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갈아입은 온사는 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고요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왕수안의 어깨를 툭 쳤다.“왕 현령, 성녀 전하는 이미 멀리 갔는데 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빨리 따라가지 않고?”그제야 정신을 차린 왕수안이 다급히 달려가며 온사를 불렀다.“같이 가요, 성녀님!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빨리 가자! 늦으면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간다, 가! 좀만 기다려!”“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자네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것이야?!”금주성 성문 밖,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세 달째 가뭄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은 거의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금주성 현령이 폐하께서 친히 책봉한 성녀님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고, 무려 하룻밤 사이에 그 소식은 금주성 밖까지 퍼졌다.수많은 백성들은 기우 대전에 참석해 복명 성녀의 얼굴을 보려고 모여들었는데, 점점 더 많은 백성들이 금주성 안에 집결되자 성내의 호위가 부족할 정도였다.북진연은 어쩔 수 없이 반 이상의 흑기군을 파견하여 성내 호위를 도와주게 했다.잠시 후, 기우 대전을 진행할 제천대 주변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천대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관원들은 민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못 오게 막을 수가 없었다.그들은 제발 아무 일 없이 기우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비가 바로 내리지 않더라도 순조롭게 끝나 성녀만 안전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의 목서리 또한 점점 커지고 있었다.모든 호위와 흑기군들이 바쁘게 돌아치고 있을 때, 멀리서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성녀 전하 납시오!”왕수안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크게 질렀다.온사는 마차에 앉아 수치심을 느꼈다.‘왕 현령은 언제 목청이 저렇게 좋아진 거지?’성녀가 왔다는
주변은 곧이어 조용해졌다.높은 제천대에 선 온사는 밑에서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늘에 제를 올렸으니 이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시간이었다.온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곧이어 그녀의 예쁜 입에서 청아한 기도문이 흘러나와 백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여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한마디 한미다 마다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곧이어 제천대 아래에서 북소리가 울리며, 제복을 입은 남녀가 제천대를 둘러싸고 기우제를 위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심금을 울리는 북소리와 성스러운 춤, 그리고 고결한 성녀와 간절한 소망을 가진 백성들이 이 순간 함께 어우러져 가슴 뛰는 장면을 연출했다.온사의 기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한번 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녀는 다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두번째에도 실패하자 다시 세번째, 세번째도 묵묵부답이자 네번째, 그렇게 온사는 제천대에 서서 같은 기도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와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제사의 춤도 계속되었다.제천대 아래의 백성들은 고개를 들고 그들의 성녀를 우러러보았다.성녀의 기도문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하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누군가가 갑자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비 온다!”“정말 비네?”“드디어 재앙이 끝이 났어!”“아버지, 어머니! 보고 계신가요? 재앙이 끝났어요!”금주성 안팎의 백성들은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달려나왔다.그들은 빗속에서 환호하며 무려 세 달 만에 찾아온 큰비를 두 손 들고 환영했다.“성녀 전하 덕분이야!”“맞아! 복명 성녀님의 기도에 하늘도 감명하여 비를 내려주신 게 분명해!”“복명 성녀는 보살님이야!”“폐하께서 친히 책봉한 성녀 전하시잖나.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야! 우리 모두의 성녀님이라고!”금주성의 모두가 빗속에서 온사의 이름을 외쳤다.대명 왕조의 유일 성녀, 복명 성녀.그녀의 이름은 훗날 역사에도 이렇게 불렸다.7일 후, 온사 일행은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이건 어떻게 할 거요?”성으로 들어가기 전, 북진연은 기절한 온모를 가리키며 온사에게 물었다.온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저한테 맡겨주시지요.”“사태 혼자 괜찮겠소? 김사도가 무조건 다시 찾아올 텐데?”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사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남은 암살자들 모두 숨어버린 것 같았다.“괜찮아요. 추월이 있으니깐요. 어차피 그 놈은 추월의 상대가 못 돼요.”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곤충이나 독을 사용하는 놈이긴 하나, 제가 아는 분께서 놈보다 훨씬 독에 대해 뛰어나시거든요. 그리고 경성에도 돌아왔으니 이제 안전해요.”김사도가 감히 다시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전생에 그녀에게 온갖 고통을 주었던 사내였기에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사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 없었다.그녀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김사도만 죽으면 그녀는 바로 온모를 죽일 생각이었다.완벽한 살인 계획을 세운 온사는 다시 마차에 올라탄 후, 추월에게 먼저 온모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그녀와 북진연은 입궁하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한바탕 치하와 포상을 받은 뒤에 마차를 타고 수월관으로 돌아갔다.
