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눈으로 확인했어?”임유환이 중얼거렸다.그의 눈빛 깊은 곳에는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저 녀석, 진짜 얄미워.”조명주는 떠나가는 정우빈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하지만 그녀도 정우빈을 어찌하지는 못했다.필경 상대의 신분도 만만치 않으니까.“방금 다치지 않았죠?”그녀는 뒤돌아서서 임유환에게 물었다.“아니요.”임유환의 눈가에 냉기가 사라지더니 대답했다.“그런데 정우빈 저 녀석, 목숨 하나 건졌네요.”“정우빈이 목숨을 건졌다고?”조명주가 멈칫하더니 의아한 눈길로 임유환을 쳐다봤다.“조 중령님, 만약 조 중령님께서 안 오셨으면, 저 녀석 이미 죽었을 거예요.”임유환의 말투는 이야기를 서술하듯 평온했다.“큰 소리 치기는, 만약 이 중령이 제때 오지 않았으면 정우빈한테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을 거예요.”조명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근데 간도 크지, 어떻게 감히 정우빈과 맞짱 뜰 생각을 했대요.”설사 정우빈 그 녀석이 사람 됨됨이가 덜되긴 했어도, 그럴만한 힘이 있다는 건 조명주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의 정우빈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미 상위 50위 안에 드는 존재였다.이런 재능은 어느 나라에서든지 귀신같은 존재였다.그에 비해 임유환은 비록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기껏해야 그녀와 막상막하이고 100위권 안에 들지도 못하기에 정우빈과는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그녀는 임유환이 분을 못 이겨 이런 말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임유환은 믿지 못하겠다는 조명주의 표정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유환 씨, 괜찮아요? 정우빈은요?”그때, 그제야 도착한 윤서린이 숨을 헐떡이며 임유환에게로 달려왔다.방금 상황이 긴박하기에 조명주가 먼저 달려왔었다.그저 일반인에 불과한 윤서린은 그리 빨리 뛰지 못했다.“난 괜찮아. 정우빈은 이미 갔어.”임유환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신만 괜찮으면 돼요.”윤서린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에 겨워 조명주를 바라봤다.“조 중령님, 방금 일은 너무 감사드려요!”그녀는 분명
같은 시각.호텔로 돌아온 서인아는 S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피곤해 보였다.이곳은 그녀에게 있어서 아무런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미련을 둘 유일한 사람도 이미 그녀 손으로 직접 잘라버렸다.“아가씨, 진짜 사실을 말씀하지 않으실 건가요?”옆에 있던 수미가 안색이 좋지 않은 아가씨를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물었다.방금 그녀는 모든 일의 경과를 백스테이지에서 똑똑히 보았다.아가씨는 임유환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한 것이 분명했다.그녀도 정우빈이 그렇게 빨리 연회장에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됐어. 어떤 일은 진실을 모르는 게 더 좋을 때가 있어.”서인아가 고개를 저었다.말투에는 무력감이 섞여 있었다.그녀는 진짜로 피곤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분명 맑은 하늘인데 어두컴컴해 보였다. 그녀의 마음처럼 뭔가에 뒤덮인 것 같았다.“하지만...”“됐어, 수미야. 이만 연경으로 돌아가자.”서인아가 숨을 들이켜고는 말했다.“네, 아가씨.”수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아가씨가 이렇게 울적해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분명 아가씨와 임유환이 오해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참, 우빈 씨는?”서인아가 물었다.한참 동안 기다리다 차들도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정우빈이 왜 안 보이지?“잘 모르겠어요, 아가씨. 전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호텔로 돌아오신 걸 확인하고는 급한 일이 있는지 갑자기 나가신 것만 봤어요.”수미는 모르는 일이라며 대답했다.“우빈 도련님이 급한 일이 있어서 갔다?”서인아는 갑자기 심장이 꿈틀하더니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수미야, 가자. 얼른 나랑 같이 연회장으로 가자.”그녀는 정우빈이 임유환을 찾아갔다는 걸 깨달았다.방금 정신이 나가 있어서 정우빈을 깜빡했다.“인아 씨, 준비 다 했어요?”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정우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활짝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아까의 정예부대가
