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아가씨, 이것 하나만 명심하셔야 해요. 눈가에 눈물점이 있는 분이 오늘 아가씨와 혼례를 올릴 부군이랍니다.”시녀는 출발하기 전 이제는 몇 번 반복했을지 모르는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아가씨, 짓꿎은 형님께서 초야에 장난을 칠 수도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계셔야 해요!”고월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그와 강현우가 마침내 혼례를 올리는 날이다.그녀의 부군이 될 사람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있었는데 둘은 생김새가 거의 똑같다고 했다.유일하게 그들을 분간할 수 있는 것이 강현우의 눈가에 있는 눈물점이었다.강현우는 온화한 성격에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형 강현준은 남령국의 전신(戦神)으로 추앙받는 현왕(玄王) 전하로, 수많은 오랑캐의 목을 벤 잔인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전해진다.고월영은 비록 현왕 전하를 알현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분간하기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부군을 못 알아보는 새신부가 어디 있다고!분장을 담당했던 시녀들이 물러가고 정신없는 혼례 절차를 끝낸 끝에 드디어 밤이 돌아왔다.홀로 신방에 남은 고월영은 굳게 닫힌 방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곧 강현우와 초야를 치를 것을 생각하니 괜히 긴장되고 손발이 떨렸다.처음은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깊은 밤.문이 열리고 훤칠한 그림자가 방 안에 드리웠다.짓꿎은 장난을 치는 무리들도 없었고 그는 홀로 신혼 방으로 돌아왔다.그의 등장과 함께 농후한 술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취했을까?고월영은 긴장한 듯 두 손을 교차하고 그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렸다.남자는 바로 다가오지 않고 술잔에 술을 두잔 따랐다.그리고 술잔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기도 전에 냉랭한 기운이 먼저 느껴졌다.그가 고개를 숙이고 접근해 오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두근 뛰었다.“많이 긴장한 것 같군.”남자는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손끝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고월영이 아는
고월영은 이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남자의 정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마치 전장에서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장군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그가 줄곧 후방에 있었기에 고월영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그녀가 매번 고개를 돌리려 할 때마다 그가 입술을 부딪혀 왔다.그 뒤로는 더 무시무시한 공세의 연속이었다.몸과 영혼이 분리되는 느낌이었다.결국 그녀는 기진맥진하여 까무러치듯 잠이 들었다.그렇게 얼마를 잤을까… 아침이 왔다.고월영은 잠결에 자신을 보듬는 손길이 느껴졌다.더 이상 거칠지 않고 마치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전하?”고월영이 당황하며 눈을 번쩍 떴다.“전하!”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완벽에 가까운 그의 얼굴이었다.눈가의 눈물점이 선명하게 보였다.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눈물점을 힘껏 문질렀다.색상이 날아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려 넣은 점이 아닌 건 확실해졌다.그녀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왜 그래? 어제 내가 너무 거칠어서 많이 놀란 건가?”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을 살짝 쓰다듬었다.그의 미소는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했다.“미안해. 어제 술을 좀 마셨더니… 그리고 처음이라 내가 자제를 좀 못 했군.”이 사람도 처음이었구나.고월영의 창백한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겁낼 거 없어. 앞으로 많이 자제할 테니.”강현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보드라운 그의 입술이 목선을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자… 잠깐만요!”고월영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얼굴… 다시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그녀는 약간 넋을 잃은 표정으로 눈가의 눈물점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어쩐 일인지 조금 전의 온화한 기운은 싹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강현우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만약 이 눈물점이 사라진다면 내 부인은 그래도 나를 알아볼 수
고월영은 강현우와 강현준이 외모가 많이 비슷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쌍둥이라도 이 정도로 똑같을 줄이야!그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왔다.차갑고 냉철하며 음산하기까지 한 분위기!한번 눈이 마주치면 저절로 시선을 피하게 하는 압도적인 기운을 가진 존재였다.황족의 타고난 기품과 자신감, 그리고 주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압도적인 존재감까지! 옆에 있는 것만으로 저절로 숨이 안 쉬어졌다.역시 그녀의 부군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고월영은 서둘러 그에게 예를 취했다.“현왕 전하를 뵙습니다.”하지만 상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사뿐이 걸어서 그녀를 지나쳤다. 마치 고월영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했다.그는 마차에 올라 가림천을 내렸다.