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문은 마차 발을 살짝 걷었다. 소은은 다소곳하게 서 있던 참이었다. 지난번보다 키가 조금 자란 듯했고, 그저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은 역시 택문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강준과 외사촌지간이라 그런지 얼굴 생김새도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었다.다만 강준의 얼굴선이 굵고 뚜렷하다면, 택문은 그에 비해 섬세하고 우아한 인상이라 할 수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면, 아무래도 건장한 강준 쪽에 시선이 더 쏠리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보면, 훗날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길 만도 했다. 황자인 몸이
가게가 정식으로 문을 열기 전, 소은은 몰래 한 번 청천각을 찾았다.부가은의 일 처리 능력은 소은 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그 몇 장의 처방은 이미 '설기환', '기미고'로 완성되어 있었고, 포장 또한 고급 상자에 담겨 있어 화려하고 정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번에 고가품임을 알 수 있었다.그제야 소은은 왜 고대에서 ‘구슬 상자를 사고 주옥을 되돌려 주다’ 는 말이 생겨났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조차도 그 정교한 포장에 시선을 빼앗겼으니 말이다.“전에 말했던 그대 생각이 이런 거였어요?” “언니의 구상이 훨씬 더
눈 깜짝할 사이, 그 검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고 목을 스칠 듯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췄다.“세자 저하, 접니다.” 소은은 황급히 망토를 젖히며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강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칼날을 들어 그녀의 턱 밑에 살짝 대고는, 다시금 칼끝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건달에게 희롱이라도 당하는 듯한 기분에 소은은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소은은 남장을 했지만 그는 분명 소은을 알아보았을 텐데도 일부러 저런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소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은입
소은은 잠시 침묵했다. 만약 강준이 직접 진명우에게 ‘작요’를 달라고 한다면, 그는 선왕부 세자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상당히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한참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소은은 ‘작요’가 지금 진명우에게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작요는 제 혼수품입니다. 세자 저하의 뜻을 따르기 어려운 점,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강준은 본래 혼약을 거절한 사람이니 그렇게 말하고 나면, 더 캐묻지는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강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요즘 저하께서 머무는 이곳은 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강준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익향루의 공자면 다름 아닌...” 강미는 ‘매춘’이라는 단어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그녀는 강준의 눈치를 살피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냈다. 어떻게 오라버니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더러운 매춘부가 감히 선언부를!” 강미는 손을 뻗어 그자의 따귀를 때리려 했고 소은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강준의 뒤에 몸을 숨겼다. 소은은 그의 팔을 부여잡고 잔뜩 겁을 먹은 듯한 모습으로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강준도 그녀의 행동을 막지 않았다.
연말이 가까워질 즈음, 소은은 그제야 택문이 말했던 “다음에 입궁할 때”의 의미를 알아챘다. 경문제는 원체 조용한 걸 싫어하는 황제였기에, 매년 섣달그믐이면 황실의 친인척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잔치를 열곤 했다.소은은 그동안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올해는 경문제 앞에서 주목을 받은 터라 황제는 자연스레 그녀를 떠올린 것이다. 택문도 아마 미리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소은이 궁에 들어간 건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긴장이 안 될 수 없었다. 경문제의 눈에 들어 입궁한다는 건, 소국
“진씨 가문은 원체 기반이 얕아… 제가 마음에 둔다 해도 상대는 저를 눈여겨볼지는 알 수 없지요. 설령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절대 그분을 힘들게 하지 않을 겁니다.” 진명우는 소은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그렇게 말했다.그가 말한 ‘그분’이 혹시 자신인지 소은은 알 수 없었지만, 심장이 저절로 빨리 뛰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비록 검은 평상복을 입고 있어도 풍채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마치 짙은 향이 밴 차 한 잔처럼, 천천히 음미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진 공자께서
그 말에 고금란이 눈살을 찌푸렸다.“적녀든 서녀든, 모두 내 손주니라. 소희도 이렇게 곱게 차려입으니 훤하니 예쁘지 않느냐. 평소에 소희에게 좀 더 신경 쓰거라. 내가 사람을 시켜 치수를 재라 하지 않았으면, 이 새 옷도 못 입었을 테니 말이다.”소희는 소은의 말을 듣고 스스로 몇 번이나 고금란을 찾아가 입을 옷이 부족하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고금란은 그녀를 불쌍히 여겨 사람을 보내 새 옷을 마련해 주도록 했다. 오늘 할머니께서 자신을 보듬어 주시는 말에 소희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위 씨는 내심 냉소를 흘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길 수밖에요.”혹시나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 혼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할까 봐 소은은 짐짓 골치 아픈 척 말했다.소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은 위씨 가문 웃어른들을 만나 뵈었다.소윤의 시어머니는 막내아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연을 날리고 싶다고 떼를 부리고 있었다.“제가 갈게요.”마침 바람을 쐬고 싶었던 소은이 말했다.“그럼 부탁 좀 할게.”소윤의 시어머니가 부드럽게 말했다.“고마워요, 누나. 어서 가요.”위림이 소은을 이끌었다.
