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의 차가운 온도에 소은은 손발이 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준의 시선은 동물이나 물건을 바라보는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와의 대치에서 소은은 당연히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저는 세자의 비밀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결국 그녀는 먼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감정적으로 굴며 자존심을 내세워서 좋을 게 없었다.“난 아씨의 비밀에 꽤 관심이 있습니다만.”미풍이 불어와 책상 위에 놓인 한지가 살짝 날아올랐다. 그것은 소은이 며칠 전 부가은에게 건넸던
강준이 말했다.“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니까요.”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저는 세자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 아버지를 관대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송 각로 사건에 관해 아버님께 죄를 사하여 주라는 상소문은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강준이 말했다.소은의 입장에서는 꽤 의외였다. 그러다가 전에 진명우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일 때문에 랑야에 다
충경 6년, 겨울.선왕부 세자 강준이 요국과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궁에서 봉상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소은은 잠자리에 든 참이었으나, 낮은 목소리로 시녀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명하는 그의 기척 소리에 무심결 몸을 일으켰다. 강준은 그녀를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아무런 말 없이 목욕실로 들어갔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기럭지, 날렵하게 뻗어있는 관자 머리, 그야말로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그가 무표정일 때면 주위가 서늘할 정도였다.
가을비의 찬 기운에 아침 서리가 온 땅에 가득했다.며칠 전 물에 빠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소씨 가문의 넷째 소은이 방금 전 마침내 깨어났다. 이른 새벽이건만 이미 소국공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듣자 하니, 소은을 물에 빠뜨린 자가 붙잡혀서 어제 소대감께서 밤새 취조하셨다더군. 허나 가죽이 찢어지도록 매를 맞아도 끝내 배후를 실토하지 않았다 하네." "매를 맞아 죽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소은에게 천운이 따라 살아남았으니 망정이지… 심성이 악독한 자라니,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네!" 문밖에서는 이런저런 수군
이후 이어진 화주령에서도 소은은 전생에서처럼 돋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땐 그저 누군가의 시선을 조금 더 받고 싶어 나섰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이번 연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는 임씨 가문의 아씨 임미진이었다. 심지연은 늘 그랬듯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도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진 아씨의 글재주가 실로 뛰어나군요.""언니께서 양보해 주신 덕분이지요."임미진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양보라니, 그런 말씀은 사양하지요. 그런데 소은 님은 오늘따라 어찌 이리 조용하신지
그 뒤로 며칠 동안 소은은 밖에 나가지 않았고 책방에 틀어박혀 밀린 학업을 보충하는 데 매진하였다. 학당에 돌아가기 며칠 전이 되어서야, 장명희를 따라 심원으로 가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게 되었다.진원은 고금란의 처소로 양옆으로 계수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비록 계수꽃은 이미 시들었으나 은은한 향기는 여전히 마음을 맑게 해주어 ‘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할머니." 소은은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우리 소은이 왔구나. 어서 이리 와서 앉거라." 소은이 다가가 자리에 앉
사내에게 따로 정해진 혼약이 있다면 소국공부에서도 선왕부와의 혼사를 바란다 하여도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 법.더구나 장안의 수많은 귀한 집 따님들 가운데 심지연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사내들이 너도나도 사모하는 여인이라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빨리 혼약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강민은 생각했던 것이다.“궁중의 형세가 아직 분명치 않으니, 혼담을 나누기엔 시기가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아.” 황제의 의심이란, 머리 위에 드리운 칼날 같아, 혹여 성상께서 이 혼사를 권세의 결탁으로 오해하실까 두려웠다.태자는 아직 책봉되지
소은은 강준이 방금 한 말의 속뜻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그대 위해 과일을 따드리면 아씨는 어떤 답례를 할 것입니까?” 강준의 차가운 말투 속엔 어딘가 모르게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이것은 분명 경고였다.만약 그녀가 관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 여인이었다면 이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소은은 이미 한 차례 혼인을 치른 적 있었고 강준과는 부부로 동침했던 사이였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소은이 '감사의 뜻'이란 명목으로 강민을 유혹하려 든다 생각한 것이
강준이 말했다.“괜찮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거니까요.”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끌어들이겠다는 의미였다. 앞으로 그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소은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저는 세자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제 아버지를 관대하게 대해주셨으면 합니다.”“송 각로 사건에 관해 아버님께 죄를 사하여 주라는 상소문은 올리지 말라고 하세요.”강준이 말했다.소은의 입장에서는 꽤 의외였다. 그러다가 전에 진명우를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일 때문에 랑야에 다