고월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동행하기로 한 호위 무사 지언이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왕비 마마, 준비한 마차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시간이 촉박한데 지금 수리가 가능하겠느냐?”고월영은 조바심이 났다.혼례 다음 날 입궐하여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인사를 올리는 건 황가에 시집 온 여인이라면 절대 태만할 수 없는 행사였다.“수리는 어렵지 않지만 제 시간에 맞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현왕 전화와 같은 마차를 타시고 입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현왕과 같은 마차를?저쪽을 보니 크고 화려한 마차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고월영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어쩐 일인지 그분을 보면 온몸이 긴장하고 두려움이 앞섰다.지언은 그녀가 말이 없자 다시금 재촉했다.“지체할 시간이 없사옵니다. 왕비마마, 어서 가시지요!”그렇게 고월영은 강현준의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마차 공간이 커서 두 사람이 타도 전혀 비좁지 않았다. 강현준은 상석에 앉아 있었고 고월영은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거대한 압박감에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다.“혀… 현왕 전하,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그는 아까부터 그녀를 뚫어져라 빤히 바
“송구합니다!”고월영은 허둥지둥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그런데 또 하필이면 마차가 흔들거리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이번에는 아예 강현준의 몸으로 쓰러졌다.손에 무언가가 잡힌 것 같았는데 천을 사이에 두고 딱딱하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아!”고월영은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손을 거두었다.그녀의 작은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상기되었다.아무리 실수였다지만 어떻게 하필이면 거기를….가장 두려운 것은 실수로 잠깐 스친 것뿐인데 물건이 딱딱하게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그것은 옷을 뚫고 나올 기세로 높이 솟아 있었다.고월영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푹 숙였다.“어제 혼례를 올린 여왕비가 감히 대놓고 이 몸을 유혹하려 하다니. 이 죄를 어떻게 물어야 할까?”“현왕 전하, 그런 거 아닙니다!”고월영은 다급히 손을 내밀어 그를 밀치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하지만 강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런 게 아니라니?”현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그럼 조금 전에 만진 건 뭐지?”“고의는 아니옵니다!”고월영은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고의가 아니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남자에게 커다란 굴욕감을 선사한 것도 사실이었다.게다가 상대는 부군의 형님이 되시는 현왕 전하라니!그래도 이건 사고였다고!“현왕 전하….”“그 말을 이 몸이 어찌 믿을까?”강현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들어올렸다. 고월영은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꼈다.고개를 들자 무시무시한 눈빛과 마주했다.가녀린 몸은 긴장감에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강현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목덜미로 내려왔다.하얗고 가녀린 목덜미는 그가 조금만 힘을 줘서 잡으면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개를 들고 있는 까닭에 고월영의 옷섶이 약간 벌어졌다.현왕의 각도에서 보면 눈부시게 하얀 쇄골이 은은하게 보였다.눈처럼 하얀 피부에는 어젯밤 남자가 남긴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강현준의 눈빛이 탁해졌다.고
고월영은 그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 인간이 꼭지가 돌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현왕 강현준은 소문에 전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었다.싸늘하고 철두철미하며 잔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하필이면 이런 사람이 여왕이 가장 존경하는 형님이라니….고월영은 조심스럽게 사과를 이어갔다.“송구합니다. 다 소인이 부덕한 탓입니다. 제발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고월영은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런 숨막히는 느낌은 처음이었다.남자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둔부에서 머물고 있었다.마치 이 징벌을 계속 이어갈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했다.마차는 계속 달리는 가운데, 고월영은 여전히 그의 무릎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자신의 운명이 다른 사람의 결정에 좌우지 된다는 이런 느낌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얼마나 지났을까. 현왕은 드디어 그녀를 놓아주었다.고월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그와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으로 가서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정리했다.물기를 가득 머금은 그녀의 눈빛은 두려움과 경계심으로 가득했다.정리를 마친 그녀는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그런데 강한 힘이 다시 그녀를 잡아당겨 바닥에 주저앉혔다.“어딜 도망가려고? 이 몸이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게 가능할 것 같았어?”강현준이 비웃듯이 말했다.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그를 노려보았다.“어찌….”강현준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억울해?”고월영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아닙니다. 제가 먼저 잘못을 했으니까요.”강현준은 온기 한점 없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힐끗 바라보고는 병법 서책을 꺼내 느긋하게 읽기 시작했다.마치 조금 전의 행동은 진짜 무