"인아 씨, 연경까진 내가 데려다줄게요. 누구도 인아 씨한테 손 못 대게 내가 지켜줄게요."정우빈은 자신에 찬 눈길로 서인아를 바라봤다. 정우빈은 자신은 무능하고 쓸모없는 임유환과는 다르다고, 서인아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했다."그래요."정우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서인아의 눈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이번에 연경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새엄마 윤가영부터 찾아가 따질 작정이었다.끝도 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여자에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인아 씨, 타요."정우빈은 직접 차 문을 열어주며 서인아를 태웠다.정우빈과 서인아를 태운 리무진이 출발하자 대기하고 있던 여러 대의 차들도 그 뒤를 따라 호텔을 떠났다.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임유환과 윤서린이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유환 씨, 인아 씨 차들인가 봐요.""그러게."차에 눈을 돌리며 말하는 윤서린에 임유환은 짧게 대꾸를 하면서도 마음이 뒤숭숭했다.이젠 정말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 같았다.어딜 가든 잘 산다면 그걸로 됐다 생각한 임유환이 윤서린을 향해 말했다."서린아, 우리도 가자."담담하게 말하며 먼저 주차장으로 향한 임유환에 윤서린은 멀어져가는 리무진을 한번 보고는 다급히 임유환을 따라갔다....오션별장 6번지."내려놔! 이거 다 내거니까 내려놓으라고!"허유나는 집 안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옮기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을 향해 처절하게 외치며 그들 손에 있는 제 보석함으로 손을 뻗었다."꺼져!"정장 차림의 남자는 성가셨는지 허유나를 힘껏 밀어버렸다."야 이 강도 새끼들아! 내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저항을 할 수도 없었던 허유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남자는 그런 허유나를 동정하기는커녕 그 우는 소리가 더 거슬렸다.고개를 숙여 손목의 시계를 한 번 본 그는 짐을 옮기던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서인아 아가씨가 말씀하신 시간까지 십 분 남았다! 다들 빨리빨리 움직여!"
"유환 씨, 도착했어요."청운 별장에 도착한 윤서린은 조수석의 임유환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럼 난 먼저 갈게."임유환은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윤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혼자 참지 말고."윤서린은 말을 하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임유환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이 말 한마디 하겠다고 얼마나 오래 고민했을지 뻔히 보여 임유환은 웃으며 답했다."걱정 마. 나 아무 일도 없어.""먼저 갈게. 집 도착하면 연락해.""알겠어요."윤서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임유환이 돌아서는 걸 보고서야 별장을 떠났다.별장으로 돌아온 임유환은 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머릿속에는 아까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서인아에게 이미 결혼을 앞둔 약혼자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 했었다.그런 상황에서 약혼자에게는 알리지 않고 S 시 까지 와서 자신을 만나려 했다는 것이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정말 서인아의 말대로 7년 전 일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하지만 해수욕장에서 발목을 삐끗한 서인아를 업었을 때 분명 그녀의 눈물이 임유환의 등에 닿았었다.그리고 폐허에서도 서인아는 임유환을 위해 눈물을 흘렸었다.그럼 그것들은 다 거짓이었을까?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게 맞을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임유환은 어느새 또 서인아 걱정을 하고있는 저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임유환은 그런 말을 듣고도 역시나 넘겨짚고 제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서인아를 지키다 다리가 부러진 게 한 마리의 개라고 해도 서인아는 똑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서 무슨 소용일까.정우빈은 서인아가 직접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정우빈이 최선이라 생각해 골랐을 것이다.연경에서 제일 명망 높은 두 가문의 연합이라니 그 정도면 서인아의 마음에도 꼭 들어맞는 결혼이 아닐까 싶다.제삼자인 임유환이 나서서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임유환은 고개를 젓고 마음을 추스르고는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다.임유환은 어쨌든 연