온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제가 워낙 먼 길을 떠났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걱정이 되셨겠죠. 사저도 나중에 멀리 나가시면 사부께서 걱정하실 거예요.”하지만 막수는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했다.‘아니야, 넌 달라.’무고를 대하는 마음과 무우를 대하는 마음은 달랐다.란자군이 세상을 떠난 후, 감정이란 것을 느껴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보신탕의 양이 많았기에 막수는 먼저 온사를 챙긴 후에 나머지를 다른 사태들에게까지 나눠주었다.온사는 보신탕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사부! 정말 맛있네요.”“맛있으면 됐어. 전에 네 어미한테도 자주 만들어 줬는데, 매번 내가 만든 국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온사의 어머니를 떠올리자 막수의 얼굴에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하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그 모습에 온사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었다.“아, 내가 또 속상한 얘기를 꺼냈구나.”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낀 막수가 말했다.란자군의 사망은 그녀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주었지만 그건 온사도 마찬가지였다.막수는 손을 뻗어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착하지. 이번에 금주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보거라. 나도 금주는 한 번도 못 가봤구나.”“좋습니다.“막수가 계속 슬퍼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온사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그리고 얘기를 들은 막수 사태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그제야 아끼는 제자가 갑자기 금주로 불려가서 기우 대전을 주관한 이유가 배후에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가는 길에 수많은 암살자와 곤충과 독을 쓰는 이국인 놈을 만날 줄이야!“김사도라고 했지? 내 기억해 두겠어. 감히 우리 수월관을 찾아오면 내 가만두지 않아!”막수는 분노에 책상을 쳤다.당장이라도 진국공에게 달려가서 딸 교육 좀 잘 시키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언제는 온사를 악랄하고 속좁은 애라고 욕하더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인간은 따로 있었다.온모는 그야말로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었
온모에게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먹이고 그녀의 눈코입을 모두 봉인한 온사는 팔다리까지 꽁꽁 묶어서 자신의 옥패 공간에 던져넣었다.비록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에 온모를 들여놓는 게 껄끄럽긴 하지만 김사도가 찾을 수 없는 곳은 여기뿐이었다.온사는 온모를 공간의 작은 오두막에 두었다.앞으로는 매일 끄집어내서 물과 음식을 주고 다시 던져넣기로 했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온사는 공간 안의 약재를 놓아둔 곳을 찾았다.이곳에 보관했던 약재들은 이미 구조 물자와 함께 금주에 기부했다.금주에 비가 내리긴 했지만 자연 재앙이 가져온 후유증은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약재들은 모두 흔히 쓰이면서도 효과가 좋은 것들이니 금주의 백성들에게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뒤돌아선 온사는 넓게 펼쳐진 자신의 보물창고, 약초밭을 바라보았다.희귀 약초를 땄던 곳에 영기가 깃든 냇물을 부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자라났다.그녀는 두 개의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하나는 사부에게, 또 하나는 북진연에게 줄 것이다.추월에게도 뭐 하나 주고 싶었지만 약재들이 그녀에게는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그래서 온사는 추월의 선물은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그녀는 약재 백과서를 들고 느긋하게 약초 밭을 누비며 정성 들여 고른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두 가지를 선택했다.하나는 백년 영지였다.온사는 심혈을 보강해 주고 심열을 내리는 약효가 있는 그것을 막수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의술을 배운 후에야 그녀는 사부가 심장이 약간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정작 의사인 막수 본인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는데 온사는 제자로서 당연히 스승을 챙기고 싶었다.비록 큰 병은 아니지만 나중에 사부가 연세가 들면 이런 작은 질병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온사가 백년 영지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다른 하나는 심신의 안정과 원기 보양에 좋은 회춘초로 골랐다.비록 섭정왕이 원기 보양까지는 필요 없더라도 심신의 안정을 지켜주는 약효가 있으니 회춘초가 가장 적당했다.
