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사는 전생을 통해 온모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녀의 어미가 남긴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독을 사용할 줄 아는 자와 암살자도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그들의 손에 온갖 고통을 받았다. 이번 생에는 온모가 성급하게 그들을 불러들인 만큼 초조하다는 의미일 것 같았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온사는 이번 기회에 뒤에서 온모를 돕고 있는 자들을 전부 색출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물론 혼자서는 힘드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온사는 고개를 돌려 문밖에 있는 북진연을 불렀다.“섭정왕 전하…!”안에 있는 자가 추월이란 것을 확인한 북진연은 밖에서 온사를 기다리기로 했다.그는 느긋하게 방문에 몸을 기대고 온사가 두고 간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온사가 다시 나와 계속해서 약을 발라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안에서 나는 대화를 듣고 있던 그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왜 그러시오?”그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그냥 죽일 거요? 아니면 목숨은 붙여놓을까?”그는 온사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북진연은 온사의 검이 되고 싶었다.그녀는 그의 무우 사태이기에, 사태가 하는 부탁이라면 그게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다 들어줄 수 있었다.어차피 이미 너무도 많은 살육을 저지른 그였으니 손에 피를 좀 더 묻힌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그녀가 원한다면 수십 명, 몇백 명, 그리고 몇 명을 죽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온사는 순순히 자신의 말을 따라주는 북진연이 고마웠다.심지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도 존귀하신 섭정왕 전하께서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돌이켜보면 북진연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처음엔 여자의 접근을 혐오한다고 해서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지금은 그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사이가 되었고 섭정왕도 흔쾌히 그녀의 검이 되어주었다.그녀가 무리한 부탁을 해도 북진연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싸늘하게 대한 적
“이름은….”온사는 고개를 돌려 충격에 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온모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제 기억에는 김사도라는 자였던 것 같아요.”이름까지 온사의 입에서 나오자 온모는 경악하며 몸부림쳤다.“웁! 웁!”안타깝게도 입이 봉인되어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온사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네가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네가 어떻게 그 사람의 생김새랑 이름까지 알아?’분명 그녀의 기억에 김사도는 경성에 나타난 적도 없었고 온사와 만난 적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온사는 어떻게 그의 존재를 아는 것일까?온사는 분명 김사도를 만난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김사도는 그녀의 어머니가 남겨준 이국인 자객이었고 온모가 가장 믿는 패였다.이 패를 감추기 위해 진국공부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김사도와 연락을 취한 적이 없었다.진국공가의 사람들이 점점 통제를 벗어나자 어쩔 수 없이 하루 전에 서신을 보낸 게 전부였다.그런데 온사는 마치 진작에 김사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김사도가 날 배신한 걸까?’하지만 그것도 영 신통치는 않았다. 온사는 분명 김사도를 잡아달라고 말했기에, 만약 김사도가 그녀를 배신했다면 온사가 섭정왕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 리 없었다.충격을 받은 온모는 초조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방금 전까지는 김사도가 와서 구해주기만을 바랐지만, 지금은 그저 그가 하루라도 빨리 이상함을 느끼고 철수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김사도만 살아 있다면 온사는 절대 쉽게 그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김사도마저 잡히거나 죽는다면 그녀는 가진 모든 패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다음 날, 북진연은 아니나 다를까 온모를 묶어서 마차 지붕 위에 매달았다.그러고는 흑기군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자객의 우두머리를 자극해서인지, 이어지는 며칠 간 수많은 자객들이 몰려들었다.하지만 워낙 적은 인원수에다가 북진연과 흑기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들의 우두머리는 드디
