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안이 갑자기 큰절을 올릴 줄 예상하지 못했던 온사는 조금 당혹스러워서 다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몸을 일으킨 왕수안에게 그녀는 가장 먼저 궁금했던 얘기를 물었다.“기우 대전 때 쓰일 제천대는 이미 지어졌지요?”왕수안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성녀 전하. 섭정왕 전하까지 함께 금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밤을 새워가며 드디어 어제 제천대를 완공했습니다. 오늘 사람을 보내 점검도 마쳤으니 내일 바로 기우 대전을 시작하시면 됩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북진연이 말을 덧붙였다.“사태는 일단 돌아가서 쉬시오. 내일 있을 기우 대전을 미리 대비해야지.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것이오. 그러니 남은 건 나에게 맡기고 들어가시오.”“예.”온사는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며칠 길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느라 피로가 쌓였기에 지금은 휴식이 절실했다. 왕수안은 미리 준비한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고요 일행은 그녀가 머물 방을 미리 꼼꼼히 검사했다.북진연은 고요를 시켜 온사의 신변을 밀착 호위하게 했고, 추월은 여전히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온사의 안전을 지켜주었다.방 문을 닫은 온사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중간에 추월이 깨워서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드러누워 잠을 잤다.그날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고 아무도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온사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성녀 전하, 이것은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기우제 관복입니다. 오늘은 이걸 입고 우리 금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왕수안은 아침 일찍 방문해서 화려한 붉은색의 관복을 온사에게 건넸다.온사는 그 관복을 힐끗 보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왕수안에게 말했다.“왕 현령, 내 자네가 이번 기우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금주 백성들이 고통받는 지금 내가 이런 화려한 관복을 입고 기우제를 지내면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안 그런가?”화려함의 정도가 지나친 관복이었다.그녀는 기우
옷을 갈아입은 온사는 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고요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왕수안의 어깨를 툭 쳤다.“왕 현령, 성녀 전하는 이미 멀리 갔는데 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빨리 따라가지 않고?”그제야 정신을 차린 왕수안이 다급히 달려가며 온사를 불렀다.“같이 가요, 성녀님!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빨리 가자! 늦으면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간다, 가! 좀만 기다려!”“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자네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것이야?!”금주성 성문 밖,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세 달째 가뭄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은 거의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금주성 현령이 폐하께서 친히 책봉한 성녀님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고, 무려 하룻밤 사이에 그 소식은 금주성 밖까지 퍼졌다.수많은 백성들은 기우 대전에 참석해 복명 성녀의 얼굴을 보려고 모여들었는데, 점점 더 많은 백성들이 금주성 안에 집결되자 성내의 호위가 부족할 정도였다.북진연은 어쩔 수 없이 반 이상의 흑기군을 파견하여 성내 호위를 도와주게 했다.잠시 후, 기우 대전을 진행할 제천대 주변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천대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관원들은 민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못 오게 막을 수가 없었다.그들은 제발 아무 일 없이 기우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비가 바로 내리지 않더라도 순조롭게 끝나 성녀만 안전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의 목서리 또한 점점 커지고 있었다.모든 호위와 흑기군들이 바쁘게 돌아치고 있을 때, 멀리서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성녀 전하 납시오!”왕수안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크게 질렀다.온사는 마차에 앉아 수치심을 느꼈다.‘왕 현령은 언제 목청이 저렇게 좋아진 거지?’성녀가 왔다는