"이상하네. 서린이가 아직도 집에 못 간 건가?"예전 같으면 이미 무사히 도착했다는 문자를 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오늘따라 연락이 오지 않자 임유환은 눈썹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미 한 시간이 넘어가자 걱정된 임유환은 윤서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하지만 통화 연결음만 들리다 끝난 전화에 불길한 예감이 들자 임유환은 다급히 흑제에게 전화를 걸었다."흑제, 윤서린 핸드폰 위치 추적해봐."임유환의 말투에는 다급함이 묻어나 있었다."예, 주인님!""윤서린 씨 핸드폰은 지금 도성구 쪽으로 이동 중입니다.""도성구?""임유환은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흑제를 향해 말했다."계속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보고해. 내가 지금 바로 갈게.""예, 주인님!"...도성구.낡아 빠진 골목길에는 전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뿐이었다.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 인기척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곳 가장 깊은 곳의 민가 2층에는 허유나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허유나의 뒤로는 민소매 차림의 건장한 남자 둘이 서 있었고 앞에 놓인 기둥에는 여자가 묶여져 있었다. 여자를 데려올 때 같이 딸려온 작은 가방은 바닥에 아무렇게나.내팽개져 있었다.그 여자는 역시나 윤서린이었다."야 너네, 쟤 깨워."허유나는 몸에 지니고 있던 비싼 물건들을 다 팔아치운 돈으로 조직 폭력배들을 데려온 것이다.그들은 살인, 방화부터 강도질까지 돈만 주면 못 하는 일이 없었다."예, 아가씨."허유나의 명령에 남자 하나가 양동이 가득 물을 받아와 윤서린을 향해 뿌렸다.차가운 물이 닿자 윤서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허... 허유나!"눈앞의 익숙한 인영을 본 윤서린이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윤서린, 우리가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지?"허유나는 빨간 윤서린의 입술을 보며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음을 지었다."왜... 왜 이러는 거야!"눈앞에서 섬뜩하게 웃고 있는 허유나를 보자 윤서린도 잔뜩 겁을 먹은 채
"오... 오지마!"윤서린의 떨리는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왜 너 불쌍한 척 잘하잖아. 이 얼굴 믿고 남자도 꼬시는 거잖아. 다신 네가 그딴 짓 못 하게 오늘 내가 네가 얼굴 다 망쳐 버릴 거야."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윤서린의 앞에 선 허유나가 칼을 들어 윤서린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차갑고 예리한 칼날이 제 얼굴에 닿았음을 안 윤서린은 온몸이 굳은 채 창백한 얼굴을 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바로 칼에 얼굴이 긁힐 수 있는 위치였다."무서워?""유... 유나야... 칼 내려놔.""이제 와서 무서워? 그럼 그때 나를 도왔어야지." 두려움에 떨며 애원하는 윤서린을 보며 웃던 허유나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소리쳤다."유나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윤서린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물었다."왜 이러냐고? 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거 다 너랑 임유환 짓이잖아!"허유나는 윤서린을 향해 울부짖듯이 말했다."우린 너를 해치려고 한 적이 없어! 우리가 한 짓이 아니야!"윤서린은 떨고 있으면서도 사실을 말하려 했다. 윤서린과 임유환은 허유나를 해친 적도 없었고 그럴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거짓말 마!"하지만 그 말을 믿을 리 없는 허유나가 손을 들어 윤서린의 뺨을 때렸다.짝!결코 약하지 않은 세기에 윤서린의 뺨 한쪽이 부어올랐고 불에 달군 듯 화끈거리며 따가웠다."가증스러운 년!"허유나는 여전히 증오 가득한 눈을 한 채 윤서린을 노려보고 있었다.갑자기 맞은 뺨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윤서린은 이를 악물고 해명을 했다."유나야... 정말 우리가 한 게 아니야...""그럼 네 말은 이 모든 게 내 자업자득이라는 얘기야?"윤서린이 해명하면 할수록 허유나의 분노는 더욱더 커져만 갔다."그런 말이 아니라..."제 앞에 칼이 들이 밀어진 시점에서 허유나를 더 자극할 순 없었기에 윤서린은 얼른 부정했다."그럼 무슨 뜻인데!"허유나는 소리를 지르며
