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무심한듯 물었다.“여기 동그라미를 친 약재가 있는데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임자부가 말했다.“별거 아니고요. 이것들은 아직 구하지 못한 약재들입니다. 사실 다른 약재들은 그나마 구하기 쉬운데 이 서홍화는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군요.”서홍화 얘기를 꺼내는 임자부의 표정이 제법 무거웠다.온사는 요동치는 감정을 감추려 시선을 내렸다.서홍화를 그녀는 갖고 있었다.그녀는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임자부에게 물었다.“서홍화는 뭐에 쓰이는 약재인가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그러자 임자부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그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온사에게 말했다.“사실 저희도 서홍화는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소인은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고대 서적에서 발견했지요. 비록 어디에서 자라는지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것의 효능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심신 안정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약재이지요. 그리고 제가 처방에 쓴 다른 약재와 결합하면 신기한 효능을 낼 수 있고 왕야의 병을 완치할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온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대 서적에서 본 거였구나. 서홍화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겠네.’그렇다면 서홍화의 향이 어떤지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임자부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하지만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서홍화가 섭정왕 전하의 병을 완치할 수 있다고?’그렇다는 건 그것이 섭정왕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는 의미였다.만약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온사의 머릿속에 고통스러워하는 북진연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처방전을 손에 꽉 쥐고 서홍화의 이름을 힘주어 빤히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백년 자령지와 회춘초도 선물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고 고대 서적에나 나온 약재를 선물한다면 분명 누군가의 의심을 살 것이다.어디서 났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온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안 돼, 그건 절대 선물할 수
온사는 도박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죄책감을 못 이겨 도망을 택했다.“죄송해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올게요!”온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도망치듯 북진연의 옆을 지나쳤다.북진연은 순간 당황해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온사는 이미 문밖으로 사라진 뒤였다.“사태?”그는 곧이어 뒤쫓아갔다.온사는 이대로 곧장 수월관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뒤쫓아온 북진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러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왜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는 거요?”“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돌아가야 합니다. 이만 보내주세요!”온사는 그를 지나쳐 도망가려고 했다. 북진연은 그녀의 앞을 재차 가로막고 말했다.“알겠소. 꼭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내 말 좀 들어보겠소?”북진연이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순간 온사는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북진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소. 그건 사태가 나한테 말하고 싶으ㄹ 때 말해주시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소. 이따가 사람을 붙여줄 테니 마차를 타고 안전하게 수월관으로 돌아가시오. 가서 푹 쉬고 내일 내 다시 보러 가겠소.”온사는 입만 뻐금거렸다.북진연은 정색해서 말을 이었다.“거절은 받지 않겠소.”결국 온사는 입을 꾹 다물고 북진연의 마차에 탔다.마차 안에는 온갖 물품이 들어 있었다. 아까 타고 올 때는 안 보였던 담요와 간식들, 그리고 손난로도 있었다.아직은 초가을이지만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 우려한 북진연이 준비해 준 물건이었다.이런 세심한 배려에 온사는 더더욱 괴로웠다.가는 길, 그녀는 멍하니 손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한편, 북진연은 음침한 얼굴을 하고 내전으로 돌아갔
