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서는 하지환을 밀어내며 고개를 들어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지 마요.”그녀는…… 이 차가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하지환은 실눈을 뜨고 윤이서의 어깨를 잡았다.“당신 오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오늘의 윤이서는 매우 이상했다.윤이서는 고개를 한쪽으로 치우쳐 눈가에 닿은 눈물을 억지로 거두고 입술을 깨물었다.“우리는 이혼할 거잖아요. 나는 이혼할 때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그녀가 하은철과 결혼을 발표할 날이 바로 하지환과 이혼한 날일 것이다.그때가 되면 하지환은 그 립스틱의 주인을 찾아갈 수 있고, 그녀도 걱정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결국 이 세상에서 아무도 그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하지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은 답답했다.그리고 눈빛은 뚫어져라 윤이서를 쳐다보며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려는 것 같았다.이상언도 이쪽에 주의를 돌리며 걸어왔다.“두 사람은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지환은 그를 차갑게 흘겨보더니 성큼성큼 별장을 떠났다.이상언은 멍해졌다.왜 이래?왜 그에게 화를 내는 거지?윤이서는 억지로 웃었다.“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말을 끝내고 그녀는 뒷문으로 갔다.이상언은 이 상황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먼저 하지환을 찾아갔다.문을 나서자 그는 하지환이 뒷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고, 아득한 연기는 깊고 선명한 이목구비를 몽롱하게 만들었다.이상언이 다가와서 물었다.“싸웠어?”“아니.” 하지환은 목소리가 답답했다.‘이야, 불쾌하다는 것을 아예 드러내고 있는데 싸우지 않았다니.’“너 해서는 안 될 말한 거 아니냐, 내가 너에게 말하는데, 여자는 달래야 해. 달래면 괜찮아질 거야.”하지환은 실눈을 뜨고 이상언을 흘겨보았다.“왜 달래야 하는 거지?”이상언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너 참 잘났다!”‘앞으로 이서 씨 쫓아다닐 때도 이렇게 잘났으면 좋겠네...’하지환은 초조하게
그렇게 그녀는 편하게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싶었다.임하나는 윤이서가 이상한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물론이지. 네가 얼마 동안 살고 싶든 상관없어. 가자.”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다.임하나는 아주 천천히 운전을 했고 수시로 고개를 돌려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마치 깨진 도자기 인형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임하나는 마음이 아팠다.“이서야,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급하게 너를 찾은 이유가 대체 뭐야?”윤이서는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었다.“하은철과 결혼하래.”임하나는 어이가 없었다.“왜 기어코 너를 그 쓰레기와 결혼하게 하는 거지?”“그들은 하 씨 집안에 의지하여 윤 씨 집안을 되살리고 싶어하기 때문이지.”윤이서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가 이렇게 되니 임하나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너는 동의하지 않았지?”“동의했어.”임하나는 바로 차를 멈추었다.“야, 너 미쳤어?”윤이서는 웃었다.“동의하지 않으면? 그들이 내 앞에서 농약을 마시는 거 지켜보라고?”임하나는 핸들을 세게 두드렸다.“그들이 자살로 너를 협박했니? 세상에, 이게 무슨 부모야? 나 지금 네가 그들의 친딸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다 든다?!”윤이서는 힘없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니 이상하게도 그녀는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하나야, 화내지 마. 이것이 바로 내 운명이야. 어릴 때부터 지금 때까지 가족들이 나에게 줄곧 말한 것은 바로 내가 하은철과 결혼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거야. 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을 때,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존경했지. 그것도 나쁘진 않았어…….”그녀의 목소리는 겨울날 호수처럼 차가웠다.임하나는 가슴이 아팠다.“그러나 넌 하은철과 결혼하기만 하면 신장을 윤수정한데 주어야 하잖아. 제기랄,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상간녀 주제야 네 앞에서 행패를 부려도 그만이지만 또 네 신장을 가져가다니. 