주변은 곧이어 조용해졌다.높은 제천대에 선 온사는 밑에서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늘에 제를 올렸으니 이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시간이었다.온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곧이어 그녀의 예쁜 입에서 청아한 기도문이 흘러나와 백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여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한마디 한미다 마다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곧이어 제천대 아래에서 북소리가 울리며, 제복을 입은 남녀가 제천대를 둘러싸고 기우제를 위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심금을 울리는 북소리와 성스러운 춤, 그리고 고결한 성녀와 간절한 소망을 가진 백성들이 이 순간 함께 어우러져 가슴 뛰는 장면을 연출했다.온사의 기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한번 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녀는 다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두번째에도 실패하자 다시 세번째, 세번째도 묵묵부답이자 네번째, 그렇게 온사는 제천대에 서서 같은 기도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와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제사의 춤도 계속되었다.제천대 아래의 백성들은 고개를 들고 그들의 성녀를 우러러보았다.성녀의 기도문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하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누군가가 갑자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비 온다!”“정말 비네?”“드디어 재앙이 끝이 났어!”“아버지, 어머니! 보고 계신가요? 재앙이 끝났어요!”금주성 안팎의 백성들은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달려나왔다.그들은 빗속에서 환호하며 무려 세 달 만에 찾아온 큰비를 두 손 들고 환영했다.“성녀 전하 덕분이야!”“맞아! 복명 성녀님의 기도에 하늘도 감명하여 비를 내려주신 게 분명해!”“복명 성녀는 보살님이야!”“폐하께서 친히 책봉한 성녀 전하시잖나.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야! 우리 모두의 성녀님이라고!”금주성의 모두가 빗속에서 온사의 이름을 외쳤다.대명 왕조의 유일 성녀, 복명 성녀.그녀의 이름은 훗날 역사에도 이렇게 불렸다.7일 후, 온사 일행은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이건 어떻게 할 거요?”성으로 들어가기 전, 북진연은 기절한 온모를 가리키며 온사에게 물었다.온사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에게 말했다.“저한테 맡겨주시지요.”“사태 혼자 괜찮겠소? 김사도가 무조건 다시 찾아올 텐데?”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사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남은 암살자들 모두 숨어버린 것 같았다.“괜찮아요. 추월이 있으니깐요. 어차피 그 놈은 추월의 상대가 못 돼요.”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곤충이나 독을 사용하는 놈이긴 하나, 제가 아는 분께서 놈보다 훨씬 독에 대해 뛰어나시거든요. 그리고 경성에도 돌아왔으니 이제 안전해요.”김사도가 감히 다시 찾아온다면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전생에 그녀에게 온갖 고통을 주었던 사내였기에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온사는 아직 사람을 죽여본 적 없었다.그녀의 눈빛에 순간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김사도만 죽으면 그녀는 바로 온모를 죽일 생각이었다.완벽한 살인 계획을 세운 온사는 다시 마차에 올라탄 후, 추월에게 먼저 온모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그녀와 북진연은 입궁하여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한바탕 치하와 포상을 받은 뒤에 마차를 타고 수월관으로 돌아갔다.
