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민정이 만난 건...“미인계는 우리한테 통하지 않아! 다른 수나 생각해 보시지?”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던 이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지환에게 말했다.“대표님, 저 여자는 윤 대표님의 머리카락 한 올보다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앞에서 미모를 뽐내다니,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민정의 얼굴에는 다정함이 사라졌다.“무슨 소리야?!”갑자기 다가온 그녀가 이천의 목을 움켜쥐었다.“방금 말한 윤 대표가 누구야? 그 사람이 나보다 예쁘다고? 말도 안 돼, 얼른 그 사람을 불러! 부르라고!” 이민정의 동작은 너무도 빨라서 어둠의 세력 조직원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환조차도 눈을 가늘게 떴다.그는 이천의 곁에 서 있었지만, 그녀의 움직임을 정확히 보지 못했다.게다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민정의 출신은 전혀 알아내지 못했고, 그녀의 체형만 보고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앞 사람들보다 훨씬 강해.’ 이천을 구하러 가려던 여러 사람이 튕겨 나가는 것을 본 지환이 인상을 찌푸리며 이민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내 목소리를 높였다.“그 사람, 내 와이프야.”이민정은 지환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두 눈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솟구치고 있었다. “너도 내가 네 와이프의 머리카락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해?”이 말을 뱉는 이민정은 이천의 목을 힘껏 졸랐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이천은 곧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녀는 기쁘게 이천을 놓아주고 지환의 앞에 다가갔다.“그럼 내가 네 와이프보다 더 예쁘다는 거네?” “아니, 나는 단지 네가 내 와이프와 비교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할 뿐이야. 너와 내 와이프를 비교하는 건... 내 와이프에 대한 모욕이야.” 이민정은 이 말을 듣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폭주하는 괴물처럼 지환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환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녀가 돌진하는
한편, 호텔에 있던 이서는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다.왠지 모르게 눈을 감으면 지환의 처참한 죽음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그녀가 이런 고통에 시달리며 신경쇠약의 극치를 달리던 찰나, 책상 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서는 혼비백산했다.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하도훈이었다.어쩌면 시아버지가 되었을지도 모를 어른, 이서는 그가 자신에 대해 과하게 친절하지도, 냉담하지도 않았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적인 연락을 거의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하은철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도훈이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은 이서의 불길한 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몇 초 후, 수화기 너머에서 하도훈은 명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서니?]“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한테는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하도훈은 이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너랑 통화 한 번 하기 참 어렵구나.] 이해하지 못한 이서가 물었다.“무슨 말씀이세요?”[아직도 모르는 게야? 지환이가 우리랑 네가 통화하지 못하도록 네 모든 전화번호를 차단해 버렸잖니.] “네?”이서는 이 일을 전혀 몰랐다.하도훈은 또 웃기 시작했다.[정말 몰랐구나? 역시 지환의 깊은 속은 나도 감탄할 정도라니까?] “여보세요?”하도훈이 말했다.[지환이 녀석이 지금 어디 있는 줄 아니?] “아니요.”이서가 고개를 저었다.[나는 안단다.]이서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내가 있는 여기에 있지.]하도훈의 말투가 갑자기 아주 이상하게 변했는데, 마치 거대한 슬픔이 잠재되어 있는 듯했다.[그 녀석을 만나러 오고 싶니?]이서는 한동안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거기서 뭘 하고 있는데요?”[하하하, 하하!]하도훈이 또 한번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웃음에는 처량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너한테 전혀 말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지환이
[하나 씨가 이미 너한테 가고 있어. 이서야, 꼭 기억해. 너는 지환이의 중심이야. 네가 안전해야만 지환이가 뒤돌아보지 않고 근심 없이 싸울 수 있어.] 이서가 인상을 찌푸렸다.마음속에는 수많은 불만이 있었지만,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곳에 간다고 하더라도, 닭 한 마리조차 잡을 수 없는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되려 지환의 짐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그나마 안정을 되찾은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이서는 지환을 찾아갈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곧 호텔에 도착한 하나가 이서와 함께 있어 주었다. “이서야, 우리 텔레비전 볼까?” 두 사람은 모두 잠을 잘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이서는 침대에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하나는 그녀를 힐끗 보았으나, 그녀가 자기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마음도 아주 뒤숭숭했다.‘이 선생님이 가려는 곳은 분명히 아주 위험한 곳일 거야.’ 하지만 하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내가 이 선생님의 아내였다면, 당당하게 가지 말라고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하...” 하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불가능한 일이야. 이 선생님과 형부는 아주 가까운 사이잖아. 형부에게 어려움이 생긴 이상, 이 선생님이 팔짱을 끼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하나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고서야 텔레비전을 켰다. 한밤중 텔레비전에서는 지루한 야간 드라마만이 방영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불 속에 몸을 움츠린 채, 대화만 간간이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은 이미 각자의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같은 시각.병원에 있던 지환은 이미 피로 흥건해져 있었다.그의 행동은 점점 느려졌는데, 다른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조차 이미 쓰러진 지 오래였다. 다른 사람이 주위를 분산시키지 않자, 지환은 마치 우리에 갇힌 짐승이 되어버렸다.“내가 네
