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왕 전하의 간택.이 일은 오래전부터 안비가 나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사실 고월영은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안비가 매번 그녀를 부르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뭐라 해도 현왕부의 여주인이니, 이일은, 그녀가 꼭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그저 고월여이 생각지 못한 건, 오늘 강현준도 자리에 있다는 것."준아, 출정 전에 이미 그 아가씨들을 보았을 텐데, 그중 누가 더 좋더냐?"안비가 말을 묻자마자, 고월영이 시녀와 함께 들어왔다.안비가 웃으며 손짓했다."영아, 너도 이리 와 앉거라."고월영이 늦은 걸음으로 걸어가 나긋한 소리로 말했다."모비."그리고 시선이 강현준에게 떨어졌다.그녀가 크게 아프고 난 뒤, 처음으로 강현준을 만났다.많은 시일들이 지나, 그의 부상도 많이 나은듯했다.적어도 그때만큼 안색이 창백하진 않았다.고월영은 눈을 내리깔고 나긋이 불렀다."현왕 전하."비굴하지도 않고 미적지근했다.이리도 담담하니, 안비조차도 흠을 잡을 수 없었다.강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안비가 그를 힐끗 쳐다보곤 나무랐다."영이도 이젠 우리 현왕부 사람이고, 너의 제수인데, 이 안 좋은 성격도 좀 넣어두거라.""예."강현준이 담담히 응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월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월영은 안비 곁으로 가 앉았다.시녀들은 차를 올린 후 모두 물러갔다.안비는 고월영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영아, 전에 그 아가씨 셋이 왔을 때, 너도 만났다 하던데, 어떠하더냐?"고월영의 안색엔 변화가 없었지만, 속으론 안비의 말뜻을 이해했다.이 왕부안 곳곳엔, 다 안비의 밀정들이 있다.그날 강현준을 찾으러 왔을 때, 확실히 세 아가씨를 만났었다.이 모든 걸, 안비는 다 알고 있었다.고월영은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안비를 바라보았다."세 아가씨를 확실히 다 만나보았습니다, 모비, 사실대로 고 할까요?""말해보거라."안비의 눈엔 웃음기가 어려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준아!"안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하지만 강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영이가 본인과 똑같은 사람을 찾으면 되겠네요!"안비의 눈가엔 어두운 기운이 스쳐갔지만, 고월영을 바라볼 땐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영아 화내지 말거라, 네 사황형은 그저...""사황형의 뜻을 알겠습니다."고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쾌함이 느껴지긴커녕 오히려 무언가를 확 깨달은듯해 보였다."저희 집안엔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자매들이 많습니다. 사황형의 뜻은, 저의 언니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까?"강현준은 차고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고월영은 그저 안 보이는 척 여전히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마침 며칠 뒤 장군부에 돌아가려 하는데, 사황형을 위해 신경을 쓰겠습니다. 어느 언니가 원하...""너의 언니도, 너처럼 생겼더냐?"강현준의 깊은 눈망울엔 웃음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그럼 좋긴 한데, 너도 쌍둥이 언니가 있거든, 그녀를 본 왕에게 시집오라 하거라!""그럼, 본 왕도 고를 필요가 없으니!"강현준이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모비, 아들은 아직 할 일들이 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말을 마친 뒤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고월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안비의 표정은 담담해,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온몸에서 풍기는 한기를, 옆에 앉은 고월영은 똑똑히 느꼈다.고월영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모비, 저에게는 쌍둥이 언니가 없습니다. 허나, 저의 언니들 모두 다정하고 가련합니다.""모비가 좋으시다면, 돌아가 그들에게 말을 해놓겠습니다. 만약 언니들도 사황형에게 뜻이 있다면, 화상을 올리라...""필요 없다!"안비는 손을 저으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너의 언니들은, 이미 화상을 올려왔다."고월영은 의아했다.하지만 그저 거기에 그쳤다.그녀는 웃으며 답했다."사황형은 남령국의 전신이시니, 남령국의 아가씨들은 아마 대부분이
