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감옥 입구에 가까워지자 고용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현우는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서 고월영과 고여추가 당도하기 전에 고용기의 혈자리를 봉인하여 진정시켰다.하지만 고용기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고 입술도 검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혈자리가 봉인되어 더 이상 발광할 수 없게 되자 충독이 체내에서 날뛰며 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고월영은 가슴이 철렁하며 얼른 다가가서 약을 꺼내 그의 입안에 넣어주었다.강현우는 고용기를 부축하여 앉힌 뒤에 어깨를 잡고 기를 운용하여 독을 억제하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용기의 충혈된 눈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약이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네요.”가슴을 졸이던 고월영이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월영아?”정신을 차린 고용기는 전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 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강현우는 고월영과 시선을 교환한 뒤, 그녀의 허락을 받고 혈자리 봉인을 풀었다.“오라버니, 좀 어떠신가요?”고월영이 다급히 물었다.고용기는 그제야 자신이 충독이 발작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여추가 손수건을 꺼내 고월영에게 건넸다.고월영은 오라버니의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준 뒤, 강현우와 함께 그를 부축해서 일으켰다.고용기의 손발은 차가운 쇠사슬에 묶인 상태였다.“현우 오라버니….”고월영은 간청하는 눈빛으로 강현우를 바라봤다.강현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발작을 일으켜서 더 큰 사고가 날까 봐 연일이 족쇄를 잠근 것 같구나.”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는 족쇄를 풀어주지 않는 게 나았다.고월영은 안쓰러운 얼굴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현왕은 여느 수감자를 대하는 것처럼 각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옥 중이었지만 침대도 있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상과 의자도 마련해 주었으며 상 위에는 진귀한 차도 놓여 있었다.둘은 고용기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고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오라버니, 안색이 안
고용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월영이 네가 무안희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열 살이면 세상 물정도 모를 때고 우리가 만난 적도 없는데 어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함하느냐?”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다독였다.“오라버니,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하지만 저도 들은 게 있고 느끼는 게 있어요. 다만 증거가 없어서 말을 못한 것뿐이지요.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무안희는 열 살 때부터 이미 충독을 사용하여 사람을 해치기 시작했어요. 그 여자는 절대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선한 처자가 아니에요. 오라버니가 속은 거예요.”“월영아!”고용기는 여전히 못 믿는 태도였다.무안희가 열 살이면 고월영은 그때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러니 십 년 전의 일에 대해 뭘 안다고 저렇게 말하는 걸까?“알겠어요. 증거가 없으니 더 뭐라 하지 않을게요.”고월영은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월영아, 네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고용기의 기분은 엉망이었다.무안희가 무아린에게 중상을 입히는 장면을 직접 보았을 때 그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비록 혈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자매였다. 그는 무안희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라버니, 체내에 있는 그 충독 누구한테 당했는지 정말 모르시나요?”고월영이 또 물었다.고용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사실 날 구해준 사람은 아린이가 아니었어.”“무안희라는 말씀인가요?”고월영의 질문에 고용기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마음을 주게 된 건가요? 하지만 무안희는 백단교의 성녀라서 마음을 숨기려고 했던 거고요. 이 일이 알려지면 무안희가 곤란해지니까요.”고용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고월영이 말했다.“어쨌든 지금 시급한 건 충독을 해결하는 거예요. 독이 해제되면 오라버니도 정신을 차리겠죠.”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
부드러운 달빛이 완전무결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었다.강현우는 넋을 놓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겉으로는 티 나지 않았지만 손에는 이미 땀이 흥건히 고였다.그는 긴장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어쩌면 그가 필요한 건 진솔한 답일지도 모른다.그 답을 알더라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답이었다.고월영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하, 이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아요.”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강현우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월영아….”“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앞으로 마음이 가는 여인이 생기면 그때 저를 내치셔도 좋습니다.”말을 마친 고월영은 안으로 들어갔다.강현우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런 날은 아마 평생 오지 않을 거야.”하지만 앞서가던 고월영은 그의 절절한 고백을 듣지 못했다.“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서 쉬시지요.”방 문 앞에 당도한 고월영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전하께서 건강을 회복하셨는데 현왕 전하께서 최근에 계속 부상을 당하시니 현왕께서 하시던 일을 대신 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전하를 한가히 놀릴 것 같지도 않고요.”“알아.”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그럼 내일 보자, 월영아.”뒤돌아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말했다.“언젠가는 허울 뿐인 친왕이 아닌 진짜 왕이 되어 너를 지켜주겠다.”일국의 친왕은 나라를 위해 공적을 세워야 했다.여왕이라는 칭호도 결국 형인 현왕의 덕을 입어서 내려진 것이었다.하지만 오늘부터는 진짜 친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안으로 들어갔다.무아린은 이미 깨어 있었고 시종이 그녀를 돌보고 있었다.고월영은 시종의 손에서 탕약을 받아 들고 말했다.“여긴 내가 있을 테니 넌 그만 나가 보거라.”“예, 마마.”시종은 공손하게 예를 취한 뒤, 물러갔다.