장명희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소철수도 인맥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도 없었다.소철주가 부인을 아껴 분가를 요구한 뒤로 장명희의 생활은 점점 평온하고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큰집도 그렇고 시어머니도 그렇고 어쨌거나 그녀의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는 편이었다.“그래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장명희는 차 한 잔만 마시고 바로 심원을 나섰다.위씨는 소은을 보며 한마디 했다.“소윤이가 많이 심심한가 보더라. 너 불러서 얘기라도 하고 싶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얘기를 안 꺼냈다네.”소은은 잠시 고민
진명우가 산적을 토벌하러 가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강준은 이 산적들을 이용해서 량주 지방 세력을 견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 불리한 세력들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 이상, 그는 산적들을 토벌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진명우는 강준의 사람이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은은 강준의 이름으로 서신을 써서 량주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버지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소철주가 유배를 떠난지도 반달이 지났다. 소국공 소철수는 정사품 태상에서 종삼품 태수로 승진했다. 큰 집은 경사
“어찌 자신을 어리석다 말합니까. 낭자의 재능은 대연을 통틀어도 따라올 자가 몇 없는걸요. 낭자가 어리석으면 이 천하에 똑똑한 여인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낭자에게 선왕부 살림을 맡겨도 잘할 것 같기는 합니다만.”강준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잔재주일 뿐이고 어디 내놓을 정도는 아닙니다.”소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가 비록 선왕부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강준은 그녀의 걱정을 알아보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꿇고 있으면 편합니까?”
강준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탁하고 내려놓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소은은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그녀는 자신의 말이 예의가 없었던 점이 있는지 짚어본 뒤에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급한 일이 있다면 제게 사람을 보내셔도 됩니다.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떻게든 세자께 도움은 드릴 테니까요.”그와 안전하게 거래하고 싶었기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그녀는 딱히 거부감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만남을 청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그런데 지금 강준의
소은은 경계를 세우고 고개를 돌려 윤비를 빤히 바라보았다.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눈동자에 맺힌 장난기와 느긋함은 거짓이 아니었다.그녀는 피식 웃고는 답했다.“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부군이라고 하더라도 꼭 잠자리를 했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어쩌면 그 방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윤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를 잘 아는 신변의 부장군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그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북부에서 오랑캐 놈들과 밀서를 주고받은
“가자.”소은은 부채를 챙기며 말했다.두 사람은 익숙하게 영롱대로 찾아갔다. 마중을 나온 여인은 소은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하인에게 말했다.“어서 가서 모시는 공자님이 오셨다고 윤비를 불러와.”잠시 후, 윤비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저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윤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지난번의 싸늘했던 인상에 비해 눈앞의 이 사람은 한결 인상이 부드러웠다. 소은은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어쩌면 윤비가 인기가 많아 영롱대에 많은 돈을 벌어다주니 수많은 ‘윤비’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을 전부 읽어보았습니다. 역사 서적에서 읽었던 이야기들이 지금 상황과 겹쳐 보이더군요.”소은이 웃으며 말했다.소은의 이런 제안은 전생의 경험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유배를 갔을 시에 그 지역에서 꽤 큰 공을 세웠고 그래서 경문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그들 일가족이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전생에서는 공로로 죄를 사면 받은 경우지만 이번 생은 확실히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떠나는 게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소철수의 예상대로 다음 날, 형부 사람들이 소국공부로 들이닥쳐 수색
그녀는 그 일은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송 각로 뇌물수수 사건의 조사가 빠르게 진전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준이 경성을 나갔다면 아마 이 일 때문에 갔을 가능성이 컸다.6개월만에 드디어 이 사건이 끝나가고 있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소철수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은에게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그날 밤, 저택의 편전에 불이 나서 송 각로와의 밀서가 전부 불에 탔다. 소철수는 이미 재가 된 서신들을 호수에 버렸다.“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하는 자가 있다면 혀를 잘라낼 것이다!”소철수는 싸늘한 얼굴로 하인들에게 으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