“흣….”고월영이 일부러 신음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강현준의 거친 공세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온 것이다.어떻게 여인을 이렇게 거칠게 다룰 수 있는 거지?그녀는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그러다가 그가 왜 이러는지 알아챘다.하지만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만약 부현 공주가 가림천을 연다면….지척에서 들리던 공주의 발걸음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고월영은 이를 질끈 깨물고 강현준이 다시 몸을 부딪혀 올 때 신음을 내뱉었다.“앗….”걸음을 멈춘 공주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이… 이게 무슨 소리지?살이 부딪히는 마찰음과 여자의 비명이라니….“유리야, 이쪽으로 오너라!”양왕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여동생의 손을 잡아끌었다.‘아니 현우 이 녀석은 아무리 신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절제를 못해서야….’앞에서 마차를 몰던 지언도 신음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멀리서 양왕과 부현공주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게 보이자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더 이상 양왕과 부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에야 고월영은 드디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그녀는 강현준을 힘껏 밀치며 새초롬하게 말했다.“현왕 전하,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강현준이 그녀의 가슴에서 천천히 얼굴을 들더니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싸늘하게 말했다.“이 몸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한 주제에 일이 다 끝났으니 이대로 내치는 건가? 여왕비는 정말 양심도 없군!”“전하….”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이내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다시 냉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다.고월영은 얼른 자신의 자리로 가서 황급히 옷매무시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너무 민망하고 어색해서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다행히 강현준은 다시 병법서에 시선을 돌리고 그녀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고월영은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지금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이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져야겠다는
고월영은 당황했다.간담이 서늘하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강현준은 더 이상의 얘기 없이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그러더니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월영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그는 여왕일 리가 없다.눈물점은 그녀가 손수 그려준 것이고 문지르면 지워지는 것이었다!그러나 어제의 눈물점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한 거지?고월영은 호흡을 가다듬고 가림천을 열었다.그녀는 강현준의 손을 피해 마차의 변두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강현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멀지 않은 곳에서 부현공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현우 오라버니, 정말 오랜만입니다!”양왕 강남정도 웃으며 다가왔다.“폐하께 인사 드리러 온 거야? 신혼 축하해!”고월영은 긴장한 표정으로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다.그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강현우의 기품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부현공주와 양왕 전하는 정말 아무런 낌새도 눈치 못 챈 건가?두 사람은 강현준과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함께 대전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지언이 고월영에게 다가와서 공손히 말했다.“왕비마마,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대전으로 드시어 황제폐하와 황후마마께 인사를 올리지요.”“그… 그러자꾸나.”고월영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강현준을 따라갔다.궁중예절은 까다롭고 번잡했다.그런데 아무도 현왕의 위장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고월영이 예를 올리는 과정을 다 지켜보고는 입을 열었다.“태후께서 요즘 건강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궁에 왔던 김에 태후마마도 뵙고 가고 싶군요.”황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황후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월영에게 말했다.“오황은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지요. 앞으로 왕비가 옆에서 많이 보필해 주세요.”고월영은 그 말이 당혹스러웠다.여왕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니? 그와 일년을 교제했지만 한 번도 어디 아픈 티를 낸 적은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