이어지는 며칠간 고월영은 성심껏 무아린을 돌보았다.부상이 심각했기에 짧은 시간 안에 완쾌하는 건 불가능했다.하지만 고월영의 살뜰한 보살핌 덕분에 무아린은 느리지만 천천히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3일째가 되었을 때 무아린은 이미 스스로 정원을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그 3일 동안 강현우도 바쁘게 보냈다.강현준은 아직 요양 중이었기에 현왕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고 정왕과 함께 성 안팎에 있는 간첩들을 추려내느라 굉장히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소문에 운조인들은 서령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겉으로 보기에는 운조에서 보낸 것 같지만 사실 저들은 서령국의 괴뢰일 수도 있어.”“괴뢰요?”그가 갑옷을 벗는 일을 도와주던 고월영은 흠칫하며 무 공자의 얼굴을 떠올렸다.“누구의 꼭두각시로는 안 보였어요.”고귀하고 순결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고작 서령국의 괴뢰일 가능성은 없는 것 같았다.괴뢰라면 무릇 음산한 분위기를 사방에 풍기고 다니는 좀비와도 같은 자들이 아닌가!“어쩌면 녀석이 괴뢰 두목일 수도 있겠지. 큰 형님마저 그 괴뢰들에게 당했어.”고월영은 젖은 물수건으로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자란 강현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하지만 아직은 녀석들이 운조인인지 아니면 서령에서 왔는지 확실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어. 그런데 놈들이 쓰는 무공 초식이 이상해. 마치 아주 특별한 훈련을 받은 놈들 같았어.”“괴뢰들이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고요?”고월영은 괴뢰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일반적인 괴뢰는 아니야. 보통 괴뢰들은 온몸에 죽음의 기운을 풍기고 독을 달고 다니는데 놈들은 아니었어.”“그 놈들이 어땠는데요?”“뭐랄까….”강현우는 갑자기 허기를 느끼며 상 위에 있는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고월영은 못 말린다는 듯이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손 안 씻으셨잖아요. 손에 피가 잔뜩 묻어 있는데 어서 목욕이나 하고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그냥 여기서 씻으면 안 될까? 부탁이야. 너무 배고파서 운려각까지 가고 싶지
“최근 여왕 전하는 밖에서 돌아오면 줄곧 영하각에서 왕비 마마와 함께 목욕하고 식사를 즐긴다고 합니다.”“뭐라?”둔탁한 소리와 함께 강현준이 쥐고 있던 백옥 젓가락이 두 동강이 났다.지언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다시 해명했다.“아… 아닙니다. 목욕을 같이 즐긴 건 아니고… 여왕 전하 혼자 여왕비 마마의 방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합니다.”강현준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하지만 가슴까지 올라온 뜨거운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부족했다.지언은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어쨌거나 부부 아니겠습니까….”“당장 나가!”고함소리와 함께 지언은 도망치듯 현왕의 방을 나갔다.첩보원 업무는 정말이지 피곤하고 간담이 서늘한 일이었다.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사실을 말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강현준은 식탁에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을 보고 순간 입맛이 떨어졌다.지언이 떠난 뒤로 홀로 남게 된 방 안에서는 고독의 향기만 풀풀 풍겼다.그는 자신이 뭘 기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20여 년의 거의 대부분 시간을 홀로 식사를 해결해도 느낀 적이 없던 고독감이었다.그런데 영하각에서 둘이 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상실감이 몰려왔다.‘하!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나?’강현준은 홧김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술잔에 술을 따랐다.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전하, 여추 아씨가 뵙기를 청하옵니다.”고여추의 등장은 안 그래도 심란한 그의 마음에 짜증만 더 불러일으켰다.“당장 돌아가라고 하거라!”말을 마친 그는 술잔을 비우고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아씨께서 장군부에 계실 때 여왕비가 자주 애용하던 물건들을 가져와서 전하께 바치겠다고 하옵니다.”지언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여왕비는 분명 영하각에 있는데 왜 그녀의 물건을 고여추가 가져온 것일까?그는 소박하지만 신경 써서 입고 온 듯한 고여추의 차림새와 그녀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고 뭔가 알 것 같기도
강현준은 혼란스러운 심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그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고여추가 내려놓은 서책을 집어들었다.책을 열고 고월영의 필체를 확인하자마자 그는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일반인은 알아볼 수도 없는 조잡한 설계도였는데 강현준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그녀는 가끔은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특별한 생각을 가진 여인이었다. 가끔 마치 자신은 이 시대 사람이 아닌 것처럼 굴기도 했는데 캐물으면 대충 둘러대고는 했다.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서 강현준도 더 캐묻지 않았다.우아한 곡조가 계속되고 있었다.둘만 있을 때 그녀가 자주 흥얼거리던 곡조였다.강현준의 의식은 점차 곡조에 같이 녹아들기 시작했다.유쾌하던 곡조가 언젠가부터 우울하고 애잔한 흐름을 타기 시작하더니 끝으로 달려갈수록 절망의 기운을 띄고 있었다.그는 마치 울고 있는 고월영을 눈앞에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좋아하는 꽃들이 만개한 산마루에 앉아 멍하니 꽃밭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강현준은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갑자기 고개를 든 그녀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갖은 혐오와 증오가 가득한 눈빛이었다.“다 전하 때문입니다! 왜 저와 현우 오라버니를 갈라놓아야만 했나요? 왜 그렇게 저희한테 모질게 대하셨습니까?”“제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전하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저의 아이를 죽였습니다!”“전하, 차라리 죽지 그러셨습니까? 살아 있는 전하를 보는 하루하루가 괴롭습니다!”“안비는 전하를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뿐이 동생은 전하를 두려워하죠. 저도 전하가 두렵습니다. 이 세상에 전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차라리 죽지 왜 그리도 끈질기게 살아 계신 겁니까?”강현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피부를 뚫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모두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구나.’‘내 존재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행만 가