이민정의 동공이 심하게 움츠러들었다,그녀는 곧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면서 물었다.“네 와이프, 저 사람 중에 있어?”지환은 간신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민정이 하염없이 눈살을 찌푸렸다.“네 와이프가 저 사람 중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 여자는 네가 거짓말을 해도 듣지 못해. 게다가 그 거짓말이 너를 살린다는데도 말하지 않겠다고?” “들을 수 있을 거야.”이민정은 완전히 격노했다.“나를 놀리는 데 재미라도 들린 건가? 그 여자가 어떻게 들을 수 있다는 거지?”“우리 사이에는 텔레파시가 있어. 천산만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지.” “흥!”이민정은 지환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젖혀 크게 웃었다. “하도훈이 네가 YS그룹의 대표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 바보라면 모를까.” “좋아, 네 와이프를 그렇게 아끼는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네 와이프보다 예쁘다고 말할 수 없다면, 나는 너를 염라대왕과 만나게 해줄 수밖에 없어!”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다시 이야기하자.” 이민정은 이 말을 끝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지환의 목을 힘껏 졸랐다. 하지만 지환의 눈빛은 매우 평온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 마음속에서 좌절감이 솟아오른 이민정이 악랄하게 말했다.“난 정말 너를 죽여버릴 거야!” “알아.”“아는데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내가 뭘 할 수 있겠어?”지환이 가볍게 웃었다.“내 목숨은 네 손 안에 있어. 네가 힘만 조금 주면 난 내일의 태양을 볼 수 없겠지. 그런데 더 말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어?” “미쳤구나? 완전히 미쳤어!”이민정이 지환의 목을 확 물었다.“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면서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만났어. 고작 내가 네 와이프보다 예쁘다고 말하라고 했을 뿐인데, 그게 네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어렵다고?!” 이민정은 정말이지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다른 사람들이 내 손아귀에 잡혀 있고, 말 한마디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그러나 이민정의 모습은 정말 유령과 같아서 사격수조차 그녀를 조준할 수 없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상언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노리는 기회를 틈타 급히 차에서 내렸고, 지환을 차에 태웠다.차 안에서 상언의 손을 잡은 지환이 물었다.“이서는?”“걱정하지 마. 나오기 전에 이서한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호텔에만 있으라고 말했으니까.” “그리고 하나 씨한테도 이서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어.”마음 졸이던 지환은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저 여자는... 상대하기 어려워.”“그런 것 같네.”상처투성이인 지환을 보던 상언이 말했다.“우린 먼저 철수할까? 하은철이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는 앞으로 천천히 조사하면 되잖아.” 지환은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하도훈은 하은철을 이용해서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들였어. 아마 순순히 내보낼 생각은 전혀 없을 거야.” “저 여자도 상대할 수 없는 우리가 맨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상언의 시선이 이민정에게 떨어졌다.그는 하나둘씩 쓰러지는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저 여자는 대체 뭐야? 왜 저렇게 강한 거지?” “나도 모르겠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여자도 하지호의 수하였을 거야. 내가 YS그룹을 팔고 난 후에 모집되었을 거고.” “하지호한테 저런 사람이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지?”‘하나만 해도 이렇게 무서운데,’‘만약 하나가 더 있다면... 그건 무적이나 다름없는 거야.’ “저 여자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상언이 물었다. “저 여자의 유일한 단점은 외모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쓴다는 거야.”“하지만 네가 못생겼다고 말한다고 한들, 저 여자는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다만, 너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겠지.” 상언은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그렇게 재미있는 사람이 있다고? 나한테 저 여자를 해치울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다만, 협력이 좀 필요하지.”그는 말하면서 앤서니를 쳐다보았다.“앤서니 씨, 사
이민정의 손동작은 정말 멈추었다.상언을 바라보는 그녀는 여전히 약간의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이를 본 상언이 웃으며 말했다.“왜? 아직도 날 못 믿는 건가? 내 여동생이 왜 당신보다 더 예쁜지 알아? 내가 성형수술을 해줬기 때문이지.”“그래서 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진 거야.”“다만, 걔는 원래 바탕이 그리 좋지 않았어. 그래서 수술했는데도 여전히 결점이 있지.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은 정말 완벽하잖아? 수술만 한다면 금상첨화일 거야. 내 여동생보다 더 예뻐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정말이야?”이민정은 분명히 설렌 듯했다. 그녀가 한 걸음 더 나아갔다.“그럼 내가 어디를 손대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될 수 있을까?”상언은 여자를 에워싸고 계속해서 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의 생김새는 아주 완벽해. 다만, 눈이 좀 아쉽지.” “눈?”이민정은 승복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너도 알 수 있겠지만, 내가 내 몸에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 바로 눈이야. 