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환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왜 그러는 거야?”서인아는 그런 임유환을 의아한 듯 쳐다보며 물었다.“저 경찰 좀 수상해 보이지 않아?”임유환의 의심 가득한 말을 들은 서인아는 그가 가리킨 경찰을 눈여겨보았다.마침 팀장쯤 돼 보이는 다른 경찰이 그 경찰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었다.“이 형사, 현장은 처음일 텐데 이것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너무 긴장은 하지 마. 그럼 잘해봐.”“네, 팀장님.”모자를 푹 눌러쓴 경찰은 고개를 끄덕이며 팀장을 따라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아니야,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상황에 임유환도 한시름 놓으며 말했다.“가서 물어보자, 뭐 나온 거 있나.”임유환이 이번 습격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서인아도 알고 있었기에 그 궁금증을 풀어주고자 넌지시 제안했다.그에 임유환도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네 사람은 현장 쪽으로 다가갔다.“죄송하지만 여긴 사전 현장입니다. 민간인은 출입 못 하세요.”하지만 그들을 잔뜩 경계하며 언성을 높이는 경찰에 서인아는 차갑게 말했다.“아까 제가 신고했어요.”“아, 서인아 아가씨시네요.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경찰은 서인아를 보자 바로 공손해지며 고개를 숙였다.“다친 덴 없고요, CCTV는 돌려봤어요? 용의자는 특정됐나요?”“아직은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도 곧 나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가씨. 결과 나오면 저희 쪽에서 연락 드릴게요.”“네.”고개를 끄덕인 서인아는 임유환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우린 그냥 기다려야겠네.”“그럼 난 잠깐 어디 갔다 올게, 금방 올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줘.”“응.”서인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유환은 아까 그 수림 속으로 들어갔다.호텔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그곳에는 총알과 핏자국이 가득했다.다만 아까 임유환이 심문하던 남자와 다른 킬러들의 시신은 이미 그의 예상대로 말끔히 사라져
“인아야, 나 왔어.”기자들이 인터뷰하는 사이에 임유환은 서인아 뒤로 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아, 깜짝이야! 놀랬잖아, 왜 인기척도 없이 와!”그에 서인아는 정말 놀라긴 했는지 몸을 떠는 것도 모자라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말했다.“어... 나 말했는데...”생각보다 많이 놀라는 서인아에 임유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여기가 너무 시끄러워서 안 들렸나 봐.”“우리 조용한 데로 갈까요?”임유환이 조명주와 최서우를 보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아요.”그 시각, 사람들 틈에 섞여 있던 그 남자가 임유환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눈빛이 서늘해지며 안주머니에서 소음기를 장착한 검은 총을 꺼내 들었다.워낙에 조심스러웠던 행동이라 사람들은 그가 총을 들어 임유환을 겨냥할 때까지 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유환아, 너 아까 어디 갔었어? 뭐 알아낸 건 있어?”서인아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얘기하며 걸어가고 있었다.“아, 그게...”임유환도 자연스레 질문에 대답하려던 그 순간, 그는 갑작스레 느껴진 살기에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렇게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본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저를 향해 겨눠진 총구였다.“다들 엎드려!”임유환의 외침과 거의 동시로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인파를 뚫고 수많은 기자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기자들이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한 그 잠깐 사이에 임유환은 다행히 총알을 피해냈다.그렇게 첫발이 허탕을 치자 남자는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기려 했는데 임유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힘껏 땅을 굴러 호랑이마냥 남자의 앞으로 뛰어가서 그의 손목을 꺾어버렸다.그렇게 이번에는 총성 대신 남자의 손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임유환은 무표정으로 남자의 팔을 등 뒤로 꺾고는 그를 바닥에 눕혔다.임유환에게 제압당한 킬러는 자연스레 총까지 떨구어버렸다.“총이야!”총이 떨어지는 걸 보고서야 기자들도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다들 뒤로 물러났다.그 광경을 보고 있던 경찰들도
