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설마요.”최서우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임유환은 들키게 되면 자신의 노력들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눈빛이 흔들렸다.“나도 모르죠. 됐어요,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요. 아무튼 유환 씨 아직 나 한 번 도와줘야 해요.”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최서우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하늘을 올려다봤다.“어...”그 일을 잊지 않고 언급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잠시 벙쪄있었다.“왜요, 싫어요?”“그럴 리가요!”입술을 내미는 최서우에 다급하게 부정을 하던 임유환은 무슨 일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게 아니라 며칠 뒤면 나는 S 시에 없어요.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 좀 갔다 와야 하거든요.”“연경에요?”“네.”“서인아 씨 만나러 가는 거예요?”“아니요.”“그럼 어젯밤 일 때문이겠네요?”고개를 젓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긴장한 채 물었다.어젯밤 통화로 언뜻 들었듯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된 엄청난 일이 있는 것 같았다.“네.”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환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그럼 조심해서 다녀와요.”최서우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어차피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이런 당부의 말뿐이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뭘 나한테 고마워해요, 난 아무 도움도 못 되는데.”“근데 연경에는 언제 가는 거예요?”“그건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곧 갈 것 같아요.”“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요?”최서우는 혹시 임유환이 떠나기 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다시 물었다.“일주일 뒤로 생각하고 있어요.”“그럼 서인아 씨 결혼식이 있을 때네요?”“네.”“알겠어요.”잘 맞지 않는 시간에 최서우는 조금 실망한 듯 대답했다.“내가 아직 더 도울 일이 있는 거예요?”“아니요... 아, 서인아 씨랑 진짜 무슨 사이에요?”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최서우에 임유환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조효동, 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최서우는 눈썹을 치켜뜨고 경멸 어린 눈으로 조효동을 보고 있었다.“서우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나는 네가 정말 저 자식한테 속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너는 사람들이 다 너처럼 파렴치한 줄 알아?”저를 걱정하는 척 말하는 조효동에 최서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서우야, 3년 전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나 진짜 진심이야.”“너 진짜 역겨워.”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는 조효동에 최서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처음에도 조효동이 싫었지만 결혼을 한 적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역겨워 나 단 한순간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내가 다 설명할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야.”이 와중에도 해명하겠다는 조효동을 시린 눈으로 노려보던 최서우가 말했다.“닥쳐. 그리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널 보는 것 자체가 내 눈을 더럽히는 일이야.”최서우의 마음속에서 조효동은 이미 나쁜 놈 낙인이 찍힌 지 오래였다.“서우야...”“서우 씨가 꺼지라잖아, 못 들었어?”최서우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들러붙는 조효동에 임유환이 입을 열었다.최서우의 앞을 막아서며 둘을 떼어놓는 임유환에 조효동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네가 뭔데 감히 나랑 말을 섞어.”“네가 지금 우리 데이트를 방해하고 있으니까.”조효동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임유환이 내뱉는 데이트란 말에 최서우는 그냥 조효동 들으라고 일부러 한 말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간지러워 나며 달달한 느낌이 들었다.“데이트? 너 같은 게 서우 남자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말이 많은 거 보니까 어제 망신을 덜 당했나 보네.”저를 무시하는 듯한 조효동의 말에도 전혀 자극받지 않은 임유환은 여전히 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너!”하지만 임유환과 달리 쉽게 열 받은 조효동은 화가 나 소리쳤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비아냥거렸다.“너 진짜 연기 잘한다. 어제 서우랑 아주머니 앞에서 아