고월영은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 난간에 앉아 있는 강현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사황형은 아현이 제일 경애하는 형님이십니다. 사황형의 혼사를, 아현도 필히 관심을 가지겠죠.""전 아현의 부인으로서, 모든 일은 아현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아현이 관심하는 일은, 저도 당연히 관심하죠."아현!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강현우를 구별하려는 건가?강현준은 눈빛이 냉랭했다. 그는 난간에서 뛰어내려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하지만 고월영의 시선은 그를 넘어서, 장랑 끝에 있는 그림자를 향해갔다."아현!"강현준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장랑 중간에 위치한 계단으로 걸어가, 한 계단 아래로 향해 걸음을 내딛고 떠났다.강현우는 그를 한참 바라보고서야 고월영을 향해 걸어갔다."모비가 부인을 청해갔다고 해서, 모비께 찾아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들으려 했어.""아현은 모비가 절 난처하게 만들가봐 그러는 건가요?""영아, 왕부 같은 곳에서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된다."강현우가 낮은 소리로 탓했다.고월영은 담담히 웃어 보였다."왕부 같은 곳은, 사사건건 규칙을 지켜야 하는 건가요? 이런 곳에서, 전 어떻게 지내야 하나요?"그녀는 영하각을 향해 걸어갔다.강현우는 그녀 곁에서 걸으며, 내심 자책감을 느꼈다."혹시 이곳이 너에게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나가고 싶어?"고월영은 의아했다."부군도 정말 나가고 싶어요?""만약 당신이 좋다면, 당신과 함께 나가 한동안 지낼 순 있지만...""결국은 돌아와야겠죠, 아닌가요?"고월영은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진지하게 그를 바라봤다.그와 강현준은 확실히 많이 닮았고, 보통 사람이라면 그들을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고월영은 단번에 보였다.아현은 아현이고, 강현우는 강현우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 아니다."영아, 우리가 사황형을 버리고 나간다면, 그는 고통스러울 거야.""왜 고통스럽죠? 남의 감정을 갖고 놀며 마
시안이 돌아왔다.또 하루가 지난 뒤, 시안이 보낸 전서구가 소식을 갖고 왔다."일 년 전 그 전역엔, 현왕 전하와 여왕 전하 두 분 다 계셨습니다.""다 계셨다고?"고월영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난군의 군영에 가 사람을 구한 건...""두 분 다 가셨습니다."시안은 난감한듯했다."당시엔 두 갈래로 흩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두 분이 똑같이 생기신데다, 두 갈래의 적군을 고의로 현혹시키려 해, 다들 누가 아가씨를 감금한 적영에 간 건지 모르고 있습니다."고월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러니 시안도 그날 자신을 적군의 군영에서 구해낸 자가 누군지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건가?"아가씨, 저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꼭 조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시안은 그녀가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괜찮다, 여왕 전하의 몸에서 그날 내가 남긴 칼자국을 보았다."그러니, 그녀는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그때 자신을 구한 건, 확실히 강현우였다.강현준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고월영의 눈가엔 어두운 웃음이 흘러 지났다."지금의 나한텐, 그때 누가 날 구해준 건지, 이미 중요하지 않은 건지도 몰라.""아가씨..."시안은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다.아가씨가 중요치 않다 했지만, 시안은 알고 있다, 그녀가 신경 쓰고 있다는걸.시안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월영을 힐끗 쳐다보고, 결국은 참지 못한 채 물었다."그럼 아가씨, 아가씨께선... 혼례를 올린 그날, 그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고월영은 무표정으로 담담히 말했다."알아."그녀가 알고 있다!시안은 깊은숨을 내쉬었다.아가씨가 아신다면, 이일은,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오히려 고월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현왕 전하가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거라.""아가씨?"부군을 알아보라고?"설마, 아가씨께선 아직도 여왕 전하가 가짜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그는 가짜가 아니다."고월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 안에 휩싸인 고단함이 철저히 가려졌다.시안은 알 수가
"현우가 그 아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손을 댄 것이냐? 심지어... 너!"안비는 마음의 화를 못 이기고 손을 들어 다시 채찍을 내리쳤다.강현준은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은 빈 위패 앞에 꿇고 앉았다. 채찍을 여러 번 맞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그날 밤, 내가 왜 너를 때렸는지 아느냐? 말하거라!"안비가 화를 내며 물었다.강현준은 여전히 얇은 입술을 앙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안비는 화로 인해 손끝마저 떨려왔다."청아가 그 아이의 몸을 검사할 때, 무엇을 봤는지 아느냐? 청아는 그 아이 몸에, 온통 남자가 남긴 흔적뿐인 걸 보았다!""현우는 그 아이와 잠자리를 가질 리 없어! 네가 그들의 첫날밤 신혼 방으로 쳐들어간 게지? 감히, 동생의 여자를, 차지하려 들다니!""네 마음속엔, 대체 네 동생이 있는 게냐?"