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환 씨, 내일 시간 있어요?][있는데 왜요?]임유환이 간단히 답장을 보내자 최서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문자를 보냈다.[잘됐네요 그럼!]최서우의 기뻐하는 이모티콘을 본 임유환은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매번 최서우가 저를 찾을 때면 늘 좋은 일은 없었기에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실험대상으로 삼고 저번에는 가짜 남친인 척 강준석의 파티에까지 참석해달라고 하는 사람인데 누구라도 겁을 먹는 게 당연했다.[나 아직 무슨 일이라고 말도 안 했는데 왜 그래요 서운하게.]최서우는 서운하다며 귀여운 이모티콘까지 같이 보냈다.[됐어요. 빨리 무슨 일인지나 말해요.]임유환의 어이없다는 듯한 답장에 최서우는 부탁을 하기가 망설여졌다.이렇게 저를 경계하니 부탁을 내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그래서 최서우는 임유환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며 부탁할 판을 깔기 시작했다.[시간 있으면 할아버지 병은 좀 어떤지 와서 봐줘요.]예상과 달리 할아버지 병세에 대해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안도하며 알겠다고 답장했다.[고마워요, 근데 좀 일찍 와줄 수 있어요?][그렇게 급해요?][음... 일이 좀 있어요.][할아버지 몸 안 좋아지셨어요?][아니요, 할아버지는 건강하세요.][근데 왜 이렇게 급해요?][그랬어요 내가? 그냥 할아버지 빨리 퇴원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나 봐요.][알겠어요.]임유환은 대답을 하고도 찝찝한 마음에 한 번 더 물어봤다.[진짜 다른 일 있는 거 아니죠?][아니...]최서우는 타자를 하면서도 찔리는지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 요즘 명주도 나랑 할아버지 같이 보살피고 있어요. 유환 씨 온다고 하면 좋아하겠네요. 유환 씨한테 할 말 있는 것 같던데.][조 중령님이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무슨 말이요?]임유환의 반응을 본 최서우는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일단은 임유환을 데려오는 게 우선이기에 일부러 장난스러운 문자를 보냈다.[그건 나도 모르죠. 내일 오면 다 알게 될 텐데요 뭘.]
윤서린의 예상대로 옆방에서는 김선이 귀를 벽에 가져다 대고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이상하네, 왜 아무 소리도 안 나지?”김선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윤동훈을 보며 물었다.“여보, 유환 씨랑 서린이 설마 아직도 안 해본 건 아니겠지?”“당신은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그래!”윤동훈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얼굴이 빨개진 채 김선을 나무랐다.“이게 다 서린이를 위해서지!”“유환 씨가 책임감이 좀 강해? 서린이랑 그런 쪽으로 발전하면 우리 서린이 절대 포기 안 할 거 아니야?”“그런 거 안 해도 잘해주잖아.”“당신이 뭘 알아!”김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윤동훈을 노려보며 말했다.“요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데, 유환 씨 같은 남자가 밖에 나가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달려들겠어? 서린이 생각 좀 하라고 당신은!”“됐어. 애들 일을 우리가 왜 나서. 걱정 마.”“유환 씨가 서린이 보는 눈빛만 봐도 얼마나 아끼는지 다 보이는데. 둘이 절대 안 헤어져.”“어떻게 걱정이 안 돼...”“안 되겠어. 내가 내일 서린이 좀 부추겨봐야지. 서두르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한다니까...”김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유환은 윤서린이 직접 그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절대 선을 넘지 않고 있었다.윤서린은 엄마가 엿들을까 봐 아직도 조마조마해 하며 얼굴을 붉혔다.“서린아, 얼굴은 왜 그렇게 빨개?”그 붉어진 얼굴을 본 임유환이 의아한 듯 묻자 윤서린의 눈동자가 떨려왔다.“방, 방금 씻어서... 더워서 그래요.”“에어컨 온도 좀 낮출까?”“아니에요.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래. 그럼 우리 얘기나 하자.”임유환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일 돌아가야 하니 오늘은 윤서린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그래요!”윤서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유환 씨, 이번에 연경 가면 한 달은 있어야 오죠?”“그럴 걸 아마.”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가문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봐야 했고 또 어머니의 결백을