정말 너무 화가 나잖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 민예지는 하이힐을 신은 채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까만 치파오를 입었는데, 완벽하게 재단된 치파오는 그녀의 섹시한 몸매를 완벽하게 그려냈고, 걸을 때, 트인 곳의 늘씬한 다리는 보일락말락 하지만 단정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사람은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의논했다.“세상에, 이게 그 벼락부자 민예지 아가씨라고?”“민예지가 입은 치파우는 정말 예쁜데? 몸매도 좋고!”“스타일이 언제 이렇게 좋아졌지?”……민예지는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반응이었다.요 며칠, 그녀는 집에서 매일 자태를 연습했고, 또 오늘 입을 옷과 메이크업을 골랐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가 윤이서보다 더 단정하고 우아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그녀가 기세등등하게 펜을 들고 손님 명단에 사인하려고 할 때, 뒤에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감탄을 금치 못했다.민예지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그 자리에 멍해졌다.평범하기 그지 없는 차 안에서 한 여자가 내려왔다.여자는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녀의 예쁜 어깨 라인을 드러냈다. 허리에는 진주색 허리띠를 맸는데, 가녀린 허리 라인을 그래도 그려냈다. 그리고 아래는 새빨간 하이힐을 신고 가녀린 발목을 드러냈는데, 얼핏 봐도 예쁜 여자였다.그러나 그녀가 몸을 돌리는 순간, 호접골은 마치 나비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특히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평소 단정하고 우아한 윤이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윤이서의 미모는 누구나 다 알고 있었는데, 다만 뜻밖에도 그녀도 이렇게 섹시할 줄은 몰랐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섹시할 수 있었다니.민예지의 안색은 점차 보기 흉해졌다.민예지는 원래 오늘 우아함으로 윤이서를 깔아뭉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 여자가 다른 스타일을 선택해, 성숙하고 매혹적인 스타일로 바꿨다니, 더
윤이서는 하은철의 눈빛을 무시하고 미소를 지었다.“도련님은 기억이 정말 좋지 않은 거 같군. 해마다 할아버님은 메인 테이블에 내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도련님이란 호칭은 소리 없이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하은철은 눈썹을 찌푸렸고, 윤이서의 이 호칭을 매우 싫어한 게 분명했다. 그는 전에 그녀가 자신을 은철이라고 불렀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윤수정은 기침을 하더니 즉시 하은철의 시선을 끌었다.“왜, 어디 아파, 내가 먼저 너 병원에 데려다 줄까?”윤수정은 간신히 고개를 저었지만 눈빛에는 교활함이 스치더니 윤이서에게 하은철은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자랑했다.윤이서는 그녀의 이런 수작에 진작에 관심이 없어 가려던 참에 윤수정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오늘은 할아버님의 생신이니 나도 여기에 남고 싶은데. 언니는 날 쫓아내지 않겠지?”윤이서가 고개를 돌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어르신이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말했다.“난 너를 청한 적이 없구나.”윤수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억울해하며 하은철을 바라보았다.하은철은 윤수정을 뒤로 감쌌다.“할아버지, 수정도 호의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윤이서는 이 장면을 보면서 문득 하지환이 처음으로 자신을 그의 뒤에 감쌌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그녀가 하은철과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그녀가 죽은 후, 그는 자신의 산소로 찾아올까?“이서야…….”어르신의 목소리는 윤이서를 현실로 잡아당겼다.“할아버님, 왜 그러세요?”어르신이 말했다.“이서야, 저 아이는 네 사촌 여동생이고, 윤 씨 집안 사람이니, 여기에 남길지 쫓아낼지, 할아버지는 너에게 결정을 맡기마.”이 말이 나오자 윤수정과 하은철은 동시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어르신이 이렇게 말한 의도는 매우 분명했다.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윤이서가 하 씨 집안의 여주인이며, 그녀는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이서는 어르