“동생도 미인에게 홀렸구먼! 그런데 여자가 둘이라면 차라리 둘 다 살려서 우리가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건 어떤가?”이태성의 입에서 상스러운 요구가 튀어나왔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산채 대문 앞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김사도를 위해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아직은 김사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았다.김사도가 그들 몰래 움직이고 있을 때, 이태성도 몰래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산채에 있던 산적무리들은 몰래 산길을 돌아 김사도를 포위했다.“너희들이 데리고 있어도 되긴 하지. 하지만 너희들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까?”김사도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동생 말을 들어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하군. 그런데 방금 전에는 이득이 될 것만 얘기하고 우리한테 주의해야 할 점은 전혀 말해주지 않았지 않나?”그러자 이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쾌한 어조로 김사도에게 말했다.“망자에게는 당연히 얘기해 줄 필요가 없으니까.”“뭐? 너!”김사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고 오른손을 들었다. 언제 접근했는지 모를 지네가 순식간에 이태성의 머리를 공격했다.“악!”이태성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형님?”“당장 저 자식 죽여버려!”“죽여!”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김사도는 등 뒤에서 쌍검을 꺼내며 냉소를 지었다.“너희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나한테 항복하는 이는 죽이지 않을 거야.”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산적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기 시작했다.흑호굴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그렇게 한 시진 후, 흑호굴의 산적의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남은 자들은 김사도에게 항복했다.그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 사내가 너무나 강력했다.김사도는 시작하기 전 말했던 것처럼 항복한 산적들을 죽이지 않고 항복을 거부한 자들의 시신을 토막내는 모습들까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너무나 잔인해서 현장에 있던 산적들마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남은 산적들이 반항을 포기하자 김사도
마침 저녁식사 준비를 마친 고요가 커다란 그릇 두개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왕야, 성녀 전하, 어서 식사하세요!”온사는 자기 몫의 그릇을 받아들었다. 냄새만 맡아도 흑기군의 요리사가 꽤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반찬과 국물 모두 채식이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맛이 아주 좋았다.온사는 그릇을 들고 밥을 먹으며 속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며칠 전까지 끊임없이 몰려오던 자객들이 오늘에 와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과 흡사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오?”정신이 다른데 팔린 온사의 모습을 보고 옆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북진연이 물었다.“그자들이 오늘 밤 찾아올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오늘 밤에 무조건 올 거요.”북진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온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오늘 밤이 그들이 움직이기 가장 최적의 시기이니까. 오늘 밤이 지나가면 앞으로 우리가 도착할 곳은 활동하기에 꽤 불편할 것이오. 이틀만 지나면 우린 목적지에 도착할거예요.”김사도가 만약 또 암살자를 보낸다면 오늘 밤이 최적이라는 얘기였다.“오늘 밤도 푹 자기는 글렀네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북진연의 예상처럼 군대가 교대로 식사하는 시간에 갑자기 수림에서 놈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저 놈들이다! 죽여라!”“식량이야! 저렇게나 많은 식량을 갖고 있었다니!”“역시 사도 형님 말이 사실이었어! 은화도 있다니!”“그럼 일단 은화부터 빼앗자고!”“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죽여!”식량과 은화를 담은 차를 알아본 흑호굴 산적들은 광기에 미쳐서 우르르 달려들었다.식사 중이던 흑기군은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버리고 검을 빼들었다.“물자를 보호하라!”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흑기군은 곧 침착하게 검을 빼들고 산적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화살 하나가 온사를 향해 날아갔다.북진연
흑호굴 산적들은 흑기군 진영을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김사도가 보낸 암살자가 북진연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김사도는 마차 위로 뛰어올라, 온모를 구해주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쾅하고 예리한 검이 김사도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그는 재빨리 쌍검으로 공격을 막은 후에 상대의 머리를 노렸다.하지만 추월이 더 빨랐다. 그녀는 힘껏 김사도의 복부를 걷어차서 마차에서 떨어뜨린 뒤, 마차 지붕 위에 서서 싸늘한 시선으로 김사도를 노려보았다.김사도도 고개를 들고 어둠을 닮은 검은 인영을 노려보았다.여기서 이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수를 만날 줄이야.분명 며칠 전에도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공격하는 초식으로 봤을 때는 그림자 호위가 틀림없었다.‘복명 성녀의 사람인가 보군.’온모는 후회가 사무쳤다.온사의 신변에 그림자 호위가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김사도와 연락을 취할 때는 암호로 간단한 얘기만 주고받았기에 추월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은 것만이 변수였다.김사도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그 역시도 그림자 호위의 존재에 꽤 놀란 눈치였다.