갑작스러운 사고는 모든 이의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었다.그 갑작스러움에 임유환조차 반응을 못 하고 뒤로 넘어가는 최서우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최서우의 뜨거운 피가 임유환의 얼굴에 닿았을 때 마침내 정신을 차린 임유환은 최서우를 받쳐 안으며 다급히 외쳤다.“최서우 씨!”관자놀이에서 흘러나온 새빨간 피가 임유환의 손까지 빨갛게 물들여가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최서우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어 임유환의 소리를 들을 수조차 없었다.“안돼요! 죽으면 안 돼요!”임유환은 떨리는 목소리로 최서우를 부르며 다급히 8개의 침을 관자놀이 꽂아 상처부터 틀어막았다.하지만 그래봤자 지혈만 했을 뿐 총알은 여전히 최서우의 머릿속에 박혀있었다.“젠장, 아직도 안 죽었어?!”그때 총을 쏜 남자는 아직도 살아있는 임유환을 보고 이를 갈더니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X발, 내가 오늘 너 죽일 거야.”그걸 본 임유환은 우레와 같은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진기를 뿜어냈다.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다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임유환은 빠르게 경찰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총구를 감싸 쥐고는 눈을 번뜩이며 남자를 노려보았다.악마를 연상케 하는 임유환의 표정에 깜짝 놀란 남자는 방아쇠부터 당겼지만 임유환이 그보다 먼저 총구를 휘게 만든 탓에 총알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총과 함께 터져버렸다.터져나간 총의 뜨거운 파편은 남자의 얼굴과 눈을 파고들어 눈까지 멀게 만들었다.그에 반해 임유환 얼굴에 튄 파편은 그저 자그마한 흔적만 남긴 정도였다.“아!”임유환은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울부짖으며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무릎을 걷어차 버렸다.그렇게 뼈가 부서져 버린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임유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주먹을 들어 남자의 척추뼈에 내리꽂았다.그 충격에 피를 토해내며 힘없이 바닥에 내리꽂힌 남자는 경련이라도 인 듯 몸을 떨어댔다.하지만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임유환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
“누가 이렇게 시끄러워! 여기 병원입니다!”그때 한 중년 간호사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걸어 나왔다.“간호사님, 빨리 의사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간호사를 본 임유환은 다른 걸 신경 쓸 새도 없이 다급히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간호사의 불친절이었다.“여기가 당신 집이에요? 진료예약부터 해요!”힘든 야근에 어렵게 눈을 붙였는데 하필 임유환이 그럴 때 소란을 피운 탓에 지금 간호사는 기분이 아주 나쁜 상태였다.“뭐라고요?!”임유환은 사람 목숨이 달린 이 상황에 여유롭게 예약이나 하라는 간호사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뭘 쳐다봐요? 귀먹었어요? 가서 예약하라고요!”노려보는 임유환의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간호사는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여기 사람 다친 거 안 보여?! 너도 죽고 싶어?!”간호사의 태도에 다시 화가 난 임유환은 진기를 뿜어내며 순식간에 간호사 앞으로 다가가 그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목이 잡힌 간호사는 두 발이 공중에 떠버린 채 말 못하는 아기처럼 웅얼대며 빨개진 얼굴로 발버둥을 쳤다.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의사가 흰자가 보이도록 눈이 뒤집힌 간호사를 보고는 다급히 임유환을 말리며 말했다.“그만 하세요! 이러다가 사람 죽습니다!”“그럼 당장 수술 준비해.”임유환은 정말 악마라도 된 양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일단 진정하고, 병원 절차대로...”“지금 당장 수술 준비하세요.”그때 서인아가 의사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말했다.“오늘 이 사람 못 살리면 다들 그만둘 각오해요.”단번에 서인아를 알아본 의사는 당황하며 바로 고개부터 숙였다.“네,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겠습니다!”“얼른 수술 준비해!”임유환이 서인아의 친구라는 것을 알아챈 의사는 바로 응급실 직원들에게 수술을 준비하라 일렀다.임유환은 그제야 간호사를 놓아주었다.목을 옥죄이던 손이 풀리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간호사는 몸을 떨어대며 임유환의 눈도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들이 침대를 끌고 나와서는 거기에 최서우를 눕히고
