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배미희가 하인에게 자신이 먹던 음식을 모두 2층으로 옮기라고 지시하며, 이서와 지환에게 1층을 양보했다. 배미희가 이렇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는 배미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정말이지 H선생님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이전에는 H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H선생님의 마음속에 다른 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H선생님과 가깝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H선생님은 몇 번이고 내가 그분의 대체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이제는 내가 H선생님께 다가가고 싶지 않아.’‘두려워.’‘내가 이대로 무너져 버릴까 봐, 또 이성을 잃게 될까 봐 너무 두렵다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지환이 뼈를 바른 생선 살을 이서의 그릇에 넣으며 말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그릇 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서가 좋아하는 생선이었지만, 가시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먹는 것을 포기하려던 참이었다.‘뭐야, 내가 이 생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계신 거야?’‘만약 정말 내가 이 생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러시는 거라면...’순간, 이서의 머릿속과 눈앞이 또 한 번 흐릿하게 변했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일상의 소리마저 찢어질 듯한 소음으로 바뀌자... 쨍그랑!손에 든 그릇을 땅에 떨어뜨린 이서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지환이 이서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이서야!”하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이서는 지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몸이 너무 가벼워... 아픈 건 아니지만...’‘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 같아...’“이서야?!”이서의 손을 꽉 붙잡은 지환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리멍덩한 표정을 한 이서는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나, 갈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과 이서 씨의 감정이 아주 돈독하다는 걸 꼼꼼하게 고려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라도 이서 씨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마이클 천이 어두운 얼굴로 지환을 쳐다보았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이서 씨의 곁에 계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대표님께서 무심코 하신 행동이 이서 씨에게는 큰 자극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마이클 천의 말을 들은 배미희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서의 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하늘이 원망스러워.’마이클 천 역시 안타깝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동안 경과가 너무 좋아서 이서 씨가 천천히 대표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처럼.’‘그런데... 이서 씨에게 대표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아.’‘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던 거지.’‘이제는 나조차도 언제쯤 대표님과 이서 씨가 솔직한 만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미희와 마이클 천은 지환이 크게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오히려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알겠습니다.”지환이 배미희에게 말했다.“이서는 아주머니께 맡길게요. 꼭 이서를 잘 보살펴 주세요.”배미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지환은 몸을 돌려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고 있었다. 멀어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배미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환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어...’“사모님,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배미희에게 인사를 건넨 마이클 천 역시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방에 들어선 배미희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이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서는 밤이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배미희가 하인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배고프지? 자, 어서 밥 먹어.”몸을 일으킨 이서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배미희를 바라보았다.“사모님, 혹시
“지금 네가 막막함을 느끼는 건 할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거야.” “이틀 후에 스웨이 여사의 강연이 있다고 했지? 네가 좋다면 스웨이 여사를 따라 글을 쓸 수도 있지 않겠어?”“그러고 보니, 네가 스웨이 여사한테 글 쓰는 걸 배운 적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아무래도 취미가 생기면, 마음의 고통도 가라앉게 될 거야.”“제가 글을 썼다고요?”이서는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저는 전혀 기억나질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 용감하게 한 번 써 봐.”배미희가 격려했다.이서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한 번 해볼게요.” 평온을 되찾은 이서를 본 배미희가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시각.가은은 박예솔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가은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반드시 우리 엄마의 강연에 참석할 거예요.”[확실해요?]예솔이 창문 앞에 놓인 분재의 잎사귀를 어루만졌다.