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과 이서 씨의 감정이 아주 돈독하다는 걸 꼼꼼하게 고려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라도 이서 씨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마이클 천이 어두운 얼굴로 지환을 쳐다보았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이서 씨의 곁에 계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대표님께서 무심코 하신 행동이 이서 씨에게는 큰 자극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마이클 천의 말을 들은 배미희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서의 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하늘이 원망스러워.’마이클 천 역시 안타깝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동안 경과가 너무 좋아서 이서 씨가 천천히 대표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처럼.’‘그런데... 이서 씨에게 대표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아.’‘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던 거지.’‘이제는 나조차도 언제쯤 대표님과 이서 씨가 솔직한 만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미희와 마이클 천은 지환이 크게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오히려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알겠습니다.”지환이 배미희에게 말했다.“이서는 아주머니께 맡길게요. 꼭 이서를 잘 보살펴 주세요.”배미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지환은 몸을 돌려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고 있었다. 멀어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배미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환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어...’“사모님,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배미희에게 인사를 건넨 마이클 천 역시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방에 들어선 배미희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이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서는 밤이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배미희가 하인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배고프지? 자, 어서 밥 먹어.”몸을 일으킨 이서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배미희를 바라보았다.“사모님, 혹시
“지금 네가 막막함을 느끼는 건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이틀 후에 스웨이 여사의 강연이 있다고 했지? 네가 좋다면 스웨이 여사를 따라 글을 쓸 수도 있지 않겠어?”“그러고 보니, 네가 스웨이 여사한테 글 쓰는 걸 배운 적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아무래도 취미가 생기면, 마음의 고통도 가라앉게 될 거야.”“제가 글을 썼다고요?”이서는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저는 전혀 기억나질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 용감하게 한 번 써 봐.”배미희가 격려했다.이서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한 번 해볼게요.” 평온을 되찾은 이서를 본 배미희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각.가은은 박예솔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가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반드시 우리 엄마의 강연에 참석할 거예요.”[확실해요?]예솔이 창문 앞에 놓인 분재의 잎사귀를 어루만졌다.[내가 고용했다던 저격수, 몸값이 꽤 비싸거든요.] “확실해요, 전에 엄마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윤이서가 창작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하셨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엄마의 강연에 참석하려고 할 거예요.” [그래요, 윤이서가 이씨 가문의 고택을 나서는 이상, 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예솔이 전화를 끊었다. 가은은 불안하던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을 나서려던 찰나, 또 한 번 핸드폰이 울렸다. ‘장희령?’가은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혹이 생겨났다. ‘내가 엄마를 따라 심씨 가문의 고택을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내게 연락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가은 씨...]장희령의 말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가은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M국의 생활은 어떤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총애를 받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묻고 싶어서 전화했어.] “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심가은이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저었다.“알고 있는 거 다 얘기해!”가은의 목소리를 들은 장희령은 그녀가 자기의 말귀를 알아먹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아주 간단해. 그때 사씨 아주머니가 심가은을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렸어. 그러고는 심씨 가족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보육원에 가서 애를 데리고 왔지. 그 애가... 바로 너고...]“그만해!” 가은은 소리쳤다.“그럴 리 없어. 나 엄마 딸 맞아. 하마터면 너한테 속을 뻔했네!”‘난 이미 엄마와 친자확인까지 마쳤잖아.’‘더군다나 이 일은 윤이서가 기획한 거야.’‘이서가 엄마를 속일 리 없을 테니까.’가은이 생각을 읽은 장희령은 웃으며 말했다.[가은 씨랑 스웨이 작가님이 친자 확인한 거는 맞지만, 윤이서가 책임지고 한 것이잖아. 가운데서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누가 알겠어?]“윤이서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가은은 쉽게 믿지 않았다.“그래서 그녀가 얻는 건 뭐고?”[가은 씨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어? 잘 생각해 봐, 스웨이 작가님이 가장 원했던 게 뭐였어?]가은의 안색이 돌변했다.장희령은 계속 말을 이었다.[작가님의 가장 큰 약점이 딸이었어. 누군가가 딸을 찾는 걸 도와준다면, 그 사람은 작가님한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가은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대답했다“은인.”실제도 그랬다.이서가 딸을 찾는 걸 도와준 이후로, 스웨이는 이서를 더욱 애틋하게 대했다.비록 그 기간동안 가은은 자신의 딸 신분을 이용하여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멀리하도록 강요했었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에게 매우 불만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윤이서 엄청 계산적인 사람이였구나.’‘정말 무서운 여자야.’수화기 너머에서 장희령의 목소리가 울렸다.[가은 씨, 만약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작가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가은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서도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이 장희