그녀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안에 든 것은 백년 영지였다.온사는 웃으며 말했다.“사부께서 저에게 잘해주셔서 저도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답니다.”그녀는 자신의 걱정을 막수에게 전했다.“영지가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는 사부님도 잘 아시잖아요. 저는 줄곧 사부의 병이 걱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이걸 선물하는 거예요. 괜찮다고만 넘기지 마시고 신경 써서 치료했으면 해요.”막수가 만약에 적극적으로 치료했었다면 이 정도 잔병은 진작에 나았을 것이다.온사는 선물의 귀중한 정도보다 제자로서의 걱정과 관심을 전하고 싶었다.잠시 침묵하던 막수는 병치료를 미루고 있었던 까닭에 대해 입을 열었다.“네 어미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후에 난 한동안 상심에 빠져 있었단다. 그러다가 심병까지 얻게 되었지. 치료를 안 했던 건 치료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나를 관심하고 걱정해 주는 제자도 있으니 제대로 치료를 해보마.”말을 마친 막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온사는 적잖이 놀랐다.사부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것 같았다.그리고 사부가 어머니의 죽음에 비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온사는 예전에 독점욕을 느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사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자신의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사부님, 사부님께서 어머니의 죽음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걸 어머니가 아신다면 분명 속상해하실 거예요.”“그러니 치료 잘해요. 앞으로 제가 오래오래 사부님 곁에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막수는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그래, 그래야지.”사부의 방에서 나온 온사는 북진연에게 줄 선물을 들고 처음으로 섭정왕부로 향했다.출발하기 전, 그녀는 먼저 서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잠시 후, 섭정왕부의 하인이 마차를 끌고 수월관으로 왔다.마을 주민의 차를 얻어타고 가려던 온사는 주저없이 마차에 올랐다.두 시진 후, 마
“회춘초요?”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 온사를 바라보며 환호를 질렀다.“되죠! 당연히 도움되죠!”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난번에 성녀 전하께서 왕야께 백년 자령지를 선물하셨지요. 이제 왕야의 치료에 필요한 희귀 약재가 두 가지 남았는데 그 중 하나가 회춘초입니다!”‘이런 우연이?’온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임자부는 계속해서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요? 혹시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신가요?”온사가 말했다.“제게 회춘초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지난번에 섭정왕께서 저를 금주까지 호송해 주시고 수차례 위험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셨기에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그녀는 나무 상자를 임자부에게 건넸다.임자부는 급급히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회춘초가 안에 들어 있었다.딱 봐도 백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귀한 약재였다!임자부는 환호를 질렀다.“잘됐어요. 너무 잘됐습니다! 왕야의 처방전에 꼭 필요한 희귀 약재를 또 하나 구했네요!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실 줄은 알았습니다. 고요, 내가 뭐랬나? 내 말 맞았지?”온사는 순간 흠칫하며 임자부에게 물었다.“임 의원께서는 내가 회춘초를 갖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셨나요?”임자부는 기쁨에 들떠 온사의 표정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지난번에 갖고 오신 백년 자령지 때문이죠. 제가 이 코가 아주 개코거든요. 약재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지난번 백년 자령지를 보고 회춘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진하고 오래 감도는 향은 백년 회춘초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죠!”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듯 말했다.하지만 정작 온사는 가슴이 철렁했다.강한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고마워서 선물한 약재가 단서를 남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옥패 공간에서 회춘초는 백년 자령지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옥패 공간 내부에 영기가 감돌고 있어서 희귀 약재들은 환경을
“전하께 너무 감사하네요. 여러분도 이 많은 걸 찾아오느라 고생하셨어요.”북진연은 그녀가 정원에 심은 약초들을 보고 그녀를 위해 뒷산까지 약초밭으로 개간해 주었다.그리고 약재 씨앗을 찾아봐 주겠다고 하더니 그 약속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존귀하신 섭정왕 전하께서 한낱 승려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하니 온사는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비록 북진연에게 회춘초를 선물한 행위가 자신의 정체를 탄로나게 할 위험도 있지만 별채 정원에 가득 채워진 씨앗과 묘목들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괜히 후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섭정왕은 한 번도 그녀에게 과분한 요구나 선 넘는 행위를 한 적 없었다.솔직히 온사의 주변에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와준 사람은 섭정왕이 유일했다.이런 생각을 하니 온사는 초조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성녀 전하!”임자부는 잔뜩 들뜬 얼굴로 온사에게 달려오더니 말했다.