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강호명은 임유환을 보며 깊고 속내를 알 수 없던 눈에 분노를 드리운 채 말했다."다시 한번 경고하지. 축하하러 온 거면 환영이야. 하지만 만약 소란을 피우러 온 거라면 나도 가만있진 않겠네.""가만있지 않아?"임유환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차가운 눈을 강호명에게 고정한 채 물었다."강씨 집안에서 당신이 실세야?""그래."강호명의 낮은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임유환이 그를 향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식구들 데리고 우리 엄마 별장에서 나가."임유환은 문을 가리키며 강호명에게 나가라고 했다.그 말을 들은 별장 안의 모든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임유환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다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탓에 고요해진 별장 안에서 강호명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뭐?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임유환을 바라보는 강호명의 표정은 우뢰가 치는 하늘의 구름마냥 어두워져 있었다."당연히 알지."임유환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강호명을 보며 말했다."나는 우리 엄마 별장을 찾으러 온 것뿐이야.""네 엄마?""그래."눈썹을 꿈틀거리며 묻는 강호명에 임유환은 여전히 차갑게 대답했다."어머니 성함이 뭐야?""고하연.""고하연?!"강호명은 고하연이라는 이름에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반응 보니까 아는 이름인가 보네."강호명의 반응을 보자 임유환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후..."강호명은 깊은숨을 내쉬고 주위의 손님들을 향해 말했다."미안하게 됐어요 다들. 오늘 밤은 다들 봤다시피 개인적인 원한으로 이 친구랑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연회는 이만 마무리하죠.""다시 초대하겠습니다.""어르신, 뭐 이런 거로 사과를 다 하십니까!""얼른 일 보세요. 저흰 먼저 가볼게요."다들 하나둘 별장을 빠져나가면서 나가는 사람마다 임유환을 한 번씩 보며 고개를 저었다.도대체 무슨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는 몰라도 하필 강호명의 생일
별장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다들 놀란 눈을 하고 임유환을 바라보았다.들어올 때부터 이상한 놈인 건 알았지만 감히 강씨 집안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망언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이 자식! 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아?”강씨 집안 사람들의 호통이 잠깐의 정적을 깨며 들려왔다.“네가 간이 부어도 제대로 부었구나. 감히 그런 말을 다 하고!”“내가 너부터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줄게!”“이리와. 내가 다신 그 입 함부로 못 놀리게 때려줄 테니까.”“다들 조용히 해.”소란스러운 목소리들 사이로 위압감 있는 낮은 강호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시 조용해진 별장 안에서 강호명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는 못마땅한 듯 임유환을 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여기서 얻고 싶은 게 뭐지?”“첫째, 그때 우리 엄마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말해. 알아, 너희들이 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그리고 둘째, 우리 엄마 집에서 나가.”임유환은 얼버무리는 것 없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끊어 말했다.그 말을 들은 강호명의 표정이 더 굳어져 갔다.강호명이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들은 명령인데 그 상대가 하필 임씨 집안의 버려진 아들인 것에 자존심이 상했었다.“네가 정말 임영그룹 도련님이라도 되는 줄 알아?”강호명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지금의 넌 그저 임씨 집안의 버려진 아들일 뿐이야. 오늘 온 게 설령 네 아버지라 해도 우리 강씨 집안한테 이렇게 함부로 할 순 없어.”“너희들 배후가 정씨 집안이야?”임유환은 덤덤하게 강호명을 바라보며 말했다.“다 알고 왔나 보네. 그럼 언행에 더 주의를 해야 할 텐데. 너도 들어서 알 서 아니야, 정씨 집안이 연경 그리고 대하에서 어떤 위친지.”강호명은 어디 건드릴 수 있으면 건드려 보라는 태도로 천천히 말했다.정씨 집안이 뒷배로 있는 한 대하에서는 그 누구도 강씨 집안을 함부로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그게 네가 믿는 구석이구나.”임유환은 표정 변화 하나
