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 씨, 나 그렇게 보지 마요... 난 그냥 평범한 시민이에요...”자신을 심문하듯 바라보는 조명주에 임유환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시민 좋아하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조명주는 임유환을 전혀 믿지 못하고 날카롭게 뜬 삼백안으로 임유환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내가 아까 본 게 맞다면 육해공 삼군이 다 출동했죠 방금?”“평범한 시민이 그런 힘이 있을까요?”“말할게요... 사실은 내가... 호패 소유자예요.”더이상 속일 수 없다 판단한 임유환은 마침내 사실을 털어놓았다.조명주도 작전 지역 사람이니 그에게 알려주는 건 기밀 누설로 칠 순 없었다.그리고 무엇보다 임유환은 조명주가 이 비밀을 지켜줄 만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유환 씨가 호패 소유자라고요?”작전 지역 중령으로서 호패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조명주도 여느 사람들처럼 깜짝 놀란듯한 반응을 보였다.호패의 권력은 연경 작전 지역 총사령관보다도 더 큰 것이었기에 대통령 바로 아래에 위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근데 그런 사람이 임유환이라니!나이로만 따져 보아도 절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조명주 기억 속의 호패 소유자는 총사령관처럼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었기에 당연히 임유환을 믿지 못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불신의 태도를 보였다.“거짓말 좀 그만 해요! 어떻게 사람이 사실대로 말을 할 때가 없어요!”“저번에는 본인이 세계 제일 갑부고 군정계의 수장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호패 소유자라고요?”“내가 설마 그분도 뵌 적이 없을까 봐요?”“그분은 분명히 총사령관님과 비슷한 나이의 어르신이었다고요!”“근데 제 말도 다 사실이에요.”임유환은 호패의 현 소유자였고 또 군정계의 수장이자 세계 제일 갑부였다.조명주가 기억하는 그분은 아마 임유환의 스승님일 것이다.“그럼 유환 씨 옆에 서서 계신 분은 세계 두 번째 부자예요?”조명주는 흑제를 힐끗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소리쳤다.아까는 임유환을 걱정한다고 검은 코트의 남자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분이
‘왜 저한테 그러세요 주인님...'흑제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켜내며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조명주를 보며 말했다.“임유환 씨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비즈니스 파트너에요.”“비즈니스 파트너요?”임유환이 사업을 한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조명주가 눈을 크게 뜨며 임유환을 한 번 바라보았다.“네. 그래서 그동안 정도 많이 쌓였죠.”“그다음은요?”흑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명주가 바로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같이 사업도 했는데 왜 망했어요? 흑제 어르신과 같이할 정도의 사업이면 그 규모가 꽤 컸을 텐데 저는 들어본 적도 없거든요.”“그건...”훅 들어온 조명주의 날카로운 질문에 흑제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그다음엔 부도났어요.”그때 임유환이 나서며 흑제를 도와주었다.“부도요?”“네.”“아, 그래서...”잠시 놀라던 조명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자 임유환이 의아한 듯 물었다.“그래서라뇨?”“그래서 내가 못 들어본 건가 싶어서요.”“아니면 허세 부릴 줄밖에 모르는 임유환 씨가 이 말을 저 볼 때마다 했겠죠.”“하하...”제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는 조명주에 임유환은 애써 올린 입꼬리가 떨려왔다.“조 중령님 눈에는 제가 그렇게 허세에 쩐 사람으로 보였어요?”“당연하죠!”“근데요, 유환 씨도 좀 대단하긴 해요. 흑제 어르신과 같이 사업도 해봤잖아요.”“이건 칭찬이죠?”조명주의 말은 항상 종잡을 수 없었기에 임유환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네, 칭찬 맞아요.”“사업은 망했어도 그 용기는 대단해요! 사람이 용기 하나만 있으면 됐죠 뭐.”“하하, 칭찬 고마워요.”조명주의 어설픈 칭찬에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아 그리고 강씨 집안이 어떻게 죽은 건지는 왜 안 알려줘요?”조명주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며 진지하게 물어왔다.“그 얘긴 가면서 해요.”“좋아요.”아직 윤서린이 마음에 걸렸던 임유환이 가면서 얘기하자고 제안하자 조명주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 사람들은... 서씨 집안 호위군인데?”임유환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던 조명주의 눈이 커지며 눈썹까지 따라 올라갔다.왜 서씨 집안 호위군이 여기 있는 거지?