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은 아쉬움이 남았지만, 더 오래 머물면 밖에서 오해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기에 더 말하지 않았다.선왕부는 그녀에게 있어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괜히 사람들 사이를 지나면 방금 전 강민과 함께 있었던 일을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하여 일부러 인파를 피하고자 조용히 가는 길을 택하려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준과 마주치고 말았다. 강준이 있는 그곳에서는 조금 전 강민과 강미와 함께 있던 그녀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세자 저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나와 함께 한 판 둡시다.” 강준이 그녀
소은이 이 시점에서 강준의 혼사를 언급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그녀는 확신이 없었다.그의 혼사가 훗날 둘의 협력에 어떤 영향을 줄지 가늠할 수 없었기에 이 말을 꺼내며 슬쩍 그를 떠봤던 것이다. 하지만 강준에게 있어 소은은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그녀는 마치 이제 그녀는 첩실의 태도로 자신과 다른 여인과의 혼사를 축하고 있는 셈이었다.그가 이번 생에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없다고 해도, 그녀의 이런 태도를 아무 감정 없이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강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제 일에 신경
게다가 선왕비도 자신을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칭찬한 적이 있었고, 자신에게 무척 잘 대해주었다.심지연만 사라져 준다면, 강준의 옆자리가 자신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주는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그러는 사이 강미가 소은을 잡아 끌며 말했다.“우리 함께 구경할래요?” 소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부는 그녀에게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곳이지만, 무리와 너무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좋지 않았다. 하여 그녀는 함께 어울리기로 했다. “한동안, 명우 공자님이 보이지 않네요.” 강미가 긴 복도를 지나며 말했
서신을 쓴 이는 심지연이 아니었다. 강준이 소은이 보낸 서신을 따로 간직하긴 했지만, 그가 서둘러 돌아온 것과는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강준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강민 역시 이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바가 있었고, 요즘 들어 그 또한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추운 북지에서 아내가 보낸 서신을 받게 된다면 마음만은 따뜻할 것이다.강민은 소은을 쳐다보았고 그녀는 옆에 있는 다른 여인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늦은 시
“소은 언니랑 저 정말 인연이 깊은가 봐요. 또 마주쳤네요.”강미는 오늘 선왕비과 강민과 함께 도원 스님을 만나러 왔다. “저와 막내 동생은 할머니의 호신부를 받으러 왔어요.” “오라버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강미는 두 사람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어 분위기를 띄웠다.하지만 강민은 그저 담담하게 답할 뿐이었다.“한향사를 드나드는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마주친다고 해서 신기할 건 없구나.” 이것은 곧 인연이라는 말을 단호히 부정한 셈이었다.강미는 어리중절한 얼굴로 강민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전처럼 열정 넘치지
강준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으니, 요즘은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성왕부의 안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그는 이제 혼사에만 전념할 것이다.잠시 생각에 잠긴 소은이 말했다. “세자께 편지를 남길 테니 대신 전해주시지요.”옥부용에 관한 일은 단번에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를 대하는 자세는 중요했다. 설령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그녀는 강준에게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보여줘야 했다. 오늘처럼 적극적으로 찾아와 옥부용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은 그녀였고, 자리하지 않
“아마도 그럴 거야.” 소은이 알고 있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그녀는 문득 이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세자 같은 사내는 혼인을 해도 여전히 주위에 여인이들이 맴돌기 마련이라, 측실이어도 다툼이 일 거라 했었다.앞으로 몇을 들일지는 심지연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녀가 충분히 훌륭하다면 다른 이들은 감히 파란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심지연 언니의 혼사가 결정되면, 이제 언니를 주목할 거예요.” 소희가 웃으며 말했다. 소은은 지금 많은 이들의 구애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서도 소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내며, 저
영롱대에서는 황홀한 춤사위가 진한 술보다 매혹적이었고 귓가에 흐르는 음악 소리는 그 미묘함을 더 해주었다.소은의 부채 자루는 그의 옷깃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의 가슴에 닿았다.그리고 가슴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당당하게 농락했다.겉보기에 점잖은 듯했지만,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유혹하고 있었다.그 모습은 영락없이 풍류를 즐기는 공자다운 모습이었다. “윤비”는 그저 힐끔 바라볼 뿐 그녀를 막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시면 어찌하려고 이러시는지요?” “걱정 말거라, 집안의 여인들은 감히 나를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요.”혹시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 혼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소은은 짐짓 골치 아픈 척 말했다.소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위씨 가문 웃어른들을 만나 뵈었다.소윤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연을 날리고 싶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제가 갈게요.”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던 소은이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할게.”소윤의 시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 누나. 어서 가요.”위림이 소은을 이끌었다.
장명희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소철수도 인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소철주가 부인을 아껴 분가를 요구한 뒤로 장명희의 생활은 점점 평온하고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큰집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어쨌거나 그녀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장명희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심원을 나섰다.위씨는 소은을 보며 한마디 했다.“소윤이가 많이 심심한가 보더라. 너 불러서 얘기라도 하고 싶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얘기를 안 꺼냈다네.”소은은 잠시 고민
진명우가 산적을 토벌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강준은 이 산적들을 이용해서 량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불리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이상, 그는 산적들을 토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진명우는 강준의 사람이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은은 강준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량주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소철주가 유배를 떠난지도 반달이 지났다. 소국공 소철수는 정사품 태상에서 종삼품 태수로 승진했다. 큰 집은 경사
“어찌 자신을 어리석다 말합니까. 낭자의 재능은 대연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몇 없는걸요. 낭자가 어리석으면 이 천하에 똑똑한 여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낭자에게 선왕부 살림을 맡겨도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강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잔재주일 뿐이고 어디 내놓을 정도는 아닙니다.”소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가 비록 선왕부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강준은 그녀의 걱정을 알아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꿇고 있으면 편합니까?”
강준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은은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자신의 말이 예의가 없었던 점이 있는지 짚어본 뒤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급한 일이 있다면 제게 사람을 보내셔도 됩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세자께 도움은 드릴 테니까요.”그와 안전하게 거래하고 싶었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만남을 청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그런데 지금 강준의
소은은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와 느긋함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녀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군이라고 하더라도 꼭 잠자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윤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를 잘 아는 신변의 부장군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랑캐 놈들과 밀서를 주고받은
“가자.”소은은 부채를 챙기며 말했다.두 사람은 익숙하게 영롱대로 찾아갔다. 마중을 나온 여인은 소은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하인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모시는 공자님이 오셨다고 윤비를 불러와.”잠시 후, 윤비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저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윤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난번의 싸늘했던 인상에 비해 눈앞의 이 사람은 한결 인상이 부드러웠다. 소은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어쩌면 윤비가 인기가 많아 영롱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니 수많은 ‘윤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을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역사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이더군요.”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소은의 이런 제안은 전생의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유배를 갔을 시에 그 지역에서 꽤 큰 공을 세웠고 그래서 경문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그들 일가족이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전생에서는 공로로 죄를 사면 받은 경우지만 이번 생은 확실히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떠나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소철수의 예상대로 다음 날, 형부 사람들이 소국공부로 들이닥쳐 수색
그녀는 그 일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송 각로 뇌물수수 사건의 조사가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준이 경성을 나갔다면 아마 이 일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컸다.6개월만에 드디어 이 사건이 끝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소철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은에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그날 밤, 저택의 편전에 불이 나서 송 각로와의 밀서가 전부 불에 탔다. 소철수는 이미 재가 된 서신들을 호수에 버렸다.“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혀를 잘라낼 것이다!”소철수는 싸늘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으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