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윤이서가 총에 맞은 걸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일 거야.’“하지만.”가은이 어려움을 토로했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윤이서와 이씨 가문의 행동이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어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라고요.”박예솔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떠올랐다.[윤이서가 글 쓰는 걸 좋아한다면서요? 하이먼 스웨이 작가님의 초대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려고 하지 않겠어요?] 가은의 눈동자가 다시 밝아졌다.”그럼 나는 뭘 하면 돼요?”예솔의 눈에 살의가 번뜩였다.[당연히 심가은 씨는...]심가은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세세하게 설명한 예솔이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박예솔이 옅은 미소를 짓는 하지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긴 다리를 들어 책상 위에 올린 지호가 예솔을 자세히 살펴 보고서야 웃으며 말했다.“예솔아, 난 너를 비웃을 수가 없어. 왜냐하면 방금 너한테서 내 모습을 봤거든. 내가 널 비웃으면, 나 자신을 비웃는 꼴이 되어버리는 거잖아?”“난 내 동생이 그렇게 똑똑할 줄 몰랐어. 아니, 무정하다고 해야 하나?” “지환이는 제수씨한테 문제가 생긴 그 순간부터 부하들을 시켜서 너를 조사하고 있었을 거야.”“아직도 모르겠니? 지환이가 널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허, 미안하지만, 나는 원래 좋은 사람이 아니야.”예솔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으나, 꽉 쥔 주먹은 그녀의 복잡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호는 이미 지환이 예솔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을 거라고 말했으나, 예솔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미행을 눈치챈 그녀는 자신을 미행한 사람이 지환의 현재 비서인 조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순간, 그녀는 사그라진 줄 알았던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불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그래,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사람을 이대로 남한테 양보할 수는 없어!’‘지환이의 곁에 있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 해!’ ‘나도 윤이서 못
임하나가 M국에 온 이후, 이서는 눈에 띄게 밝아졌다.하지만 하나는 놀러 온 것이 아닌 출장을 온 것이었기에, 이서와 이틀간 밤을 새우며 긴 대화를 나눈 것을 끝으로 시내에 있는 호텔로 떠나야만 했다. 이서도 그녀와 함께 시내에 가기를 원했으나, 하나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이서야, 네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아.”“여기서 시내까지는 서너 시간이나 걸리는데, 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잖아. 괜히 나 때문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푹 쉬어.”“다음 주에 휴가받으면 또 올게.” “그래, 알겠어.”이서의 시선이 하나의 뒤에 있던 상언에게 떨어졌다.“이 선생님께서 널 돌봐주신다니까 나도 안심이야.”“이서야, 그게 무슨 소리야.”볼이 약간 붉어진 하나가 상언을 보며 말했다.“그냥 데려다주시려는 거야.”이서가 웃으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하나의 볼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이서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듯했다.“됐어, 너랑 이야기 안 할래.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손을 흔들며 하나와 작별한 이서가 두 사람이 떠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바로 이때, 이서의 귓가에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부러워?” 놀라서 고개를 돌린 이서의 얼굴색이 약간 변했다.‘H선생님?’“언제 오신 거예요?”‘H선생님께서 오신 줄은 전혀 몰랐어.’ “방금 왔어.”지환이 이서 곁으로 가서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부러워?”“뭐가요?”이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말이야.”말을 마친 지환은 멍해지는 듯했다. ‘내가 상언이를 부러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바닥을 바라보는 이서의 입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하나는 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단 말이지.’“아마... 우리도 저 두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거야.”놀란 이서가 연거푸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H선생
이서는 지환의 팔을 가볍게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우리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또 어떤 관계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H선생님이 제게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어요.”“그리고... 왜 제 곁을 지켜주시는 건지, 또 우리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는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H선생님의 마음속에 있다던 그 분의 대역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지환의 눈동자에 옅은 웃음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는 끝내 해명하지 않았고, 이서가 두드린 자신의 팔을 바라볼 뿐이었다. ‘기억을 잃은 이서가 처음으로 날 건드렸어.’지환이 고개를 들어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어.’그는 그제야 마이클 천이 한 말을 믿기 시작한 듯했다. ‘언젠가 이서는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릴 거야.’‘이서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그 기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야. 그렇다면 작은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것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겠지.’