‘어떡하지.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습격하기도 어려울 텐데!’온모는 초조함에 몸부림쳤다.마차 안에 대기하고 있는 온사에게 위험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온사는 마차 밖 상황에 귀를 귀울이며 한손에는 독약이 든 약병을,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누가 마차에 뛰어들기만 하면 바로 독약을 상대의 얼굴에 뿌릴 생각이었다.그런데 차 안으로 침입한 것은 사람이 아닌 검은색의 지네였다.그것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구멍을 파고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온사의 허벅지로 기어올랐다.다리에 간지러움을 느낀 온사가 고개를 떨군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온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는 재빨리 비수의 칼집으로 그것의 머리를 쳤다.쾅!하지만 지네가 너무 딱 달라붙어 있던 탓에 온사는 그것을 쳐낼 수 있기는커녕, 칼집으로 마차 벽을 치고 말았다.마차 안에서 나는 소리는 밖에서 싸우던 추월의
고요 일행이 사람을 잡으러 간 직후, 북진연은 재빨리 마차로 다가갔다.“사태,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차 안에서 난 소리를 들은 사람은 추월뿐만이 아니었다.다급히 가림막을 연 그의 눈에 한 사람의 하얀 종아리가 들어왔다.차 안에서 지네에게 물린 상처가 없는지 온사의 종아리를 검사하던 추월은 재빨리 다시 가림막을 내렸다.온사가 다급하게 말했다.“섭정왕 전하,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지네가 차 안에 들어왔어서 추월이 상처가 없는지 봐주고 있었습니다.”잠시 당황했던 북진연은 지네라는 얘기를 듣고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있는 것이오? 상처를 제외하고 피부에 바로 닿은 곳은 있소?”온사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뭔가 떠올라서 방금 지네를 만졌던 오른손을 들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 끝에 검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추월의 안색이 급변해서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온사가 재빨리 보따리에서 은침 하나를 꺼내 주저없이 중독된 식지에 찔렀다.독혈이 천천히 스며들었다.곧이어 그녀는 막수가 든 해독제를 입안에 넣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짝 스치긴 했는데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해독제만 먹으면 됩니다.”지네의 몸에도 독이 있을 줄 모르고 방심했기에 생긴 일이었다.물론 방금 전 상황에서 지네를 공간 안에 집어넣지 않고 물렸더라면 상황은 아마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추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제가 동작이 너무 느렸던 탓입니다. 그 자식을 빨리 처리하고 차 안으로 돌아왔더라면 사태가 그 흉물을 만질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바깥에서 듣고 있던 북진연도 죄책감이 몰려왔다.이국인 중에 이런 사악한 비술을 쓸 줄 아는 자가 많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었다.“왕야!”고요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왔다.북진연은 그를 보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고요가 말했다.“왕야, 소인이 무능한 탓입니다. 그자는 왕야의 화살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었는데 달려가 봤더니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금주에 도착한 이후, 후끈거리는 온도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분명 타 지역의 온도는 차가워지고 있었는데 금주 지역은 아직도 한여름처럼 덥고 건조했다. 심지어는 세 달째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풍작을 거두었어야 할 논밭은 말라서 쩍쩍 갈라졌고 강까지 말라서 바닥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황무지가 따로없었다.길가에는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온사와 구제 물자를 실은 대오를 본 그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다가왔다.하지만 결국 흑기군의 위압감에 감히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대오는 묵묵히 전진했다.난민을 회피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왜 금주에서 이렇게 급하게 기우 대전을 치르려고 했는지 이해됐기 때문이었다.지친 민심을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폭동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행군 속도를 좀 더 올려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무조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예!”흑기군은 침착하고도 빠르게 행군을 이어갔다.그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드디어 금주 현령 저택에 당도할 수 있었다.소식을 들은 왕수안은 관원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섭정왕 전하와 성녀 전하를 뵙습니다!”관원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주변 백성들의 주의를 끌었다.복명 성녀가 왔다는 소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북진연은 싸늘한 시선으로 왕수안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왕수안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섭정왕 전하. 최근 현령부는 이미 몇번이나 백성들에게 포위당했었습니다. 사실 백성들도 불안해서 저러는 것이겠지요… 다 제가 무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그는 성안의 백성들이 섭정왕과 복명 성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소란이 좀 잦아들 것이라고 기대했다.북진연도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고는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사태, 이제 내려오시오.”주변 상황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그는 마차로 다가가서 창
