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요?” 하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럼 빨리 이서에게 전화해서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말라고 해요.”상언은 살짝 웃었다.하나는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상언을 보며 말했다“왜 이렇게 쳐다봐요?”“이미 얘기했어요. 이서 씨도 다시 돌아갔고요. 걱정 마요. 지금 하나 씨보다 천 배, 만 배는 안전하니까.”지환은 모든 그림자를 이서에게 붙였다.지금은 이서보다 하나가 더욱 위험한 상황이다.“무슨 뜻이에요?” 임하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이서를 겨냥해서 일을 벌이는데 어찌 이서가 자기보다 더 안전하다는 건지...이상언은 동문서답했다.“이제야 지환이가 왜 모든 힘을 동원해서 이서 씨를 보호하는지 알겠어요. 왜냐면 나도 이제 그럴 거거든요.”“어휴,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하나는 완전히 오리무중이었다.“그건 됐고, 이서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서는 이쪽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이서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면... 심가은이 유일한 인물일 거 같긴 한데... 이 모든 게 그녀가 꾸민 짓일까요?”임하나는 지난번 일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어떻게 이서가 외출하자마자 변태를 만난단 말인가?’게다가 이번에도 그녀를 이용해 이서를 밖으로 유인하려는 것을 보면 지난번 일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걱정 마요. 제가 알아볼 테니. 오히려 하나 씨...”이상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저쪽에서 이미 하나 씨를 노리고 있는 이상, 그놈들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하나 씨도 절대로 안전하다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내가 하나 씨를 밀착 보호할 거예요.”왠지 모르게 그의 얼굴에 점점 음흉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그의 입꼬리를 올라간 걸 본 임하나는 의아한 듯 물었다.“이 선생님,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거예요?”“그럴 리가요?”상언은 속으로 움찔했다. 드디어 정정
누군가가 고의로 이서를 유인하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배미희는 더욱 긴장했다. 이서의 외출을 거의 제한했다. 심지어 집에 경비원까지 추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환이 이서를 보호하기 위해 이미 어둠의 세력을 배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곧 마음을 접었다.그러나 여전히 걱정되는지 상언에게 물었다.“지환이가 정말 어둠의 세력까지 동원해서 이서를 보호하고 있는 거 맞아?”“그럼요, 정말이에요, 거짓말할 이유가 없잖아요?”“어둠의 세력은 SY와 지환이을 보호하기 위한 조직인데, 지금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서 보호하는데 배치하면 자신은 어쩌고? 너무 위험한데.”잠깐의 침묵 후 상언이 입을 열었다.“저도 얘기해 봤어요. 아마 지환이도 알고 있을 겁니다. 자신의 이런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배미희는 감개무량했다.“그래, 얼마나 똑똑한 애인데, 당연히 알고 있겠지. 이서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나 보네.”상언은 속눈썹을 내리깔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 맞다.” 배미희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했다.“하나 씨랑 어떻게 돼가니? 곧 주말인데, 집에 데리고 와, 밥이나 같이 먹자.”“주말에 세미나가 있어서 힘들 거 같아요.”“너는 세미나에 간다지만 하나 씨는 안 가잖아. 와서 같이 밥도 먹고, 나랑 얘기도 좀 하고, 얼마나 좋아, 일거양득이네.”“안 돼요!” 상언은 아주 깔끔하게 거절했다.“엄마, 죄송한데 엄마가 하나 씨한테 무슨 얘기하실 지 감이 안 와서요. 하나 씨는 결혼 얘기에 엄청 예민해요. 혹시 결혼 얘기라도 꺼냈다가 도망가면 어떡해요?”배미희는 웃는 듯 마는 듯 이상언을 바라보았다.상언은 말을 더듬었다.“왜, 왜요?”“아들, 네가 이렇게 인내심이 많은 애인지 오늘 처음 알았네. 예전 여자 친구들은...”상언은 어머니의 입을 꽉 막았다.“엄마, 손자 보고 싶은 거 맞죠?”한 마디로 배미희의 입을 막아 버렸다.배미희는 즉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그래, 그래, 더는 얘기 안 하마. 하지만 속도 좀 내.