“전하께서 의술을 공부하고 계신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소인의 처방 한번 봐주시겠어요? 아주 신묘하지 않나요?”임자부는 종이 한 장을 온사에게 건넸다.고요가 미처 그를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온사는 흠칫하더니 이내 침착하게 임자부의 손에서 처방을 받아 위에 쓰인 약재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임 의원의 의술은 참으로 절묘하군요. 심신 안정에 좋은 약재를 아주 잘 배합했어요.”“당연하죠! 저 임자부는 이 나라의 의성입니다. 심신미약 정도야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죠!”임자부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의성이라는 말에 온사는 놀란 눈으로 임자부를 바라봤다.“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 유명한 의성이 당신이었나요?”“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표정은 좀 과장된 것이긴 합니다만.”임자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하마터면 저승길 갈 뻔한 녀석을 구해준 적은 있죠. 그 일로 소문이 그렇게 나서 그렇지 죽은 자는 못 살린답니다.”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죽은 사람 살리는 건 신선이나 가능한 거죠. 제가 무슨 수로 그런 능력을 가졌겠습
그는 혹시라도 막수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해명을 덧붙였다.하지만 그럴수록 막수의 눈에는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온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랬군요. 어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죠.”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고 북진연과 막수만 정원에 남았다.막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다 보일 정도예요. 무우는 현재 우리 수월관 사람이니 전하께서 이럴수록 무우의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북진연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서신을 받은 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수월관에 도착하고 막수와 부딪쳤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밤중에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다니,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온사의 명성에 큰 누를 끼칠 것이다.북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군. 사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다음엔 더 주의하겠습니다.”막수는 다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았다.이때, 온사가 뜨거운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세 사람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사는 북진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막수와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사부님, 독사의 사체는 어디에 쓰려고 남기라고 한 건가요?”온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제야 구석진 곳에 쌓인 피 묻은 보따리를 발견했다.살짝 풀어진 틈새로 독사의 머리가 보였다.비취색의 영롱한 색상을 보고 북진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매우 강한 독사인데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보따리의 형태로 봐서 적어도 열 마리는 될 것 같았다.이게 모두 온사의 정원에서 나왔고 오늘 온사가 하마터면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북진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미 죽은 녀석들이고 좋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 마침 3일 후에 그 사구라는 인간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이것들로 좋은 선물을 준비할
약속 시간을 잡은 사구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그렇게 온사의 정원을 지나던 그는 뭔가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늙은 여승이 있었다.사구는 그 여승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그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뱀들이 소매에서 기어나와 여승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사구는 그걸 본 여승이 겁에 질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흥미가 사라진 사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길로 수월관을 벗어났다.사구가 떠난 후, 추월은 정원 안팎을 꼼꼼히 확인했다.그리고 정원 곳곳에서 십여 마리의 뱀을 잡아냈다.“사구 놈이 다녀간 후로 내 처소가 뱀 소굴이 다 되었네.”독사를 전부 처치한 추월은 굳은 표정으로 뱀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사르려 했다.그리고 이때, 막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잠깐, 그 독사들은 그대로 둬.”고개를 돌린 온사가 물었다.“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네가 나 몰래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있을 줄도 몰랐잖니.”막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사를 쏘아보았고 온사는 괜히 찔려서 어깨를 움츠렸다.사부는 밖에서 그녀와 사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온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작정하고 숨긴 게 아니라 확실해지면 사부님께 말하려고 했어요!”“정말이니?”막수 사태는 못 믿겠다는 어투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온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저도 출가인입니다, 사부님!”