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환은 서인아의 결혼식이 7일 남았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최서우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설마 진짜 서인아 씨 짝사랑해요? 그래서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건 못 보겠어요?”그래도 대답이 없자 최서우는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역시 남자들은 다 그런 차도녀를 좋아하는 거 맞잖아요!”“나도 차가워질 거에요 이제, 아니다. 나 원래 그런 스타일이었는데.”혼자 떠들고 있는 최서우에도 임유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화났어요?”“아이, 뭐 이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요? 내가 그냥 아무렇게나 말한 건데. 알겠어요, 유환 씨는 서인아 씨 짝사랑한 적 없어요. 내가 사과할게요, 미안해요.”최서우는 임유환이 화가 난 줄 알고 바로 꼬리를 내리며 달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방 천장을 응시했다.“유환 씨?”최서우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임유환을 팔을 찔러보며 조심스럽게 불렀다.“나 괜찮아요.”“어머!”조용하다가 갑자기 입을 여는 임유환에 깜짝 놀란 최서우가 말했다.“아니, 왜 갑자기 말해요! 놀랐잖아요!”최서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아까 일은 미안해요. 아무렇게나 말한 거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마요.”“네.”“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네.”임유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이상함을 느낀 최서우가 계속해서 물었다.“그럼 서인아 씨 결혼식엔 갈 거예요?”“안 가요.”“그래요... 근데 둘 사이에 진짜 무슨 일 있었어요?”국제 파크에서 결혼사진을 보았을 때도, 오늘 결혼식 얘기를 꺼냈을 때도 이상하리만치 가라앉는 분위기에 최서우는 참지 못하고 또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늦었으니까 얼른 자요.”“알려주면 안 돼요? 나한테만 좀만 알려줘요.”임유환이 대답 없이 누우려 하자 최서우가 또 애교를 부려왔다.“유환 씨, 알려줘요...”최서우의 애교가 계속되자 임유환은 등을 돌려 누웠다.“에이, 됐어요! 나도 안 궁금해요
“읍!”순식간에 입술이 물린 최서우는 두 눈을 크게 떴다.임유환이 정말로 입을 맞출 줄은 몰랐는데 인제 와서 후회된 최서우가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 치며 작은 손으로 단단한 가슴팍을 쳐보았지만 이미 본능에 잡아먹힌 이성이었기에 임유환은 그런 최서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최서우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일부러 싫은 척하는 것 같은 모습에 임유환의 신경이 더 곤두섰다.임유환은 최서우의 손목을 잡아 누르고 제 손을 잠옷 치마 아래로 집어넣었다.살갗에 닿아오는 손길에 최서우의 온몸이 달아오르며 그녀의 발버둥도 점점 더 심해졌다.하지만 임유환에게 잡힌 손을 빼내기엔 한없이 미약한 몸부림이었다.최서우는 자신이 마치 바다에 휘몰아치는 파도 속에 갇힌 쪽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가슴의 두근거림과 함께 임유환과 알고 지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병원에서의 첫 만남 이후로 강준석에게서 벗어나게 도와줬던 일, 그리고 오늘 조효동을 쫓아 내준 일까지 임유환에게 받은 도움이 참 많았다.최서우도 물론 임유환이 남자친구인 척해주는 것뿐이란 걸 알고 있었고 또 여자친구도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두 손이 제멋대로 임유환을 잡았다.그리고 임유환의 입맞춤에 똑같이 뜨거운 대답을 해주었다.최서우의 대답을 들은 임유환의 눈은 더 뜨거워지며 둘은 더 깊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그때 베개 옆에 놓아두었던 임유환의 핸드폰이 울려왔다.그 소리에 깜짝 놀란 임유환을 몸을 떨었고 최서우 역시 잔뜩 긴장하며 둘은 빛의 속도로 떨어졌다.최서우가 빨개진 얼굴을 아래로 숙이자 순간 이성을 되찾은 임유환도 살짝 어색해졌다. 하마터면 최서우와 그런 짓을 할뻔했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그때 임유환의 생각을 끊는 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 밤에 대체 누가 전화를 하는지 임유환은 속으로 욕을 하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그런데 발신자가 흑제인 것을 보고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