강현준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등 뒤는 피로 얼룩졌고, 크나큰 땀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한 방울씩 바닥에 떨어졌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심지어 눈살도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안비가 가장 원망하는 게, 바로 지금의 그의 모습이다.이리도 완강하다니!그녀는 분명히 느껴졌다. 아들이, 자신의 공제를 철저히 벗어났다는걸!"현우의 여자다, 현우에게 돌려주거라, 그럼 널 용서할 터이니!"그녀는 채찍을 손에 꽉 쥐었다. 채찍의 끝자락엔 아직도 피의 흔적이 묻어있다.그녀는 꼿꼿이 꿇고 있는 아들을 노려보며 화를 냈다."앞으로 고월영과 엮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라, 말해!"강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건 분명 소리 없이 그녀에게 항의하는 것이다!설마, 이후에도, 또 고월영을 찾으려 하는 건가?"맹세하라고 하지 않았냐! 안 말할 거냐? 안 말할 거냐고!"강현준이 반응을 하지 않을수록, 안비의 채찍은 더더욱 강해졌다!하지만 등의 옷가지가 피로 흠뻑 물들어도, 얼굴엔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그저 그 눈빛이, 조금 혼란스러워질 뿐.시선도, 점차 흐릿해져갔다.그의 모
"현우야, 지금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냐? 고월영은 너의 왕비다, 일 년 전, 네가 월영을 구해왔으니, 응당 너의 여자임을."안비는 그의 모습을 보며, 못내 마음이 안타까웠다."바닥이 차다, 현우야, 어서 일어나거라."강현우가 미동도 없자 안비는 마음이 조급해 나, 채찍을 버리고 그를 부축했다.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살짝 밀어내고 말했다."모비, 이리도 아들을 아끼시는데, 왜 사황형에겐 이리도 엄하십니까? 그도 당신의 친아들입니다!"강현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독에 걸린 이후, 자신은 몸이 약해 자주 아팠고, 기대를 걸 필요가 없다.하지만 사황형은 다르다. 사황형은 뛰어난 업적을 가지고 있고 재능이 특출나, 그야말로 모비의 유일한 기대이자 희망이여야 한다.모비는 궁궐 여인으로서, 어찌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지는 도리를 모른단 말인가?안비는 강현준을 노려보며, 여전히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본궁에겐, 이런 불효자가 없다!""모비...""현우야, 넌 몸도 안 좋은데, 어서 일어나거라, 꿇지 말거라.""모비께서 사황형을 더 이상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요."강현우는 그녀의 마음속에 화가 나있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진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다."모비, 진정 이기적인 사람은 아들입니다, 일 년 전, 아들이... 아들이..."강현우는 갑작스레 안색이 변했고, 혈기가 가슴 언저리에 막혀있어, 한 글자도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현우야, 흥분하지 말고, 무슨 말을 하려거든 천천히 하거라, 흥분하지 말고!"안비는 다급히 소리쳤다."상궁, 어서 난원을 부르게, 어서!""예! 소인 바로 난원 의원님을 청하러 가겠사옵니다!"청아는 사색이 되어 황급히 달려나갔다."모비..."강현우는 여전히 안비의 손을 잡고 완강히 말을 이어갔다."모비, 사황형을 오해하셨습니다, 일 년 전..."갑자기, 마음속 모든 생각들이 흐릿해졌다.어쩌면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사실이 밝혀지면,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이 아이, 정말 어리석다!안비의 마음은 너무나 침통했다.하지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내, 난원이 왔다.하지만 이번엔, 난원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마마, 여왕 전하께선 자극을 받으시면 안 돼옵니다, 그런데 왜... 왜 전하를...""지금 어떠하냐?"안비는 알고 있다. 그녀도 아들을 자극하려 한적 없었다.그가 갑작스레 뛰쳐 들어올 줄 알았나?그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고월영에 대해 말을 꺼내자 현우가 그리도 흥분할 줄!"난 선생, 지금 어찌해야 하는 건가? 어서 방법을 생각하게!"난원은 이미 강현우에게 침을 놓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의 은침도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강현우는 여전히 피를 토하고 있고, 토해낸 피들은, 전부 검은 피였다!"어떡하냐? 어떡하냐?"안비는 급해 넋을 잃었고, 강현준의 팔을 단번에 잡아당겼다."준아, 어서 방법을 생각해 보거라! 네 동생이 곧 힘들다지 않느냐! 어서 방법을 생각해!"강현준에게 항시 엄격했던 그녀지만,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안비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건, 바로 이 아들뿐이다.강현준은 살짝 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입가까지 올라온 피비린내를 누르며 잠긴 소리로 답했다."걱정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하지만...""기필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모비는 이 아들을 믿으십시오."