“하, 말은 잘해.”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일단은 믿어주도록 하마. 허나 삼일 후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그건 안 돼요, 사부님!”온사는 당황하며 막수를 말렸다.“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상대가 몇이나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만약 사람이 많이 오면 한바탕 피바다가 될 거예요. 사부님은 출가인인데 어찌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어요?”“그럼 넌 출가인이 아니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나에 대한 정보를 대체 누가 줬을까?”중년 사내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배신자는 빨리 제거해야 해서 말이야.”온사는 당연히 이 시점에 김사도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주인이 워낙 겁쟁이라 좀 겁만 줬을 뿐인데 전부 말하더라고. 그걸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아?”“쯧,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사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참 궁금하단 말이야. 고결하신 성녀 전하는 대체 우리 아가씨한테 어떤 식으로 겁을 줬을까?”능글맞게 웃는 그의 눈매에서 위협이 느껴졌다.하지만 온사에게는 저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도 많아서 말이야. 궁금하면 너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성녀 전하의 시련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본론부터 얘기하지.”사구는 손을 뻗더니 소매 안에서 고급 소재의 헝겊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성녀 전하,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온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사망하신 어머니께서 입관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온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좋아. 어디 네 얘기 한번 들어보지.”그녀는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공간 안에서 뭔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피 묻은 머리카락이었다. 딱 봐도 억지로 잡아당겨 뽑은 것으로 보였다.사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물건으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마. 네가 어머니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준다면 너희의 아가씨도 무사할 테니까.”물론 지금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손발가락 그대로 붙어 있으니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사구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호통쳤다.“이런 식으로 나에게 협박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어!”“그건 예전이고 지
“뭐라고?”온자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그런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는 말했다.“거래 안 한다고. 알아들었어? 내가 다시 말해줘?”“온사, 너!”온자월이 온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놀란 온자월은 품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려 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추월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추월은 주먹으로 온자월의 얼굴을 쳤다.퍽!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일어나서 반격하기도 전에 추월은 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너… 넌 누구야? 감히 진국공가의 공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다니!”온자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분으로 추월에게 겁을 주려 했다.온사는 그런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온사의 뒤에 섰을 때에야 온자월은 상황을 눈치챘다.“이 아이는 내 사람이야. 뭐, 불만 있어?”온사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소중히 연을 감싸고 있는 온자월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아들이 원수의 딸을 구한답시고 친히 만들어준 연을 거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걸 어머니가 아시면 참 후회하실 거야.”“원수의 딸이라니! 또 무슨 헛소리야!”온자월은 바닥에 쓰러져 몸도 못 일으키면서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참, 내 정신 좀 봐. 또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온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는 생전에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어. 네가 불효자인 걸 아셨어도 후회는 없으셨을 거야.”말을 마친 온사는 온자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온자월 너는 후회 안 해?”온자월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 넌 나와 막내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혈연을 떠나서 막내는 내 동생이야!”“그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그 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그 말을 끝으로 온사는 수월관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온자월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그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온사는 그가 뭐 하러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온자월이 대체 뭘 갖고 왔을지 궁금했다.