윤수정은 몸을 바르르 떨며 간절한 눈빛으로 하은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할아버지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쳤다.순간, 마음이 오싹해났다.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얼굴의 웃음기가 눈에 띄게 살아졌다.“설마 네가 정말 형부를 넘봤단 말이야?”윤수정의 숨결이 순식간에 가빠지며 급히 변명했다.“아닙니다, 할아버지,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습니다…….”“그래? 그럼 맹세해봐.”윤수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 뭇사람들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네, 저 윤수정은 맹세합니다. 만약 형부랑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저는 반드시 벌을 받아 죽을겁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싱긋 웃었다. 자기를 죽일려는 윤수정의 마음을 알아 챈 윤이서가 어찌 그와 하은철의 결혼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만약 결혼을 하더라도 오늘의 맹세로 늘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겠지.“이 맹세의 속박으로 동생은 반드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겁니다. 오늘 할아버지 생신이잖아요. 몸도 안 좋으신데, 기왕 온 이상, 여기 계세요.”말이 끝나자 윤이서는 고개를 들어 하은철을 바라보았다.“은철 씨, 그 동안 우리 수정이를 돌봐줘서 고마워요. 집안에 남자가 없으니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네요.”한치의 실수가 없는 공식적인 말투였다.사석에서 아무리 옹졸하더라도 사람들은 윤이서의 예의 바른 모습만 기억할 것이다.어르신도 윤이서의 일처리 방식을 칭찬하였다.“이서야, 오늘 할아버지 곁에 앉거라.”“네, 할아버지.”윤이서는 어르신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이를 본 하은철은 분노와 질투 등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심란한 그는 윤수정을 직원에게 맡기고 무대 뒤로 향했다.하은철은 집사에게 물었다.“둘째 삼촌은요?” “도련님, 어르신께서 지금 휴계실에서 쉬고 계십니다.”집사가 웃으면서 말했다.“알았어요.”휴계실로 들어가보니 하지환은 소파에 앉아 여유롭게 화면를 보고 있었다.벽만 한 모니터 위에는 연회장 안의 모습이 보였다.하
“그래?”하은철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생각이 나지 않아 아예 그의 옆에 앉았다.“다른 사람이 맸었나봐요.”그제야 긴장이 풀린 하지환은 무심코 대답했다.“응.”하은철은 맥주 한 모금을 더 마시더니 그제야 진정되었다.“참, 삼촌, 나갈거예요?”하지환은 화면속의 윤이서를 힐끗 보더니 이마에 손을 얹고 긁적이며 말했다.“아니야, 그냥 여기서 보는 게 더 재미있어.”하은철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그럼 먼저 나가겠습니다.”윤이서와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생각에 관자놀이가 아파났다.현재 이 시각, 윤이서는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두 사람을 본 다른 하 씨 가문의 사람은 눈치를 보면서 아첨을 떨었다.“이서 씨, 정말 어르신께 잘 하네요. 평소 어르신은 잘 웃지도 않는데 오늘은 이서 씨가 있어서 얼굴에 꽃이 폈네요.”비록 잘 보일려고 한 말이긴 하지만 이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윤이서는 웃기만 할뿐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이때, 하은철은 이미 연회장에 도착을 했다. 윤이서에 대한 칭찬를 들은 하은철은 문득 둘째 삼촌이 떠올랐다. 윤이서와 몇번밖에 만나 본적 없는 삼촌은 그녀를 너무 보호해 주는 것 같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이 윤이서에게 쏠렸다.“은철이가 왔구나. 윤이서 옆에 앉거라.”말을 마치자 둘의 사이가 생각난 하도훈은 말을 바꿀려고 했지만 하은철은 이미 윤이서 옆에 앉아있었다.이것을 본 하도훈과 어르신은 순간 눈을 마주쳤고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요즘 하은철이 윤이서를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도 좋은 징조이다.다른 사람들도 서로 알고 있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자리에 앉는 하은철은 두통수가 시려났다. 하지만 뒤로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윤이서는 옆에 있는 하은철을 무시한 채 어르신에게 물었다.“할아버지, 둘째 삼촌은 언제 오시나요?” 연회가 곧 시작되는데 하지환이 보이지 않자 오늘 밤 또 못 만날까 봐 걱정했다.“둘째 삼촌? 벌써 도착했는데.”하은철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그제야 윤이