“PD한테 듣기로는 이번 작품은 기존의 날카롭고 비판적인 스타일을 완전히 벗어나 휴먼 로맨스에 코믹까지 가미했다는데, 어때?”장희령은 단번에 관심이 생겼다.[그래, 그럼 여주 자리 부탁해.]가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욕심이 뭐 저리 많을까?’하이먼 스웨이가 여주 캐스팅할 때 아주 까다로운 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여주 자리를 요구하다니.“그래, 알았어. 대신 비밀 지켜줄 거지? 앞으로 캐스팅 관련 건은 나한테 맡겨.”가은은 장희령에게 공수표를 남발했다.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 든 지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했다.그녀가 하이먼 스웨이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걱정 마, 내가 작가님 작품의 여주만 할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할 테니까.]가은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정말? 사실이야?”[물론이지.]장희령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지금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인데, 가은 씨가 잘 돼야 나도 잘 되지.]가은도 웃었다. ‘그래, 장희령은 여주 역할 때문이라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지만, 윤이서는...’이서를 생각하자, 머리가 띵 했다.다행히도 곧 죽을 테니, 그때가 되면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어느덧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 날짜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요 며칠, 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기대하면서 그녀의 책을 읽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하이먼 스웨이의 책은 늘 그녀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은 것 같았다. 게다가 책 속의 내용도 너무 좋았다. 이서는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아마도 배미희의 얘기처럼 좋아하는 걸 찾아서 그런지 요 며칠은 삶이 무료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지난날들과는 달랐다.드디어 자신만의 방향을 찾은 듯했다.그녀는 왠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본인조차도 왜 이런 황당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그 모습을 본 배미희가 긴장한 듯 물었다.“이서야, 왜 그래?”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왠지 지금의 하이먼 스웨이의 모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다.‘아마 잃어버린 기억 속이겠지.’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와 사이가 좋았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매번 하이먼 스웨이를 볼 때마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마치... 가족처럼...“이서야, 너 정말 괜찮아?”배미희는 이서가 또 갑자기 기절할까 봐 노심초사했다.이서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스크린에 비친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저 정말 괜찮아요.”배미희는 이서의 곁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이서가 점점 하이만 스웨이의 강연에 매료되며 표정이 평온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같은 시각.강연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 건너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박예솔은 점점 초조해졌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심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윤이서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강연 시작한 지 벌써 30분이 지났는데,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요?”가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날 분명히 강연 들으러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단 말이예요.왜 안 갔을까요?]박예솔은 단번에 그녀의 말 속의 핵심을 잡았다.“뜻이라니요? 뭐예요, 그럼 그냥 심가은 씨의 추측이었던 거예요?”[그런데 분명히 제 티켓을 받았거든요!]“심가은 씨, 바보예요?!” 박예솔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어쩜 그녀가 만난 협력 대상들은 하나같이 바보 멍청이들이란 말인가?!“심가은 씨가 건넨 티켓을 받았을 뿐이지,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돌겠네요, 사격수 고용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기나 하냐고요!”가은도 스스로 켕기는 것이 있는지라 얼른 말했다.[그럼... 제가 지금 바로 윤이서한테 가 볼게요. 얼리고 달래서라도 이씨 고택에서 데리고 나오면 되잖아요.]“심가은 씨가 그년 죽이고 싶어 하는 거를 온 세상에 광고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지금, 이 낯선 번호가 예전에 미처 저장하지 못한 번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곧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뭐라고요? 하나가 사고 났다고요?”[네, 그렇습니다.]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마리아성모병원에 전화하면 확인 가능합니다.]이서는 바삐 전화를 끊고 배미희를 찾아갔다.임하나가 사고 났다는 얘기에 배미희도 극도로 긴장했다.“이서야, 우선 진정부터 하고... 방금 너더러 어느 병원에 전화해 보라고 했니?”“마리아성모병원이요.”배미희는 곧 전화를 들었다.“지금 바로 병원에 전화할 테니 조급해하지 마라. 사기꾼일 수도 있을 테니...”이서를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는 얘기이기도 했다.병원 쪽과 곧 전화 연결이 되었다.배미희가 물었다.“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임하나라는 환자가 오늘 병원에 실려 왔나요?”[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직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안녕하세요, 확인 결과, 임하나라는 환자가 방금 접수되었습니다...]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서는 옷을 챙기며 말했다.“하나 맞아요, 사모님, 죄송하지만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줄 차량을 준비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배미희는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네.”몇 분 후, 차가 준비되었고, 이서와 배미희는 차에 올랐다.차에 오르자마자, 배미희는 곧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저쪽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열 번째 통화를 시도했을 때 마침내 연결되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배미희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너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그래?”[지금 병원이에요. 방금 하나 씨의 상처 처리해 준다고 전화 소리 못 들었어요.]그제야 배미희는 긴장