“아직도 인정 안 해?”조효동은 태연자약한 임유환을 보고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그래, 네가 궁금하다니까 네 소원대로 얘기해줄게.”“넌 흑제 어르신이 누군지도 모르잖아!”“이게 네가 말한 실체야?”“당연히 이것 말고도 더 있지.”경멸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최서우를 향해 조효동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조효동은 최서우가 아직도 임유환에게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해 한껏 잘난 척을 하며 떠들어댔다.“서우야, 네가 나 안 믿는 건 아는데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다 사실이야.”“세계 제일 갑부이신 흑제 어르신이 저런 놈과 알고 지낸다는 게 말이 안 돼!”“너 대체 언제까지 그럴 거야? 넌 안 지치니?”더 듣기 거북했던 최서우는 차갑게 대꾸했다.“넌 아직도 내가 3년 전처럼 쉽게 속을 줄 알아?”“서우야, 이건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라니까.”조효동이 다급하게 부인하자 최서우가 다시 물었다.“네 말대로 유환 씨가 흑제 어르신을 모른다면 어젯밤은 어떻게 연락했겠어?”“저놈이 어제 연락한 건 흑제 어르신이 아니야!”“조효동, 넌 그렇게 너를 속이면 마음이 편해?”“진짜라니까, 나 좀 믿어줘 서우야.”최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임유환 씨가 정말 흑제 어르신을 모른다면 네 그 추악한 과거들은 어떻게 찾아낸 거야?”“그게 문제야!”조효동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내 개인정보는 흑제 어르신이 알아봐 주신 게 아니라 임유환이 S 시 대리인의 신분으로 사람을 시켜서 알아낸 것뿐이야!”“내가 아주머니한테 잘 보이는 게 싫어서, 나를 질투해서 저 자식이 혼자 꾸민 일이라고!”“상상도 정도껏 하지.”다른 사람들은 흑제와 임유환 사이를 의심할 수 있지만 최서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흑제와 임유환 사이를 가장 잘 입증하는 블랙 골드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최서우는 지금 조효동이 하는 말들이 우습기만 했다.“서우야, 너도 저놈한테 제대로 속았구나.”조효동은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 최서우에 다급 해하며 말했다.“허, 네가
“그래, 정우빈 도련님도 왔었어.”최서우의 반응을 본 조효동은 웃으며 말했다.“이 사실들을 누가 너한테 알려준 거야?”“그야 당연히 정우빈 도련님이지.”의아한 듯 묻는 최서우에 조효동이 고개를 쳐들며 우쭐거렸다.최서우가 정보의 출처를 묻기만을 기다렸던 조효동이었기에 이것을 기회 삼아 잘난 척을 해야 했다.“정우빈 씨가?”“둘이 아는 사이야?”최서우가 놀란 눈으로 조효동을 바라보자 조효동은 더 으스대며 웃었다.“당연하지.”“5일 뒤, 서인아 아가씨와 정우빈 도련님 결혼식이 있는 날에 S 시 유명인사인 조재용 회장님이 두 분을 위해서 S 시 초호화 별장인 클라우드 별장에서 파티도 열어주신대.”“그날엔 S에서 입지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 파티에 참석해서 두 분 결혼 축하해 드린다던데.”“당연히 나도 초대받았지. 그것도 정우빈 도련님이 직접 주신 초대장이야.”사실 조효동이 초대장을 받고 파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정말 정우빈과 아는 사이여서가 아니라 조효동이 임유환을 조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우빈이 직접 사람을 보내 조효동과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조효동 더러 임유환에게 말을 전해주라고 해서 오늘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정우빈이 널 초대했다고?”최서우는 득의양양한 조효동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언제부터 조효동이 그렇게 대단했지...“당연하지, 초대장에 정우빈 도련님 사인도 있어.”조효동은 말을 하며 제 초대장을 내밀었다.조효동의 말대로 정말 정우빈의 사인과 클라우드 별장의 주소, 파티 시간 등이 적혀져 있는 초대장이었다.그리고 그곳에 적힌 주소는 정말 조재용 회장의 개인 별장이었다.S 시에서 가장 화려한 별장이 맞았다.빨간 종이에 적혀있는 검은 글자들을 읽던 최서우의 눈이 점점 커졌다.조효동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인가, 정말 정우빈의 초대를 받은 것일까.“아, 미꾸라지.”이번 기회에 정우빈과 서인아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조재용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이제 곧 두 사람이 서씨 집안과 정씨 집안의 주