왕수안이 갑자기 큰절을 올릴 줄 예상하지 못했던 온사는 조금 당혹스러워서 다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몸을 일으킨 왕수안에게 그녀는 가장 먼저 궁금했던 얘기를 물었다.“기우 대전 때 쓰일 제천대는 이미 지어졌지요?”왕수안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성녀 전하. 섭정왕 전하까지 함께 금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밤을 새워가며 드디어 어제 제천대를 완공했습니다. 오늘 사람을 보내 점검도 마쳤으니 내일 바로 기우 대전을 시작하시면 됩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북진연이 말을 덧붙였다.“사태는 일단 돌아가서 쉬시오. 내일 있을 기우 대전을 미리 대비해야지.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것이오. 그러니 남은 건 나에게 맡기고 들어가시오.”“예.”온사는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며칠 길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느라 피로가 쌓였기에 지금은 휴식이 절실했다. 왕수안은 미리 준비한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고요 일행은 그녀가 머물 방을 미리 꼼꼼히 검사했다.북진연은 고요를 시켜 온사의 신변을 밀착 호위하게 했고, 추월은 여전히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온사의 안전을 지켜주었다.방 문을 닫은 온사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중간에 추월이 깨워서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드러누워 잠을 잤다.그날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고 아무도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온사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성녀 전하, 이것은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기우제 관복입니다. 오늘은 이걸 입고 우리 금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왕수안은 아침 일찍 방문해서 화려한 붉은색의 관복을 온사에게 건넸다.온사는 그 관복을 힐끗 보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왕수안에게 말했다.“왕 현령, 내 자네가 이번 기우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금주 백성들이 고통받는 지금 내가 이런 화려한 관복을 입고 기우제를 지내면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안 그런가?”화려함의 정도가 지나친 관복이었다.그녀는 기우
온장온은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 없었다.분명 마차에 난입하려 한 사람은 셋째였는데 칼은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섭정왕께서 갑자기 기분 나쁘다고 그의 목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셋째가 흑기군의 호위 범위에 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 자신이 동생의 죄를 대신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온장온은 처음으로 아버지와 동생에게 원망을 느꼈다.온사의 명성을 갖고 섭정왕을 협박한 아버지, 그리고 얌전히 있으랬더니 마차에 난입하려고 한 동생, 둘이 친 사고를 왜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지 분통이 터졌다.온장온은 차라리 오늘 따라오지 말걸 하고 후회했다.어머니의 시신이 온사에게 있지만 효심이 지극한 온사이니 시신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다.온사가 화가 좀 풀리면 그가 찾아와서 사정해도 될 일이었다.아무리 생각해도 후회가 치밀자, 온장온은 불만 섞인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 이제 그만하시죠? 어쨌거나 어머니의 시신은 온사가 가져갔지 않습니까. 아버지든 아들인 저희든 지금은 온사를 추궁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막수는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온장온을 바라보았다.‘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큰 애가 저렇게 변했지?’그녀는 온장온이 어쩌다가 사람이 할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어떻게든 이들과 대치를 이어가려던 온권승은 불쾌한 눈으로 장남을 노려보았다.북진연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진국공, 나이가 들었으면 패배를 인정하는 게 심신에 좋아. 자넨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구만. 차라리 장남이 나아.”온권승이 냉소를 지으며 반박하려던 찰나, 마차에서 듣고만 있던 온사가 입을 열었다.“진국공 어르신, 자꾸 이렇게 시간을 끌면 당신께서 그렇게 아끼는 사생아가 목숨을 잃을 텐데요.”그 말을 들은 온씨 가문 사내들의 안색이 급변했다.온권승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마차에 대고 소리쳤다.“너 온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그 애가 사람을 시켜 어머니의 시신을 훔쳐가고 보복한답시고 시신을 훼손하려 했습니다. 이렇게