따뜻한 햇살이 마침내 그녀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드디어 따뜻함을 느꼈다.하지만 머리는 녹슨 것처럼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사람은 정말 신기한 동물이다.H선생님이 있을 때, 그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그를 다시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 안 보이니, 또 그가 그립기 시작했다.이서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그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짜증 나...’‘옆에 있어도 싫지만, 없어도 싫어.’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바로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이서 씨, 일어났어요?”상언의 목소리였다.이서는 얼른 얼굴의 눈물을 닦고 거울로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문을 열었다.상언이 노트북을 들고 문밖에 서 있었다.“혹시 지금 시간 좀 있을까요? 하나 씨에 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이서는 눈을 깜박였다.“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미 다 말씀드렸는 걸요.”“그럼 한 번 더 얘기해줘요. 혹시 아나요, 놓친 부분이라도 있을지.”기대에 찬 상언을 본 이서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문을 열어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했다.“그럼 들어와요, 다시 한번 얘기해 드릴게요.”상언은 기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정부에게 음료수를 준비해 오게 했다.이서가 얘기를 마쳤을 때는 이미 한 시간 뒤였다.지난 번에는 세부사항까지 꼼꼼하게 말했지만, 이번에는 대체적인 맥락과 가끔 생각나는 새로운 사항만 말했다.얘기를 듣고 난 상언은 노트북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왜 그러세요?” 이서가 물었다.“있잖아요.”상언은 굳이 이서를 속이려 하지 않았다.“며칠 뒤 제가 의학 세미나가 있어요. 세미나 끝나고 행사가 있는데...”“?”“그 행사는 다들 파트너랑 함께 참석하는데, 제가 하나 씨를 초대하면 혹시 놀라서 도망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돼서요...”잠깐 고민을 하던 이서는 살짝 웃었다.“상언 씨 걱정이 지극히 정상적이죠. 하나는 이성 문제에 있어서 민감한 건
“분풀이요? 그럼 하나의 교통사고도...”“그건 그냥 뜻밖의 사고였을 뿐이에요. 우리가 너무 예민했어요.”이상언은 미소를 지으며 이서를 바라보았다. 전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그래요...”이서는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의 일에 하나가 연루된 게 아니라는 생각에 걱정을 적잖게 내려놓았다.“그럼, 그 에바라는 사람은...”“이미 경찰에 넘겼어요. 그리고 걱정 마요. 그녀가 출소하더라도 M국에 체류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감사합니다.” 이서는 상언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상언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여전히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서의 방을 나서자, 상언의 기분도 바닥으로 떨어졌다.이서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지환은 다 알고 있다. 며칠 전에 하나를 미끼로 이서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것까지.방금 한 얘기도 지환이 시킨 것이었다.그는 이서를 잘 알고 있다. 만약 하나가 본인 때문에 다쳤다는 걸 알게 되면 틀림없이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이서가 줄곧 이 일로 마음이 무거운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이런 스토리를 꾸며 냈다.상언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며칠 전, 그들은 하나를 치려고 했던 운전자를 잡았다. 조사 결과, 그날 술에 취했음을 확인하였다. 별다른 배후는 없었다. 하지만 그 낯선 번호의 주인은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M국에에서 지환과 견줄 사람은 그의 형, 하지호뿐이다.하지만 어둠의 세력의 보호를 벗어난 SY과 맞설 수 있는 기업은 많아졌다. 따라서 전화 발신자가 누군지 단정할 수도 없다.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이서를 겨냥한 것이다.상언은 눈썹을 꾹꾹 눌렀다.‘이제는 M국도 안전하지 않아.’목욕을 마치고 나온 이서는 개운함을 만끽하며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전화벨 소리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하나한테서 걸려 온 것이었다.이서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하나야.”[이서야.]하나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왠지