온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제가 워낙 먼 길을 떠났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걱정이 되셨겠죠. 사저도 나중에 멀리 나가시면 사부께서 걱정하실 거예요.”하지만 막수는 말없이 앞으로 걷기만 했다.‘아니야, 넌 달라.’무고를 대하는 마음과 무우를 대하는 마음은 달랐다.란자군이 세상을 떠난 후, 감정이란 것을 느껴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보신탕의 양이 많았기에 막수는 먼저 온사를 챙긴 후에 나머지를 다른 사태들에게까지 나눠주었다.온사는 보신탕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감사합니다, 사부! 정말 맛있네요.”“맛있으면 됐어. 전에 네 어미한테도 자주 만들어 줬는데, 매번 내가 만든 국이 제일 맛있다고 하더라.”온사의 어머니를 떠올리자 막수의 얼굴에는 이내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하지만 눈빛에는 슬픔이 가득했다.그 모습에 온사는 고개를 떨구고 입을 다물었다.“아, 내가 또 속상한 얘기를 꺼냈구나.”분위기가 이상해짐을 느낀 막수가 말했다.란자군의 사망은 그녀에게 큰 고통과 슬픔을 주었지만 그건 온사도 마찬가지였다.막수는 손을 뻗어 온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착하지. 이번에 금주행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해보거라. 나도 금주는 한 번도 못 가봤구나.”“좋습니다.“막수가 계속 슬퍼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기에 온사는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그리고 얘기를 들은 막수 사태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그제야 아끼는 제자가 갑자기 금주로 불려가서 기우 대전을 주관한 이유가 배후에 누군가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가는 길에 수많은 암살자와 곤충과 독을 쓰는 이국인 놈을 만날 줄이야!“김사도라고 했지? 내 기억해 두겠어. 감히 우리 수월관을 찾아오면 내 가만두지 않아!”막수는 분노에 책상을 쳤다.당장이라도 진국공에게 달려가서 딸 교육 좀 잘 시키라고 윽박지르고 싶었다.언제는 온사를 악랄하고 속좁은 애라고 욕하더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인간은 따로 있었다.온모는 그야말로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었
온모에게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먹이고 그녀의 눈코입을 모두 봉인한 온사는 팔다리까지 꽁꽁 묶어서 자신의 옥패 공간에 던져넣었다.비록 자신만의 신성한 공간에 온모를 들여놓는 게 껄끄럽긴 하지만 김사도가 찾을 수 없는 곳은 여기뿐이었다.온사는 온모를 공간의 작은 오두막에 두었다.앞으로는 매일 끄집어내서 물과 음식을 주고 다시 던져넣기로 했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온사는 공간 안의 약재를 놓아둔 곳을 찾았다.이곳에 보관했던 약재들은 이미 구조 물자와 함께 금주에 기부했다.금주에 비가 내리긴 했지만 자연 재앙이 가져온 후유증은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약재들은 모두 흔히 쓰이면서도 효과가 좋은 것들이니 금주의 백성들에게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뒤돌아선 온사는 넓게 펼쳐진 자신의 보물창고, 약초밭을 바라보았다.희귀 약초를 땄던 곳에 영기가 깃든 냇물을 부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자라났다.그녀는 두 개의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다.하나는 사부에게, 또 하나는 북진연에게 줄 것이다.추월에게도 뭐 하나 주고 싶었지만 약재들이 그녀에게는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그래서 온사는 추월의 선물은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그녀는 약재 백과서를 들고 느긋하게 약초 밭을 누비며 정성 들여 고른 끝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두 가지를 선택했다.하나는 백년 영지였다.온사는 심혈을 보강해 주고 심열을 내리는 약효가 있는 그것을 막수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의술을 배운 후에야 그녀는 사부가 심장이 약간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정작 의사인 막수 본인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는데 온사는 제자로서 당연히 스승을 챙기고 싶었다.비록 큰 병은 아니지만 나중에 사부가 연세가 들면 이런 작은 질병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온사가 백년 영지를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다른 하나는 심신의 안정과 원기 보양에 좋은 회춘초로 골랐다.비록 섭정왕이 원기 보양까지는 필요 없더라도 심신의 안정을 지켜주는 약효가 있으니 회춘초가 가장 적당했다.