그 말을 들은 북진연은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었다.그는 더욱 싸늘해진 얼굴로 호통쳤다.“내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거늘!”임자부가 다급히 말했다.“억울합니다, 왕야. 제가 먼저 얘기한 거 아닙니다. 성녀 전하께서 마침 회춘초를 가져왔더라고요. 먼저 물어본 것도 성녀 전하입니다.”음침하게 굳은 북진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임자부는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북진연은 고개를 돌려 고요에게 눈빛을 보냈다.고요는 긴장한듯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성녀 전하께서 먼저 얘기 꺼낸 것은 맞습니다. 오늘 약재를 왕야께 선물한다고 오셨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그 약재가 왕야께 꼭 필요한 회춘초였습니다.”이는 임자부나 그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사실 고요가 어느 정도 방관한 것도 있었다.안 그래도 처음에 성녀가 섭정왕에게 희귀 약초인 백년 자령지를 보냈을 때부터 그들은 혹시 회춘초도 갖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백년 자령지를 보고 임자부는 성녀가 회춘초를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었고 고요도 임자부와 같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섭정왕은 절대 말 꺼내지 말라고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성녀가 처음 섭정왕부를 방문하면서 마침 회춘초를 선물로 가져온 것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게다가 희귀하디 희귀한 백년 된 회춘초였다.그들은 오랜 시간 찾아다녔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한 약재 두 가지를 성녀가 선물이라고 가져온 것이다.너무 쉬운 전개에 그들은 참지 못하고 성녀에게 혹시 서홍화도 갖고 계신지 묻고 싶었다.갖고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들어보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임자부도 그냥 정보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너무 지나쳐서 성녀가 도망간 것이다.고요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북진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너희는 성녀가 이런 진귀한 약초를 두 가지나 내놓으면서 한 번도 외부에 판 적 없는 게 왜인지 생각을 안 해봤느냐? 그랬다는 건 성녀는 자신이 희귀 약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북진연은 손을 휘휘 저었다.비록 화는 나지만 임자부와 고요를 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너희도 나를 걱정해서 한 일이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어야 할 것이다.”그는 내일 온사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했다.이 두 멍청이를 보낸다면 또 무슨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요와 임자부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북진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오늘 밤 둘 다 가서 약초 씨앗을 포장하도록 해. 다 포장하지 못하면 오늘 밤은 잘 생각하지도 마!”고요와 임자부는 곧바로 기죽은 얼굴로 답했다.“예, 전하.”섭정왕부에서 부랴부랴 약초 씨앗을 포장하고 있을 때, 진국공 저택 역시 부산스러웠다.“찾았어?”“못 찾았어요. 전혀 아무런 단서도 없어요!”“산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아무런 단서도 없다니!”반달 동안 진국공 저택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반달 전 해독제를 먹고 깨어난 온자월은 자신이 평소에 그렇게 아껴주었던 여동생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독을 먹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온모가 압박을 못 이기고 해독제를 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라비를 독살한 죄명은 온사에게 돌아갈 것이고 온자월 자신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이 사실은 온자월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홧김에 허약한 몸을 끌고 온모의 처소로 갔다.왜 오리구이에 독을 넣었으며, 왜 그걸 자신에게 먹였는지, 그리고 왜 온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는지 따질 생각이었다.분명 가장 순수하고 선하다고 생각했던 막내가 이런 악랄한 짓을 벌였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실망감을 안고 온자월이 온모의 방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렇게 진국공 저택 사람들은 온모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하지만 반달이 지나고 저택 안팎과 충용 후작가, 경성을 다 뒤졌는데도 온모를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단서 하나 안 남기고 사라졌다.온모에게 따지려던 온자월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걱정으로 바뀌었다.“애를 방에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게 사실이지요. 