[이서야...]임하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걱정 마, 그런 사람 곧 나타날 거야.]이서의 눈 밑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순간 그녀의 시선은 갑자기 담벼락 밖의 익숙한 차량에 떨어졌다.하지환의 차였다.‘설마 지금 문밖에 계시나?!’‘그럼... 왜 안 들어오시는 거지?’이서의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고, 그녀는 바삐 전화기 너머의 하나에게 말했다.“하나야, 재밌게 잘 다녀오고, 또 연락해.”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쏜살같이 아래층으로 달려갔다.아래층에서 통화 중이던 배미희는 이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이서야, 이번 주말에 스웨이 여사의 집에 갈 건데, 너도 혹시...”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서의 그림자는 이미 바람처럼 사라졌다.배미희는 중얼거리며 하이먼 스웨이와 주말 약속을 계속 이어갔다.밖은 온통 지환이 배치한 어둠의 세력이다. 따라서 배미희는 이서가 위험에 빠질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한걸음에 대문까지 달려간 이서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이서 씨, 나가실 거예요?”정문 경비원이 점잖게 물었다.이서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나갈까?’‘하지만 더 이상 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그런데 나가서 무슨 말을 하지?’“이서 씨, 사모님이 나가셔도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다만 너무 멀리 가지는 마세요.”경비원은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문을 열어 주었다.“집 근처에는 모두 우리 쪽 사람들이에요. 멀리 나가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겁니다.”“...”대문이 열렸지만 제자리에 잠자코 있는 이서를 보며, 경비원은 이서가 두려워하는 줄 알고 주동적으로 앞으로 이서를 살짝 밀었다.“이서 씨,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 집 주변에는 온통 우리 쪽 사람들입니다.”대문 밖으로 밀려 나온 이서는 문밖에 주차된 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경비원도 이상한 듯 말했다.“엄청 눈에 익은 데 혹시...”그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누구의 차량인지 떠오르지 않았다.이
그러나 다음 순간, 큰 손 하나가 이서의 손목을 잡았다. 차갑고 서늘한 촉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가면은 가볍게 ‘툭’ 소리를 내며, 이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이서는 손을 빼며, 불안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안 잤어요?”“아니.” 지환은 몸을 곧게 펴고 이서와 거리를 두었다.비록 이미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처한다고 했지만, 이서는 여전히 눈치채 버렸다.“그럼 누가 다가오는지 어떻게 알았어요?”지환의 두 눈동자는 가면을 뚫고 이서를 빠르게 한 번 훑어보았다.이서의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다.그녀가 다가오자마자,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처음에는 이서가 너무 그리워서 스스로 만들어낸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서의 불안한 손이 그의 가면에 떨어졌을 때 그는 소스라쳐 깼다.“왜 나왔어?”지환이 화제를 돌렸다.“저...”지환의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에 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녀가 바라던 바인데, 왜, 그녀의 심장이 이토록 아플까? 더군다나 H선생님의 이러한 냉담한 태도를 그녀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안에 너무 오래 있어서 좀 답답해서요.” 그녀는 대충 거짓말로 둘러댔다.지환은 고개를 돌려 고택을 보았다.이씨 고택이 크긴 하지만, 아무리 커도 정해진 공간이다.하루 종일 안에 있는 것은 감옥에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며칠 있다가... 시간 봐서 사람 보낼게, 잠깐 바람 쐬러 다녀와.”그는 부하들에게 익명의 발신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해 뒀다. 머지않아 이서를 저택에서 유인하려는 자의 정체를 알게 될 것이다.그 사람만 찾으면 이서는 앞으로 이씨 고택에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여기에 계속 ‘감금’되어 있을 필요가 없다.“사람 보낸다고요?” 이서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입을 열자, 말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공사다망하신 H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귀찮게 하겠어요?”말을 마치고는 곧 문을 밀고 차에서 내렸다.지환은 이서가 왜 화가 났는지
이서는 배미희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눈물을 닦았다. 재차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네, 들어오세요.”배미희는 웃으며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서가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본 그녀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 깊어졌다.“왜 그래? 방금 그 H선생님과 싸운 거야?”“아니요.” 이서는 고개를 저었다.“싸우는 게 정상이야. 남자와 여자는 달라. 특히 마음의 섬세한 면에서 절대 우리 여자를 따라올 수 없지...”배미희는 이서를 위로하면서 이서 옆에 앉았다.“이서야, 나에게 속마음 말해봐. H선생님, 어때?”이서는 멍하니 배미희를 바라보았다.“H선생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다만, 다만...”“다만 뭐?”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다만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자꾸 저를 찾아오니까...”배미희는 참지 못하고‘풉’하고 웃었다.“어째 난 네 말 속에서 질투가 느껴지는 것처럼 들리지?”“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질투하겠어요. 질투를 한다는 건 제가, 제가...”배미희는 애처로운 듯 이서의 머리를 어루만졌다.“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거야. 하물며 H선생님처럼 훌륭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 난 네가 착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는 것도... 하지만 H선생님의 그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구나.”“왜 못 돌아오는 거예요? H선생님이 그분을 엄청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분은 왜 H선생님을 버리고 떠난 거예요?”“미안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여기까지야. 이서야, 너 아줌마 믿지?”이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앞으로 H선생님한테 화내지 마. 네가 그에게 화내면 그는...”배미희는 망설이다가 끝내 말을 계속하지 않았다.이서는 약간의 기대를 안고 추궁했다.“그는 어떤데요?” “아무것도 아니야.”배미희는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나를 믿는다면 그에게 화내지 마라.”이서는 왜 그런지