강현준은 말을 강하게 했다.안비는 의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믿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항상 믿는 건, 바로 이 아들이었다.그는 항상 그녀가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하지만 강현우가 여전히 피를 내뱉고 있는 터라,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전하, 무안희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밖에서, 지언이 아가씨 한 명을 끌고 빠르게 걸어왔다."무슨 사람인 게야?"안비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눈 안엔 살기가 언 듯 스쳐지났다.여긴 운려각이다. 그리고 여기엔 너무 많은 비밀들이 숨겨져있다.동일한 편의 사람들만, 여기에 올 수 있다!"저 여인의 피는 현우 체내의 독을 억제할 수 있네."
어젯밤 운려각에서 발생한 일들을, 고월영은 전부 모르고 있다.영하각은 그저 고요하다.시안이 어젯밤 전서구를 보내, 오늘 또다시 회신을 받았다."여왕 전하께서 어려서부터 이상한 병에 걸려, 때때로 반복하신다 들었습니다.""좋을 땐, 정상인과 다를 바 없어, 때로는 현왕 전하를 따라 출정을 가신다 합니다.""몸이 안 좋을 땐, 현왕부에 숨어 요양을 하다 보니, 여왕 전하의 병에 관한 바깥소문은 많지 않은듯합니다. 전하가 재발하는 것을 본 자들도 몇 없을듯합니다.""다들 그저 재발 시 숨어서 요양을 해야 한다는 것만 알뿐, 병이 어떤 정도인지는, 현왕 전하와 안비 마마 등 몇 분만 아시고, 태후 마마의 사람들도 모른다고 합니다."고월영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을 하지 않았다.시안은 무력이 조금 떨어지나, 경공은 아주 뛰어나, 그녀가 소식을 알아내는 능력을 고월영은 의심해 본 적 없다.하지만, 시안마저도 찾아낼 수 없는 것은."여왕은 병에 걸린 게 아니라, 독에 걸린 것이다."맹독."중독이요?"시안은 불현듯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찾은 바로는, 매개인의 인상속, 그건 전부 어린 시절 걸린 이상한 병이었다."아마 폐하와 태후 마마마저도, 병에 걸렸다 생각하실 게야."그러니, 시안이 못 찾아낸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월영은 처음엔 독충으로 인한 독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강현우의 맥을 친히 짚어보았을때, 그 독은 기운이 강했었다.독충으로 인한 독처럼 희미하지 않았다.그러나 또 일반적인 독보다는, 조금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움이 있었다.이건 고월영이 여태껏 이해하지 못한 점이다.21세기에 있을 때, 그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독소들을 철저히 연구했었다.하지만 강현우 몸속의 독은 포함되지 않았다.설마, 고대의 독소는, 이상한 분류가 되어있는 건가?"그럼, 아가씨, 여왕 전하의 치료를 도우시려고요?"현왕부의 두 주인은, 아가씨에게 수많은 억울함을 주었다.하지만 시안은 아가씨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여왕
황족들 사이의 암투는 예전부터 존재해 오던 것이었다.황족과 혼인한 여자는 살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몸에 익혀야 했다.그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다른 여자보다 더 많이 총애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황족 남자들이 황위를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들의 싸움은 피를 흘리지만 여자들 사이의 암투는 소리 없는 전쟁이었다.고월영은 반항을 포기하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주변을 돌던 호위 무사들은 둘을 보고 멀리 피해서 도망갔다.남령국에서 여왕비의 명성은 아마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바닥으로 추락한지 오래였다.“황족으로 사는 삶은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그래도 나를 위해서….”“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삶의 방식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전하께서도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으셨잖습니까.”지금 하는 모든 말은 의미가 없었다.고월영은 원망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전하의 이 현왕부에서 저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전하의 세력 범위 안에서요. 벌써 잊으셨나요?”잊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왕부의 상공에 얼마나 거대한 먹구름이 끼었는지 처음으로 확인했다.더 이상 현왕부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지 않을 것 같았다.고월영은 그를 부드럽게 밀치고 갈 길을 가버렸다.그는 홀로 정원에 남아 고독을 달랬다.고월영이 영하각으로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무아린이었다.“어머니께서는 무안희를 버리셨습니다. 저에게 돌아가서 성녀의 자리를 물려받으라고 하더군요.”무아린은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그래서 떠나려고요?”고월영은 무아린을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선택이 있는 법이다.“저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돌아가지 않으면 갈 곳도 없고요.”어머니가 그녀를 마음먹고 찾으면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없었다.며칠 돌아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무안희마저 백단교 사람들의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는데 무아린은 자신이 없었다.“오라버니랑은 이