[내가 고용했다던 저격수, 몸값이 꽤 비싸거든요.] “확실해요, 전에 엄마가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윤이서가 창작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하셨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엄마의 강연에 참석하려고 할 거예요.” [그래요, 윤이서가 이씨 가문의 고택을 나서는 이상, 다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예솔이 전화를 끊었다. 가은은 불안하던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그녀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을 나서려던 찰나, 또 한 번 핸드폰이 울렸다. ‘장희령?’가은의 머릿속에 수많은 의혹이 생겨났다. ‘내가 엄마를 따라 심씨 가문의 고택을 떠난 후로는 단 한 번도 내게 연락한 적이 없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가은 씨...]장희령의 말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가은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 있어?”[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M국의 생활은 어떤지,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총애를 받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묻고 싶어서 전화했어.] “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심가은이 믿기 어려운 듯 고개를 저었다.“알고 있는 거 다 얘기해!”가은의 목소리를 들은 장희령은 그녀가 자기의 말귀를 알아먹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아주 간단해. 그때 사씨 아주머니가 심가은을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렸어. 그러고는 심씨 가족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보육원에 가서 애를 데리고 왔지. 그 애가... 바로 너고...]“그만해!” 가은은 소리쳤다.“그럴 리 없어. 나 엄마 딸 맞아. 하마터면 너한테 속을 뻔했네!”‘난 이미 엄마와 친자확인까지 마쳤잖아.’‘더군다나 이 일은 윤이서가 기획한 거야.’‘이서가 엄마를 속일 리 없을 테니까.’가은이 생각을 읽은 장희령은 웃으며 말했다.[가은 씨랑 스웨이 작가님이 친자 확인한 거는 맞지만, 윤이서가 책임지고 한 것이잖아. 가운데서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누가 알겠어?]“윤이서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잖아?”가은은 쉽게 믿지 않았다.“그래서 그녀가 얻는 건 뭐고?”[가은 씨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어? 잘 생각해 봐, 스웨이 작가님이 가장 원했던 게 뭐였어?]가은의 안색이 돌변했다.장희령은 계속 말을 이었다.[작가님의 가장 큰 약점이 딸이었어. 누군가가 딸을 찾는 걸 도와준다면, 그 사람은 작가님한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가은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대답했다“은인.”실제도 그랬다.이서가 딸을 찾는 걸 도와준 이후로, 스웨이는 이서를 더욱 애틋하게 대했다.비록 그 기간동안 가은은 자신의 딸 신분을 이용하여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멀리하도록 강요했었다. 비록 겉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하이먼 스웨이는 가은에게 매우 불만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윤이서 엄청 계산적인 사람이였구나.’‘정말 무서운 여자야.’수화기 너머에서 장희령의 목소리가 울렸다.[가은 씨, 만약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작가님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가은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서도 좋은 사람이 아니지만, 이 장희
“PD한테 듣기로는 이번 작품은 기존의 날카롭고 비판적인 스타일을 완전히 벗어나 휴먼 로맨스에 코믹까지 가미했다는데, 어때?”장희령은 단번에 관심이 생겼다.[그래, 그럼 여주 자리 부탁해.]가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욕심이 뭐 저리 많을까?’하이먼 스웨이가 여주 캐스팅할 때 아주 까다로운 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당당하게 여주 자리를 요구하다니.“그래, 알았어. 대신 비밀 지켜줄 거지? 앞으로 캐스팅 관련 건은 나한테 맡겨.”가은은 장희령에게 공수표를 남발했다.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 든 지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해야 했다.그녀가 하이먼 스웨이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걱정 마, 내가 작가님 작품의 여주만 할 수 있다면, 가족들에게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할 테니까.]가은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정말? 사실이야?”[물론이지.]장희령이 웃으며 말했다.[우리 지금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인데, 가은 씨가 잘 돼야 나도 잘 되지.]가은도 웃었다. ‘그래, 장희령은 여주 역할 때문이라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지만, 윤이서는...’이서를 생각하자, 머리가 띵 했다.다행히도 곧 죽을 테니, 그때가 되면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어느덧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 날짜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요 며칠, 이서는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기대하면서 그녀의 책을 읽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하이먼 스웨이의 책은 늘 그녀에게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은 것 같았다. 게다가 책 속의 내용도 너무 좋았다. 이서는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아마도 배미희의 얘기처럼 좋아하는 걸 찾아서 그런지 요 며칠은 삶이 무료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지난날들과는 달랐다.드디어 자신만의 방향을 찾은 듯했다.그녀는 왠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본인조차도 왜 이런 황당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그 모습을 본 배미희가 긴장한 듯 물었다.“이서야, 왜 그래?”이서는 고개를 저었다. 왠지 지금의 하이먼 스웨이의 모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다.‘아마 잃어버린 기억 속이겠지.’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와 사이가 좋았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매번 하이먼 스웨이를 볼 때마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마치... 가족처럼...“이서야, 너 정말 괜찮아?”