임유환은 떨리는 윤서린의 몸을 보며 제 생각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바보, 걱정 마. 서인아 안 찾아갈 거니까.”서인아와 임유환은 이미 완전히 끝난 사이였다.서인아 그날 밤 그 말을 한 날부터 둘 사이는 이미 끝이 나버렸다.저를 다독이며 말하는 임유환에 윤서린은 난감한 듯 주저하며 말했다.“그런 뜻이 아니라...”“유환 씨, 나 너무 쪼잔하죠...”“무슨 소리야 그게.”“네가 날 얼마나 많이 봐주고 있는데, 네가 지금보다도 더 날 이해해주면 내 남자 친구 자리가 위험해질 것 같아.”그 말에 윤서린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 이내 입술을 말아 물며 낮게 말했다.“고마워요.”“뭐가?”“나 이해해줘서요.”벙찐 임유환에 윤서린이 예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그 웃음에 또 가슴이 따뜻해지는 임유환이었다.“내가 고마워해야지. 날 더 많이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건 넌데. 내가 서인아 이름 듣고 기분 나빠 할까 봐 말 못 한 거지?”“네.”“걱정 마, 나 아무렇지도 않아.”늘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알아주는 임유환을 보며 윤서린이 또 미소를 짓자 임유환도 윤서린의 눈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됐어. 늦었는데 일찍 자. 너 다크서클 장난 아니야.”“알겠어요.”아이 다루듯 달래는 그 말투에 윤서린도 고분고분하게 침대에 누웠다.불 꺼진 어두운 방에서 윤서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근데 사실 유환 씨가 서인아 씨를 만나는 것보다 정우빈 씨를 만나게 될까 봐, 나는 그게 더 무서워요...”“조심할게.”“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요.”제 머리맡에서 속삭이는 임유환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좀 된 윤서린이 마침내 잠을 청하려 했다.“잘 자요-”“너도 잘자.”...이튿날 아침.아침을 먹은 임유환은 윤서린 부모님과 윤서린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그리고 도착한 S 시 제일병원 206호 병실 앞에는 진작 마중 나온 최서우가 임유환을 반겨주었다.“유환 씨, 여기요!”“서우 씨.”임유환은 가벼운 미소를 띠
“조 중령님,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말도 제대로 안 해주고.”임유환은 조명주가 망설이는 모습이 처음이라 갑자기 불안해 났다.“별일은 아닌데, 그냥 내 말 들어요. 일단은 가지 마요.”“알겠어요...”성격상 한번 결심한 일을 뒤엎는 법은 없는 조명주이기에 임유환도 더는 묻지 않았다.“어르신, 침 좀 놔드릴게요. 이번에 침 맞고 경과 괜찮으면 바로 퇴원하셔도 될 것 같아요.”임유환은 잠시 호기심을 내려놓고 최대호를 진찰하는 데 집중했다.“하하, 잘됐네. 내가 퇴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오랫동안 병실에 있어 마침 답답했는데 드디어 나갈 수 있다는 말에 최대호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일단 누우세요.”“그래.”최대호가 임유환 말대로 가만히 눕자 임유환은 호침 8개를 꺼내 침을 놓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별 효과가 없는 듯했지만 최대호의 혈색이 점점 좋아지면서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넋을 놓고 보고 있던 조명주와 최서우도 깜짝 놀라며 아까와는 다른 눈길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조명주는 임유환이 평소에 자신이 알던 그 임유환이 아닌 것만 같았다.무력에서는 허풍이 조금 심하지만 의술은 정말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인 것 같았다.작전지역의 경험 많은 중의보다도 훨씬 뛰어난 실력이었다.도대체 스승이 누구지?“다 됐어요 어르신. 일어나서 몸 좀 움직여 보세요.”조명주가 임유환의 스승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진료를 끝낸 임유환이 최대호에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그래, 어디 보자.”“할아버지, 조심해요!”최서우가 달려가 부축하려고 하는데 최대호의 발이 이미 땅에 닿아버렸다. 그것도 아주 평온하게.“할아버지 걱정 안 해도 돼요 이제.”자신이 혼자 섰다는 생각에 너무 기뻐 난 최대호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했다.“역시 우리 신의님이라니까!”“할아버지, 혼자 걸을 수 있겠어요?”“그래!”최서우 역시 잔뜩 커진 눈으로 연신 감탄을 내뱉는 최대호를 바라보았다.그에 조명주의 눈동자도 세차게 흔들리며 임유환을 향해
