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강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심지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소준도 집에 없으니 강준이 아니면 진명우의 상황을 알아볼 사람이 없었다.강미는 그녀를 멀리하는 상황이니 다가가고 싶지도 않고 심지연에게도 자신이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그리고 심지연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은의 부탁을 들은 심지연은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강준이 소은을 거절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소은이 진명우의 상황을 궁금해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
소은은 복희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복희가 울음을 터뜨렸다.“제가 둘째 공자의 먹을 깨뜨렸으니 분명 공자께서 저를 벌하실 겁니다.”복희가 겁에 질려 말했다.그건 강민이 정말 어렵게 구한 먹이었는데 먹 중에서도 희귀품이라고 했다.강민은 나가기 전에 먹을 자신의 서재로 가져가라고 분부했는데 그걸 가지고 가다가 깨뜨렸으니 어떻게 주인에게 보고해야 할지 막막했다.하물며 강민은 큰 공자나 세자처럼 부드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군영에서 부하들을 벌할 때도 절대 봐주지 않은 거로 유명했다.복희가 세자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걸
“둘째 공자, 오늘 제가 찾아온 일을 세자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소은이 말했다. 또 강준이 자신이 의도적으로 가족들에게 접근한다고 오해받기는 싫었다.“그래.”어차피 개인적인 일을 강준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전생의 소은은 강민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대화가 이렇게 순조로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할머니가 애초에 강민을 신랑감으로 점찍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준보다는 교류하기
항상 이 주제를 피하기만 하던 강민은 오늘따라 꽤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제가 마음에 둔 사람을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을까 봐 걱정이지요.”강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강 부인이 말했다.“청렴한 가문의 아이라면 다 좋아.”둘째는 선왕부의 세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니 혼인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강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좀 더 시간을 주세요.”아들의 성미를 잘 아는 강 부인은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봐서 신분이 특별하거나 셋째와 혼담이 오간 사이라고 짐작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리 보수적인 사
소은은 진작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선왕비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그녀에게서 나온 처방이라고 하면 절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선왕부와 소국공부가 엮이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에게서 처방을 받는다면 분명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어린 후배들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웃어른들의 생각은 거의 비슷했다.강미는 이미 그녀를 경계하고 있으니 소은은 심지연을 설득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처방을 알약으로 만들고 괜찮은 이름을 붙여 심지연 언니에게 줄 거예요. 그리고 언니가 왕
밀실의 차가운 온도에 소은은 손발이 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준의 시선은 동물이나 물건을 바라보는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와의 대치에서 소은은 당연히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저는 세자의 비밀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결국 그녀는 먼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감정적으로 굴며 자존심을 내세워서 좋을 게 없었다.“난 아씨의 비밀에 꽤 관심이 있습니다만.”미풍이 불어와 책상 위에 놓인 한지가 살짝 날아올랐다. 그것은 소은이 며칠 전 부가은에게 건넸던
강준이 말했다.“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니까요.”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저는 세자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 아버지를 관대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송 각로 사건에 관해 아버님께 죄를 사하여 주라는 상소문은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강준이 말했다.소은의 입장에서는 꽤 의외였다. 그러다가 전에 진명우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일 때문에 랑야에 다
소은은 근면성실한 아가씨였다. 서당에 가는 길에서도 책을 읽거나 시를 외우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소희도 감히 게으림을 피울 수 없었다. “언니가 오늘 입은 옷은 참 예쁘네요.” 소희는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소은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경성의 아씨들 중에서, 옷을 가장 잘 입는 사람은 단연 소은이었다. 소은에게 강단 있으면서도 그녀를 지극히 아껴주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 소희는 너무 부러웠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소은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고왔고, 머릿결마저도 검고 윤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요.”혹시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 혼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소은은 짐짓 골치 아픈 척 말했다.소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위씨 가문 웃어른들을 만나 뵈었다.소윤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연을 날리고 싶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제가 갈게요.”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던 소은이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할게.”소윤의 시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 누나. 어서 가요.”위림이 소은을 이끌었다.
장명희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소철수도 인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소철주가 부인을 아껴 분가를 요구한 뒤로 장명희의 생활은 점점 평온하고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큰집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어쨌거나 그녀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장명희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심원을 나섰다.위씨는 소은을 보며 한마디 했다.“소윤이가 많이 심심한가 보더라. 너 불러서 얘기라도 하고 싶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얘기를 안 꺼냈다네.”소은은 잠시 고민
진명우가 산적을 토벌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강준은 이 산적들을 이용해서 량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불리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이상, 그는 산적들을 토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진명우는 강준의 사람이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은은 강준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량주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소철주가 유배를 떠난지도 반달이 지났다. 소국공 소철수는 정사품 태상에서 종삼품 태수로 승진했다. 큰 집은 경사
“어찌 자신을 어리석다 말합니까. 낭자의 재능은 대연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몇 없는걸요. 낭자가 어리석으면 이 천하에 똑똑한 여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낭자에게 선왕부 살림을 맡겨도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강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잔재주일 뿐이고 어디 내놓을 정도는 아닙니다.”소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가 비록 선왕부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강준은 그녀의 걱정을 알아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꿇고 있으면 편합니까?”
강준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은은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자신의 말이 예의가 없었던 점이 있는지 짚어본 뒤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급한 일이 있다면 제게 사람을 보내셔도 됩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세자께 도움은 드릴 테니까요.”그와 안전하게 거래하고 싶었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만남을 청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그런데 지금 강준의
소은은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와 느긋함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녀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군이라고 하더라도 꼭 잠자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윤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를 잘 아는 신변의 부장군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랑캐 놈들과 밀서를 주고받은
“가자.”소은은 부채를 챙기며 말했다.두 사람은 익숙하게 영롱대로 찾아갔다. 마중을 나온 여인은 소은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하인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모시는 공자님이 오셨다고 윤비를 불러와.”잠시 후, 윤비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저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윤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난번의 싸늘했던 인상에 비해 눈앞의 이 사람은 한결 인상이 부드러웠다. 소은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어쩌면 윤비가 인기가 많아 영롱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니 수많은 ‘윤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을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역사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이더군요.”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소은의 이런 제안은 전생의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유배를 갔을 시에 그 지역에서 꽤 큰 공을 세웠고 그래서 경문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그들 일가족이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전생에서는 공로로 죄를 사면 받은 경우지만 이번 생은 확실히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떠나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소철수의 예상대로 다음 날, 형부 사람들이 소국공부로 들이닥쳐 수색
그녀는 그 일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송 각로 뇌물수수 사건의 조사가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준이 경성을 나갔다면 아마 이 일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컸다.6개월만에 드디어 이 사건이 끝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소철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은에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그날 밤, 저택의 편전에 불이 나서 송 각로와의 밀서가 전부 불에 탔다. 소철수는 이미 재가 된 서신들을 호수에 버렸다.“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혀를 잘라낼 것이다!”소철수는 싸늘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으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