말을 마친 강현준은 뒤돌아섰다.“현준아!”안비가 다급히 붙잡으려 달려갔지만 강현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현준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단지 너와 현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안타깝게도 그 말은 이미 멀리 가버린 강현준에게 닿지는 않았다.안비는 고개를 돌리고 마지막 희망을 강현우에게 걸었다.그녀는 달려가서 강현우의 손을 잡으려 했다.“현우….”강현우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현우 너마저 이 어미를 버리는 것이냐!”안비가 울며 울부짖었다.강현우는 그 모습을 낯선 눈빛으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자식을 아끼던 어머니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왜 이렇게 된 걸까?약병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결국 그는 쥐고 있던 약병이 그의 손 안에서 깨졌다.“현우야!”안비는 아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강현우도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치고 가버렸다.두 아들이 모두 그녀를 버리고 가버린 것이다.“현우야!”여왕마저 떠난 뒤, 그녀는 무기력하게 바닥으로 주저앉아 흐느꼈다.고월영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뒤돌아섰다.등 뒤에서 안비의 외침이 들려왔다.“고월영, 이 악랄한 년! 넌 곱게 죽지 못할 거야!”걸음을 멈춘 고월영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히 말했다.“세상에 들통나지 않을 거짓말은 없어요, 마마. 무슨 일이든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요.”“양심도 없는 년! 어찌 나한테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안비는 두 아들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모든 원인이 고월영에게 있다고 생각했다.세상에 어찌 이렇듯 매정하고 악랄한 여자가 있단 말인가!고월영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안비를 바라보고는 걸음을 옮겼다.뒤에서 안비의 처절한 저주가 들려왔다.“언젠가 넌 나보다 더 비참한 처지가 될 것이야!”“모두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모두가 널 혐오할 것이야!”“고월영, 이 죽일
시안이 자결했을 때 방 문은 안으로 잠겨 있었다.진심으로 죽음을 택했기 때문이었다.정말 죽으려는 사람은 절대 방해 받지 않을 시간과 환경을 마련하고 행한다. 일부러 누군가가 발견해 주기를 바라고 행한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말이 되지 않았다.“내 궁에서 그딴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다니!”안비의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고월영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제 질문이 불편하셨다면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자리에서 일어선 그녀는 품에서 약을 꺼내 강현우에게 건넸다.“현우 오라버니, 이걸 마마께 드리세요. 멍자국을 없애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멍자국?”강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안비는 아무리 봐도 어디 다친 것 같은 반응은 아니었다.고월영이 말했다.“목을 매달았다면 온몸의 중량이 저 천으로 쏠립니다. 그 과정에서 목덜미에 압박흔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이 약을 발라드리면 멍이 사라질 겁니다. 약을 안 바르면 나중에 흉터가 남을 수도 있어요.”모두의 시선이 안비의 목덜미로 향했다.안비는 밤중이라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얗고 긴 목덜미가 그대로 드러났다.안비는 당황한 얼굴로 목덜미를 가렸다.“어머니….”강현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갑자기 실망감이 몰려왔다.“나… 난 괜찮다. 사실 바로 발견돼서….”“참. 너는 이 밤중에 마마께서 나쁜 생각을 하실 줄 어떻게 알고 침소로 뛰어들어왔느냐?”고월영은 어린 궁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겁에 질린 어린 궁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안비의 눈치를 보려고 했는데 고월영이 앞으로 나서며 시선을 가렸다.“설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월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네 이년, 무슨 망언을 하는 것이냐!”안비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고월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말해 보거라! 너는 어쩌다가 마마의 침소로 들어오게 된 것이냐!”“너 이….”강현준이 싸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안비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그는 고