임유환은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포와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의술에 능한 임유환은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잘 알고 있었다.시신경들이 가득한 뇌에 박힌 총알을 빼내다가 다른 걸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걱정 마 유환아, 서우 씨 괜찮을 거야.”임유환은 잔뜩 충혈된 눈에 눈물을 매단 채 자신을 위로하는 서인아를 바라보며 자책 어린 말을 했다.“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나 때문에, 내가 너무 경솔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임유환은 아까 자신이 좀 더 조심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아 죄책감에 사로잡혀 버렸다.“네 탓이 아니야 유환아, 그 일은 누구라도 예상 못 했을 거야.”서인아도 위로를 하고는 있었지만 상상조차 못 했던 일에 심장이 떨리긴 마찬가지였다.“그래요 유환 씨. 얼른 힘내야죠. 서우도 유환 씨가 이러고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눈시울이 빨개진 조명주도 임유환을 다독였다.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생사불명의 상황에 놓여있으니 그도 마음이 아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수술이 잘 되길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이었기에 일단은 힘을 내서 버텨야만 했다.“조 중령님 말이 맞아. 일단 좀 앉아봐. 서우 씨 강하고 운도 좋은 사람이니까 꼭 살 수 있을 거야.”“그래요, 전에 무당이 서우는 아흔아홉 살 까지 살 거라 그랬어요!”조명주도 애써 밝은 척하며 서인아와 함께 임유환을 위로했다.자신을 위해 애써주는 조명주와 서인아를 향해 임유환도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차디찬 병원 의자에 앉았다.수술실 등이 켜진 뒤로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났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긴장에 떨고 있었다.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술에 불안감까지 몰려온 임유환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떨고 있었다.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서인아는 차디찬 임유환의 두 손을 다정히 잡아주며 말했다.“걱정 마 유환아, 서우 씨 괜찮을 거야.”“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인아야...”좀 전까지만 해도 헤어지기 아쉬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지며 흑제의 심장까지 철렁이게 했다.임유환이 이토록 화난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흑제였기에 다급히 그의 말에 대답했다.“예, 임 선생님. 지금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임유환의 말 한마디에 흑제가 서둘러 사람을 풀며 달려나가는 모습을 본 서인아와 조명주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지만 수술실의 등이 계속해서 켜져 있는 지금 그런 거에 정신을 팔 여유가 없었다.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시간은 지체없이 흘러 어느새 다섯 시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왜 아직도 안 끝난 거야.”임유환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수술실 주변을 맴돌았다.그의 눈은 더욱더 빨갛게 충혈됐고 눈 속에는 불안과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임유환의 이성은 수술이 길어질수록 최서우가 살아날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하필 총이 뇌에 박혀버린 탓에 수술이 까다롭고 또 과다출혈의 위험도 있어 수술시간은 최대 6시간이 한계인데 이미 다섯 시간이나 지나버린 것이다.그러니 지금은 앞으로 한 시간 안에 수술이 끝나지 못한다면 최서우의 목숨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라는 감정이 임유환의 심장을 옥죄어왔고 임유환의 손발은 빠르게 식어가며 그의 몸까지 파르르 떨려왔다.“유환아, 괜찮아. 서우 씨 괜찮을 거야.”그걸 본 서인아는 임유환을 다정히 토닥이며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임유환 어깨에 걸쳐주었다.은은한 나무 향이 코끝으로 전해지자 그제야 조금 안정을 되찾은 임유환이 서인아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고마워...”서인아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임유환의 시린 손을 꼭 잡아주었다.그렇게 긴장감 속에서 시간은 또 30분이나 흘러버렸다.하지만 여전히 닫혀있는 수술실 문에 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서인아의 손을 꽉 잡았다.십분, 이십 분...최서우의 생사를 가를 시간이 고작 10분밖에 남지 않았다.임유환은 수술실의