어쨌거나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란자군의 시신을 가져갈 것이다.란자군은 진국공부 사람이고 죽어서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그녀의 시신은 그녀를 위한 조상묘에 묻혀야 마땅했다.그리고 세월이 지난 후, 그녀와 함께 묻힐 것이다.“섭정왕 전하, 괜히 논점 흐리지 마시죠. 온사의 명성을 그렇게 걱정하신다면 그 애를 설득해서 어미의 시신을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러면 저도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허튼소리는 여기까지!”북진연은 싸늘한 목소리로 온권승의 말을 잘랐다.말에서 내린 그는 성큼성큼 온권승의 앞으로 다가갔다.온권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북진연이 주는 위압감에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북진연이 앞으로 다가오자 키차이에서 오는 압박감과 함께 굴욕감이 온권승을 괴롭혔다. 그런 온권승에게 북진연은 더 모욕감을 주는 말을 했다.“난 진국공 자네랑은 달라. 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 여인의 명성을 갖고 사람을 협박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자네가 딸의 명성을 들먹이며 내게 답을 요구했으니 그 답을 지금 해주지!”그 순간 막수마저 주먹을 불끈 쥐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북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북진연이 일시적인 충동으로 온사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발언을 할까 봐 두려웠다.북진연이 말했다.“난 늘 정직하고 당당하게 살아왔어. 내가 여인의 접근을 혐오한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 만약에 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 나타난다면 그것 역시 만 천하가 알게 될 거야. 내가 누구를 소중이 생각하고 아끼는 줄 알면 당연히 그 사람을 어렵게 대해야 하거늘!”그 말이 끝나자 현장에 적막이 감돌았다.온장온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북진연을 바라보았고 온권승은 마치 똥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당장이라도 저 요망한 얼굴에 주먹을 꽂고 싶었다.“그러니 진국공, 내가 무우 사태에게 어떤 마음인지 이제 알겠나?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한번 더 말해줘야 할까?”온권승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북진연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
“섭정왕 전하!”뒤늦게 온자월의 옆으로 달려간 온권승은 기이할 정도로 휘어진 아들의 다리를 보고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어찌 제 아들에게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애를 죽이려고 작정했어요?”북진연은 그런 온권승을 바라보며 냉소를 짓더니 말했다.“진국공, 난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의 안전을 보호했을 뿐이야. 자네의 아들은 흑기군 호위를 따돌리고 강제로 성녀 전하가 계신 마차에 침입하려 했어. 건방지게도 말이야. 이건 섭정왕인 날 무시하는 행위 아닌가. 정말 한방에 죽여버릴까 생각도 했네만 자네를 봐서 참은 건데, 어떻게 생각하나?”“참으로 건방지군요, 섭정왕!”온권승은 분노에 치를 떨었다.“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전하께서 이리도 온사 그 계집애를 감싸고 도는 이유 말입니다. 단순히 폐하의 어명 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전하께서 온사에게 어떤 마음인지 본인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을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짝!온권승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막수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손을 뻗어 온권승의 귀뺨을 쳤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온권승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온권승! 이 짐승보다도 못한 놈!”막수는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게 아비로서 할 말이야? 아무리 무우가 이제는 진국공부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찌 그런 식으로 딸의 명성을 더럽힐 수 있지?”만약 이 소문이 새어나간다면 온사는 경성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특히나 그녀는 부처님 앞에 맹세를 올리고 출가한 승려였다. 만약에 온사가 섭정왕을 홀려서 불도를 더럽혔다는 죄를 뒤집어쓰게 된다면 그녀를 벼랑으로 떠미는 격이었다.“아버지, 방금 하신 말씀은 선을 넘으셨어요!”듣다못한 온장온마저 고개를 돌리고 불만스러운 어투로 온권승에게 말했다.마차에 타고 있는 온사가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상심할까?아버지의 말로 그녀의 명예가 실추된다면 그건 정말이지 온사에게 큰 타격이 될 것이었다.하지만 온장온은 오라버니인 자기들이 온사의 명성을