집에 돌아온 이상언은 곧 배미희와 이서에게 사건의 연유를 물었다. “방금 낯선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가 병원에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못 믿겠으면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라고... 그래서 병원에 전화했더니 하나가 병원에 있다고 해서...대략적으로 이런 상황이었어요.”이서가 말을 듣고 상언은 말을 아꼈다.그의 생각은 단번에 사건 발생 이전으로 돌아갔다.오늘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호텔 입구에서 하나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하나가 호텔에 도착하기 직전 호텔 입구에 갑자기 통제력을 잃은 차 한 대가 나타났다.당시 현장에 그가 없었더라면 그 차는 임하나를 쳤을 것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임하나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바빠 사고 차량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서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가 사고 났다는 얘기를 전한 사람이 있다...이 속에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다. “누군가가 하나 씨를 이용해서 이서 씨를 유인해 내려는 거예요!”이상언의 말투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냉랭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배미희도 보통 여자가 아니다. 집안들끼리 세력 다툼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갖은 애를 써서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만약 방금 상언과 통화가 되지 않고 정말 병원까지 갔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수도 있다.생각해 보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런데 대체 누굴까요?” 이서가 물었다.“이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이상언의 말투는 다소 차가웠다.“그 사람 전화번호를 저에게 주세요, 제가 처리할게요.”“네.” 이서는 상언이 말한 대로 전화번호를 넘겼다. 그러고는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나는... 지금 어때요? 많이 다쳤어요?”괜히 자기 때문에 하나까지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니 이서는 마음이 무거웠다.“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이서 씨, 자책하지 마세요. 이서 씨가 자책하며
“누가요?” 하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이서에게 전화해서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말라고 해요.”상언은 살짝 웃었다.하나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상언을 보며 말했다“왜 이렇게 쳐다봐요?”“이미 얘기했어요. 이서 씨도 다시 돌아갔고요. 걱정 마요. 지금 하나 씨보다 천 배, 만 배는 안전하니까.”지환은 모든 그림자를 이서에게 붙였다.지금은 이서보다 하나가 더욱 위험한 상황이다.“무슨 뜻이에요?” 임하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이서를 겨냥해서 일을 벌이는데 어찌 이서가 자기보다 더 안전하다는 건지...이상언은 동문서답했다.“이제야 지환이가 왜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서 씨를 보호하는지 알겠어요. 왜냐면 나도 이제 그럴 거거든요.”“어휴,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하나는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그건 됐고, 이서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서는 이쪽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이서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면... 심가은이 유일한 인물일 거 같긴 한데... 이 모든 게 그녀가 꾸민 짓일까요?”임하나는 지난번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어떻게 이서가 외출하자마자 변태를 만난단 말인가?’게다가 이번에도 그녀를 이용해 이서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것을 보면 지난번 일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걱정 마요. 제가 알아볼 테니. 오히려 하나 씨...”이상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저쪽에서 이미 하나 씨를 노리고 있는 이상, 그놈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하나 씨도 절대로 안전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내가 하나 씨를 밀착 보호할 거예요.”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 점점 음흉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그의 입꼬리를 올라간 걸 본 임하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 선생님,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거예요?”“그럴 리가요?”상언은 속으로 움찔했다. 드디어 정정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처음에 그 약속을 할 때, 왜 이런 상황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환은 그런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조용히 말했다. “술집에 가고 싶으면, 가자.” 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 보고 나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는 밤거리를 좀 걷는 게 어때요? 한밤중에 조용한 거리를 걷는 거, 진짜 재밌거든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서는 스스로 신이 나서 말했다.“아마 해본 적 없겠죠? 진짜 재밌어요. 가끔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더 재밌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누군가가 정적을 깨는 것 같다니까요?” 바로 그때, 지환이 이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같이 해줄게. 오늘 밤 집에 안 가는 것까지도.”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고말고. 뭐가 문제겠어?” 어둠 속에서 지환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이서는 괜히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집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될 상황을 떠올리니, 이서의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서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두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며 11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저히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지환과 단둘이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스스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