강현준은 손에 힘을 풀었다.그녀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어쩌다가 온기를 찾은 심장이 다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고월영은 그가 정신을 판 사이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보겠….”“전하!”밖에서 지언이 다급히 안으로 달려왔다.“전하,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그날 밤 현왕부 사람들은 모두 궁으로 몰려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부탁으로 함께 궁으로 갔다.다행히 안비는 자결 시도만 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안비는 고월영을 보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저년이 내 궁에 어쩐 일이야? 누가 저년을 들여보냈어? 여봐라! 당장 저년을 밖으로 끌고 나가!”궁녀와 태감들이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하지만 현장에는 현왕과 여왕도 함께 있었다.강현준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들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구석으로 물러섰다.고월영은 홀로 궁을 나갈 수는 없으니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그녀는 따분한 얼굴로 안비 궁 안의 시설들을 구경했다.방 안에는 안비의 울음소리만 들렸다.두 아들은 멀뚱멀뚱 서서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한참을 울던 안비는 아들들이 반응이 없자 목청을 높였다.결국 마음이 약해진 강현우가 말했다.“어머니, 형님도 너무 화가 나셔서 그런 거지 않습니까. 며칠만 참고 기다리면 금족령은 금방 풀릴 겁니다.”안비는 조심스럽게 강현준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줄곧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그녀는 더 구슬피 울며 말했다.“그래도 이 어미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우리 현우밖에 없구나. 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는데 현준이는….”강현준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현왕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성격이었다.안비는 더 큰소리로 통곡했다.이 왕조에는 귀비가 없었다. 황후 다음으로 귀한 위치가 비였다. 현왕이 공훈을 많이 세웠기에 안비도 궁 안에서 모두에게 떠받들리는 존재가 되었다.그런 존재가 통곡하고 있자 안비 궁 궁인들의 눈에도
“대체 저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고월영은 점점 강현준의 처소랑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그녀는 이 시점에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떠날 건데 더 이상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이따가 알게 될 거야.”강현우는 이번에 작정하고 둘을 화해시키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고월영은 그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현왕의 정원으로 들어왔다.강현준은 정원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술 취한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그날 밤 술을 먹고 자신을 침범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밀었다.이 사람이랑 영원히 보지 않고 살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강현우는 그녀를 끌고 정원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간 뒤, 그녀의 등을 밀치고는 휑하니 가버렸다.고월영은 발을 헛디뎌 그대로 강현준의 품에 무너졌다.‘저런 사람도 부군이라고!’고월영은 속으로 강현우를 욕하며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강현준은 팔을 뻗어 품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전하!”“네가 먼저 품에 달려들었다. 뭐가 불만이지?”강현준은 홀린 듯한 눈으로 탐스럽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눈빛에서도 다정함이 넘쳤다.정말 오랜만에 보는 다정한 눈빛이었다.고개를 든 고월영은 순간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전하도 아시다시피 제가 원해서 넘어진 게 아니지 않습니까.”하지만 강현준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전하, 자중하십시오!”“언제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인데?”궁에서 처음 그가 그녀를 껴안았을 때 했던 말이었다.몇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월영아, 우리 화해하면 안 될까?”강현준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덜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그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화해?그게 가능할까?고월영은 한참을 반복적으로 생각했다.화해할까?하지만 이미 잃은 사람과 전에 입었던 상처는 여전히 그대로였다.결국 그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전하, 제가