배미희는 이서가 또 갑자기 기절할까 봐 노심초사했다.이서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스크린에 비친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저 정말 괜찮아요.”배미희는 이서의 곁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이서가 점점 하이만 스웨이의 강연에 매료되며 표정이 평온해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같은 시각.강연이 진행되고 있는 건물 건너편에서 커피를 마시던 박예솔은 점점 초조해졌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어 심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윤이서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강연 시작한 지 벌써 30분이 지났는데,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요?”가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럴 리가 없는데요? 그날 분명히 강연 들으러 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단 말이예요.왜 안 갔을까요?]박예솔은 단번에 그녀의 말 속의 핵심을 잡았다.“뜻이라니요? 뭐예요, 그럼 그냥 심가은 씨의 추측이었던 거예요?”[그런데 분명히 제 티켓을 받았거든요!]“심가은 씨, 바보예요?!” 박예솔은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어쩜 그녀가 만난 협력 대상들은 하나같이 바보 멍청이들이란 말인가?!“심가은 씨가 건넨 티켓을 받았을 뿐이지,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돌겠네요, 사격수 고용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기나 하냐고요!”가은도 스스로 켕기는 것이 있는지라 얼른 말했다.[그럼... 제가 지금 바로 윤이서한테 가 볼게요. 얼리고 달래서라도 이씨 고택에서 데리고 나오면 되잖아요.]“심가은 씨가 그년 죽이고 싶어 하는 거를 온 세상에 광고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기억의 일부가 사라진 지금, 이 낯선 번호가 예전에 미처 저장하지 못한 번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잠깐 생각을 마친 이서는 곧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뭐라고요? 하나가 사고 났다고요?”[네, 그렇습니다.]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마리아성모병원에 전화하면 확인 가능합니다.]이서는 바삐 전화를 끊고 배미희를 찾아갔다.임하나가 사고 났다는 얘기에 배미희도 극도로 긴장했다.“이서야, 우선 진정부터 하고... 방금 너더러 어느 병원에 전화해 보라고 했니?”“마리아성모병원이요.”배미희는 곧 전화를 들었다.“지금 바로 병원에 전화할 테니 조급해하지 마라. 사기꾼일 수도 있을 테니...”이서를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을 위로하는 얘기이기도 했다.병원 쪽과 곧 전화 연결이 되었다.배미희가 물었다.“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임하나라는 환자가 오늘 병원에 실려 왔나요?”[안녕하세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수화기 너머에서 키보드를 탁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직원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안녕하세요, 확인 결과, 임하나라는 환자가 방금 접수되었습니다...]직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서는 옷을 챙기며 말했다.“하나 맞아요, 사모님, 죄송하지만 저를 병원으로 데려다 줄 차량을 준비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배미희는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말했다.“나도 같이 갈게.”“네.”몇 분 후, 차가 준비되었고, 이서와 배미희는 차에 올랐다.차에 오르자마자, 배미희는 곧 이상언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저쪽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열 번째 통화를 시도했을 때 마침내 연결되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배미희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말했다.“너 뭐 하느라 전화도 안 받고 그래?”[지금 병원이에요. 방금 하나 씨의 상처 처리해 준다고 전화 소리 못 들었어요.]그제야 배미희는 긴장
집에 돌아온 이상언은 곧 배미희와 이서에게 사건의 연유를 물었다. “방금 낯선 전화를 받았는데 하나가 병원에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못 믿겠으면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라고... 그래서 병원에 전화했더니 하나가 병원에 있다고 해서...대략적으로 이런 상황이었어요.”이서가 말을 듣고 상언은 말을 아꼈다.그의 생각은 단번에 사건 발생 이전으로 돌아갔다.오늘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호텔 입구에서 하나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하나가 호텔에 도착하기 직전 호텔 입구에 갑자기 통제력을 잃은 차 한 대가 나타났다.당시 현장에 그가 없었더라면 그 차는 임하나를 쳤을 것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임하나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바빠 사고 차량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이서에게 전화를 걸어 하나가 사고 났다는 얘기를 전한 사람이 있다...이 속에는 분명히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다. “누군가가 하나 씨를 이용해서 이서 씨를 유인해 내려는 거예요!”이상언의 말투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냉랭한 살의를 느낄 수 있었다.배미희도 보통 여자가 아니다. 집안들끼리 세력 다툼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갖은 애를 써서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었다.만약 방금 상언과 통화가 되지 않고 정말 병원까지 갔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수도 있다.생각해 보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런데 대체 누굴까요?” 이서가 물었다.“이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이상언의 말투는 다소 차가웠다.“그 사람 전화번호를 저에게 주세요, 제가 처리할게요.”“네.” 이서는 상언이 말한 대로 전화번호를 넘겼다. 그러고는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나는... 지금 어때요? 많이 다쳤어요?”괜히 자기 때문에 하나까지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니 이서는 마음이 무거웠다.“별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이서 씨, 자책하지 마세요. 이서 씨가 자책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