그녀가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안에 든 것은 백년 영지였다.온사는 웃으며 말했다.“사부께서 저에게 잘해주셔서 저도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었답니다.”그녀는 자신의 걱정을 막수에게 전했다.“영지가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는 사부님도 잘 아시잖아요. 저는 줄곧 사부의 병이 걱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이걸 선물하는 거예요. 괜찮다고만 넘기지 마시고 신경 써서 치료했으면 해요.”막수가 만약에 적극적으로 치료했었다면 이 정도 잔병은 진작에 나았을 것이다.온사는 선물의 귀중한 정도보다 제자로서의 걱정과 관심을 전하고 싶었다.잠시 침묵하던 막수는 병치료를 미루고 있었던 까닭에 대해 입을 열었다.“네 어미가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후에 난 한동안 상심에 빠져 있었단다. 그러다가 심병까지 얻게 되었지. 치료를 안 했던 건 치료하고 싶지 않아서였어.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나를 관심하고 걱정해 주는 제자도 있으니 제대로 치료를 해보마.”말을 마친 막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이렇게 환한 미소를 지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온사는 적잖이 놀랐다.사부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것 같았다.그리고 사부가 어머니의 죽음에 비통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온사는 예전에 독점욕을 느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사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자신의 아이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사부님, 사부님께서 어머니의 죽음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걸 어머니가 아신다면 분명 속상해하실 거예요.”“그러니 치료 잘해요. 앞으로 제가 오래오래 사부님 곁에 있을게요.”그 말을 들은 막수는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그래, 그래야지.”사부의 방에서 나온 온사는 북진연에게 줄 선물을 들고 처음으로 섭정왕부로 향했다.출발하기 전, 그녀는 먼저 서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잠시 후, 섭정왕부의 하인이 마차를 끌고 수월관으로 왔다.마을 주민의 차를 얻어타고 가려던 온사는 주저없이 마차에 올랐다.두 시진 후, 마
“회춘초요?”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 온사를 바라보며 환호를 질렀다.“되죠! 당연히 도움되죠!”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난번에 성녀 전하께서 왕야께 백년 자령지를 선물하셨지요. 이제 왕야의 치료에 필요한 희귀 약재가 두 가지 남았는데 그 중 하나가 회춘초입니다!”‘이런 우연이?’온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임자부는 계속해서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요? 혹시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신가요?”온사가 말했다.“제게 회춘초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지난번에 섭정왕께서 저를 금주까지 호송해 주시고 수차례 위험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셨기에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그녀는 나무 상자를 임자부에게 건넸다.임자부는 급급히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회춘초가 안에 들어 있었다.딱 봐도 백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귀한 약재였다!임자부는 환호를 질렀다.“잘됐어요. 너무 잘됐습니다! 왕야의 처방전에 꼭 필요한 희귀 약재를 또 하나 구했네요!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실 줄은 알았습니다. 고요, 내가 뭐랬나? 내 말 맞았지?”온사는 순간 흠칫하며 임자부에게 물었다.“임 의원께서는 내가 회춘초를 갖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셨나요?”임자부는 기쁨에 들떠 온사의 표정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지난번에 갖고 오신 백년 자령지 때문이죠. 제가 이 코가 아주 개코거든요. 약재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지난번 백년 자령지를 보고 회춘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진하고 오래 감도는 향은 백년 회춘초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죠!”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듯 말했다.하지만 정작 온사는 가슴이 철렁했다.강한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고마워서 선물한 약재가 단서를 남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옥패 공간에서 회춘초는 백년 자령지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옥패 공간 내부에 영기가 감돌고 있어서 희귀 약재들은 환경을
“좋아.”사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막수 사태가 주저없이 요구를 승낙했다.막수는 고개를 들려 단호한 눈빛으로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갈 테니 넌 여기 가만히 있어.”온사는 자기가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상의할 여지조차 없어 보이는 막수 사태의 모습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예, 그렇게 할게요. 조심해요, 사부님.”김사도는 몰래 온사를 힐끗 보고는 짐짓 여유 넘치는 어투로 물었다.“내가 갈까?”사구가 담담히 말했다.“아니, 사칠 네가 가.”눈만 빼고 온몸을 꽁꽁 사맨 사칠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형님.”저들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사구는 일당 중에서도 꽤 지위가 있어 보였다.김사도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사칠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비켰다.사칠은 관을 내려놓고 맞은편을 향해 걸어갔다.