병실 밖.임유환은 난처해 보이는 최서우의 얼굴에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말해요. 무슨 일인데요.”“그게... 유환 씨. 나랑 동창회 한 번만 같이 가주면 안 돼요?”“동창회요?”“최서우 씨 동창회에 제가 왜 가요?”“한번만요.”애교를 부리며 말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 속내를 간파하고는 물었다.“설마 또 남자 친구인 척하라고요?”“헤헤, 어떻게 한 번에 알아요? 한 번만 더 내 남자 친구인 척 해주면 안 돼요?”“안 가요.”최서우가 조심스럽게 하는 부탁에도 임유환은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딱 잘라 거절했다.“제발 한번만요...”“안돼요.”최서우는 임유환의 팔을 잡아 흔들며 애교를 부렸지만 그런 거에 넘어갈 임유환이 아니었다.“유환 씨도 알잖아요. 내가 또 연약한 여자라서 거기 가면 다들 나 괴롭힐 거라고요.”최서우는 눈을 최대한 불쌍하게 뜨며 임유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남자들이었으면 이미 동의하고도 남았을 모습이었지만 최서우를 잘 아는 임유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믿기지도 않는 거짓말 그만 해요.”“한 번만 가줘요... 그냥 가서 앉아있어 주기만 하면 돼요. 밥만 먹고요.”“그럼 내가 안가도 괜찮겠네요.”“그거랑은 다르죠. 아무튼 그냥 가주기만 하면 돼요. 절대 귀찮게 안 할게요. 그냥 내 옆에 앉아 있어 주면 되요.”임유환이 너무 단호하게 나오자 최서우는 일단 또 속여서 데려가기로 했다.“이젠 최서우 씨 안 믿어요. 다른 사람 알아봐요.”“유환 씨... 한 번만 가줘요. 같이 가주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요.”꿈쩍도 안 하는 임유환에 최서우는 비장의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무슨 비밀이요?”“명주에 관한 거요.”“다른 사람 프라이버시 캐묻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유환 씨랑도 관련된 거면요?”“나랑 관련 있는 거라고요? 조 중령님이 제 가족과 관계가 있나요?”임유환이 흥미가 생긴 듯 물었지만 최서우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당황해했다.“가족이요?”“아니면 됐어요.”금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전광판만 바라보던 임유환은 그제야 왜 조명주가 저에게 국제파크에 가지 말라고 했는지 알아차렸다.이 사진을 보고 속상할까 봐 그런 거였네.“서인아, 나더러 결혼식에 오지 말라고 이런 짓까지 하는 거야?”조용히 중얼거리는 임유환의 가슴 한켠이 저릿해 왔다.“이건... 서인아 씨 결혼사진이에요?”한편 뒤이어 차에서 내리던 최서우도 전광판에 걸린 사진을 보고 물었다.“서인아 씨 옆에는 정우빈 씨죠?”“정씨 집안 도련님과 서씨 집안 아가씨라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서인아와 임유환 사이도 모르고 임유환과 정우빈 사이의 다툼은 더더욱 모르는 최서우가 해맑게 말했다.그에 임유환은 눈빛이 흔들렸지만 뭐라고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유환 씨, 왜 그래요?”“아니에요.”숨까지 들이마시는 임유환에 이상함을 감지한 최서우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가만히 생각하다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혹시 서인아 씨 짝사랑했어요? 아니면 둘이 무슨 사이라도 돼요? 그래서 서인아 씨가 유환 씨를 S 시 대리인으로 지정한 거예요?”“설마... 전에 사귀었던 사이는 아니죠?”최서우는 전국에 그 많은 기업가들 사이에서 왜 하필 임유환을 대리인으로 꼽았는지 늘 궁금했었다.“그냥 평범한 소시민이 어떻게 서인아 아가씨 눈에 들겠어요?”임유환은 지난날의 본인을 비웃고 있었지만 최서우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답했다.“그렇긴 하죠.”“그리고 서인아 씨가 ‘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잖아요. 이성한테 끌리는 게 아니라 아예 혐오한다던데.”“이번에 정우빈 씨랑 하는 결혼도 그냥 정략결혼인 것 같아요.”“그만 추측하고 얼른 은행이나 가요. 좀 있다 동창회 안 갈 거예요?”임유환은 최서우의 말을 끊으며 대하 은행 본부 쪽으로 걸어갔다.“뭘 그렇게 급하게 가요! 같이 가요!”최서우는 빠르게 걷는 임유환을 쫓아가며 투덜대기 시작했다.“설마 진짜 서인아 씨 짝사랑 한 거예요?”“뭐 그렇게 대단한 분인데 안 좋아하는 것도 이상하네요.”“남자들은 다