의사의 어두운 얼굴을 본 셋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임유환은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다급히 물었다.“선생님, 수술은 성공적인 건가요?”목소리에서 불안감이 새어 나오는 임유환을 보며 의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있죠.”“다행히도 환자를 데려올 때 누가 이미 응급처치는 끝내놨더라고요. 은침으로 혈 자리를 막은 덕분에 과다출혈은 피해서 수술할 시간은 충분했어요.”“후...”의사의 말을 들은 셋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서인아와 조명주도 자연스레 응급처치를 한 임유환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의사의 말에 셋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환자분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에요.”“총알이 뇌를 조금 빗겨나가서 뇌가 망가지는 건 피했지만 그래도 다른 시신경들이 많이 다친 상태에요. 아마...”“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불길한 의사의 말에 임유환은 잔뜩 긴장하며 물었다.“아마 뇌 쪽 손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있을 겁니다. 환자분이 언제 깨어나실지도 잘 모르는 상태고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그럼 계속 의식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죠?”“그럼... 식물인간이라고 봐야 합니다.”“식물인간이요?”놀란 듯 되묻는 임유환에 서인아와 조명주의 표정 역시 다시 어두워졌다.“네.”의사도 안타까운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 그리고 환자분 가족은 어느 분이시죠? 와서 사인하셔야 해요.”“제가 가죠.”최서우가 이렇게 된 건 다 제 책임이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먼저 나서며 말했다.“같이 가.”그때 서인아가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곳은 연경이니 임유환이 지리도 잘 모를 것이고 또 자신이 동행하는 편이 최서우에게 제일 좋은 병실을 찾아주는 데도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서인아였다.“그래.”그리고 그런 서인아의 마음을 아는 임유환도 고맙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때 서인아를 구하느라 폐허 속에 갇혀있던 탓에 임유환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었다.임유환은 철근에 배가 찔려 몇 바늘씩이나 꿰맨 채로 누워있었는데 다행히도 스승님의 혹독한 훈련과 수많은 약재 덕분에 남다른 회복속도를 자랑하며 열몇 시간 만에 몸이 거의 다 회복됐었다.그래서 당시 임유환의 주치의이자 의학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최서우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이다.임유환에게 흥미가 생긴 최서우는 말끝마다 잘생긴 환자분이라며 임유환을 유혹해댔고 임유환더러 자신의 연구를 도와달라고 졸라왔었다.하지만 그 연구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던 임유환은 표본으로 잘려나가긴 싫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었다.하지만 임유환의 예상과 반대로 그 거절 뒤에 따른 것은 최서우의 더욱 강력해진 유혹이었다.최서우는 임유환의 상태를 살펴본다는 이유로 병실에 들어와 그의 복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그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임유환은 너무 흥분한 탓에 상처까지 다시 벌어져 버린 것이다.최서우는 그제야 의사를 데려온다는 말만 남기고 멋쩍은 듯 병실을 빠져나갔다.그렇게 주치의에게 버려진 채 혼자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던 그 날의 추억을 회상하던 임유환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지금의 임유환은 최서우가 다시 눈을 떠서 잘생긴 환자분이라며 저를 쫓아다녀 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일어나주기만 한다면 임유환은 최서우의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연구실에 끌려가서 그녀의 표본이 된다 해도 기꺼이 모른 척 같이 가줄 수 있었다.“서우 씨, 얼른 좀 일어나요 제발...”임유환은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서우 씨가 일어나기만 하면, 멀쩡히 눈만 떠주면 서우 씨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 그게 뭐든 다 들어줄게요...”임유환의 간절한 기도에 답변하듯 최서우의 오른손의 손가락 하나가 살짝 움직였다.하지만 그마저도 단 한 번으로 끝났고 손가락은 다시 움직임을 멈추었다....한편 정씨 집안의 서재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