“나더러 전하라고? 너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아직도 당당하게 나오는 임유환에 헛웃음을 지은 조효동은 다시 최서우를 보며 말했다.“서우야, 이제 이 자식 실체를 좀 알겠지? 여자한테 빌붙는 게 끝이 아니라 전에 이혼도 한 놈이야. 이건 너도 몰랐지?”“그런 말이 하고 싶은 거라면 그만해, 난 신경 안 써.”차가운 눈으로 확고하게 말하는 최서우에 조효동의 입꼬리가 떨려왔다.똑같이 이혼 경력이 있는 사람인데 임유환만 감싸고 도는 그 모습은 제대로 조효동의 질투심을 자극했다.조효동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서우야,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저놈한테 더는 속지 마. 네가 점점 더 빠져들까 봐 걱정돼서 그래.”“그리고 저놈 지금 너 말고도 여자친구가 더 있어!”“다른 여자친구?”임유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조효동이 또 무슨 말을 지어낼지 궁금했던 최서우는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물었다.조효동은 최서우가 정말 궁금해서 물은 줄 알고 임유환을 한 번 보고는 서둘러 말했다.“그래, 둘이 만난 지는 좀 됐대 이미.”“여자 이름은 윤서린이래.”윤서린이라는 이름을 들은 최서우는 조효동이 하룻밤 사이에 임유환을 탈탈 털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더 싫어졌다.정확히 말하면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하지만 조효동은 최서우의 증오 가득한 눈이 임유환을 향한 건 줄로 알았다.여자한테 빌붙고 양다리까지 걸쳤다는 제 말이 최서우를 자극한 줄로 알고 임유환에게 정이 떨어져 둘이 곧 헤어질 거라는 상상까지 했다.이제 임유환은 정말 끝났다는 생각에 조효동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하지만 조효동의 예상과 달리 최서우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네가 말한 거 난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유환 씨가 다 알려줬거든.”“뭐?”최서우의 말에 조효동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러니까 저 자식에게 여자친구가 알면서도 계속 만난다는 말이야?”“그래.”담담하게 말하는 최서우에 조효동이 무언가 알아차
“나더러 저런 더러운 년한테 사과를 하라고? 너 미쳤어?”조효동은 임유환의 차가운 눈빛에 겁먹고 있었지만 법치 사회이니 임유환이 감히 제게 손을 대진 못할 거라 여기고 일부러 더 큰소리를 냈다.“그럼 어쩔 수 없지.”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조효동을 보며 임유환은 고개를 젓고 차갑게 말했다.“허세만 부리는 놈이 감히 누구한테 명령이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착각 좀 하지 마.”임유환이 여전히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 조효동은 냉소를 흘렸다.“근데 너랑 최서우가 잘 어울리긴 하네. 하나는 허세를 부리고 하나는 제 몸이나 파니까.”“조효동 너!”조효동의 말에 최서우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소리 질렀다.“뭐? 내가 틀린 말...”짜악!그런데 조효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유환의 억센 손아귀가 조효동의 뺨을 내리쳤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던지 조효동은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바닥에 주저앉은 조효동은 피를 토해냈는데 그 속에는 이빨 몇 개도 섞여져 있었다.그 모습을 본 최서우도 깜짝 놀랐다.임유환이 정말로 손을 댔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힘을 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임유환은 서서히 주저앉아 있는 조효동에게로 향했다.그때 일어나려고 기어 다니던 조효동은 저에게로 다가오는 발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동공이 작아지며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임유환의 무표정인 얼굴을 마주했다.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굳어진 얼굴에 깊고 시린 눈이 더해져 온몸에서 한기가 뿜어나오는 그 모습에 조효동은 물론 두려워 났지만 그래도 자존심을 꺾지 못하고 소리쳤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 너 딱 기다려, 내가 지금 당장 경찰 부를 거야. 너 이거 폭행으로 신고할 거라고!”말을 마친 조효동이 핸드폰을 꺼내 신고하려 하자 임유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효동의 손등을 밟아버렸다.“아!”조효동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마에 땀이 맺힌 채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사... 사과할게!”조효동이 신음 섞인 고함을 지르고서야 임