강현준은 전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고여추는 점점 숨이 막히고 정신이 흐릿해졌다.이대로 죽는 걸까?총기를 담은 눈동자는 강현준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다.물론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다.다섯 손가락은 계속해서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고여추는 점점 생기를 일어갔다.‘내가 죽으면 다들 행복해할 거라고?’‘내가 왜 모두를 위해 목숨을 희생해야 하지?’‘저들은 뭐가 잘났다고?’‘뭐가 잘나서 너희들은 다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거지?’“전하!”수상한 인기척을 들은 지언은 밖에서 애타게 전하를 외치다가 답이 없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그리고 모시는 상전이 고여추의 목을 조르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여추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눈알은 이미 뒤집혔고 혀끝이 점점 튀어나오고 있었다.“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왕비 마마께서 평생 전하를 증오할 겁니다!”하지만 애타는 부름에도 강현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지언도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전하, 월영 아씨가 괴로워할 겁니다!”그제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고여추의 몸이 튕겨져 나가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지언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신속히 진기를 그녀의 체내에 흘려보냈다.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고여추는 세게 기침을 하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이미 각오하고 행한 일이지만 죽음의 직전에서 느낀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눈물이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렸다.“왜 나를 암살하려 했느냐?”강현준은 의자에 앉아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실패했으니…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부 소인이 혼자 행한 일이니… 죽이든 거리에 내몰든 마음대로 하시지요.”고여추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이번에는 실패했지만 기회만 되면 계속할 것입니다.”“끌고 가서 옥에 가두거라.”강현준은 지언에게 손짓하고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그는 고여
술을 마시고 있던 강현준은 고월영의 방문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네 언니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러 온 거라면 당장 꺼져라.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서 네 응석을 받아줄 수 없어.”말을 마친 그는 잔에 든 술을 한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만나게만 해주세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라도….”“그년도 고 장군처럼 충독의 통제를 받아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잔을 내려놓은 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반적인 암살이 아니었다. 섭혼술을 사용했어.”섭혼술이라는 말에 고월영은 가슴이 철렁했다.섭혼술이라면 고여추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시전했다는 의미였다. 충독에 통제 당한 사람은 절대 섭혼술을 시전할 수 없었다.‘언니가 대체 왜 그런 짓을….’“전하, 여추 언니는 어릴 때부터 장군부의 편전에서 자랐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바깥세상에 나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예요. 언니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그런 일을 행했을 리는 없습니다.”“그리 멀리 서서 웅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안 들리는구나. 이리 가까이 와보거라.”강현준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월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내가 두려운 것이냐?”강현준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그리도 나를 무서워하면서 왜 찾아온 거지? 당장 꺼지거라!”고월영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자객이 암살 시도를 한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그는 평소보다 기분이 훨씬 안 좋아 보였다.고월영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어렵사리 걸음을 떼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전하, 언니는….”“네 얘기를 할 거면 이리 와서 앉고 다른 여자 얘기를 할 거면 듣고 싶지 않으니 나가.”고월영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고여추 일이 아니면 그와 독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예. 그럼 제 얘기를 해보지요. 옥으로 가서 언니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강현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더니 주먹으로 상을 내리쳤다.“이리 와서 술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