“부대를 데려와?”“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저 자식 지금 소대 하나 데리고 오라고 했지?”“뭐야, 지가 소령이나 중령이라도 되는 줄 아나?”“그냥 뭐 좀 있는 척 가오 잡는 거야.”소대를 데리고 오라는 통화를 마친 임유환을 강씨 집안 사람들은 조롱 섞인 눈으로 보며 웃어댔다.임씨 집안에서 버림받은 아들이 뭐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뭐 지금 우리 겁주는 거야?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지. 우리가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갈 것 같아?”“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부대를 부를 것이지 왜 소대를 부른대?”“너희들을 상대하는데 부대면 병력 낭비야.”임유환은 덤덤히 강씨 집안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맞장구 좀 쳐주니까 신났네?""우리가 지금 너 놀리는 거야. 모르겠어?"임유환의 보는 강씨 집안 사람들 얼굴의 조소는 마치 광대를 구경하듯 점점 더 짙어졌다."허!"강호명의 얼굴에서 가소로움이 스쳐 지나갔다.강호명 눈에 임유환은 소대는커녕 분대의 한 조도 움직일 힘이 없는 임씨 집안의 버려진 아들일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임씨 집안에서 버림받지도 않은 일이었다."웃고 싶으면 지금 많이 웃어둬. 나중에는 기회도 없을 테니까."임유환은 천천히 저를 비웃는 듯한 얼굴들을 훑으며 차갑게 말했다. 마치 마지막 심판을 내리기 전 자비를 베풀듯이.오늘 강씨 집안에서 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강씨 집안이 존재할 이유도 없었다."이런 방자한 놈!"강씨 집안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또 열을 올리며 얼굴을 붉혀댔다."아버지, 더 이상 못 들어주겠어요. 빨리 저놈 치워요."임유환의 망언을 정말 1초도 더 들어줄 수 없었던 둘째 아들 강한권이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잠시만."그때 강호명이 아들을 제지하며 비열하게 웃고는 말했다."소대 하나 데려온다잖아. 5분만 기다렸다가 오나 안 오나 보지 뭐. 그러다 안 오면 그때 팔다리를 부러뜨려도 안 늦어.""하하, 그러네요. 아버지
“이...이중령!”강씨 집안 사람들은 낯빛이 파래진 채 군복을 입은 이민호를 보고 몸을 떨어댔다.임유환이 정말 S 시 작전지역에서 소대를 불러들인 것도 믿기 어려운데 그 소대를 이끌고 등장한 사람이 무려 이 중령이라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분명히 임씨 집안의 버려진 아들인데 어디서 이런 인맥을 쌓은 거지? 임유환은 차가운 표정으로 놀라 자빠진 강씨 집안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이젠 우리 엄마 집에서 나갈 수 있겠어?"목소리에는 아까처럼 굳이 힘을 싣지 않았지만 소대를 대동한 채 말하는 그 위압감은 강씨 집안 사람들을 누르기엔 충분했다.강호명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나갈... 나갈게. 지금 바로 나갈게."머리에 겨눠진 총구 앞에서 누가 감히 거절 의사를 내비치겠는가."잠깐만."임유환은 아직 할 말이 있는 듯 강호명을 불러 세웠다."유... 유환 씨, 무슨 더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강호명은 얼굴에 경련이 일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때 우리 어머니를 죽인 일에 정씨 집안도 가담했어?"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는 임유환에 강호명은 떨리는 입으로 대답했다."모... 모릅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진짜야?""진짭니다. 임유환 씨, 이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요!"임유환이 가까이 다가오며 강호명을 노려보며 질문하자 강호명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애써 대답했다.말이 끝나고도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강호명은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아 길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입을 열었다."유... 유환 씨, 저희가 정씨 집안과 가깝게 지내는 것은 강씨 집안이 원래 P 시에서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집이라 정씨 집안 눈에 들어서 저희도 감히 거절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가까이 지내는 것뿐입니다.""그리고 이 집은... 제가 그때 어떤 이름 모를 중개인에게서 돈을 엄청나게 주고 사들인 것입니다.""유환 씨, 그날 어머님의 죽음은 정말 저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돈을 주고 샀다고?"임유환은 눈썹을 꿈틀거리더