대하 은행 S 시 본부.임유환이 은행으로 들어가 번호표를 뽑는 동안에도 최서우는 끊임없이 물어왔다.“유환 씨, 왜 그렇게 빨리 가요! 설마 진짜 서인아 씨 짝사랑 한 거예요?”“최서우 씨, 동창회에 내가 같이 가줘야 하는 거 맞죠?”그에 임유환이 동창회를 빌미로 협박하자 최서우는 그제야 입을 다물며 웃어 보였다.“알겠어요, 말 안 할게요.”이런 가십거리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최서우에 임유환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그런데 유환 씨, 우리 병원 옆에도 대하 은행 지점 있는데 현금 필요한 거면 거기서 뽑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여기까지 왔어요?”“좀 많이 필요해서요.”“얼마나요?”“2천억이요.”“아, 2천억... 네? 얼마라고요? 2천억이요?”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다 정신이 번쩍 든 최서우가 입을 틀어막고는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임유환을 바라보고 있었다.2천억이나 현금으로 뽑겠다니!“유환 씨, 장난이죠? 2천억이나 뽑는데 미리 예약 안 해도 돼요?”최서우는 이내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지만 임유환은 웃었다.임유환은 블랙 골드카드 소유자로서 어느 은행에서 돈을 찾든 예약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지점에는 그만한 현금이 없었기에 본부까지 온 것뿐이었다.“진짜요? 유환 씨 설마 뭐 재벌 2세 그런 거예요?”2천억이나 되는 큰돈을 아무렇지 않게 뽑는 임유환이 신기해 난 최서우가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아니에요.”“그럼 재벌 1세? 도대체 뭔데요?”임유환이 고개를 젓자 더 궁금해진 최서우가 되물었지만 임유환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채 뒤를 돌았다.“진짜 쪼잔하게 그럴 거예요? 좀 알려줘요!”하지만 한번 호기심이 동한 일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최서우는 애교까지 부리며 계속 물었다.“어머, 이게 누구야? 최서우 아니야? 우리 퀸카시네. 뭐 남자라도 하나 들였어? 요즘은 기생오라비 좋아해?”그때 로비에서 갑자기 최서우를 향한 한 여자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몸에 완전히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조롱 가득한 말에 최서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서지혜와 똑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자신을 자극해오는 서지혜에 최서우가 언짢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난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차가워진 최서우의 표정에 서지혜는 어깨를 으쓱이며 옆에 서 있던 제 남자친구를 최서우에게 소개해주었다.“여긴 내 남자친구 서윤후야. 기억 안 나지?”“서윤후? 그때 젤 뒤에 앉던 그 서윤후?”“그래.”최서우는 의외의 이름에 깜짝 놀라 눈동자가 흔들렸다.하지만 최서우가 놀란 건 그의 높아진 신분이 아니라 몇 년 사이에 예전의 검은 피부에 포동포동하며 수업시간에 잠만 자던 서윤후가 이렇게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서지혜와 사귄다는 사실이었다.“오랜만이야, 서우야.”제 첫사랑을 본 서윤후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고등학교 때는 제가 준 고백편지를 많이 거절했지만 지금 이렇게 성공하고 얼굴과 몸매도 많이 바뀐 저를 보면 조금은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어쩌면 오늘 동창회 이후로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안녕.”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서윤후와 달리 최서우는 서윤후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 감정도 없었기에 옅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받아주었다.서윤후는 그런 최서우의 마음도 모르고 저를 자랑하기에 바빴다.“서우야, 남자친구랑 같이 돈 찾으러 온 거야?”“응. 같이 왔어.”“잘됐다. 동창회까진 아직 시간 남아서 지혜한테 카드 만들어 주러 왔거든. 매달 돈 보내주면 주말에 친구들이랑 시간 보낼 때 쓰라고.”“그래? 지혜는 좋겠네.”“자기야, 그런 말은 왜 해. 서우가 우리 부러워하잖아.”그때 서지혜가 서윤후의 말을 끊으며 조롱하듯 말했다.“혹시 서우가 자기 돈 보고 또 유혹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자기랑 나 사이 이간질해서 자기 내 옆에서 데려가려고 그럴까 봐 나 무서워.”“은행도 우리랑 우연인 척 마주치려고 일부러 온 걸지 누가 알아?”“하하하, 그래?”서윤후는 서지혜가 한 말들이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