잠자코 자리를 지키던 온사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이때, 막수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막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에게 말했다.“넌 나갈 필요 없어. 네 어머니를 잘 지키고 있어. 내가 나갈게.”말을 마친 막수는 마차에서 내려갔다.고개를 돌린 온권승 부자는 온사가 내려오길 기대했지만 나온 사람은 막수였다.막수는 온권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온장온과 온자월을 번갈아보더니 담담히 말했다.“넷째는 안 왔네. 하긴, 그 놈은 말도 타지 못하는 약골이니까.”“넷째가 오든 안 오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야? 당장 온사 나오라고 해!”온권승이 옆에 있으니 온자월도 대담해졌다.그는 짜증스럽게 막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감히 건방지게 성녀의 이름을 입에 담아?”아직도 반성을 모르는 아이에게 막수는 인내심을 잃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권승을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자군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진국공 가문은 애들을 대체 어떻게 가르친 거지? 어찌 저런 예의 범절도 모르는 망나니가 됐어?”온권승은 불쾌한 얼굴로 경고했다.“막수, 네가 출가인 신분이라는 걸 잊지 마. 어디 출가인이 그런 불경한 말을 해?”“내 성격 진작에 알고 있었잖아? 예전 기억이 별로 없나? 승려한테 욕먹어서 기분이 불쾌해? 또 귀뺨 한번 맞고 싶어?”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황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온자월과 온장온 형제는 물론이고 북진연마저도 눈썹을 치켜올렸다.‘역시 온사의 사부여서 그런지 개성 있어.’경성에 진국공을 상대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막수를 제외하고 몇 없을 것이다.온권승은 버럭 화를 내며 막수를 협박했다.“예전에는 부인 체면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지만 감히 오늘 내 앞길을 막는다면 나도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아!”그의 협박에 막수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네 주제에? 그럴 자격은 있고?”온권승이 음침한 눈으로 노려보는 가운데 막수는 싸늘히 덧붙였다.“넌 사생아의 신분을 은폐하려고 자군의 딸에게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었
그녀의 침묵에 막수도 잠시 고민에 잠겼다.잠시 후, 막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가 몇번을 말해. 독과 해독제는 동시에 제조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온사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제가 돌아가서 바로 만들게요!”다행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북진연은 흑기군을 이끌고 근처를 배회하던 중에 뜻밖의 수확이 있었다.도주하던 사구 일당이 그대로 북진연의 포위 범위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그리고 그때 마침 진국공부에서 사람을 보내왔다고 한다.“그 사람들이 왜요?”온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북진연은 안쓰러운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온모를 데려갔어. 김사도는 도망치고 사칠과 사구를 우리가 잡았어. 네가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사람을 시켜 이쪽으로 끌고 오는 중이야.”당연히 김사도와 온사의 관계를 아는 북진연이 일부러 풀어준 거였다.그래서 북진연은 부하를 시켜 김사도에게 틈을 주었고 그걸 눈치챈 김사도는 사구와 사칠을 버려둔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여기로 끌고 올 것까진 없습니다. 사칠은 그냥 죽이고 사구의 몸에 뱀독 해독제가 있는지 수색하고 있든 없든 그냥 목을 치면 됩니다.”뱀독 해독제를 연구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그녀는 더 이상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출가인이 사람을 죽이라는 말을 이리도 쉽게 하는데도 북진연은 전혀 그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온사가 그들의 죽음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것이다.곧 지시가 내려졌고 결과가 나왔다.사구의 몸에는 해독제가 없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안타깝게도 온사는 주저없이 죽이라고 말했고 사구의 목이 떨어졌다.온사와 막수는 온자신과 란자군의 시신을 챙겨 길을 나섰다.당나귀를 타고 갈 수는 없으니 당나귀는 자연스럽게 고요에게 맡겨졌다.“걱정 마세요, 성녀 전하. 제가 이 녀석을 어떻게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흑기군은 그들을 호송하기로 했다.남산 산기슭
“무우야!”“사태!”막수와 추월이 동시에 소리쳤다.온사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온자신에게 밀쳐져서 바닥에 쓰러졌다.그녀는 다급히 온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뚝에는 가느다란 독사가 매달려서 독니로 그의 살을 깨물고 있었다.추월은 바로 독사를 쳐내고 검으로 그것의 머리를 잘랐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온사는 재빨리 온자신의 옷소매를 위로 걷었다. 독사에게 물린 부위가 이미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빨리 팔뚝을 묶어!”막수는 란자군의 시신을 온사에게 넘긴 후, 해독제를 꺼내 온자신에게 먹였다.그러나 사구의 독사는 독성이 아주 강한 품종이라 해독제도 독이 몸에 퍼지는 시간만 늦출 뿐이었다.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일각만 지나면 온자신은 독성이 온몸에 퍼져 죽게 될 것이다.“온사야, 내 동생… 괜찮아? 그 뱀… 멀리 도망쳐… 위험해….”온자신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온사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만 말해요. 지금 위험한 건 당신이니 체력을 아껴요.”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하는 온사를 보고 온자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 들을게.”온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막수에게 물었다.“사부님,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막수는 은침을 꺼내 온자신의 혈자리에 꽂으며 말했다.“있어. 걱정 마. 내가 있는 한 이 녀석 절대 죽지 않아.”그제야 온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곧이어 막수는 싸늘한 얼굴로 온사에게 말했다.“네 전갈을 시켜서 뱀에게 물린 부위를 물게 해. 독으로 독을 공격해서 뱀독을 약화시켜야 해!”“예.”온사는 전갈왕을 하나 꺼내 온자신의 팔뚝에 놓았다.한 마리로 부족해서 막수는 또 한 마리를 부르라고 했다.그렇게 전갈왕 두 마리가 양쪽에서 독사가 물린 부위를 깨물었다.그러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잠시 후, 온자신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악! 아파, 너무