"아버지, 일단 이 사실을 정씨 집안에 알리죠."강한권은 덜덜 떨며 강호명을 향해 말했다.지금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정씨 집안에서 나서야만 해결될 것 같았다."죽고 싶어?"강호명은 강한권을 노려보며 말했다."오늘 일이 정씨 집안 귀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하는 건 우리야! 그 사람들은 우리 입을 막기 위해서 죽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고!""하지만 아버지, 정씨 집안에서 나서지 않으면 우린 임유환의 상대조차 되지 않아요. 3일 뒤면 그 중개인을 찾아와야 하는데 그걸 해내지 못하면 죽는 건 똑같아요."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던 강한권이 얼굴이 점점 더 질려갔다."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강호명은 화를 내며 소리쳤다."임유환은 작전지역 사람이야. 그리고 우리도 마침 P 시 작전지역 친척이 있잖아. 우리 쪽 사람은 원수라고.""설마... 안지용 원수 말씀하시는 거예요?"강한권은 단번에 강호명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다."그래.""하지만... 안지용 원수는 큰형 처가댁 사람인데, 우리를 위해서 작전지역 사람과 척을 지려 할까요?"강한권은 불안한지 물었다."강씨 집안이 위험한데 모른 척은 하지 않을 거야. 어찌 됐든 강씨 집안 일가친척이고 우리 준석이 삼촌 아니냐."강호명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일단 이 일을 안지용 원수에게 알려. 그리고 우리 대신 임유환 뒷조사부터 부탁한다고 해. 그놈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뭐든 할 거 아니야.""네, 아버지."강한권은 사람을 시켜 바로 안지용에게 연락을 했고 그쪽에서도 바로 답장이 왔는데 작전지역에는 임유환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임유환은 애초에 작전지역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이놈이 우리 가지고 논 거였어!"작전지역에 임유환이라는 사람이 없다는 말에 강씨 집안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전지역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토록 겁을 먹을 일도 없었다."하지만 아버지, 그 자식이 작전지역 사람도 아닌데 왜 이 중령이 그 자식 말을 들어요?"강한권이 의
"유환 씨, 제가 보기엔 강씨 집안 사람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별장 문 앞에 다다른 이민호 넌지시 말을 건넸다."알아요."임유환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럼 왜 3일이라는 시간을 더 준 겁니까?"이민호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지금 어머니 죽음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이 강씨 집안 밖에 없잖아요. 그게 제일 빠른 길이고요."말을 하는 임유환의 눈에 결의가 차오르고 있었다.그날의 일은 이미 하도 오랜 일이라 흑제를 시켜 찾아왔어도 줄곧 진전이 없다가 간신히 찾게 된 실마리가 강씨 집안 하나인데 놓칠 수가 없었다."알겠습니다.""이 중령님, 오늘 신세가 많았습니다."임유환은 고개를 끄덕이는 이민호를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뭐 별일도 아닌데요. 앞으로도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이민호는 호패 보유자인 임유환에게 부름을 당할 수 있단 사실이 영광스러울 뿐이었다.호패 보유자란 대하 작전지역 최고 권위자로서 그 어느 작전지역의 부대든 마음대로 움직일 권한이 있는 사람이었다.그리고 다들 우러러보는 흑제 어르신도 임유환의 부하에 불과했다.하지만 이 일은 절대 밖으로 누설해선 안 되는 기밀이었고 작전지역의 일원인 이민호는 더 입을 다물어야 했다."그래요 이 중령."임유환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이민호는 소대를 데리고 작전지역으로 복귀했다.이민호가 떠나고 난 뒤, 임유환은 고개를 들어 파란 하늘을 바라봤는데 마치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엄마!"임유환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어머니 것이던 것들 제가 다 찾아올게요.""그리고 임씨 집안이 우리한테 진 빚들도 제가 다 받아낼 거에요.""그날까지 얼마 안 남았어요!"마음속으로 엄마를 향해 다짐한 임유환이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데 그때, 별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서우가 이미 혼비백산하여 손톱까지 물어뜯고 있었다.파티에 참석했던 손님들은 나가지, 경호원들은 문을 걸어 잠그지, 그리고