그와 동시에 막수 사태도 천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사구는 눈앞의 늙은 여승을 빤히 노려보았다.3일 전 수월관에서 만났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악취미가 발동해서 상대를 겁주려고 시도했는데 상대의 반응이 참 재미없었던 거로 인상에 남았다.그런데 그 여승이 성녀의 사부이자 수월관의 주지 사태였을 줄이야.사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한편, 사칠이 다가오자 검은 인영이 온사의 뒤편에 나타났다.추월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칠이 자칫 조금만 선을 넘는 행동을 하면 당장 죽여버릴 기세였다.거래 과정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사칠이 다가오는 동안에도 온사는 칼로 온모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그녀는 막수가 어머니의 시신을 관에서 안고 돌아올 때에야 천천히 비수를 내렸다.“아가씨, 가시죠.”사칠의 목소리는 사구보다도 더 흉측했는데 마치 쇠가 갈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그는 예의고 뭐고 다짜고짜 온모의 팔목을 잡아당기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가자! 빨리 가자!”온모는 허둥지둥 사칠을 따라갔다. 만
‘사구? 사구가 왔어! 드디어 날 구하러 온 거야!’‘온사 이 망할 년! 넌 이제 죽었어!’온모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온사에게 붙잡혀 있는 신세가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구에게 달려가고 싶었다.“온사 네 이년!”사구 일행은 처참한 모습의 온모를 확인하고 분노를 터뜨렸다.물론 김사도는 예외였다.그는 세 사람 중 유일하게 이 광경을 통쾌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다.물론 동료가 보고 있으니 안 그런 척은 해야 했다.그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짐짓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어찌 우리 아가씨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지금 저 꼴을 봐! 대체 아가씨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뭔지 모르지만 아주 잘했어!’온사도 그의 눈빛에 숨은 찬탄과 희열을 알아보았다.그녀는 한심한 눈으로 김사도를 바라본 뒤, 담담히 말했다.“난 약속 지켰어. 너와 약속한 이후로는 얘 털끝 하나 안 건드렸으니까.”“그럼 저 상처들은 대체 어떻게 난 거야!”김사도의 목소리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앙칼졌다.온사는 그를 무시하고 음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러니 누가 늦게 오래? 뭐 너무 늦은 건 아니지만. 하루만 더 늦게 찾아왔으면 아마 온모의 시신을 마주했을 텐데 말이야.”적나라한 협박에 사구와 그의 동료는 이를 갈았다.사구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성녀, 네 어머니의 시신이 우리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마. 넌 우릴 자극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어.”온사는 냉소를 짓고는 온모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그리고 김사도의 충격 어린 눈빛을 무시한 채, 사구를 협박했다.“어디 해봐. 내 어머니의 시신에 손이라도 대는 날엔 나도 너희의 아가씨를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악! 뭐 하는 거야!”온사는 그대로 칼을 빼들어 온모의 목을 겨누었다.“해볼래, 사구?”위협적인 온사의 말투에 온모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눈을 가린 천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지
너무 동생이 그리웠던 온자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뒤쫓아갔다. 그는 뒤늦게야 온사가 경성 방향이 아닌 근처의 마을로 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한참 후, 앞에 정자 하나가 나타났다.온자신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피월정이잖아? 여긴 왜 온 거지?”그가 의혹에 빠져 중얼거릴 때, 이상한 복장을 입은 세 명의 사내가 피월정에 나타났다.온자신은 인상을 찌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그쪽을 주시했다.“온자신이 따라왔어.”막수는 뒤쪽을 힐끗 보고는 온사에게 말했다.온사는 그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담담히 답했다.“상관없어요. 이따가 제가 하는 일을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막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둘은 전방에서 다가오는 사구 일행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들 중에는 김사도도 있었다.나머지 한명은 온사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얼굴을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눈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그는 등에 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온사 어머니의 관이었다.이들은 도굴할 때 관까지 통째로 가져갔던 것이다.온사는 주먹을 꽉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았다.“성녀 전하, 이건 우리가 3일 전에 했던 약속과 얘기가 다르잖아?”사구는 온모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순식간에 표정이 음침하게 굳었다.“지금 약속을 번복하는 건가?”온사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해? 너희 아가씨는 이곳에 있어. 다만 내 어머니의 시신을 확인한 후에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너희가 어머니 시신에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그녀는 어머니의 시신이 온전한지, 아니면 이들에 의해 훼손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똑같이 돌려줄 것이다.사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걱정 마, 성녀 전하. 네 어머니의 시신은 아주 온전한 상태니까.”말을 마친 그는 장풍으로 관 뚜껑을 열었다.이미 그들이 한번 열었어서 그런지 뚜껑은 아주 쉽게 열렸다.