쿨럭….”옆에 있던 온옥지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온장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이 진국공 저택까지 와서 막내를 납치하겠어?”경성 전체를 뒤져도 그럴만한 인간은 거의 없었다.온옥지가 담담히 말했다.“그거야 모르죠. 반달 전에 흑기군을 이끌고 우리 진국공 저택을 쥐 잡듯이 수색한 사람도 있지 않나요.”북진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하지만 온권승은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은 아닐 거다.”온옥지는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온권승은 병약한 아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섭정왕은 뒤에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 인간이 온모를 잡아가고 싶었으면 집으로 쳐들어왔겠지. 그때 진국공부와 충용 후작가를 수색했을 때부터 말이야.”비록 섭정왕 북진연과는 정적인 사이지만 그래서 상대의 성격에 대해 잘 알았다.“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죠.”불손한 태도에 온장온이 인상을 찌푸렸다.“넷째야, 말투가 그게 뭐니? 왜 화를 아버지에게 풀어? 지난번 일이 아버지 잘못은 아니지 않니.”온옥지는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쿨럭….”“아버지는 무려 진국공입니다. 진국공 가문의 일에 어쩌다가 외부인이 참견하게 된 거죠? 쿨럭… 아버지께서 폐하께 고발했다면 섭정왕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리 쉽게 우리 진국공 저택을 짓밟을 수는 없습니다!”“폐하께서 그 사람이 병권 좀 있다고 우리 집안을 짓밟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온옥지는 홧김에 기침을 하면서까지 분노를 쏟아냈다.챙그랑!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온권승은 그의 발치에 들고 있던 찻잔을 던졌다.찻잔이 깨지며 뜨거운 찻물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온권승은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온옥지, 어디 아버지한테 불손하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아버지, 넷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막내가 너무 걱정돼서 순간 충동적으로 하지
그는 아버지와 온자월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맨 먼저 온자월의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 막내가 이미 온자월을 혼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온자월의 말에 늘 온화하게 모두를 중재하던 온장온마저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굳은 표정으로 온자월의 말에 반박했다.“온사는 잘못 없어.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온자월과 온옥지는 이 상황에서 온사의 편을 드는 큰 형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형님, 온사가 먼저 독으로 날 통제했어요!”온장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거 잊었어? 애초에 너희가 짜고 수월관으로 찾아가 온사에게 약을 먹여서 강제로 끌고 오려 하지 않았으면 온사가 왜 너에게 독을 먹였겠어?”그 말에 온자월과 온옥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은 진심으로 이 사건의 발단이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온옥지는 여전히 온사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녀 때문에 한달을 폐인으로 산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말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그런 느낌을 떠올리면 병이 발작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악몽 같은 그 느낌을 떠올리면 온옥지는 지금 당장 온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우리가 먼저 시작한 건 맞아요. 하지만 애당초 해치려는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당한 사람은 우리예요. 그런데 걔는 막내를 저격했죠. 막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온사는 셋째의 입을 통해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온장온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부터 막내의 생일에 문제가 있었어. 걔의 출신부터!”온권승의 침묵을 통해 온장온은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이 얘기가 다시 거론되자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막내의 출신에 문제가 있다고요?”그때 온자월은 혼수상태였기에 온옥지의 방에서 일가족이 나눴던 얘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온장온은 음침한 얼굴로 답했다.“나중에 막내 돌아오면 직접 물어봐.”어쨌거나 그는 이번만큼은 막내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자초지