‘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나는 언제까지든 기다릴 각오가 되어 있어.’“이서야, 내가 말했잖아. 넌 절대 그 사람의 대역이 아니야. 그리고, 그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는 없어.” 이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H선생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전히 H선생님의 말을 믿는 걸 보면... 내 병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아.’지환의 가면을 쳐다보던 이서의 심장이 또 한 번 꿈틀거렸다. ‘가면 아래에 있는 H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일이 더 수월해지겠지?’‘하지만...’‘저 가면을 벗길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할까?’ 지환은 이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그녀가 잃어버린 기억을 곱씹는 것이라 생각한 그가 또 한 번 위로를 건넸다.“생각하지 마. 너무 깊이 생각해서 좋을 건 없어.”깜짝 놀란 이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환을 바라보았다.‘설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계시는 건가?’“혹시...”“이제 그만 돌아가자, 여기 이렇게 오
하나의 마음이 혼란으로 인해 소용돌이칠 때, 그 여자는 이미 상언의 앞에 이르러 있었다.“이 선생님, 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소식을 왜 진작 알려주지 않으신 거죠? 우리 두 사람, 친구 아니었나요?” 그 여자가 가볍게 쥔 주먹으로 상언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두 사람, 꽤 가까운 사이인가 봐.’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랜만에 친구분을 만나신 것 같으니, 저는 먼저 올라가 볼게요.”하나는 상언의 곁에서 빨리 떠나고 싶었다.그 여자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이분은?”그녀는 그제야 하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다.상언이 하나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여자 친구야.” 하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여자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하나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에야 얼굴의 충격을 거두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아, 이 선생님의 여자 친구분이시구나. 실례가 많았어요.”“그러고 보니, 지난번 병원에서도 얼굴을 뵀던 것 같은데... 오늘은 화장하신 거죠?”“H국의 화장술은 정말 대단해서 화장 전후가 완전히 다르다면서요?”“어쩐지 못 알아보겠더라니...” 하나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 여자... 보통이 아닌데?’ ‘내가 화장해서 이 정도이고, 이 선생님의 곁에는 본인과 같은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은근히 알려주려는 심산이잖아.’ 상언의 얼굴색도 변했다. 하나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에는 땀이 약간 배어나는 듯했다. 상언이 냉엄한 눈빛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케이티!”이상한 낌새를 느낀 케이티가 당황하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제가 말실수라도 한 거예요?”상언이 하나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오늘은 이만 가볼게.” 상언은 더 이상 케이티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것을 본 케이티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상언이 M국에 왔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선생님이 H국에 있을 때, H국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더니, 그 소문이 전부 다
하나는 멍해지는 듯했다. “진... 진심이에요?” 상언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린 듯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그 사람들을 찾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CCTV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선생님, 제 정신이에요?”몸을 곧게 편 하나가 상언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무의미하고 복잡한 일을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요?”“무의미하지 않아요.”상언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나 씨에게 믿음을 줄 수만 있다면 전혀 무의미한 일이 아니에요. 난 하나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상언의 눈빛을 마주한 하나가 입술을 움찔거렸다. “이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에요. 사실 요 며칠... 몇 번이고 이 선생님께 한 걸음 다가갈까 생각했었는데, 그때마다 엄마랑 같이 아빠의 간통 현장을 잡으러 다닌 일이 떠올라서 너무 괴로웠다고요.”‘아직도 그 일이 눈에 선한 것 같아.’‘흠씬 얻어맞으며 소리를 지르던 내연녀, 당황하던 아버지, 그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까지...’‘이미 그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버렸다고.’‘그 일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하나 씨.”상언이 온화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러는 건, 하나 씨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을 타파하기 위한 게 아니에요. 오직 하나 씨를 위한 거죠.”“하나 씨가 마음을 꺼내 증명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할게요.”“그런데도 이 선생님을 믿을 수 없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면요?”“하나 씨, 설령 내가 마음을 꺼내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내 심장에는 내가 하나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쓰여 있지 않을 테니까요.”“하지만... 나는 하나 씨한테 내 마음을 맡길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 씨에게 맡겨야지만 내가 가장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가 입술을 오므렸다.“이 선생님...”