북진연이 떠난 후, 온사도 공간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온모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삼일 후가 약속한 날이니 그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특히나 사구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완벽히 준비하고 가는 게 맞았다.독은 사부가 더 뛰어나다고 하지만 상대는 뱀을 부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다.게다가 전부 다 강한 독성을 가진 독사였다.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들은 수동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뱀에게 물릴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게 싫었다.온사는 2층 연금대로 바로 갔다.이곳에는 독성이 강한 약재들 외에도 독벌레도 있었다.불개미와 독거미, 지네도 있었다.온사는 그것들을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에 전갈에게 시선이 갔다.오독 중에 가장 독한 것이 전갈 독이라고 했다.독성도 강할 뿐만 아니라 전갈 자체가 아주 흉포한 벌레였다.온사는 사구를 상대하려면 전갈이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그런데 아직은 체형이 너무 작고 독성이 약했다.온사는 3일 안에 이 전갈을 제대로 육성하기로 마음먹었다.공간에 영수는 넘쳐나고 가진 독약까지 합치면 대왕 전갈을 육성해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삼일 간 온사는 공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그 기간에 막수가 찾아왔지만 추월이 나서서 응대했다.시간은 어느덧 흘러 약속한 날짜가 다가왔다.그날 아침, 온사는 아침 일찍 공간에서 나왔다.3일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지만 워낙 공간 안에 농후한 영기로 가득찼기에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정원을 나가자 막수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준비는 다 됐니?”온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예, 가시죠.”막수는 의아한 얼굴로 온사의 등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온모는 어디 있니?”“데리고 가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사부.”그 말을 들은 막수는 온사가 추월에게 맡긴 줄로만 알고 더 캐묻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당나귀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막수는 당나귀 따위를 타기 싫었기에 온사를 위에 태우고 자신은 고삐를 잡고 앞에서 걸었다.남산 산기슭에 다다랐을
그는 혹시라도 막수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해명을 덧붙였다.하지만 그럴수록 막수의 눈에는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온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랬군요. 어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죠.”그녀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고 북진연과 막수만 정원에 남았다.막수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섭정왕 전하의 마음이 너무 티가 납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다 보일 정도예요. 무우는 현재 우리 수월관 사람이니 전하께서 이럴수록 무우의 수행을 망치는 것입니다.”북진연은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서신을 받은 후, 너무 걱정되는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온 그였다.수월관에 도착하고 막수와 부딪쳤을 때에야 그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밤중에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다니, 다른 사람이 봤으면 온사의 명성에 큰 누를 끼칠 것이다.북진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생각이 짧았군. 사태,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다음엔 더 주의하겠습니다.”막수는 다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았다.이때, 온사가 뜨거운 차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세 사람은 정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사는 북진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막수와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했다.“사부님, 독사의 사체는 어디에 쓰려고 남기라고 한 건가요?”온사는 혐오스러운 눈으로 구석 쪽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은 그제야 구석진 곳에 쌓인 피 묻은 보따리를 발견했다.살짝 풀어진 틈새로 독사의 머리가 보였다.비취색의 영롱한 색상을 보고 북진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매우 강한 독사인데다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보따리의 형태로 봐서 적어도 열 마리는 될 것 같았다.이게 모두 온사의 정원에서 나왔고 오늘 온사가 하마터면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고 생각하니 북진연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이미 죽은 녀석들이고 좋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 마침 3일 후에 그 사구라는 인간을 만나야 하니 그 전에 이것들로 좋은 선물을 준비할