"아!"가슴 바로 앞의 옷이 찢겨지자 윤서린의 입에서도 비명이 흘러나왔다."제발... 제발 그만 해요!"윤서린이 울며 애원할수록 두 남자는 점점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윤서린 같은 여자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놀아봐야 했다.둘은 눈을 마주치더니 윤서린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었다.윤서린은 그 틈을 타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것까지 이미 예상했던 놈들은 하나는 윤서린의 두 손을 틀어잡고 다른 하나는 두 발을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그만! 제발 그만 해요!"윤서린은 낯빛이 파래진 채 발버둥을 쳤다."어이 애기야, 그만 힘 빼. 조금 있다 잘 즐겨야지."두 남자의 얼굴은 흥분으로 바짝 달아올라 지금이라도 당장 윤서린을 덮칠 것만 같았다."안... 안돼..."윤서린은 작은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내가 먼저 하게 해줘. 이런 아가씨를 내가 언제 덮쳐보겠어. 아 X발, 쟤가 자꾸 우니까 더 못 참겠잖아.""아 씨, 빨리해 그럼. 나도 못 참겠으니까.""그래."윤서린의 두려움은 그들의 연민을 사기는커녕 아래에 누워서 울고 있는 그 모습은 오히려 그들의 흥분에 박차를 가했다.한 명은 윤서린의 팔을 다른 한 명은 다리를 짓누른 채 윤서린이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게 했다.그리고 남자 하나가 큰 손을 들어 윤서린의 남은 옷을 찢어내려 하자 윤서린은 눈물 자국이 가득한 눈으로 애원했다."멈... 멈춰요! 돈은 달라는 대로 줄게요! 그러니 제발 그만 해요!""빨리 시작해!"보다 못한 허유나가 남자들을 재촉했다.허유나는 윤서린이 당하는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허유나의 다그침을 듣고 절망스러워진 윤서린은 고개를 떨군 채 눈물만 흘려보내고 있었다.그녀의 위에 올라타고 있는 남자는 눈을 번뜩이며 윤서린의 가슴에 손을 대려 했다.펑!그때 엄청 난 굉음과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남자들은 하던 짓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뭐야?"나무로 된 문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그
방으로 들어온 임유환은 천천히 윤서린에게 다가갔다."누가 들어오랬어!"그 모습을 본 허유나가 또 소리를 질러댔다.짝!시종일관 무표정이던 임유환은 손을 들어 허유나의 뺨을 내리쳤다.그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허유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귀에 거슬리던 시끄러운 소리가 사라지자 임유환은 몸을 웅크린 채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윤서린에게 다가갔다."유환 씨... 진짜 유환 씨예요?""그래, 나 맞아."소란의 주인공이 임유환임을 알아차린 윤서린은 안도의 눈물을 쏟으며 임유환의 품에 안겼다.임유환은 안쓰러운 눈으로 윤서린을 바라보며 그녀를 받아 안았다."유환 씨... 나 너무 무서웠어요..."아까 정말로 그 두 남자에게 당할 뻔했던 윤서린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괜찮아, 이제 내가 왔잖아."윤서린을 토닥이던 임유환의 눈에 살기가 더욱더 짙어졌다.허유나!임유환은 오른손 주먹을 얼마나 세게 말아쥐었는지 뼈가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임유환, 네가 뭔데 나를 때려!"그때 아까 뺨을 맞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허유나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내가 뭐냐고?"임유환은 눈에 차오른 분노를 애써 누르고 윤서린을 보며 달래듯 말했다."서린아, 잠깐만."그리고는 그 살기를 감추지 않은 채 시선을 허유나에게로 돌렸다."네가 서린이 한테 한 짓 때문이야.""애초에 시작도 윤서린이었어! 자업자득이라고!"허유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자업자득? 허유나, 다시 말해봐."임유환은 화를 참으려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이미 화가 한계치에 다다른 임유환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허유나의 입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내가 뭐 틀린 말 했어?"하지만 상황 파악을 못 한 허유나의 언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그리고 임유환 너! 너는 무슨 자격으로 나를 때리는데!""네들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어. 서인아 씨가 날 내치려 하는 걸 뻔히 다 알면서도 내가 파티에 가서 그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