“아버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라도 있나요?”온권승은 담담히 답했다.“증거는 없어. 하지만 막내는 실종되기 전에 누구를 만났어.”“누구를요?”온자월과 온옥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온권승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답했다.“그 아이는 시종을 시켜 안란심을 저택으로 불렀어.”온모는 아무도 모르게 일을 진행시켰다고 믿었지만 향하는 본디 온권승이 붙여준 사람이었다.그녀는 향하를 시켜 안란심을 집으로 불렀으니 온권승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안란심이요?”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라 온장온 삼형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곧이어 온자월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온사를 밀어서 물에 빠뜨린 애 아닙니까?”“맞아.”온장온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막내는 그 아이를 왜 부른 거죠? 왜 사람까지 시켜서 그런 애를 저택까지 오게 한 겁니까?”안란심은 하마터면 온사를 죽일 뻔한 인물이었다.온장온은 온모에 대한 걱정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너무 뜻밖이었기에 실망하고 분노했다.정체가 사람들 앞에서 탄로나서 충동적으로 오라비에게 독을 먹였다고 봐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일로 반성하라고 금족령까지 내려졌는데 처소에서 가만히 반성을 하고 있기는커녕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온장온은 물론이고 온자월도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온사가 물에 빠진 일은 그때 크게 소문이 났었고 그때 이미 저택에 와서 살고 있었던 온모가 그 일을 몰랐을 리 없었다.그걸 알면서 왜 그런 여자를 집으로 끌어들였을까?“막내가 안란심을 불러온 게 맞나요? 막내가 맞은 게 소문이 나서 그 서녀가 이참에 뭐라도 건지려고 제 발로 찾아온 게 아닐까요?”온자월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온모를 대신해서 억지스러운 핑계를 만들었다.온권승은 담담한 얼굴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실종 전에 온모는 그 아이를 만났고 그 뒤로 온사는 폐하의 명을 받고 금주로 가서 기우 대전을 주관하게 되었어.”순간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그들은 모두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온자월과 온옥지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어찌 감히!”“온사가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요!”온자월은 분노에 부르짖었고 온장온은 온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반박했다.온장온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온사가 비록 철없이 군 적도 있고 잘못을 한 적도 있지만 그 애는 먼저 나서서 사고를 치는 애가 아니고 그렇게 심한 짓을 했을 리도 없어!”“아버지께서 막내를 편애하시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온사도 아버지의 딸 아닙니까? 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십니까?”“사실적 근거로 판단한 거고 가능성을 제기했을 뿐이다. 내가 꼭 그 애가 범인이라고 하지도 않았지 않니.”온권승은 다 식은 차를 마시며 담담히 대꾸했다.온장온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사실적 근거라니요? 친딸을 의심하면서 이걸 사실적 근거라고 얘기하시는 겁니까? 아버지, 온사는 죄인이 아니에요!”이 순간 온장온은 드디어 왜 둘째가 그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떠났는지 이해가 갔다.이 집안은 더 이상 사랑이 넘치는 옛날 집이 아니었다.아버지는 왜 이렇게까지 막내를 편애하는 것일까?아무리 막내가 아버지의 혈육이라고 하지만 온사 역시 친딸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어릴 때부터 그들과 함께 자란 진국공부의 적녀였다.아버지는 왜 온사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한 걸까?온장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형님, 그만 좀 하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막내를 빨리 찾는 게 우선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건 나중에 얘기할 수도 있잖아요!”온자월은 짜증이 치밀었다.그는 온사가 어쩌면 막내를 어느 산골에 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었다.당장이라도 수월관으로 달려가서 막내를 어디 숨겼냐고 온사에게 따지고 싶었다.물론 정말 그렇게 할 용기는 없었다.또 수월관을 찾아가면 지난번처럼 최면제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난 못 가도 아버지는 갈 수 있잖아!’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온권승에게 말했