약속 시간을 잡은 사구는 그 길로 뒤돌아섰다.그렇게 온사의 정원을 지나던 그는 뭔가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는 늙은 여승이 있었다.사구는 그 여승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그가 옷소매를 휘두르자 뱀들이 소매에서 기어나와 여승이 있는 곳을 향해 기어갔다.사구는 그걸 본 여승이 겁에 질려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흥미가 사라진 사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길로 수월관을 벗어났다.사구가 떠난 후, 추월은 정원 안팎을 꼼꼼히 확인했다.그리고 정원 곳곳에서 십여 마리의 뱀을 잡아냈다.“사구 놈이 다녀간 후로 내 처소가 뱀 소굴이 다 되었네.”독사를 전부 처치한 추월은 굳은 표정으로 뱀의 사체를 한곳에 모아 불사르려 했다.그리고 이때, 막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왔다.“잠깐, 그 독사들은 그대로 둬.”고개를 돌린 온사가 물었다.“사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내가 안 왔으면 네가 나 몰래 이렇게 큰 일을 치르고 있을 줄도 몰랐잖니.”막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사를 쏘아보았고 온사는 괜히 찔려서 어깨를 움츠렸다.사부는 밖에서 그녀와 사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었다.온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작정하고 숨긴 게 아니라 확실해지면 사부님께 말하려고 했어요!”“정말이니?”막수 사태는 못 믿겠다는 어투로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온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출가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저도 출가인입니다, 사부님!”“하, 말은 잘해.”막수는 냉소를 지으며 온사에게 말했다.“일단은 믿어주도록 하마. 허나 삼일 후 나도 너와 같이 가겠다.”“그건 안 돼요, 사부님!”온사는 당황하며 막수를 말렸다.“아주 위험한 상황이란 말이에요. 상대가 몇이나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만약 사람이 많이 오면 한바탕 피바다가 될 거예요. 사부님은 출가인인데 어찌 그런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겠어요?”“그럼 넌 출가인이 아니고?”
미리 대비를 해두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그 독사에게 물릴 뻔했다.“나에 대한 정보를 대체 누가 줬을까?”중년 사내는 위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런 배신자는 빨리 제거해야 해서 말이야.”온사는 당연히 이 시점에 김사도를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주인이 워낙 겁쟁이라 좀 겁만 줬을 뿐인데 전부 말하더라고. 그걸 꼭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아?”“쯧,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군.”사구는 눈썹을 꿈틀하더니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참 궁금하단 말이야. 고결하신 성녀 전하는 대체 우리 아가씨한테 어떤 식으로 겁을 줬을까?”능글맞게 웃는 그의 눈매에서 위협이 느껴졌다.하지만 온사에게는 저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내가 할 줄 아는 게 하도 많아서 말이야. 궁금하면 너도 경험하게 해줄 수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됐어. 난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고. 성녀 전하의 시련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그러니 본론부터 얘기하지.”사구는 손을 뻗더니 소매 안에서 고급 소재의 헝겊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성녀 전하,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온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그것은 사망하신 어머니께서 입관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온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좋아. 어디 네 얘기 한번 들어보지.”그녀는 소매를 만지는 척하며 공간 안에서 뭔가를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피 묻은 머리카락이었다. 딱 봐도 억지로 잡아당겨 뽑은 것으로 보였다.사구의 얼굴이 음침하게 굳었다.온사는 냉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내 어머니의 물건으로 날 협박하려 하지 마. 네가 어머니를 완전한 상태로 돌려준다면 너희의 아가씨도 무사할 테니까.”물론 지금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그래도 사지 멀쩡하고 손발가락 그대로 붙어 있으니 완전하다고 할 수 있었다.사구는 냉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호통쳤다.“이런 식으로 나에게 협박한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어!”“그건 예전이고 지