밖으로 나가서 온자월이 들고 있는 연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연까지 가지고 왔네?”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나도 쓸데없는 말 안 할게. 너 어머니의 물건을 원하잖아? 이 연을 너에게 줄게. 당장 막내를 풀어줘.”온사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온모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걔를 위해서 어머니까지 버릴 생각이야?”“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은 곧바로 반박했다.“네가 막내를 납치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꺼낼 일도 없었어!”온사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넌 결국 어머니와 외부인 둘 중에 외부인을 택했다는 거잖아!”“헛소리하지 마!”온자월은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쳤다.“막내는 외부인이 아니야. 외부인은 너지! 잊지 마, 넌 이미 진국공가의 딸이 아니야. 진국공가의 딸은 막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동생이라고!”“그래! 양심도 없는 놈. 역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끼리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너희가 일가족이었나 봐!”온사는 눈을 부릅뜨고 온자월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지금 누굴 욕한 거야?”온자월도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 내가 너한테 주먹을 못 휘두른다고 함부로 막내 욕하지 마!”온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참 대단하네. 경성의 사내들 중에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너!”온자월은 발끈하며 온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손에 든 연을 놓칠 뻔했다. 그는 뒤늦게 연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을 외부인인 나에게 갖고 와서 거래를 하자는 사람이 뭘 그렇게 긴장해?”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이걸 소중히 보관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중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온자월은 나무상자에서 조심스럽게 연 하나를 꺼냈다.이것은 그가 어릴 적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연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간 이후로 그는 한 번도 이것을 꺼낸 적 없었다.오늘에 와서야 이것을 꺼내보지만 목적은 좀 달랐다.“분명 온사가 막내를 숨겨뒀을 거야. 온사가 막내를 풀어주게 하려면 걔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으로 교환할 수밖에.”온사가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는 온자월은 잘 알고 있었다.온사는 출가하러 수월관으로 떠날 때도 그들 몰래 어머니의 위패를 가져간 사람이었다.나중에는 온자신을 갖고 그들을 협박하여 어머니의 혼수품까지 모두 챙겨갔다.그래서 이 집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물건은 별로 많지 않았다.이걸 온사에게 내어주기엔 너무 아깝지만 막내가 온사의 손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었다.게다가 온사는 막내가 어머니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모함하고 있지 않은가! 빨리 막내를 구해내지 않으면 명성이 더럽혀질 것 같았다.“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들의 불효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막내만 구출하고 어떻게든 이 연은 다시 돌려받을게요.”온자월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그는 연을 들고 말에 올라 남산 쪽을 향해 달려갔다.그가 경성을 나간 후, 진국공부.“국공 어르신, 셋째 공자께서 외출하셨습니다. 성녀를 찾아간 것 같아요.”침상에서 휴양 중이던 온권승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집사가 재빨리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온권승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뭐 하러 가는지는 말이 없었고?”집사가 답했다.“셋째 공자께서는 손에 연 하나를 들고 나가셨습니다. 다른 건 소인도 모릅니다.”“연을 갖고 나가?”온권승은 잠시 기억을 회상하다가 집사에게 물었다.“제비 모양의 연 말이야?”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예, 맞습니다. 크지 않고 자그마한 어린애용 연 같았습니다.”온권승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온자월이 뭐 하러 갔는지 알 것 같았다.“됐어. 갈 테면 가라고 해. 수월관에 침입하지 못하도
그러나 김사도는 사구와 그저 몇번 지나치다 본 사이라고만 했다.말투나 표정을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온사는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옥패 공간으로 돌아간 온사는 사구가 찾아올 것을 미리 대비해 두기로 했다.그 시각, 경성 진국공부.“그럴 리 없어요. 막내가 그런 짓을 했을 기 없잖아요! 분명 온사 그 계집애가 막내를 모함하는 걸 거예요!”그날 집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에게 완전히 실망한 온장온은 어머니의 무덤이 도굴당한 일을 두 동생에게 알렸다.두 사람의 반응은 무척 격했다. 하지만 온장온이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지금 그게 중요해? 먼저 어머니의 시신부터 찾아야 하는 게 아니야?”“당연히 알죠. 하지만 형님, 온사가 막내를 모함하는데 그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온자월은 격분해서 온장온에게 언성까지 높였다.온장온의 표정도 순간 차갑게 변했다.“온사가 이런 일로 장난칠 애로 보여? 잊지 마! 걔도 우리처럼 어머니의 자식이야!”“형님!”