“그럼요!”온사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식을 먹는데 집중했다.“날 찾아온 게 이 일 때문이었어?”“예, 맞아요.”자신이 보고 싶어 찾아온 줄 알고 기대했던 북진연은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물론 그도 온사가 지금 당장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어차피 시간은 많고 천천히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참, 너에게 전해줄 소식이 있어.”“뭔가요?”온사는 동작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북진연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입가에 묻은 과자 찌꺼기를 닦아주었다.온사가 뭔가 이상한 것 같아 뒤로 빼려는 순간, 북진연이 말했다.“내 부하가 며칠 전에 한때 경성에 살았던 란씨 가문 사람을 찾았더군.”온사는 순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게… 사실인가요?”“그럼.”북진연은 손을 내리고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아니, 그냥 너무 뜻밖이라서요.”온사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북진연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란씨 가문 사람들은 경성을 떠난 친척들 외에 경성에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그래서 북진연이 갑자기 란씨 가문 사람을 찾았다고 했을 때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한번 만나보지 그래? 마침 사는 곳이 경성과 그리 멀지 않더라고.”“경성 밖에서 살고 있나요?”온사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예, 만나봐야죠.”그녀는 외조부 가문의 사람이 확실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좋아, 그럼 지금 가지. 마차는 이미 대기시켜 뒀으니까.”북진연은 온사가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그만큼 북진연은 온사의 성격에 대해 그녀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온사는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었다.두 시진 후, 마차는 유가마을 입구에 도착했다.“이곳이 유가마을인가요?”하필 오전에 우왕재가 말했던 그 영감님도 유가마을에 살고 있었다.온사는 이따가 친척을 만나고 시간 되면 그 영감님도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마차
“섭정왕 전하가 얼마나 여자를 혐오하는지 몰라? 그분의 사람이 되고 싶다고? 네가 뭔데? 너 그분께 접근했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자신은 있고?”안비각은 각박한 얼굴로 비아냥거렸다.“서녀 주제에 돌아가서 수놓이나 연습하지 않고 어디 못된 것만 배워서는. 난 네 헛소리 들어줄 시간 없어. 나가!”“저 섭정왕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그분이 저를 받아주게 할 자신이 있다고요.”안란심이 말했다.“네가 전하의 비밀을 알아?”안비각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네가 뭘 알아?”“그건 제가 온사한테서 들은 거예요.”안란심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거짓말을 술술 했다.“온사?”안비각은 인상을 찌푸렸다.“너와 성녀 전하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척을 진 거 아니었어? 성녀 전하께서 너한테 비밀을 알려줘?”안란심은 침착하게 답을 했다.“원수지간이 된 건 맞지만 성녀 전하께서 워낙 여린 분이잖아요. 제가 눈물 흘리며 찾아가서 빌었더니 저를 용서해 주셨어요.”“그게 사실이니?”안비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딸을 빤히 바라보았다.온사가 여리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것은 알고 있었다. 과거 안란심 때문에 하마터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도 그녀는 못난 그의 딸을 용서해 주었다.그래서 안비각은 외부에서 진국공부 적녀가 악랄하고 독사 같은 여자라고 욕할 때도 그는 여전히 온사가 여리고 멍청한 애라고 생각했다.“물론이죠. 못 믿으시겠으면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세요. 오후에 온사와 약속을 잡고 만났었거든요. 긴 얘기를 나누고 온사는 저를 용서해 줬어요. 얘기가 끝나고 저는 그 애를 섭정왕부까지 데려다줬고요.”안비각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그래서 네가 말하고자 하는 섭정왕의 비밀이 뭐니?”안란심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말씀드렸다가 아버지께 피해만 갈 수 있으니까요.”그 말을 들은 안비각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그럼 아버지, 제 부탁을 들어주시는 건
말을 마친 온사는 바로 섭정왕부로 들어가 버렸다.“성녀 전하를 뵙습니다.”대문 앞을 지키는 호위는 그녀의 앞을 막지도 않고 예를 행한 뒤에 바로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안란심은 자신은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섭정왕부 대문 앞에 서서 멀어지는 온사의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아가씨, 이제 어떡하죠? 성녀 전하는 섭정왕 전하와 아주 친한 거로 보이는데요. 성녀 전하를 상대하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겠어요.”안란심의 심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괜찮아, 나한테 방법이 있어.”안란심은 피식 웃고는 그곳을 떠나 저택으로 돌아갔다.잠시 후, 중서령 저택 서재.“소녀 아버지께 문안드리러 왔습니다.”“들어오너라.”중서령 안비각(安比刻)이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곧이어 문이 열리고 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비각은 고개도 들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무슨 일인지 빨리 말하고 나가. 