 엄청 강하잖아요!”무아린의 눈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용기밖에 없었다. 고용기는 그래도 고월영을 바라보며 “나는 현왕전하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올려야겠어. 월영이도 나와 함께 가자꾸나. 전하는 네가 청해왔으니 너도 몸소 감사드려야지!”고월영은 이렇게 오라버니한테 끌려 강현준의 막수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지언은 “고장군와 왕비님,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이미 밤새 황성으로 복귀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복귀하셨다고요?”고용기는 의아해하였다. 이건 무슨 의미이지?분명 강현우인데 …지언은 웃으며 “조정에서 급보가 도착하여 전하는 방금전에 출발하셨습니다. 하지만 왕비님,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전하의 분부대로 12대의 형제들이 왕비님을 황성까지 보호해서 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언은 고용기를 보면서 “고장군님은 전에 무단이탈하셨다가 이번에 죄를 덮어쓰고 공을
이번엔 고월영은 전혀 방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뒤돌아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현왕전하의 현월대도는 100여근이나 되어 오직 전하께서만 자유자제로 사용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그녀는 표정이 없었고 심지어 좀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제가 전장에서 현우씨가 전하의 현월대도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자기 무기를 다루듯이 자유롭게 사용하던데요?”“네가 언제 현우가 전장에서 싸우는 걸 보았더냐?”강현준은 코웃음을 짓더니 “아니면 너는 너의 남자조차 알아보지 못한게더냐?”“무슨 말씀이신가요?”고월영은 온몸이 뻣뻣해졌다. “10일전에 너의 오라버니 대신 파성을 한 사람이 바로 이 본왕이야! 이 멍청스런 여자니라구야!”강현준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네 생각에는 현우의 독이 가라앉은지 얼마 안 되는 이 상황에서 본왕이 현우더러 출정하여 싸우라고 했겠느냐?”라고 말했다. “전하가 하신 말씀이 진짜인가요?” 고월영은 마음이 번쩍 흔들렸으며 눈가에는 기쁨이 그려졌다. 하지만 바로 그 기쁨을 가라앉였는데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혹이 가득찼다. 그녀는 더 이상 터무니없는 생각을 감히 못하였다. 강현준은 그와 해석하는 것을 귀찮아하더니 “지금 당장 나랑 함께 궁에 들어가자꾸나. 황조모께서 너를 뵙자 하신다.”라고 말했다. “황조모님께서 … 왜 저를 뵈려 하실까요?”“너는 본왕이 너희 여자들의 생각을 알거라고 생각하느냐?” 강현준은 차갑게 고월영을 힐끗 보더니 “본왕을 두 번이나 때렸으니 본왕이 너를 죽이지 않으면 감사해야지, 본왕앞에서까지도 허튼소리를 하고 있구나!”고월영은 여전히 그를 쳐다만 보았다. 강현준 말로는 그날 밤 성을 격파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했는데 고월영은 자기 두 눈으로 강현우가 들어가 환복하고 마지막에 갑옷까지 착용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일은 정말 이렇게 간단할까?“왜 또 멍때리고 있는거냐? 너는 일부러 본왕이 너를 안고 입궁하기를 원하는거느냐?”고월영은 몸을 돌려서 바로 걷기 시작했고 아
강현준은 고월영을 데리고 안비의 침궁으로 가려 했다. 그는 강현우가 지금 바로 안비의 침궁에 있다고 하였다. 강현준은 마음속으로는 억울함을 느끼게 되었다. 표정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고월영은 강현준이 화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현준은 심지어 아무런 약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정말 그녀가 틀린 걸까?사실은 정말 강현준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걸까? 그는 강현우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자기가 친히 전장에 나갔다고 한다. 정말 그런 걸까? 두 사람이 가산을 돌아갈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두 가지 목소리가 들렸다. 고월영은 마음이 섬뜩했다. 이런 내궁에서 밀회를 가지다니…이는 머리를 날릴 큰 죄이다. 어느 시위와 궁녀인지 모르겠지만 담이 정말 크네!강현준을 보았더니 분명 그도 들었을 법한데 여전히 침착하게 걷고 있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였다. 설마 이런 일은 황궁내에서 자주 겪는 일인가?고월영이 계속해서 걸어가려던 참에 가산 뒤의 두 사람은 말을 하였다. “어떠세요? 옥비마마, 본 세자가 그 영감탱이보다 훨씬 대단하죠?”“당, 당연하죠! 영감보다 엄청 대단해요!”고월영은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궁녀와 시위가 아니라 후궁의 첩이었구나!고개를 들어 강현준을 쳐다보았더니 현왕전하도 멈추고 손을 흔들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의 가산은 현왕의 내공에 의해 산산조각이 돼버렸다. 모래와 돌멩이가 사처로 날아가고 홀딱 벗은 두 몸둥아리도 진동에 의해 날려 나와 팍팍 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옥비마마라고 하는 이는 이미 장력에 의해 혼미하였다. 팔다리는 사방으로 뻗어 땅바닥에 쓰러져있었고 몸은 피투성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 다른 한 남자고월영은 한번 힐끗 보았다가 바로 고개를 돌리고 다시 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실타리 하나 걸치지 않았고 온몸은 모래와 돌멩이에 긁힌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내공이 좀 있는 것 같았는데 바닥
“아!”하고 고월영은 자기의 비명소리와 함께 깨어났다. 깨어나자마자 그를 엄청난 공포로 몰아넣은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를 다치지 마요!” 라고 침상밖으로 밀어냈다.침대옆의 남자는 피하지 않았고 고월영의 밀침을 그대로 받아냈다. 하지만 그녀의 내공이 너무 옅은 관계로 아무 타격도 내지 못했다. 다만 그녀의 공포에 질린 모습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월영아, 괜찮아?”“다치지 마!”고월영은 그를 째려보며 떨리는 손으로 “오지 마! 오지 말라고!”“월영아, 나 현우야!”“아니야, 너는 강현준이야! 너는 현우가 아니야!”강현우는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라고 말했다. 고월영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온화한 눈길을 바라보니 경황불안한 마음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현…우씨?”고월영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눈가에는 확실히 눈물점 하나가 보였다. 하지만 그와 강현준이 너무나도 비슷하여 그는 전혀 구분할 수 없었다. 이 눈물점이 만약 연이수의 약물로 그린거라면? “황조모께서 옥체가 편찮으셔서 나와 사황형더러 들라 하셨는데 아마 그는 기다리지 못하실…”강현우는 계속하지 않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너는 내가 너랑 함께 오지 않아서 원망하느냐?”라고 물었다. 고월영은 이 문제에 대답하지 않았고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강현우는 “요며칠 태후마마께서의 옥체가 그나마 좀 나아지셔서 좋아하는 후손들을 보고 싶어 급하게 궁에 들라하셨어.”“그래서 내가 복귀하자마자 궁으로 들라고 하셨나요?”라고 고월영은 눈길을 아래로 보았다. 강현우가 한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 아니다. 태후의 옥체상황이 아마도 안 좋은 것 같다. 내일 꼭 그분을 찾아뵈러 가야겠다.하지만 고개 들어 강현우를 쳐다볼 때 눈길에는 여전히 열정이 없었다. “왜 그러느냐? 왜 그런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거냐?”라고 강현우는 그녀를 향해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품속에 안으며 “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