전갈을 본 사구와 사칠은 의심의 눈초리로 김사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자신들보다 더 충격에 빠진 그를 보고 의심이 약간 사그라들었다.“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요!”저것들은 일반 전갈이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소중한 독사들이 떼죽음을 당할 상황이었다.사구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사칠과 함께 온모를 붙잡고 뛰었다.“싫어! 나 안 가! 이 무능한 자식들! 어떻게 여자 셋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 난리야!”온모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하지만 이번에 사구와 사칠은 그녀의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그들은 강제로 온모를 끌고 갔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온사를 힐끗 바라본 뒤에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사구가 자리를 뜨자 요행으로 살아남은 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물론 움직임이 느린 자들은 전갈의 집게발에 찔려 죽었다.“도망쳤네.”막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사구와 온모가 도망친 방향을 노려보며 말했다.그러고는 흐뭇한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았다.“미리 대비해 뒀기에 다행이야. 섭정왕 전하의 사람들도 좋은 소식을 전해오겠지.”한차례 대결이 드디어 끝나자 온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리 좀 하고 저희도 이곳을 떠나죠.”그녀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고는 막수에게 말했다.그런데 이때, 등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사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니?”나무 뒤에 숨어서 이 사태를 지켜보던 온자신이 밖으로 나오며 온사에게 물었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독사의 사체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온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미 다 봤으면서 새삼스럽게 뭘 물어봐요? 보신 그대로예요. 더 설명할 것도 없어요.”온자신은 흠칫하며 막수가 안고 있는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러니 막내가… 널 협박하려고 어머니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는 얘기야?”“협박이 아니지요.”온사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보복이에요. 분을 못 이겨서 나에게 보복하려고 어머니의 시신을 도굴해서 훔쳐간
온모의 호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등 뒤에 있던 사구가 담담한 미소를 짓더니 답했다.“명을 받들겠습니다, 아가씨.”걸걸한 목소리가 울리자 사방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수십 마리나 되는 비취색 독사들이 빠른 속도로 온사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그것들은 온사 일행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방을 포위했다.그 광경을 본 온모는 지금 당장 고통받는 온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온사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살려달라 애원할 생각을 하니 웃음이 터져나왔다.그런데 이때, 온모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피를 뿜었다.“아가씨!”당황한 사구가 얼른 달려와서 온모를 부축했다.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검붉은색이었다.“감히 아가씨께 독을 먹였어?”사구는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독사들을 노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내가 사전에 독을 먹이지 않았으면 너희 같은 비겁한 자들을 어떻게 상대하라고?”“젠장! 당장 해독제 내놔!”“그 전에 네가 우릴 무사히 보내준다면 기꺼이 줄 수 있어.”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안 돼… 절대 보내주지 마!”온모는 피를 토하면서도 사구를 꽉 잡고 이를 갈며 말했다.“온사는 절대 돌려보내면 안 돼!”그동안 그 고생을 견디며 참아온 이유는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그래서 절대 온사를 무사히 돌려보낼 수 없었다.“하지만 아가씨, 체내의 독은….”“닥쳐! 이 무능한 자식! 당장 저 늙은 할망구부터 잡아. 저 할망구가 쟤 사부야. 저 늙은이만 잡으면 온사가 어련히 알아서 해독제를 내놓겠지!”사구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반절이 넘는 독사를 막수에게로 보냈다.막수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독사를 발로 차버리고는 소매에서 웅황이 든 독약을 독사들에게 뿌렸다. 앞에서 돌진하던 독사 몇 마리가 독을 맞고 쓰러졌다.하지만 그 뒤로 더 많은 독사가 몰려왔다.수량이 많아지니 막수도 점점 상대하기 버거워졌다.그녀는 란자군의 시신까지 안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시신을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