“뭐라고?”온자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는 그런 그를 싸늘히 노려보고는 말했다.“거래 안 한다고. 알아들었어? 내가 다시 말해줘?”“온사, 너!”온자월이 온사의 이름을 부른 그 순간,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놀란 온자월은 품에 간직한 비수를 꺼내려 했다.하지만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추월의 주먹에 맞아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추월은 주먹으로 온자월의 얼굴을 쳤다.퍽!온자월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그가 일어나서 반격하기도 전에 추월은 그의 복부를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너… 넌 누구야? 감히 진국공가의 공자에게 무력을 휘두르다니!”온자월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신분으로 추월에게 겁을 주려 했다.온사는 그런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갔다. 추월이 고개를 숙이고 온사의 뒤에 섰을 때에야 온자월은 상황을 눈치챘다.“이 아이는 내 사람이야. 뭐, 불만 있어?”온사는 바닥에 쓰러져서도 소중히 연을 감싸고 있는 온자월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아들이 원수의 딸을 구한답시고 친히 만들어준 연을 거래 조건으로 들고 나온 걸 어머니가 아시면 참 후회하실 거야.”“원수의 딸이라니! 또 무슨 헛소리야!”온자월은 바닥에 쓰러져 몸도 못 일으키면서도 언성을 높여 말했다.“참, 내 정신 좀 봐. 또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온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니는 생전에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어. 네가 불효자인 걸 아셨어도 후회는 없으셨을 거야.”말을 마친 온사는 온자월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온자월 너는 후회 안 해?”온자월은 주먹을 꽉 쥐고 온사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뭘 하려는 건지 알아. 넌 나와 막내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어. 하지만 착각하지 마. 혈연을 떠나서 막내는 내 동생이야!”“그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그 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랄게.”그 말을 끝으로 온사는 수월관으로 돌아가 버렸다.그녀는 더 이상 온자월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그가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온사는 그가 뭐 하러 온 건지 바로 알아차렸다.그녀는 온자월이 대체 뭘 갖고 왔을지 궁금했다.밖으로 나가서 온자월이 들고 있는 연을 보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연까지 가지고 왔네?”온자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연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안다면 나도 쓸데없는 말 안 할게. 너 어머니의 물건을 원하잖아? 이 연을 너에게 줄게. 당장 막내를 풀어줘.”온사는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온모를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이야. 걔를 위해서 어머니까지 버릴 생각이야?”“어머니를 버린 게 아니야!”그 말을 들은 온자월은 곧바로 반박했다.“네가 막내를 납치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꺼낼 일도 없었어!”온사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넌 결국 어머니와 외부인 둘 중에 외부인을 택했다는 거잖아!”“헛소리하지 마!”온자월은 격앙된 목소리로 호통쳤다.“막내는 외부인이 아니야. 외부인은 너지! 잊지 마, 넌 이미 진국공가의 딸이 아니야. 진국공가의 딸은 막내 한 명뿐이야. 걔가 내 동생이라고!”“그래! 양심도 없는 놈. 역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끼리 잘 어울리네. 원래부터 너희가 일가족이었나 봐!”온사는 눈을 부릅뜨고 온자월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지금 누굴 욕한 거야?”온자월도 눈을 부릅뜨고 온사를 노려보았다.“온사, 내가 너한테 주먹을 못 휘두른다고 함부로 막내 욕하지 마!”온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나한테 주먹을 휘둘러? 참 대단하네. 경성의 사내들 중에 여자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너!”온자월은 발끈하며 온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손에 든 연을 놓칠 뻔했다. 그는 뒤늦게 연이 괜찮은지 살펴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온사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연을 외부인인 나에게 갖고 와서 거래를 하자는 사람이 뭘 그렇게 긴장해?”그녀는 비웃음 가득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이걸 소중히 보관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