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철주는 고금란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시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말해보거라.”미향은 고금란의 냉랭한 얼굴을 한 번 살피고는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부디 저를 벌하소서.”소철주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혹시나 무례를 범할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른이 아이를 훈계하는 것은 마땅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비가 된 자로서,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때, 위 씨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오늘 동서와 어르신께서 말다툼이 있었고 아가씨가 어머니 편을 들다가 그
이쯤 되자 소철주 모든 걸 눈치챘다. 어머니가 대방을 편애한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신과 소철수는 친형제이기에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다. 대방이 집안 살림을 도맡았을 때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손에 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자리인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그는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내버려뒀다. 하지만, 어머니가 집안 형편을 알면서도 대방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아내의 혼수로 막으려 했다니…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다시 아내를 바라보니, 문득
하지만 소철주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고 세 번 큰 절을 했다. “아들 된 도리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 사람이 유일한 아내입니다. 그녀를 지키지 않는다면, 남편이라 할 자격도 없지요.” 이 말을 남긴 채, 소철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내와 딸을 데리고 하정원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서 좀 더 일찍 이리 나셔주셨다면 어머니께서도 그토록 마음고생은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소은의 무릎의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아 돌아올 때도 가마를 타야 했다. 소철주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은전이 부족하지 않지만, 큰 오라버니는 지금이야 인맥을 쌓아야 할 때이니 어디든 돈이 드는 법이지요. 계속 미루면 큰 집에도 이로울 것이 없고 혹여라도 큰 오라버니의 앞날을 그르치게 되면 큰어머니도 후회할 것입니다.” 소은이 말했다.위 씨가 가장 걱정한 부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의 수중의 은전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본래는 둘째에게 돈을 빌리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이리 이방과 상의하러 온 것이다.“큰 오라버니께서 필요한 금액은 제가 도울 수 있고 장부의 문제도 메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 하
난향각을 지날 때, 인파가 북적이고 대기 줄이 길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이 가게는 장사가 참 잘되나 봐.” 위경화는 커튼을 걷어 올리며 말하자 소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잠시 내려가서 구경해볼래?” 위경화는 약간 망설이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대방의 사정이 좋지 않잖아. 그런데 내가 이런 걸 들고 돌아가면 어머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 여전히 위 씨의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는 그녀의 모습에 소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녀의 혼수인데 뭐가 문제인가. 만약 위 씨가 그것까지 신경 쓴다면,
“무 신의께서도 아가씨를 한번 만나고 싶다 하시며,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송백은 소매 속에서 서신을 꺼내어 내밀었다. “무 신의께서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소은은 조심스레 서신을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약속 장소가 적혀있었다.소은은 내용을 확인한 뒤, 서신을 곧장 태워버렸다. “신의께서 제게 맡기신 일은 완수했으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송백이 말했다. 그가 떠난 후, 소은은 잠시 그 서신에 적힌 장소를 곰곰이 생각했다. ‘영롱대’—겉으론 불꽃놀이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얽힌 세력은 꽤난 복잡했다.
“소은아?” 그때 마침 위경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은은 급히 손수건을 강준에게 건네주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마음이 급해진 소은은 강준의 손에서 손수건을 낚아채 물에 적신 후 다시 그에게 던져주었다.“정인 몰래 뭐 주고받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긴장할 일입니까?” 강준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세자께서 돌아오신 걸 강미조차 모르고 있는데 이렇게 몰래 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남들이 보기엔 오해하고도 남을 일이지요.” 소은은 아까 강미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그녀는 강
강준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은 한없이 차가웠다. ……“세자께서 돌아온 김에 혼사가 정해질 것 같다고 하더군요. 며칠 전 궁중에서도 황제께서 그 얘기를 꺼내셨대요.” 루나가 곁에 있던 영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영주의 얼굴빛은 썩 좋지 않았다.“예전엔 늘 넘기셨다던데 이번엔 부정도 하지 않았대요.” 루나가 팔꿈치로 영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덧붙였다.“오늘따라 왜 이리 기운이 없어요? 평소 선왕부가 오시는 걸 제일 좋아했잖아요?”강준의 혼사가 성사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영주의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요.”혹시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 혼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소은은 짐짓 골치 아픈 척 말했다.소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위씨 가문 웃어른들을 만나 뵈었다.소윤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연을 날리고 싶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제가 갈게요.”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던 소은이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할게.”소윤의 시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 누나. 어서 가요.”위림이 소은을 이끌었다.
장명희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소철수도 인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소철주가 부인을 아껴 분가를 요구한 뒤로 장명희의 생활은 점점 평온하고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큰집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어쨌거나 그녀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장명희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심원을 나섰다.위씨는 소은을 보며 한마디 했다.“소윤이가 많이 심심한가 보더라. 너 불러서 얘기라도 하고 싶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얘기를 안 꺼냈다네.”소은은 잠시 고민
진명우가 산적을 토벌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강준은 이 산적들을 이용해서 량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불리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이상, 그는 산적들을 토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진명우는 강준의 사람이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은은 강준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량주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소철주가 유배를 떠난지도 반달이 지났다. 소국공 소철수는 정사품 태상에서 종삼품 태수로 승진했다. 큰 집은 경사
“어찌 자신을 어리석다 말합니까. 낭자의 재능은 대연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몇 없는걸요. 낭자가 어리석으면 이 천하에 똑똑한 여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낭자에게 선왕부 살림을 맡겨도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강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잔재주일 뿐이고 어디 내놓을 정도는 아닙니다.”소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가 비록 선왕부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강준은 그녀의 걱정을 알아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꿇고 있으면 편합니까?”
강준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은은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자신의 말이 예의가 없었던 점이 있는지 짚어본 뒤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급한 일이 있다면 제게 사람을 보내셔도 됩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세자께 도움은 드릴 테니까요.”그와 안전하게 거래하고 싶었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만남을 청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그런데 지금 강준의
소은은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와 느긋함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녀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군이라고 하더라도 꼭 잠자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윤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를 잘 아는 신변의 부장군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랑캐 놈들과 밀서를 주고받은
“가자.”소은은 부채를 챙기며 말했다.두 사람은 익숙하게 영롱대로 찾아갔다. 마중을 나온 여인은 소은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하인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모시는 공자님이 오셨다고 윤비를 불러와.”잠시 후, 윤비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저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윤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난번의 싸늘했던 인상에 비해 눈앞의 이 사람은 한결 인상이 부드러웠다. 소은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어쩌면 윤비가 인기가 많아 영롱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니 수많은 ‘윤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을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역사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이더군요.”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소은의 이런 제안은 전생의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유배를 갔을 시에 그 지역에서 꽤 큰 공을 세웠고 그래서 경문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그들 일가족이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전생에서는 공로로 죄를 사면 받은 경우지만 이번 생은 확실히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떠나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소철수의 예상대로 다음 날, 형부 사람들이 소국공부로 들이닥쳐 수색
그녀는 그 일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송 각로 뇌물수수 사건의 조사가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준이 경성을 나갔다면 아마 이 일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컸다.6개월만에 드디어 이 사건이 끝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소철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은에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그날 밤, 저택의 편전에 불이 나서 송 각로와의 밀서가 전부 불에 탔다. 소철수는 이미 재가 된 서신들을 호수에 버렸다.“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혀를 잘라낼 것이다!”소철수는 싸늘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으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