“네, 주인님!”“알아보는 대로 보고해.”임유환의 분노를 느낀 흑제가 가슴을 졸이며 대답하자 임유환은 다시 한번 당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제 어머니의 죽음에 여러 가문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지어진 차가운 표정 탓에 임유환 주위에는 한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그들이 왜 손을 잡고 어머니를 죽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제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는 꼭 해야 했다.흑제의 조사만 끝나면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고 그들도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그... 유환 씨, 괜찮아요?”그때 귓가에 들리는 최서우의 긴장한 듯한 목소리에 임유환은 정신을 차리고 최서우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도 얼굴에 드러난 긴장과 걱정은 한 눈에 보였다.“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임유환은 한숨을 쉬며 사과를 전했다.아까 너무 흥분해서 최서우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으니 많이 놀랐을 것 같았다.“괜찮아요. 나는 그냥... 유환 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 해서요.”처음으로 임유환에게서 분노와 냉혹함을 보아낸 최서우였기에 조심스레 물었다.최서우가 알던 임유환은 아무 일도 마음에 담아둘 것 같지 않았고 또 감정 변화도 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에게서 저 정도 반응이 나올 정도면 엄청 큰일인 것 같았다.“괜찮아요. 그냥 옛날 일 때문에 그런 거예요.”“내가 도울 건 없어요?”임유환이 저를 걱정시키기 싫어 둘러대는 걸 아는 최서우는 더 캐묻지는 않고 그냥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물었다.“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 고마워요 서우 씨.”임유환은 저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는 최서우의 마음은 알지만 그녀가 이런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건 원치 않았기에 정중하게 거절했다.“알겠어요. 그럼 조심해요.”“네.”최서우도 제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더 말하지 않았다.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임유환이 다시 최서우와 눈을 맞춰왔다.또 한 번 맞물린 시선에 아까 일이 떠오른 최서우는 얼른 고개를 숙여버렸다.전화를 받기
“내 병이요?”처음에는 뭔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최서우도 이내 그 병이 가리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뜨거워 났다.“아... 아니요.”“아니라고요?”“네.”최서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임유환의 의아한 눈빛도 못 본 척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까 스킨십할 때는 왜 괜찮았어요?”어둠 속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의심 가득한 얼굴에 최서우는 조금 찔렸지만 제 그런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서둘러 해명했다.“아까는 특수상황이었잖아요. 갑자기 키스하고 또... 그러는데 내가 반응할 시간이 있었겠어요?”말이 계속될수록 최서우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귀 뒤쪽은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해명하려고 시작한 말인데 말을 할수록 어색해지는 분위기 탓이었다.“어...”그 해명에 임유환도 입꼬리가 떨려오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요.”최서우는 토라진 척하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하하...”아까의 일은 제 잘못이 훨씬 더 컸기에 최서우의 말에 임유환은 그저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상대가 아무리 자극을 해와도 그런 쪽으로는 아무런 경험도 없는 여자한테 달려드는 건 아니었는데 아까는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것 같다.“말해요, 어떻게 보상할 거예요?”“그게...”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보상하면 좋을지를 몰라서였다.여자의 순결과 관련된 문제이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최서우도 물론 임유환에게 보상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반응이 궁금해서 던진 말이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말이 없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임유환은 정말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았다.“괜찮아요, 진짜 책임지란 말 안 해요. 내가 먼저 잘못한 일인데요 뭐.”“어...”어딘가 실망한 듯 보이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이러니까 제가 마치 여자랑 잠자리만 하고 내빼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그런 뜻이 아니에요.”“그럼