‘정말 마음에 드는 눈치잖아?’이서가 입장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이서 씨가 그 강연에 간다면, 저희 엄마가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이서가 방심한 것을 알아차린 가은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계획대로야.’이서가 입장권을 손에 든 채 물었다.“입장권 두 장은 얼마예요?”“아니에요, 저희 엄마 연설이니까 제가 살게요.”가은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요.”그녀는 바로 이씨 가문을 고택을 떠나려 했다. 이서가 멀어지는 가은의 뒷모습과 손에 든 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그녀의 마음속에는 강연을 듣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렁이는 듯했다. “스웨이 여사가 강연을 한다고?”갑자기 배미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서가 고개를 돌렸다.“가고 싶어?”배미희가 웃으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일 때문에 망설이고 있구나.’배미희는 단번에 이서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강연이 듣고 싶은 거라면, 내가 주최 측이랑 상의해서 단독으로 생방송 플랫폼과 연결해 볼게. 뒤에 있을 질문 코너도 현장에 있는 관중처럼 참여할 수 있게 한다면, 집에서도 현장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느낄 수 있을 거야.”“어때?”“그게 가능할까요?” 약간 흥분한 이서가 물었다. “그럼.”배미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이 세상에 우리 이씨 가문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어.”“아, 아니다, 우리 이씨 가문조차도 손쓸 수 없는 일이 하나 있긴 하구나.”“그게 어떤 일인데요?”이서가 궁금해하며 물었다.얼굴에 만연하던 웃음기가 반쯤 굳은 배미희가 잠시 후에야 입을 열었다. “M국 최고의 명문가 집안에 관한 일이지.” “그 가문은 M국에서 제일가는 가문이라 할 수 있어.”이서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흐릿한 이목구비가 떠오르는 듯했다.이서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본 배미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얼른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저기... 이서야, 온라인으로 스
말을 마친 배미희가 하인에게 자신이 먹던 음식을 모두 2층으로 옮기라고 지시하며, 이서와 지환에게 1층을 양보했다. 배미희가 이렇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는 배미희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정말이지 H선생님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아.’‘이전에는 H선생님과 친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H선생님의 마음속에 다른 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H선생님과 가깝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H선생님은 몇 번이고 내가 그분의 대체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이제는 내가 H선생님께 다가가고 싶지 않아.’‘두려워.’‘내가 이대로 무너져 버릴까 봐, 또 이성을 잃게 될까 봐 너무 두렵다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지환이 뼈를 바른 생선 살을 이서의 그릇에 넣으며 말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그릇 안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서가 좋아하는 생선이었지만, 가시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먹는 것을 포기하려던 참이었다.‘뭐야, 내가 이 생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계신 거야?’‘만약 정말 내가 이 생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러시는 거라면...’순간, 이서의 머릿속과 눈앞이 또 한 번 흐릿하게 변했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일상의 소리마저 찢어질 듯한 소음으로 바뀌자... 쨍그랑!손에 든 그릇을 땅에 떨어뜨린 이서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지환이 이서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이서야!”하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이서는 지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몸이 너무 가벼워... 아픈 건 아니지만...’‘구름 위를 날고 있는 것 같아...’“이서야?!”이서의 손을 꽉 붙잡은 지환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리멍덩한 표정을 한 이서는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나, 갈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표님과 이서 씨의 감정이 아주 돈독하다는 걸 꼼꼼하게 고려하지 못한 제 잘못도 있습니다. 작은 동작 하나라도 이서 씨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마이클 천이 어두운 얼굴로 지환을 쳐다보았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앞으로는 이서 씨의 곁에 계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대표님께서 무심코 하신 행동이 이서 씨에게는 큰 자극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마이클 천의 말을 들은 배미희가 지환을 바라보았다. ‘아직 이서의 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니...’‘하늘이 원망스러워.’마이클 천 역시 안타깝다는 듯 지환을 바라보았다.‘그동안 경과가 너무 좋아서 이서 씨가 천천히 대표님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하이먼 스웨이 여사님처럼.’‘그런데... 이서 씨에게 대표님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아.’‘하이먼 스웨이 여사님과는 완전히 다른 경우였던 거지.’‘이제는 나조차도 언제쯤 대표님과 이서 씨가 솔직한 만남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배미희와 마이클 천은 지환이 크게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오히려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알겠습니다.”지환이 배미희에게 말했다.“이서는 아주머니께 맡길게요. 꼭 이서를 잘 보살펴 주세요.”배미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지환은 몸을 돌려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나고 있었다. 멀어지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배미희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지환이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어...’“사모님,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배미희에게 인사를 건넨 마이클 천 역시 이씨 가문의 고택을 떠났다. 방에 들어선 배미희가 침대에 잠들어 있는 이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서는 밤이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배미희가 하인에게 음식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배고프지? 자, 어서 밥 먹어.”몸을 일으킨 이서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배미희를 바라보았다.“사모님, 혹시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