미친년!‘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은철이 오빠를 꼬셔? 정말 뻔뻔스럽구나!’하지만 윤이서가 곧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니 윤수정은 점차 평온해졌다.윤이서는 하은철한테서 시선을 거두고 몸을 가볍게 뒤로 젖히며 말했다.“도련님께서 말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그녀는 직원들에게 물어보면 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윤이서의 대수롭지 않은 태도는 하은철을 자극했다. 도대체 왜 자기한테만 차갑게 대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화내려는 순간 민예지가 와인을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하은철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바로 윤이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구에서 윤이서에게 기회를 뺏긴 것에 복수를 하고 싶었다. 윤이서가 준비한 선물이 고작 2억 정도 되는 서예라는 것을 알고 비웃으려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시선이 느껴 진 윤이서는 너무 불편해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민예지는 술잔을 들고 어르신에게 인사를 했다.“할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인사드리겠습니다. 만수무강 하십시오.”어르신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한다.“그래, 고마워.”민예지는 입술을 오므작거리고 다시 윤이서에게 시선을 돌렸다.“할아버지께서 최근 골동품에 뺘졌다고 들었어요.”“맞아, 늙으니까 좋아하는 것들을 찾게 되더라.”“그럼 제가 드리는 선물이 마음에 들거예요.”“그래? 어떤 선물인데?”민예지는 직원을 시켜 선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어른신이 정교한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작은 코담배통이 들어있었다. 또한 좋은 뜻을 가진 물건이기도 하다.어르신은 선물을 손에 들고 이러저리 감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건륭시기의 코담배통입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 온데간데 돌아다녀 가까스로 찾았습니다.”“참 고맙네, 이게 비쌀 건데.”민예지는 웃으며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아주 싸요. 겨우 100억 정도밖에 안됩니다.”100억이라, 너무 비쌌다. 그러나 어르신한테 잘 보여서 하지환와 결혼하게 된다면 이 돈은 아무것도 아니였다.가장
“그럼 가져와 봐.”민예지는 직원들에게 지시했다.하지만 직원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어르신을 쳐다보았다.“가져와, 나도 이서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싶어.”직원들은 그제서야 가지러 갔고, 곧 두루마리를 들고 돌아왔다. 펼쳐보니 조지겸의 서예작품이 였다.이 사람은 업계에서 별로 유명하지 않다. 민예지가 홧김에 조지겸의 작품을 사지 않았더라면 이런 사람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이것을 본 민예지는 순간 비꼬는 듯 입꼬리를 굽혔다.“윤이서, 이것이 바로 네가 준비한 선물이야? 이런 서예가 할아버지의 신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동안 할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이뻐해 줬는데.”다른 사람들도 소곤대기 시작했다.“할아버지가 괜히 예뻐해줬네, 유명하지고 않는 작품을 선물해주다니.”“그러니 도련님이 널 안좋아하지, 말만 잘해서 뭐해, 일을 이 따위로 하는데.”“…….”평소라면 하은철은 분명 기뻐하겠지만 오늘은 왠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그는 윤이서를 바라보았다.윤이서는 차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예 앞으로 다가왔다.“몇 억짜리 선물은 분명 할아버지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저의 전재산이에요.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웅장한 글씨체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도서관에 가서 모든 서예가의 작품을 찾아보니 조지겸이 가장 어울렸습니다.”“조지겸은 비록 유명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은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글씨체이기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민예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윤이서를 힐끗 쳐다보며 말을 하려는 순간 어르신이 떨며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조지겸, 정말 그의 작품이란 말인가!”세월에 날이 간 거친 손은 서예 위로 향했다가 멈췄다. 어르신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이 모습에 다들 놀라 있었다. 필경 어르신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 였기때문이다.하도훈은 얼른 앞으로 나아가 어르신을 부축였다:“아버지, 괜찮으세요?”어르신은 눈을 감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입을 열었다.“50여년전,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