매번 당돌한 말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하지만 임유환은 그 말들이 장난임을 알고 있었다.둘의 첫 만남이 그랬던 것처럼.남자를 싫어하는 여자가 다른 여자랑 남자친구를 공유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성과의 스킨십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 것 같은 사람이었기에 임유환은 웃으며 말했다.“왜 자꾸 장난쳐요.”임유환은 최서우가 장난을 치는 거라고 확신하고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에이, 들켰네요.”최서우는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하며 제 얇은 허리선을 드러냈다.“양심 없는 남자들 좋은 노릇만 하긴 싫거든요 나도.”“하하.”아까 행동을 생각하니 저도 최서우가 일컫는 양심 없는 남자에 포함되는 것 같아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었다.그때 윤서린이 보낸 문자에 의해 임유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유환 씨, 자요?][안 자, 무슨 일 있어 서린아?][아니요, 그냥 유환 씨 보고 싶어서요. 요즘 시간 있어요?][응, 있어.][그럼... 내가 내일 유환 씨 보러 가도 돼요?][아냐, 내가 너 보러 갈게!]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최서우의 집이었기에 괜스레 찔린 임유환이 다급히 답장했다.다른 여자와 한방에서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아무리 윤서린이라도 화를 낼 것이 분명했다.[알겠어요, 그럼 올 때 연락해요. 나 먼저 준비하고 있을게요. 유환 씨 오면 우리 데이트해요.][그래.][그럼 내일 봐요, 잘 자요 유환 씨.][잘자.]두 글자를 찍어 보낸 임유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윤서린이 먼저 저를 찾지 않아도 어차피 내일 윤서린에게로 갈 생각이었다.흑제의 조사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하루라도 더 윤서린과 함께하고 싶었다.“여자친구예요?”그때 최서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임유환의 생각을 멈추었다.“어떻게 알았어요?”“입꼬리가 아주 하늘로 솟을 것 같은데 어떻게 모르겠어요?”임유환이 당황한 얼굴로 묻자 최서우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네?”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있던 임유
그렇게 길었던 밤이 지나고 밝아온 아침 일찍 임유환은 자연스레 눈을 떴다.“아, 어제 너무 잘 잤다.”이어서 최서우도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며 얇은 허리선을 또다시 드러냈다.최서우의 표정으로 보아 잠을 아주 잘 잔 것 같았다.그와 상반되게 울상을 짓고 있는 임유환은 자신의 앞에 드러난 예쁜 몸매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왜 그래요, 유환 씨?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요.”최서우는 섹시한 빨간 입술로 예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임유환은 왜 그러는지 뻔히 다 알면서 일부러 묻는 최서우에 눈을 흘기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화났어요?”최서우는 더 짙은 웃음을 지으며 따라 들어왔지만 임유환은 여전히 대답 없이 칫솔을 들어 이를 닦기 시작했다.조금 있다 윤서린을 만나러 가야 하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유환 씨도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었네요? 됐어요, 어제는 장난 한번 쳐본 거예요. 유환 씨가 나 도와준 게 얼만데 내가 설마 은혜를 원수로 갚겠어요?”“진짜요?”누구 하나 홀릴 듯 웃으며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렸다.“당연하죠.”최서우는 빨간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그러니까 마음 놓고 기분 좋게 여자친구 만나러 가요.”“어...”최서우의 눈 속에 가득한 웃음에 임유환은 도무지 그 말이 진짠지 가짠지 알 수가 없었다.“지금 나 못 믿는 거예요?”“아니에요, 믿어요!”그에 최서우가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임유환은 그 마음이 변하기라도 할까 봐 얼른 대답했다.“진작 그랬어야죠.”최서우도 웃으며 임유환을 밀고는 세면대에서 이를 닦기 시작했다.둘이 한 세면대를 쓰는 게 이상했던 임유환이 최서우를 보았지만 최서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계속 이를 닦았기에 임유환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세수를 했다.아무래도 둘이 한 세면대를 쓰는 건 이상한데 또 콕 집어 어디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연인 사이에서나 할 법한 일인데 그걸 최서우와 하고 있으니 이상한 것 같다.세안을 마친 둘은 윤세아가 직접