밀실의 차가운 온도에 소은은 손발이 마비가 올 것 같았지만 억지로 눈물을 참아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준의 시선은 동물이나 물건을 바라보는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와의 대치에서 소은은 당연히 우위를 점할 수 없었다.“저는 세자의 비밀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결국 그녀는 먼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아니나 감정적으로 굴며 자존심을 내세워서 좋을 게 없었다.“난 아씨의 비밀에 꽤 관심이 있습니다만.”미풍이 불어와 책상 위에 놓인 한지가 살짝 날아올랐다. 그것은 소은이 며칠 전 부가은에게 건넸던
소은은 진작에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선왕비는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그녀에게서 나온 처방이라고 하면 절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선왕부와 소국공부가 엮이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에게서 처방을 받는다면 분명 자랑하고 다닐 것이다. 어린 후배들의 마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웃어른들의 생각은 거의 비슷했다.강미는 이미 그녀를 경계하고 있으니 소은은 심지연을 설득하는 게 빠르다고 생각했다.“처방을 알약으로 만들고 괜찮은 이름을 붙여 심지연 언니에게 줄 거예요. 그리고 언니가 왕
항상 이 주제를 피하기만 하던 강민은 오늘따라 꽤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제가 마음에 둔 사람을 어머니가 마음에 들어하시지 않을까 봐 걱정이지요.”강준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강 부인이 말했다.“청렴한 가문의 아이라면 다 좋아.”둘째는 선왕부의 세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니 혼인 문제에서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강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좀 더 시간을 주세요.”아들의 성미를 잘 아는 강 부인은 그가 머뭇거리는 것을 봐서 신분이 특별하거나 셋째와 혼담이 오간 사이라고 짐작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리 보수적인 사
“둘째 공자, 오늘 제가 찾아온 일을 세자께는 말씀드리지 말아주세요.”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소은이 말했다. 또 강준이 자신이 의도적으로 가족들에게 접근한다고 오해받기는 싫었다.“그래.”어차피 개인적인 일을 강준에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전생의 소은은 강민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대화가 이렇게 순조로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할머니가 애초에 강민을 신랑감으로 점찍었다면 오히려 나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강준보다는 교류하기
소은은 복희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복희가 울음을 터뜨렸다.“제가 둘째 공자의 먹을 깨뜨렸으니 분명 공자께서 저를 벌하실 겁니다.”복희가 겁에 질려 말했다.그건 강민이 정말 어렵게 구한 먹이었는데 먹 중에서도 희귀품이라고 했다.강민은 나가기 전에 먹을 자신의 서재로 가져가라고 분부했는데 그걸 가지고 가다가 깨뜨렸으니 어떻게 주인에게 보고해야 할지 막막했다.하물며 강민은 큰 공자나 세자처럼 부드러운 사람도 아니었다. 군영에서 부하들을 벌할 때도 절대 봐주지 않은 거로 유명했다.복희가 세자를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한 걸
소은은 조금 걱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강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심지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소준도 집에 없으니 강준이 아니면 진명우의 상황을 알아볼 사람이 없었다.강미는 그녀를 멀리하는 상황이니 다가가고 싶지도 않고 심지연에게도 자신이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그리고 심지연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 딱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소은의 부탁을 들은 심지연은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강준이 소은을 거절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소은이 진명우의 상황을 궁금해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저도 모르
예전에 그녀가 선왕비에게 추천한 흉터를 없애는 처방도 그 중 하나였다.“우리 가문 이름을 달고 점포를 차리려는 거라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부가은은 단번에 소은의 말을 알아들었다.“첫째, 아가씨의 말을 들어보니 주요 고객은 경성의 귀족 부인이나 아가씨들 같군요. 만약에 사고가 나면 우리 가문은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요. 그러니 처방의 안전성은 제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그러면 제가 처방을 누설할 위험 부담이 존재하겠죠. 그건 아가씨의 선택에 달렸어요. 둘째, 우리가 수익을 어떻게
소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상인 가문의 딸 부가은에게 시선을 두었다.전생에 오라버니와 부가은은 온갖 반대를 겪고 힘겹게 약혼했는데 결국 혼인식도 올리지 못하고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버렸다. 부가은은 다른 사람과 혼인할 수는 없다면서 자결을 택했다. 소은은 이번 생에는 그들이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바랐다.부씨 가문은 현재 명성도 꽤 올라간 상태였다. 경성에 부자 가문이 누구냐고 따지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문이 부씨 가문이었다. 궁중의 마마님들이 쓰는 비단, 자기, 찻잎, 백성들이 자주 차 마시러 가는 객잔, 옷감, 각 업계에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