최서우는 점점 얼굴도 빨개졌고 심장도 더 빨리 뛰었다.그때 마침 고개를 돌려 최서우를 바라본 임유환은 저를 넋이 나간 채 보고 있는 최서우에 의아해진 채 물었다.“서우 씨, 내 얼굴에 뭐 있어요?”“네? 아, 아니요!”그 질문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최서우가 급하게 핑계를 생각해냈다.“나는... 어, 그러니까... 아, 아까 일 고맙다고요!”“괜찮아요, 그런 개쓰레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가만히 두고 보진 못했을 거예요.”“네.”임유환이 웃으며 말하자 최서우는 고개를 들키지 않았음에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임유환이 제 마음을 눈치챌 수도 있었던 방금 전 상황을 떠올리니 심장박동이 더 거세졌다.하지만 임유환은 최서우가 평소와 다름없다 생각하며 작별인사를 했다.“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잠깐만요!”그런데 그때, 최서우가 갑자기 임유환을 불러세웠다.“왜요?”“5일 뒤에 있는 그 파티에 정말 갈 거예요?”“네.”“서인아 씨 때문이에요?”“아니요.”“그럼 왜 가는 건데요?”“내가 볼일이 있어서요.”“나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임유환은 손을 몇 번 젓고는 검은색 맥라렌을 타고 윤서린과의 데이트 장소로 향했다.최서우는 맥라렌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고 있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거두었다.그리고는 아직도 저한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 임유환에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제가 여자친구도 아니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최서우는 임유환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며 고개를 저었다.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였다. 임자 있는 남자를 탐내는 건 할 짓이 아니었다.그렇게 진정을 하고 나니 5일 뒤 클라우드 별장에서 있을 파티가 걱정되었다.여자의 직감이 그 파티는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유환이 혼자 가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최서우는 이 사실을 조명주에게 알리기로 했다.나머지 일들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임유환의 안전부터 고려해야 했다...
“유환 씨, 우리 전에 혹시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가만히 생각하다 입을 여는 윤서린에 임유환은 최서우가 그 옛날 어린 저를 기억해낸 줄 알고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그건 왜 갑자기 물어?”“전에 나한테 운명 믿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요?”임유환이 일단 모른 척을 하며 묻자 윤서린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채 말했다.“기억하지.”아직 윤서린의 생각을 모르는 임유환은 일단을 계속 떠보기로 했다.“그게 좀 이상해서요. 그래서 우리가 혹시 만난 적이 있나 해서 물은 거예요.”“아, 그런 거였어?”“그건 당연히 장난이었지. 그냥 널 처음 볼 때부터 끌려서 그렇게 말한 거였어.”“끌렸다고요?”최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홍조가 오른 볼을 움직여 중얼거렸다.윤서린이 그날 일을 기억 못 한다는 걸 확신하고서야 임유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유환은 15년 전 일을 윤서린에게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윤서린이 알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윤서린의 성격을 너무 잘 알기에 부담될까 봐 두렵기도 했고 또 제가 그날 목숨을 빚졌기에 윤서린과 사귄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까 봐 말을 못 하는 것도 있었다.처음 윤서린에게 다가간 건 도와주기 위해서였지만 그 후에는 착한 윤서린에게 마음이 흔들렸고 지금은 윤서린만을 지켜주고 싶었다.“그래, 끌렸어. 우리가 인연이 있긴 한가 봐.”임유환은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윤서린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그에 윤서린은 빨간 입술을 움직여 부끄러움을 참으며 낮게 질문했다.“유환 씨는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요?”“음... 널 알아가면서 천천히 좋아졌던 것 같아.”“그럼 나의 어떤 모습이 좋았어요?”윤서린은 아까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더 부드럽게 물었다.“다정하고 착하고 통 크고... 그리고 가끔은 바보 같은 모습도 있는 게 좋았어. 그때마다 널 지켜주고 싶었거든.”윤서린의 장점을 하나하나 나열하던 임유환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나 바보 아니거든요!”윤서린은 임유환이 저를 이렇게 좋게 봐준다는 생각에 너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