“에이, 설마요.”최서우의 생각을 모르고 있던 임유환은 들키게 되면 자신의 노력들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눈빛이 흔들렸다.“나도 모르죠. 됐어요,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요. 아무튼 유환 씨 아직 나 한 번 도와줘야 해요.”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최서우는 눈을 감았다 뜨며 하늘을 올려다봤다.“어...”그 일을 잊지 않고 언급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잠시 벙쪄있었다.“왜요, 싫어요?”“그럴 리가요!”입술을 내미는 최서우에 다급하게 부정을 하던 임유환은 무슨 일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게 아니라 며칠 뒤면 나는 S 시에 없어요.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어디 좀 갔다 와야 하거든요.”“연경에요?”“네.”“서인아 씨 만나러 가는 거예요?”“아니요.”“그럼 어젯밤 일 때문이겠네요?”고개를 젓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긴장한 채 물었다.어젯밤 통화로 언뜻 들었듯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된 엄청난 일이 있는 것 같았다.“네.”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는 임유환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그럼 조심해서 다녀와요.”최서우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어차피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이런 당부의 말뿐이었다.“알겠어요, 고마워요.”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뭘 나한테 고마워해요, 난 아무 도움도 못 되는데.”“근데 연경에는 언제 가는 거예요?”“그건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곧 갈 것 같아요.”“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요?”최서우는 혹시 임유환이 떠나기 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다시 물었다.“일주일 뒤로 생각하고 있어요.”“그럼 서인아 씨 결혼식이 있을 때네요?”“네.”“알겠어요.”잘 맞지 않는 시간에 최서우는 조금 실망한 듯 대답했다.“내가 아직 더 도울 일이 있는 거예요?”“아니요... 아, 서인아 씨랑 진짜 무슨 사이에요?”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최서우에 임유환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조효동, 너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최서우는 눈썹을 치켜뜨고 경멸 어린 눈으로 조효동을 보고 있었다.“서우야, 왜 화를 내고 그래, 나는 네가 정말 저 자식한테 속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너는 사람들이 다 너처럼 파렴치한 줄 알아?”저를 걱정하는 척 말하는 조효동에 최서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져 갔다.“서우야, 3년 전엔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나 진짜 진심이야.”“너 진짜 역겨워.”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는 조효동에 최서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했다.처음에도 조효동이 싫었지만 결혼을 한 적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더 역겨워 나 단 한순간도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내가 다 설명할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야.”이 와중에도 해명하겠다는 조효동을 시린 눈으로 노려보던 최서우가 말했다.“닥쳐. 그리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널 보는 것 자체가 내 눈을 더럽히는 일이야.”최서우의 마음속에서 조효동은 이미 나쁜 놈 낙인이 찍힌 지 오래였다.“서우야...”“서우 씨가 꺼지라잖아, 못 들었어?”최서우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들러붙는 조효동에 임유환이 입을 열었다.최서우의 앞을 막아서며 둘을 떼어놓는 임유환에 조효동이 표정을 굳히고 물었다.“네가 뭔데 감히 나랑 말을 섞어.”“네가 지금 우리 데이트를 방해하고 있으니까.”조효동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던 임유환이 내뱉는 데이트란 말에 최서우는 그냥 조효동 들으라고 일부러 한 말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간지러워 나며 달달한 느낌이 들었다.“데이트? 너 같은 게 서우 남자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말이 많은 거 보니까 어제 망신을 덜 당했나 보네.”저를 무시하는 듯한 조효동의 말에도 전혀 자극받지 않은 임유환은 여전히 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너!”하지만 임유환과 달리 쉽게 열 받은 조효동은 화가 나 소리쳤지만 이내 다시 웃으며 비아냥거렸다.“너 진짜 연기 잘한다. 어제 서우랑 아주머니 앞에서 아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