하이먼 스웨이는 친구들끼리 얼굴 보는 것보다, 자기 딸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재벌가 아니면 권세가들이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건 심가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일인 셈이니.어휴,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예전 같으면 이런 목적성을 띤 모임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하이먼 스웨이였다.지금은 자신의 딸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연줄을 총동원하고 있다.이렇게 생각하니, 배미희는 이서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뒷배 믿고 교만한 심가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서는 너무 겸손하다. 지난번에 그녀가 친구를 손님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면 아마 다들 이서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이씨 집안 손님이라는 권세를 믿고 나대거나 사람을 무시한 적도 없다.지환이 이서를 그렇게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제가 쓴 글을 작가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요.”지난번 하이먼 스웨이의 강연을 듣고, 이서는 재미 삼아 써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문사가 샘솟듯 솟아 사흘도 안 되어 만여 자를 써냈다.이상하게도 마치 이전에 썼던 것처럼 술술 써졌다.그런데 이서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글 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썼어, 이렇게 빨리?” 배미희는 계속 말을 이었다.“마침 잘됐네, 내가 갖고 가서 보여 줄까?”“좋아요.” 이서는 컴퓨터에 있는 파일을 복사해서 배미희에게 건넸다.배미희의 말에 따르면 이서는 이전에 스웨이 작가와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서의 기억 속에서 하이먼 스웨이를 처음 만난 건 지난번 이씨 가문의 바비큐 파티에서였다.그래서 줄곧 경솔하게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가르침을 청하지 못했다.지금 배미희가 다리를 놔주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감사합니다, 엄마.”“아이고...”엄마라는 소리에 배미희는 심신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곧 토요일이 다가왔다. 임하나는 아침 일찍부터 침대에 앉아 캐리어 안의 옷을
고이서는 이서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성지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서는 사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야.”“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하은철처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을 두고, 굳이 가난한 남자를 택했겠니?” 고이서는 예전에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윤이서가 정말 그렇게 멍청하다면, 누구도 살리지 못했던 회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H 국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만들진 못했을 거야.’‘그것도 혼자만의 힘으로.’‘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윤이서는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니까?’‘이 회사의 대표가 된 것도 전부 운 덕분이었던 것 같아.’ “고 팀장님?”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이서는 정신을 차렸다. “네, 대표님.” 이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큰 일이에요. 오늘은 제가 한 말을 잊어버린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는 계약서 서명 같은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잖아요.” “고 팀장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일은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이서는 갑자기 고이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래요, 고 팀장님! 고 팀장님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고이서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 팀장님이 꼭 저를 도와줘야 해요. 고 팀장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 회사에는 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고이서는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별거 아니에요. 제가 쉬는 동안 회사 운영만 도맡아주면 돼요. 저는 회복하는 대로 다시 돌아올게요.” 고이서는 겉으로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렇게 큰 회사를 저한테 맡기셨다가 큰 문제라고 생기면 어떡하시려고요.”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고이서는 속으로 이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드