조명주가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임유환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환 씨! 잠깐만요!”미간을 찌푸리던 흑제와 조명주도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부 통솔자님, 임유환이 우릴 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갈까요?”저들한테 다가오는 임유환을 본 부하의 눈빛이 흔들렸다.임유환을 도와주라는 명을 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껏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으니 서인아가 알게 된다면 벌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하하, 괜찮아. 올 테면 오라지. 마침 나도 전할 말이 있었는데.”김우현은 웃으며 부하를 제지했다.하지만 임유환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건 의외였다.아까 경계선 밖으로 쫓겨나다 보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조명주와 함께 오는 걸 보니 그녀의 도움을 받은 듯했다.그리고 아까 그 군대는 조명주가 P 시 작전지역에서 데려온 것 같았다.할아버지가 P 시 작전지역 총사령관이니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별 볼일도 없는 자식이 여자 복은 있다니까.김우현은 질투 가득한 눈으로 임유환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그때 임유환이 마침 김우현 앞에 멈춰 섰다.임유환은 반짝이는 김우현의 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김우현 씨, 오랜만이네요.”김우현은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우리가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김우현은 임유환이 제가 서씨 집안 호위군 부 통솔자라서 일부러 친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임유환보다는 한참 높은 신분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느꼈다.“김우현 씨,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임유환은 우쭐거리는 김우현에 턱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뭐?”임유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린 김우현이 되물었다.임유환은 고개를 젓다가 더는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갑자기 S 시엔 무슨 일이에요?”“내
임유환의 말에 정곡이 찔린 김우현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김우현은 임유환을 질투하고 있었다.저는 갖은 노력을 다해도 서인아의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반면 임유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서인아가 걱정해주고 있으니 어떻게 질투가 안 날까.하지만 서인아의 마음이 아무리 임유환에게 향해있다 해도 서인아는 어차피 정우빈과 결혼할 운명이었다.그래서 김우현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내가 너를 질투한다고?”“아니에요?”담담하게 말하며 웃는 임유환의 모습에 김우현은 말아쥔 주먹에 힘을 주고는 임유환을 노려봤다.보잘것없는 놈이 운 하나로 서인아의 총애를 받아놓고서 이렇게 평온하게 웃고 있으니 더 꼴 보기가 싫었다.“아가씨가 널 지켜준다고 내가 정말 너한테 손 못 댈 것 같아?”김우현은 이를 악물며 임유환에게 이글이글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내가 너 죽이려고 들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죽이는 것처럼 쉬워.”“그래요?”임유환은 그런 김우현을 보고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이번의 미소는 어딘가 시린 느낌이 있었다.“그럼 어디 한 번 죽여봐요, 김우현 부 통솔자님.”저번에 끝을 보지 못한 승부를 오늘 판가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그래, 그럼 죽여줄게!”임유환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제대로 열이 받은 김우현이 소리를 질러댔다.여자한테 빌붙을 줄밖에 모르는 찌질이를 오늘 죽이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김우현은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어차피 서인아는 연경에 있으니 이 사실을 알 리 없고 만약 알았다 해도 제 뒤를 봐주는 사람이 정우빈이니 걱정할 게 없었다.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먹을 불끈 쥔 김우현은 오늘 입만 나불대는 임유환에게 남자의 진짜 실력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 줄 작정이었다.김우현이 제 앞에서 주먹에 힘을 모으고 있는 걸 보면서도 임유환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고고할 수 있나 어디 두고 봐!”그 모습에 약이 바짝 오른 김우현이 몸을 앞으로 뻗으며 주먹을 휘두르려 한 그때, 조명주가 나서며 소리쳤다.