강현우는 얼굴을 붉히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나중은 못 보았습니다.”단지 강현준이 뜨겁게 그녀의 입에 입술을 맞추는 장면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때는 무슨 생각인지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평생 살면서 남녀 사이의 일을 겪어보지 않은 강현우였기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형님께서… 저고리 고름을 풀 때 돌아왔습니다. 나중은… 정말 못 보았어요.”강현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기침했다.“끝까지 가지는 않았다.”적어도 그날 밤은 그랬다.하지만 어쩐 일인지 강현우 앞에만 서면 자꾸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방 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형제였지만 이 순간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한참이 지났을 때, 강현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또 할 말이 남았느냐?”강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형님과 월영이 사이에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압니다. 그날 밤 월영이는 진심으로 형님을 밀쳐내지 않았어요.”강현준은 말없이 붓대만 놀릴 뿐이었다.강현우는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정말 형님께 마음이 없었더라면 제가 아는 월영이는 죽음을 불사하고서라도 거절했을 겁니다.”붓대를 잡은 강현준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그가 아는 고월영이라면 죽더라도 원하지 않는 일은 거부하는 성격이었다.적어도 그날 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역시 쌍둥이라서 그런지 강현우보다 강현준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시안의 죽음이 월영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를 안겨서 아마 잠시는 잊어버릴 수 없을 거예요.”“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나중에 상처가 아물고 옅어지면 형님을 다시 떠올리게 될 거라고 믿어요.”“녀석, 언제부터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했지?”강현준은 붓을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라 동생에게 건넸다.“말하느라 목도 말랐을 텐데 차나 한잔 하고 가거라.”강현우는 찻잔을 받아 한숨에 삼켜버렸다.형님이
운조와 서령 대군이 연합하여 청성이 함락될 위기라는 전보였다. 청성과 가까운 수성도 민심이 흔들리고 성 안은 혼란에 빠졌다고 했다.황제는 여왕 강현우를 선봉 장군으로 봉하고 내일 즉시 출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아침에 가신다고요?”고월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굳게 닫힌 방 문을 바라보았다.큰 오라버니는 길을 떠나도 문제없지만 심각하게 다친 고월영은 지금 길을 떠나기엔 무리였다.적어도 반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고용기도 장군으로써 수성으로 복귀하는데 언니만 혼자 여기 남게 된 상황이 조금 안타까웠다.“알겠습니다. 저도 전하랑 같이 가겠습니다.”고월영이 말했다.강현우의 두 눈에 희열이 스쳤다.“나는… 네가 여기 남겠다고 할 줄 알고….”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차피 네 언니도 돌봄이 필요하니까.”“전하, 제가 현왕 전하 곁에 남겠다고 할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고월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이제 오해도 풀렸으니….”“전하, 전장에 나가 보신 적은 있으세요? 현왕 전하 없이 스스로 전장에 나가신 적 있냐고요?”“월영아, 나에게는 네가 필요해.”강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황제의 지시가 내려진 후 그는 줄곧 긴장한 상태였다.강현우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주견이 없다는 점이었다.전에는 형의 말을 들었고 지금은 고월영의 의사에 따랐다. 스스로 무언가 결정을 내리는 일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저와 현왕 전하는 이제 끝난 사이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뒤돌아서려던 그녀는 한마디 덧붙였다.“아직도 저를 전하의 왕비로 생각하신다면 조금만 더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싫으시다면 앞으로 저를 시종으로 부려도 좋아요.”“난 한 번도 너를 내치려는 생각을 한 적 없다!”그가 두려운 건 그녀가 명의뿐인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일이었다.“그런데 왜 한동안만 내 곁을 지킨다고 하는 거냐? 평생 내 옆에 있으면 되지 않느냐?”“전하께서도 진짜 혼인을 하