하지만 한 회사의 대표는 곧 하늘과도 같았다. “아직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서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듯한 김하늘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 사무실에도 CCTV가 있을 거 아니에요. 당장 영상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요!” 김하늘은 당황하며 말했다. “대표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굳이 대표님께서 무안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아.’ 이 정도의 생각은 김하늘도 하고 있었으나, 이서는 아주 단호했다.“됐고, 당장 가져오세요.” 김하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고이서는 의아해졌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비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그럼 설마...’ ‘그 꽃차가 효과를 나타낸 건가?’이 가능성이 떠오르자 고이서는 속으로 흥분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CCTV를 보자고 하신다면 봐야죠. 만약 저희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대표님께서도 정확하게 설명해 주실 겁니다. 그렇죠, 대표님?”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김 비서가 잘못 전한 거라면 엄하게 처벌하고, 정말 내가 말해놓고 잊어버린 게 맞다면, 그땐 분명히 사과할게요.” 이쯤 되니 김하늘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다. 김하늘은 결국 CCTV 영상을 가져왔고, 영상 속에는 이서가 몇 번이나 김하늘에게 지시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고 팀장님을 불러주세요.”심지어 몇 분 간격으로 반복해서 지시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서는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내가 한 말이 맞다고...?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거지?”“김 비서, 미안해요. 정말 기억이 안 나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너무 미안해서 가방을 하나 선물로 주고 싶은데, 오늘 퇴근하기 전에 나한테 와서 받아 가요, 알겠죠?”김하늘은 이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애매하고 거절하기도
“진짜예요? 거짓말하는 거 아니죠?” 이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지환은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이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말을 단순히 의례적인 질문으로 하지 않고, 정말 진심을 담아 묻곤 했다. 지환은 한동안 말없이 이서를 바라보다가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짜야. 생각해 봐. 네가 너희 가족 이야기를 고이서와 나눈 거잖아. 고이서 입장에선 너와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거야.” 이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그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병원 앞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는 고요한 침묵만 흘렀다. “고마워요. 오늘 하루 정말 즐거웠어요.” 이서는 진심으로 말했고, 지환은 잠시 이서를 응시하다가 짧게 대답했다.“응.”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요.” 이서는 문을 열고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이서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꽃차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고, 의사는 꽃차를 검사한 뒤 말했다. “지난번과 성분이 똑같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더 많네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겠어요.” 의사는 몇 번 더 종이에 뭔가를 적더니 고개를 들었다.“3일이에요. 이 차를 마시면 3일 후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할 거예요.”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서, 생각보다 더 조급했구나?’ 이서는 병실로 돌아가 꽃차를 우린 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렸다. [고 팀장님이 주신 꽃차 덕분에 불면증이 해결됐어요. 요즘 정말 잘 자고 있답니다.]문구와 함께 사진을 올리자, 고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모든 걱정을 덜어냈다. 이제 남은 건 이서가 언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느냐였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고이서는 간절하게 속으로 외쳤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윤씨 그룹의 CEO 자리에 앉고 싶다고.’특히 이서가 회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주목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이서의 질투심이 극에 달했다.