“김우현 씨, 이게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임유환의 한마디에 바로 열 받은 김우현이 분한지 코를 벌름거리며 씩씩댔다.“왜요, 내 말이 틀렸어요?”임유환은 여전히 평온하게 펄쩍 뛰는 김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조 중령님 있다고 내가 정말 널 못 건들 것 같아?!”김우현은 임유환을 보며 주먹을 우두둑 소리가 날 때까지 꽉 쥐었다.“난 지금 당장이라도 널 가루로 만들 수 있어!”“그렇게는 못 할 것 같은데.”임유환이 턱을 매만지며 내뱉은 말에 김우현은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그리고 온몸을 떨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끊어 말했다.“우리 아가씨만 믿고 까부는 놈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임씨 가문의 버려진 아들이니까 천한 신분인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뭐 그래서 남한테 빌붙는 거라면 이해할 게 내가.”제 어머니를 들먹이는 말에 임유환의 몸이 얕게 떨려오더니 표정까지 굳어버렸다.“왜, 네 상처를 건드렸나?”그에 김우현은 더 득의양양해졌다.“김우현 씨, 그만 해요!”조명주가 소리쳐도 김우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하하, 조 중령님, 이건 다 사실이잖아요.”“입 닥치고 당장 부하들 데리고 돌아가요. 그게 싫으면 길거리 패싸움으로 나랑 같이 작전지역까지 가든가.”남의 상처만 골라서 건드리는 김우현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조명주가 단호하게 말했다.“하하, 지금 갈게요.”시선을 내리깐 채 말이 없는 임유환에 아까의 공격이 정확히 먹혀들어 간 것 같아 왠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김우현은 조명주의 호통에도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넌 평생 찌질이로 여자 뒤에 숨는 게 가장 잘 어울려.”“내 말 잘 기억해둬. 기분 나쁘면 킹더베이 호텔에서 십일 뒤에 열리는 아가씨와 도련님 결혼식에 참석하든지.”“근데 그날은 오늘처럼 운이 좋진 않을 거야.”“조 중령님이 아니라 서인아 아가씨라도 널 감싸주지 못해.”“가자!”말을 마친 김우현은 손을 저어 부대를 이끌고 자리를 뜨려 했다.“잠깐.”그때
“나랑 따로 얘기하고 싶다고? 너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여자에게 빌붙어 다니는 찌질이가 저에게 독대를 청하니 어이없어진 김우현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왜요, 혹시 무서워요?”하지만 임유환도 지지 않고 조롱 섞인 얼굴로 김우현을 바라봤다.“네가 정말 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는구나!”김우현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내가 오늘은 좀 봐줄까 했는데, 넌 안 되겠다. 제 무덤을 제가 파는 성격이네. 그럼 오늘 네 뜻대로 해줄게.”임유환이 독대를 청한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김우현도 바라던 바였다.“김우현 씨, 제발 그런 말 좀 안 할 순 없어요?”임유환이 이성을 좀 잃은 듯 보이자 조명주는 김우현을 나무랐다.“조 중령님, 이건 저놈이 먼저 제안한 거예요. 제가 그러자고 한 게 아니라니까요.”“김우현 씨!”억울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김우현에 조명주는 화가 나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일부러 임유환 어머니를 언급하여 일을 크게 만든 게 누군데.“김우현 씨, 가요.”그때 임유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김우현을 재촉했다.“그래!”임유환 눈빛의 섬뜩함을 느끼지 못한 김우현은 기다렸던 순간이 곧 온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유환 씨, 흥분하지 마요!”조명주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둘에 초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임유환은 조명주의 그 눈길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면서도 진지하게 말했다.“조 중령님이 내 걱정하는 거 알아요.”“근데 어머니가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들은 정말 무능한 거 아니에요?”“조 중령님도 제가 무능한 사람으로 남길 원하진 않잖아요.”“그리고 김우현 따위는 저한테 아무것도 아니죠.”가볍게 내뱉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임유환은 먼저 수림으로 들어갔다.한편 임유환의 말을 듣고 조명주는 자리에 굳어버렸고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방금 한 말은 임유환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평소에 알던 임유환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너희들은