"그 소대가 정말 유환 씨가 불러온 거였다고요?"최서우는 입을 틀어막으며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후..."여러 번 숨을 들이마시고서야 진정한 최서우가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임유환을 보며 물었다."임유환 씨 도대체 정체가 뭐에요? 어떻게 중령이 유환 씨 말 한마디에 와요?"아까 최서우가 제대로 본 게 맞았다면 소대를 이끌고 등장한 사람은 S 시 작전지역 중령 이민호였다."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고요... 그냥 서인아 씨 영향력 덕분이죠."임유환은 잠시 멈칫하다 말했다."서인아 씨 덕분이요?"최서우는 갑자기 들리는 서인아의 이름에 다시 놀라며 물었다."네, 말했잖아요. 서인아 씨가 나를 S 시 대리인으로 선정했다고요. 그때 서인아 씨 덕분이 이 중령님과 만나게 된 거예요. 이 중령님도 서인아 씨 봐서 나와 준거죠.""아 그런 거였어요?"최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유환을 바라봤다."근데 도대체 강씨 집안과는 무슨 원한이 그렇게 깊어서 군대까지 대동한 거예요?""하하, 원한이 있긴 하죠."임유환은 웃으며 대답했다."엄청 깊은 원한이에요?"계속 물어오는 최서우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네."임유환은 고개를 끄덕였다.강씨 집안에서 인정하진 않았지만 임유환은 그날 어머니의 죽음이 강씨 집안과도 상관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리고 제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은 그게 누구라도 용서치 않겠다고 임유환은 다짐했다."강씨 집안에서 복수할까 봐 무섭지는 않아요?"최서우는 계속해서 물어왔다."안 무서워요.""뭐 대책이라도 있어요?""최서우 씨는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한 거예요?"최서우가 자꾸 무언가를 알아내려 하는 듯한 느낌에 임유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게... 사실은 임유환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뭔데요?"최서우 자신마저도 말하기 어려워하는 부탁이라면 뭐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임유환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최서우를 바라
"그래서 뭐 어떻게 된 건데요?"최서우가 분명 아직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을 것 같아 임유환은 몸을 돌려 최서우를 바라봤다."사실 강 어르신 손자 강준석이 오래전부터 저한테 계속 만나자고 여자친구 해달라고 귀찮게 굴었거든요. 이번 파티도 저를 위해서 연 거래요. 제가 여러 번 거절했는데도 계속 이러니까...""그래서 내가 남친인 척을 해서 강준석을 거절해 달라?""네."임유환의 말에 최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냥 파티에 안 가면 되는 거 아니에요?""나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강준석이 파티도 날 위한 거라고 몇 번이나 꼭 참석하라고 했는데...""제가 안 가면 얼마나 꼴이 우스워지겠어요. 상대는 P 시 최고 명문가인 강씨 집안 3세인데 저는 그냥 여자일 뿐이잖아요. 그리고 강준석 성격 더러운 거 유환 씨도 알잖아요. 그 뒷감당을 제가 어떻게 해요...""그리고 제 가족들도 이 일로 힘들어질까 봐 무섭기도 하고요."말을 하는 최서우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그런 거였군요."임유환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진작 이렇게 말하지 그랬어요.""유환 씨가 싫다고 할까 봐 그랬죠."최서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나 속여서 데려가면 내가 도망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도망 안 갈 거잖아요."임유환이 장난을 치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묻자 최서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나를 그렇게 믿어요?""네."임유환의 질문에 최서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더 실망하게 하면 안 되겠네요.""그럼 같이 가주는 거예요?"임유환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하자 최서우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도와주는 건 가능한데, 대가가 있어야겠죠?"임유환은 최서우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으며 이 단순한 여자를 한 번 놀려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전에 병원에서 그렇게 저를 놀려 대 상처까지 다시 벌어지게 했는데 이번에서야 그 복수 아닌 복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뭘 원하는데요?"임유환의 눈을 보며 최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