고이서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듣고 있었어요. 대표님의 부모님께서 그렇게 하신 건, 뭔가 사정이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이서는 즉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어떤 부모가 자기 딸의 신장을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딸을 내줄 수 있다는 거죠?” 고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서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가 두 사람의 친딸이 아니라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걸지도 모르죠.” 고이서는 숨이 잠시 멎는 듯했고, 이마에서 흐르던 땀은 이미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고이서의 옷을 적시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 세상에 다양한 부모가 있듯이, 부모의 형태도 여러 가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서는 이미 땀에 젖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고이서를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운 뒤, 사과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괜히 말을 길게 했나 봐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더 있다가 더위 먹으면 안 되잖아요?” 고이서는 마치 구원을 받은 듯 서둘러 고개를 숙인 후 떠났고, 이서는 그녀의 젖은 등 뒤를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지환은 이서의 눈가에 깃든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웃고 싶으면 그냥 웃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제야 이서는 참지 않고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이서가 지환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짓는 순간이었다. 지환은 이서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을 찍었다. 이서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오랜만에 네가 그렇게 웃는 걸 보니까 기록해 두고 싶어서. 혹시라도 불편하면 바로 지울게.” 이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사진 속 이서의 얼굴은 오랜만에 활짝 핀 미소로 가득했다. ‘그러게, 이렇게 웃
“그럼요, 지금 바로 갈게요.” 이서는 전화를 끊고 지환을 바라보았다. “바쁘면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돼요.” 하지만 지환은 이미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난 괜찮아.” 이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십여 분쯤 지나, 두 사람은 고이서를 마주했다.이서에게 꽃차를 건네주던 고이서는 지환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물론 지환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마주한 지환은 자료 속의 남자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지환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품격이 있었다. 그 품격은 마치 높은 자리에 있는 왕처럼 다가왔고, 고이서는 알 수 없는 질투심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성지영과 윤재하는 분명 여러 번 말했었다. “윤이서 남편은 돈도 없는 놈이야.” 그런데도 고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야. 하은철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안녕하세요.” 고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환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서의 차가운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윤 대표님, 꽃차가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이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고이서는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 의심을 살까 싶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럼, 별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고이서가 돌아서려는 순간, 이서가 그녀를 불렀다. “고 팀장님.” 고이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 “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고 팀장님이라면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요.”고이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이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한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아마 자신이 꺼림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이서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고 팀장님이 준
하지만 그 누구도 사다리를 건네주지 않아서, 이서는 계속 지붕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떨고 있을 뿐이었다.이 순간 누군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이서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서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나 지났네.’ 이서가 발을 닦고 나서 계단으로 나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지환은 거실에서 서류를 펼쳐놓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하지환 씨가 사다리를 건네준다면... 나는 그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하지환 씨를 용서하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이서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서둘러 시선을 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일하는 중이에요?” 이서가 묻자 지환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응.” 이서는 지환과 한 발짝 떨어진 소파에 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함께 앉아 있었다. 어색함도 없었고, 굳이 대화를 만들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평온한 순간은 회사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이서는 문득 표정을 풀고,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이서는 성지영의 딸이야. 이번에 돌아온 것도 분명 윤씨 그룹을 노리고 돌아온 거겠지.” 지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윤씨 그룹에 입사해서 나한테 약을 먹일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그런 방식으로 날 바보로 만들려고 하다니, 어이가 없어요.” 고이서 했던 짓을 떠올리자 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이서의 예상이 맞다면, 고이서가 처음부터 자신이 윤재하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은, 그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윤씨 그룹은 과거의 윤씨 그룹이 아니었다. 윤씨 그룹이 MH 그룹과 통합한 후, 이서는 쓸모없는 윤씨 일가들을 모두 몰아내고 필요한 사람들만 남겼다. 설령 윤재하가 자신이 윤씨 가문의 친딸이 아니라며 이서의 자격을 문제