온자월은 실망한 눈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따져물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막내는 우리와 같은 배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의심해도 된다는 거예요?””내가 언제 그렇다고 했어? 셋째야, 내 말을 왜곡하지 마!”“제가 왜곡을 했다고요?”온자월은 냉소를 짓고는 온옥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그럼 넷째에게 물어보세요. 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형제는 아까부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온옥지에게 고개를 돌렸다.온옥지는 담담히 말했다.“큰 형님, 어머니의 시신이 사라져서 많이 놀라고 초조한 마음 이해요. 하지만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돌아온 막내가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얼마나 속상하겠냐고요?”온자월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온장온은 한숨이 나왔다.그는 이 둘과는 말이 안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어쩌면 매번 막내와 연관된 일에 한해서는 그랬던 것 같았다.예전의 그 역시 막내의 편에 섰기에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최근에 그놈을 만났어?”온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놈이 나한테 정말 소중한 것을 훔쳐갔어. 그래서 놈을 찾고 있어.”김사도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온모가 시킨 거겠지. 그 인간 평소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해. 나도 몇 번 마주친 게 다라고. 사구의 다른 무리는 본 적도 없어.”“그렇게 은밀히 행동해?”온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김사도가 말했다.“놈들을 찾자면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사구는 곧 나타날걸.”온사가 흠칫하며 물었다.“온모가 내 손에 있기 때문에?”“맞아. 놈들은 온모가 변을 당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그러니 조심해. 내 해독제를 만들어내기 전에 죽지 말라고.”말은 그렇게 해도 김사도는 꽤 신이 난 표정이었다.온사가 담담히 말했다.“그렇다면 너도 조심해야겠지.”“내가 왜 조심해? 난 어차피 온모에게 조종당하던 허수아비일 뿐이야. 지금은 온사가 너에게 잡혀가고 내 통제권이 너한테 넘어간 것일뿐. 한낱 허수아비일 뿐인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김사도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온모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 넌 이미 내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사실을 말해주지. 온모의 몸에서 수색한 처방전을 보고 감히 확신하건대, 이 대명왕조에서 나를 제외하고 너희들의 해독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김사도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혹시 처방전을 훼손한 거야?”“그거도 그거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자세한 원인은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너희는 영원히 해독제를 못 구할 거라는 것만 명심해.”“정말 너무하네.”김사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도 이제 동맹이자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친구한테 그런 것도 얘기 못해줘?”“미안하지만 나한테 동맹과 친구는 달라. 동맹은 언제든지 적이 될 수 있지만 친구는 아니거든. 그러니 넌 내 친구가 아니야.”온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김사도는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나 상처 받았어.”“그래. 그
“쿨럭… 처리하기도 전에 납치를 당해서… 시신은 사구한테 있어.”온사가 온모를 납치하던 날에 온모가 사구를 시켜 무덤을 도굴하게 했다는 얘기였다.온사는 만약 추월이 그날 온사를 납치해서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시신은 진작에 온모의 손에 훼손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사구는 누구야?”“모… 몰라. 난 태어날 때부터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어.”‘그 사람들? 온모의 배후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가?’온사는 미간을 확 찌푸렸다.환각제를 먹고도 상대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다면 김사도 무리처럼 온모의 어미 백초유가 미처 온모한테 알려주지 못하고 남기고 간 사람들일 것이다.‘아니면 온모의 배후에 비밀의 존재가 있거나.’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온사는 어머니의 시신을 되찾은 후에 바로 온모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놈은 어디 있어? 너희는 어떻게 연락해?”“나도 걔가 어디 있는지 몰라. 그저 내가 필요할 때 알아서… 나타났어.”말을 마친 온모는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환각제의 약효가 끝난 것이다.온사는 싸늘한 눈으로 온모를 내려다보았다.“네가 필요할 때 알아서 나타난다라….”‘그렇다면….’방법을 떠올린 온사는 온모를 끌고 가서 다시 철장에 가두었다.그러고는 김사도에게 서신을 보내 속히 수월관으로 오라고 했다.다음 날, 김사도는 저녁 무렵에 온사의 처소 앞에 나타났다.“무슨 일인데 이리도 급하게 사람을 불렀어? 고귀하신 성녀 전하께서 내가 그리웠나?”그는 늘 이렇게 시정잡배처럼 굴었다.온사는 한심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아, 알았어. 내가 안 보고 싶었나 보네. 그럼 내 해독제 연구에 진전이라도 있는 건가?”김사도는 온사의 옆으로 다가가서 싱글거리며 질문을 던졌다.“진전은 있어. 온모의 몸에서 네가 말한 해독제 처방을 찾았거든.”김사도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더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정말? 성녀가 보기에 그 처방 어땠어? 만들어낼 수 있어?”그의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물론 온사는 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