내 시간 낭비하지 말고.”그가 바로 안란심의 아버지이자 안씨 가문의 수장이었다.그는 권세에 따라 움직이고 자식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안란심이 집에서 큰 부인과 적통 자매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하마터면 얼어죽을 뻔했을 때도 그는 관심 한번 주지 않았다.안란심은 우연히 지나가다가 온사를 구해주고 그 뒤로 그녀의 삶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큰 부인과 자매들은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고 십여 년 동안 눈길 한번 안 주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주었다.그 뒤로 안란심은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그녀는 온사의 환심을 사고 온사의 충실한 개가 되기로 했다.안란심은 온사만 옆에 있으면 가문에서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그녀는 그렇게 했고 우연히 베푼 호의 덕분에 온사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온사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친구였다.그때 두 사람 사이에는 제삼자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안란심은 줄곧 두 사람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
“우리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온사는 싸늘히 말했다.안란심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넌 참 매정하구나. 난 한때 너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었는데.”온사는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그리고 난 너의 친구가 아니야. 속세와 인연을 끊은지가 언제인데.”“속세와 인연을 끊어?”안란심은 살짝 당황하는 듯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진짜로 부처님을 모시는 승려가 되었을 줄이야. 난 온모에게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거기로 간 줄 알았지.”온사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묵묵히 뒤돌아섰다.안란심은 달려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같이 가. 옛친구가 만났는데 얘기 좀 할 수 있잖아. 뭐가 그리 급해?”안란심은 종종걸음으로 온사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더니 말했다.“머리를 안 자른 건 아쉽네. 빡빡이 여승이 된 네 모습이 궁금하긴 했는데 말이야.”온사는 여전히 무시로 일관했지만 안란심은 혼자서 주절주절 떠들었다.“그래도 지금 네 모습도 보기 좋아. 법복이 좀 소박해 보이긴 하지만 네가 입으니까 분위기가 다르네.”그녀는 둘이 진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온사를 칭찬했다.그럴수록 온사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만해, 안란심.”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우린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 나랑 친한 척 좀 하지 마.”“온사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상하지.”안란심은 미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우리 아무 사이 아니라고 누가 그래? 우린 서로 원수 지간이잖아? 난 내 손으로 널 밀어서 강에 빠뜨렸고 넌 그 일로 목숨까지 잃을 뻔했는데 내가 밉지도 않아?”미웠지만 그건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밉고 화도 났고 왜 안란심이 자신에게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던 때가 있었다.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더 이상 온사는 그 일 때문에 괴롭지 않았다.“안란심, 너에 대한 미움은 내려놓은지 오래야. 우린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너도 알 거야.
“온사 넌 양심이 없어?”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온모의 앞으로 다가온 온자월은 다짜고짜 욕부터 퍼부었다.“어떻게 그 많은 그림자 호위를 다 죽였어? 그들은 우리 진국공부 사람이잖니! 그걸 보시고 아버지가 몸져누운 걸 몰라?”“몰라, 알고 싶지 않아.”온사는 싸늘한 어조로 대꾸했다.“넌 정말 양심을 개나 줬구나!”“내가 양심이 없어?”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내가 양심이 없으면 너희가 그렇게 싸고 도는 막내는 뭐지? 오라버니를 독살하려고 한 짐승인가?”“난 신경 안 써!”온자월은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너 아니었으면 막내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어!”“하, 멍청하기는.”온사는 그와 단 한마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뒤돌아서 갈 길을 가려는 그녀의 앞을 온자월이 가로막았다.“어딜 가? 막내 네가 납치해서 숨겼지? 빨리 말해! 대체 애를 어디에 숨긴 거야?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난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어!”온사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그렇게 막내가 보고 싶으면 나가서 찾아. 