지환은 몸을 숙여 이서 뒤에 있던 이불을 집어 들고 이서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방금 하지환 씨는 나한테 뭘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이불을 덮어주려던 거였어?’ 이서는 닫힌 방문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고, 생각은 어느새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이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말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지환은 이미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서는 지환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예전에도 지환은 자주 이렇게 아침을 준비하곤 했다. 물론 처음에는 요리 실력이 썩 좋지 않았고, 아주 서툴렀다. 하지만 그때의 이서는 눈치가 없어서 지환이 원래 요리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지환이 이서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준비했다는 사실은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지환은 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밥 짓고, 반찬을 만들고, 살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하지환 씨가...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일까?’ 밤새 이서의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 또다시 떠올랐지만, 이번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부엌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다 됐어.” 이서는 자연스럽게 지환의 옆으로 다가가 아침 식사를 식탁으로 옮겼고, 자리에 앉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꼭 오래된 부부 같은 모습이네.’ “왜 그래?”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고, 이서는 하트 모양으로 구운 계란을 한 입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처음에 그 약속을 할 때, 왜 이런 상황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이서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환은 그런 이서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마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조용히 말했다. “술집에 가고 싶으면, 가자.” 이서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요?”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서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영화는 다 보고 나가는 걸로 해요. 그리고 술 마시고 나서는 밤거리를 좀 걷는 게 어때요? 한밤중에 조용한 거리를 걷는 거, 진짜 재밌거든요. 혹시 해본 적 있어요?”지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서는 스스로 신이 나서 말했다.“아마 해본 적 없겠죠? 진짜 재밌어요. 가끔 차가 몇 대 지나가면 더 재밌는데, 고요한 밤에 갑자기 누군가가 정적을 깨는 것 같다니까요?” 바로 그때, 지환이 이서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같이 해줄게. 오늘 밤 집에 안 가는 것까지도.” 이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겠어요?” “괜찮고말고. 뭐가 문제겠어?” 어둠 속에서 지환의 시선은 한결같았다. 오히려 이서는 괜히 의심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혹시 내가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집에 가서 단둘이 있게 될 상황을 떠올리니, 이서의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이서는 다시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환 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두 사람은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술집으로 향했다. 술을 마시며 11시가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밤거리를 걷겠다고 했던 말이 무색하게, 이제는 도저히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은 시간 동안 지환과 단둘이 밤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가오자 이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서는 눈을 감았다가, 스스
단톡방은 한동안 조용했는데, 한참 지나서야 하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대체 뭐가 네 눈을 흐리게 만든 거야? 형부가 인기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가 대체 뭐냐고.]이서가 당황하던 찰나, 소희도 메시지를 보내왔다.[언니가 싫어할 말인 건 알지만, 형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줄 세우면, H국에서 M국까진 이어질걸요?]나나도 끼어들며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서 형부가 원한다면 매일 여자 친구를 바꾸는 것도 가능할 거예요. 매번 다 다른 사람일 거고, 죄다 아주 예쁜 여자들이겠죠... 아, 물론 형부가 원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요!]“...” 이서는 조용히 지환을 쳐다보았고, 이서의 시선을 느낀 지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이서는 지환을 몇 번 더 흘깃 본 후,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서는 지환이 정말로 인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그저 닭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서는 이 식당이 이렇게 인기 있는 건 순전히 ‘속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한 입 더 먹은 이서는 문득 지환과 두 시간 넘게 줄은 선 게 별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 먹고 나서는 뭐 할 거예요?”이서가 물었다. “영화 보러 가자.” 이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우리 같이 영화 본 적은 없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지.” 지환은 조용히 이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이서야.” 이서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일로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난 늘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지환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서는 지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다 지나간 일일 뿐이에요. 오늘은 그런 얘기하지 말고... 우리 그냥 제대로...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