그 말에 김우현이 잔뜩 작아진 동공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자 그제야 어두워진 그의 얼굴을 알아차렸다.“나는 정말 네가 어디서 나온 자신감으로 나한테 이런 말들을 하는지 모르겠어.”“근데 내가 하나 충고하는데, 넌 우리 아가씨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아가씨가 대체 너 같은 놈 뭘 보고 좋아하는지 모르겠어.”“곧 알게 될 거야.”임유환은 한기를 뿜는 눈으로 김우현을 노려보았다.하지만 서인아 때문이 아니라 제 어머니를 모욕한 것 때문에 나온 표정이었다.“그래?”김우현은 이를 악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임유환을 바라보았다.“좀 있다 무릎 꿇고 빌지나 마!”“하하, 네가 날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말을 하며 웃는 임유환에 김우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이게 진짜!”김우현이 화를 내며 내뿜은 진기에 주변의 공기에까지 그 떨림이 전해졌다.무왕 중기?김우현이 보여준 실력에 임유환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무도는 실력에 따라 수련자, 무사, 무왕, 무존, 무제, 무성이라는 여섯 가지 경계로 구분되는데 매 경계 안에서도 실력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 등 세 가지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다.전하는 말에 의하면 무성 위에도 무신이라는 경계가 하나 더 있다고 하지만 5천 년 동안 무신은 나타난 적이 없어서 그저 전설 같은 존재였다.일반적으로 무왕 정도면 고수라 칭해졌다. 주먹 하나로 소를 때려죽일 수 있고 온 힘을 다하면 바위도 산산조각낼 수 있었다.김우현이 어린 나이에 그런 경지에까지 올랐으니 또래들 사이에서는 손꼽히는 인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임유환을 무릎 꿇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그런 임유환의 생각을 모르는 김우현이 제 실력을 보여주고 마치 자신에게 도취된 듯 고개를 치켜들며 긴 숨을 뱉어냈다.그리고는 임유환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전에 파티에서 아가씨가 계시니까 내가 온 힘을 다하지 않았던 거야. 한 30% 정도 보여줬나? 그래서 네가 자신감이 붙은 건가?”“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운이 좋진 않을 거야.”“하하, 그래?”임유환은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김우현이 어느새 제 코앞까지 다가온 임유환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얼굴은 늘 그렇듯 평온하여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제 주먹이 잡힌 순간, 김우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김우현, 쓸데없는 소린 다 지껄인 거야?”임유환은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김우현을 보고 있었다.아까 주먹을 잡지 않은 건 김우현의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속도는 느리고 보폭은 엉망인 채 숨도 고르지 못한 모습에 그만 관찰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버렸다.이런 무왕은 외부수단이 있어야만 제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기에 임유환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그래서 이 지루한 장난을 끝내려고 마음먹은 것이다.“이 새끼가!”임유환에게 도발 당한 김우현은 번뜩이는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어쩌다 주먹 한 번 잡은 것 가지고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지마!”“어쩌다 한 번?”임유환이 낮게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그럼 빨리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든지, 아니면...”“좀 있다 내가 널 죽여버릴 것 같아서 그래.”검은 눈동자에 드러나 있는 한기에 김우현은 눈동자가 확 작아지며 심장까지 빠르게 뛰어 온몸이 떨려왔다.“그래!”“나한테 이런 말을 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김우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렇게 애써 더 강하게 밀어붙여 그 기분 나쁜 한기를 떨쳐내려 했다.그리고 말을 마친 김우현은 표정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더니 이번에는 더 강한 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그리고 순식간에 임유환의 주먹을 풀어냈다.임유환도 딱히 쥐고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냥 풀리게 두었다.그 반동에 김우현이 5m 밖으로 나가떨어졌다.몸에서 나오는 진기에 김우현의 옷가지와 머리카락이 방향을 잃고 흩날렸다.김우현은 임유환을 보며 표정을 잔뜩 굳히고 말했다.“그래, 너 어느 정도 실력 있는 건 알아. 근데 고작 그 정도로는 내 인정을 받을 자격이 없어.”“자격?”임유환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고개를 들어 김우현을 바라보았다.“네가 뭐하나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