나 찾아와도 소용 없어. 내가 모른다고 하면 정말 모르는 거야!”“너!”온자월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뒤 봐주는 사람 있다고 건방 떨지 마!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아?”짝!온사는 주저없이 손을 들어 그의 귀뺨을 때리고는 차갑게 말했다.“난 널 때렸어. 그리고 넌 날 못 때려. 용기 있으면 한번 해봐.”온자월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나 보네. 하긴, 지금도 주제 파악을 못하면 진국공가 사람들 모두 감옥행이 될 테니까.”“건방 떨지 마, 온사!”“건방 떠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온사는 그의 어깨를 밀치고는 가던 길을 갔다.그 자리에 홀로 남은 온자월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멍청한 정도로 놓고 보면 최소택 그 멍청이랑 비슷한 수준이네.”온사도 길을 가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러고 나
서홍화를 구할 길이 없으니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온사는 달랐다.처방을 보니 해독제가 맞는 것 같았고 그녀는 서홍화를 갖고 있었다.김사도 무리가 계속 온모가 해독제를 만들어 주길 기다렸다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물론 그렇게 쉽게 김사도에게 해독제를 줄 생각은 없었다.이 약초가 필요한 사람이 그들뿐이 아니었다.온사는 한숨을 쉬며 어떻게든 공간의 약초를 현세에서 재배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해독약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한 온사는 처방전을 도로 숨겼다.다음 날, 그녀는 산을 내려갈 생각으로 짐을 정리했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어제 오후에 심은 철피석괴가 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물론 그것은 옮겨 심기 전에 희석한 령수를 주어서 토양 속에 영기가 아직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영기가 철피석괴가 완전히 외부 환경에 적응할 때까지 버텨줄지는 모를 일이었다.온사는 대전으로 가서 아침 공부를 시작했다.기도까지 마친 그녀는 어머니의 위패가 있는 편전으로 가서 큰절을 올리고 일어섰다. 마침 장명등을 든 막수가 안으로 들어왔다.“사부님, 등유를 넣으러 다녀오시나 보네요. 저 시키지 그랬어요.”“괜찮아.”막수 사태는 장명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그녀에게 물었다.“어제 네 거처에 또 누가 찾아갔다더구나?”“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이국인 사내 김사도가 찾아왔는데 제가 잘 해결했어요.”“해결했어? 이렇게 빨리? 놈은 독충을 잘 쓴다고 하지 않았어?”“그렇긴 한데 제가 한수 위니까요. 저는 독왕인 사부님이 친히 가르친 제자잖아요.”온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어리광 부리기는. 말해, 오늘은 또 어딜 가려고?”온사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사부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보따리를 잔뜩 들고 나왔는데 내가 장님도 아니고.”막수는 담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바깥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굳이 산을 내려가야겠느냐.”“화내지 마세요, 사부님. 뭐 좀 사러
애지중지하는 지네를 남기고 가라니 김사도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넌 파군을 쓸 일도 없는데 왜 굳이 데리고 있으려는 거야?”“그걸 네가 어찌 알아?”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도 저 녀석의 독을 연구하고 싶다고.”“알았어.”김사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이제 나 좀 풀어줘야지?”온사는 등을 돌려 나무통에 있는 지네를 공간에 들여보낸 후, 추월에게 눈빛을 보냈다.추월이 다가와 장검으로 김사도를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김사도는 밧줄을 벗어던지고 뻐근한 손목과 발목을 문질렀다.“독벌레는 내가 가진 게 좀 있어. 거미, 전갈, 불개미도 있고. 어떤 걸 원해? 지금은 줄 수 없고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다 줘.”온사는 주저없이 말했다.김사도는 눈을 부릅떴다.“정말 전혀 사양을 안 하네. 그 많은 독충을 먹여 살릴 방법은 있고? 그것들에게 네가 당할 수도 있는데?”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싸늘히 대꾸했다.“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내가 뭐 너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아?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충독에 당해 죽을까 봐 그러지. 그럼 나도 또 해독제를 연구할 사람을 새로 찾아야 하잖아.”김사도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그건 걱정 마. 내가 죽으면 너와 온모 먼저 죽이고 죽을 거니까. 그러니 네가 다른 사람을 찾아갈 일은 없어.”그녀를 도와 진실을 파헤치거나, 죽음을 기다리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의미였다.분명한 협박에 김사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사람 시켜 좀 알아볼게.”말을 마친 그는 온사의 주방을 떠났다.환각제 밭을 지날 때, 김사도는 한송이 챙겨갈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그러자 등 뒤에서 온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내 약초 건드리면 난 네 파군의 배를 가를 거야.”김사도는 순간 손을 내렸다.“참, 쪼잔하긴.”“누가 쪼잔해? 넌 도둑놈이야. 추월, 당장 저놈을 발로 차서 내쫓아 버려!”“야, 야! 하지 마. 내가 갈게!”김사도