아무도 무안희가 어떻게 속박을 풀었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모두의 시선이 안비에게 쏠린 틈을 타서 그녀는 어느새 밧줄을 풀었다.그리고 손에 칼을 빼들고 고여추의 목에 겨누었다.강현준은 음침한 얼굴로 기를 모았지만 입에서 또 다시 피가 뿜어져 나왔다.“형님!”강현우는 다가가서 그를 부축하고 고월영의 손을 잡아당겼다.고용기는 무안희를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지금도 여전히 그녀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힘들었다.연일이 무안희를 쫓아갔다.“오지 마!”무안희는 비수를 고여추의 목에 들이댔다. 하얗고 가는 목에서 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안 돼!”결국 고용기는 밖으로 쫓아 나갔다.고월영도 강현우의 손을 놓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무안희, 그만해!”“고월영, 너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언니의 목숨을 취해도 넌 할 말 없잖아?”고여추의 목에서는 점점 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면 숨이 끊어질 것이다.“안 돼!”고월영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강현우가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무안희, 인질 풀어주면 오늘 무사히 왕부를 떠나게 해주겠다!”“내가 너희를 믿을 것 같아?”무안희는 고여추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후문을 향해 뒷걸음질쳤다.고여추는 안비에 의해 섭혼술이 중단된 이후로 의식이 흐릿한 상태였다.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무안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었다.아무도 무안희를 막지 못했다.연일은 여러 번 강현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가 미동이 없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왕부의 하인들도 마찬가지였다.안 그래도 고월영은 강현준을 사무치게 증오하는데 이 왕부에서 언니마저 잃으면 아마 현왕에게 죽자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무안희는 그렇게 고여추를 끌고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쫓아!”연일은 그제야 부하들을 호령하여 쫓아 나갔다.고월영과 강현우도 뒤따라갔다. 무안희는 뒷산의 방향으로 도망쳤다.고월영 일행이 도착했을 때, 연일이 고여추를 안고 되돌아오고
강현준의 시선이 안비에게 닿았다.안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아들에게서 저런 시선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은 심복이 고월영에게 독을 먹였을 때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겁에 질린 안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무안희는 강현준을 똑바로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모두 안비의 짓이었습니다. 난원을 압박해서 고월영의 체내에 독을 주입했어요. 고월영은 그때까지 아이가 무사히 살아 있다고 애원했어요.”무안희는 안비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하지만 마마는 한 번에 실패하자 난원에게 한 번 더 독을 주입하라고 명령했지요.”“그때 아무도 고월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독을 두 번이나 주입했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으니까요! 전하, 이게 당신 어머니의 본 모습이에요! 얼마나 감동스러운 아들 사랑인가요!”무안희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두 번의 독 주입, 그건 고월영의 목숨을 노리고 한 짓이었다.강현우는 어느새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현준은 온기 하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다.안비는 그 시선을 마주하고 한발 한발 뒤로 물러섰다.“그런 거 아니야. 난원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했어. 태어나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현준아, 어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정상이 아닌 아이가 태어나면 현왕부는… 이게 다 너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어!”강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어머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아무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강현준 본인도 포함이었다.머릿속에 자신의 여자가 죽어 가는 장면이 펼쳐졌다.그녀는 이미 복 중에서 숨이 끊어진 아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이기적인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헐떡이는 고월영을 붙잡고 재차 독을 주입했다.푸흡!강현준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