의미심장한 말에 온모는 순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너희들 오랫동안 해독제를 먹지 못했니?”김사도가 이를 갈며 답했다.“그래. 아주 오랜 고통의 시간이었지.”그들은 해독제를 못 먹은지 이미 3년이 지났다.세번의 발작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해독제를 받지 못했다.그래서 그들의 인원수는 삼백 명에서 이미 이백 남짓으로 줄었다.그러다 금주로 온사를 암살하러 갔다가 실패하면서 또 반이 줄었다.현재 그들은 수십 명밖에 남지 않았다.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가 모두가 죽게 될 것이다.“그럼 왜 죽이지 않고 살려뒀어?”온사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김사도는 한심하다는 듯이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성녀인데, 출가한 승려 주제에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말 안 할 거야?”온사는 그를 노려보며 압박했다.“해, 해! 하면 되잖아.”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우리도 죽이고 싶지. 그런데 온모의 어미는 죽기 전에 우리들한테 자신은 해독제의 처방을 온모에게 전수해 주었고 그러니 우린 온모 걔가 처방전을 해독할 수 있는 날까지 잘 지켜주어야 한다고 말했어. 그럼 독을 완치할 수 있는 해독제를 받을 수 있다고.”“최후의 해독제? 정말 그렇게 말했어?”“맞아.”“너희는 그걸 믿고 온모를 지켜준 거야?”온사는 무슨 이런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김사도를 바라봤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속은 것 같았다.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해독제만 있으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데 온모가 최후의 해독제를 그들에게 줄 리가 없었다.그들의 체내의 독을 완치한다면 온모는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다.김사도와 그의 무리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데 온모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었다.‘그동안 그 고생을 했으니 해독제를 받으면 온모를 갈가리 찢어 죽일 수도 있겠지.’“왜 그런 눈으로 봐? 안 들을 거야?”김사도는 온사의 눈빛이 불쾌했다.“알았어, 빨리 말해봐.”온사는 김사도가 순순히 말해줄 때 더 많은
온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사도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온모가 순수하고 선량해? 천진난만? 웃기고 있네. 내 살면서 이런 웃기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군!”김사도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걔 그냥 사기꾼이야. 걔는 우리 모두를 속였어. 그 망할 어미랑 같이 우리 모두를 속였다고!”온사는 그가 실컷 욕설을 퍼부은 뒤에야 담담히 말했다.“내 말 또 한번 끊으면 네 벌레를 계속 괴롭힐 거야.”온사는 손가락으로 나무통을 가리켰다.김사도는 그제야 풀이 죽어 말했다.“알았어, 계속해봐.”“네 주인 얘기는 이쯤하고 이제 저 벌레 얘기를 하자.”온사는 약간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저 녀석은 네가 날 독살하라고 보낸 놈이지. 저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아?”게다가 공간의 령수마저 몰래 훔쳐 마신 놈을 지금까지 살려둔 것만으로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저놈이 령수를 먹고 변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니 난 저 놈을 예뻐할 수가 없어. 방금처럼 고통받기 싫으면 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해야 할 거야.”이미 포로가 된 김사도는 더 이상 반항할 수도 없었다.“물어봐. 아는 건 답해줄게. 모르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고.”온사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넌 온모가 네 주인이 아니라고 했어. 그럼 온모랑은 어떤 관계지? 너희랑 온모, 그리고 온모의 어미 말이야.”수많은 암살자들이 온모의 지시에 따랐다.온사는 그들이 온모 어미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사도가 하는 걸 보니 생각과 전혀 다른 것 같았다.“우린 그 여자의 어미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김사도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관계를 설명하자면 독에 당한 허수아비라고 보는 게 맞겠지.”“허수아비?”온사는 예상치 못했던 답에 살짝 놀랐다.“그래. 우리의 체내에는 온모의 어미가 몰래 먹인 독이 들어 있어. 일년에 한번씩 발작을 일으키고 해독제가 없으면 죽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하지. 그러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가.”‘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