그런데 그런 눈이 유일한 결점이라니... 너, 의사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기꾼 아니야?”이민정은 또 한 번 손찌검했다.하지만 상언이 손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우선 내 말부터 들어봐.” “확실히 예쁜 눈이긴 하지만, 당신의 분위기와 맞진 않아.” 이민정은 온몸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왜지?”“당신의 눈동자를 좀 봐. 부드럽고 매혹적이지만, 당신이 풍기는 분위기는 오히려 냉정하고 무자비하잖아. 즉, 그 눈동자와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지.” “네 말대로라면, 내 눈알을 파서 새로 바꿔야 한다는 거야?!”상언이 낮게 웃었다.“바로 그거야!’“감히 날 놀려?!”이민정은 분노하며 손을 들어 상언의 목을 졸랐다.하지만 그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고, 뒤로 재빠르게 몸을 피한 후, 차 안에 있는 앤서니를 향해 소리쳤다. “바로 지금이에요!”이민정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소용없었다.그녀는 분노로 인
“저렇게 강한 사람은 사실 죽을 필요가 없었어. 고작 아름다움을 향한 마음속의 집념 때문에 죽은 거야.”상언의 말 속에는 뼈가 있었다.지환은 앞을 보며 천천히 앉았고, 자신을 부축하러 온 앤서니를 밀치며 또박또박 말했다.“사람이 살 수 있는 건 마음속의 집념 때문이지 않나? 집념조차 없으면 사는 게 무슨 의미지?”이 말을 들은 상언은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시각.CCTV로 이 장면을 본 주경모가 말했다.“이민정 씨가 이렇게 죽었단 말입니까?” 하도훈이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하지호가 저들을 넘겨줄 때 그러더군. 확실히 강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강할수록 약해지기 쉽다고. 아무리 강한 사람도 자신만의 약점이 있기 마련이잖아?” “그럼 어떡하죠? 정말 하 대표님이 들어오게 두실 겁니까?”“내가 이 모든 걸 준비한 이유는 하지환이 오길 바랐던 거야. 그리고 절대 잊지 마, 우리에겐 아직 비장의 카드가 남았어.” “윤이서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지만 윤이서 씨는 안 오실 것 같습니다.”“안 올 것 같다?”하도훈이 가볍게 비웃었다.“안 온다면 우리가 직접 데리러 가면 되지.” 주경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하도훈을 바라보았다.같은 시각.호텔에서 졸음과 싸우며 걱정스러워하던 이서가 밖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곧 잠에 빠지려던 하나를 살짝 밀며 말했다.“하나야, 너도 들었어?” 하나는 단번에 깨어났다.“형부랑 이 선생님이 돌아오신 걸까?”“아니.”이서는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한 후, 정신을 집중하고서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발소리야.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니다, 적어도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아.” 한동안 주의를 기울인 하나도 여러 개의 발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하나가 침대에서 내려왔다.“이 선생님이 여긴 분명히 안전할 거라고, 호텔을 나서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파견한 사람들인 것 같아.” 이서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하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서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이서야, 반드시 스스로를 잘 보호해야 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를 다시 한번 보고는 결연히 입구로 걸어갔다.“누구세요?”그녀의 목소리는 평상시처럼 차분해서 조금의 당황스러운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문밖의 사람들은 피에 굶주린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보스의 명령을 받아 하씨 병원으로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저희가 하 대표님과의 재회를 돕겠습니다.” 이서는 발코니 밖에 숨어 있는 하나를 한 번 보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고 말했다.“갑시다.” 문밖에는 한 덩치 큰 사내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힘이 장사인 듯했는데, 주먹 하나로도 이서를 눌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이서처럼 부드러운 사람은 힘이 없었고, 그와 힘으로 맞붙을 생각도, 죽을 각오로 싸울 계획도 없었다.그저 죽기 전에 지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 남자는 이서가 이토록 순순히 따를 줄은 몰랐는지 웃음을 터뜨렸다.“상황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인 법인데, 정말 현명하시군요. 아래층에서 고집스럽게 저항하는 경호원들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이서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남자가 말하는 경호원들은 그녀가 발코니에 있을 때 아래층에 있던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 사람들, 전부 당신이 해치운 건가요?”이서가 묻자, 그 남자가 꽤 자랑스럽게 말했다.“네, 하지만 분명히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보통 경호원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 조직원입니다, 어둠의 세력 조직원들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여길 보호하고 있었다니, 하지환은 본인의 목숨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직 살아는 있는 거죠?”이서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섰다.그러자 그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누구요? 아, 하지환이요? 물론 살아는 있죠.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도 못했는데 죽었을 리가요.” 이서는 이 말을 듣고서야 팽팽했던 등줄기가 느슨해지는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잠시 후, 소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서 언니, 솔직히 말해도 절대 화내면 안 돼요.]“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소희 씨도 내가 무슨 성격인지 잘 알잖아? 말하라고 해놓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서의 말에 하나와 소희, 나나는 용기를 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서야, 형부가 신분 문제로 널 속인 건 맞지만, 그 외의 다른 일에선 너를 진심으로 대했어.]“그러니까 네 말은 하지환 씨가 날 속인 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응... 그런 셈이지.]“소희 씨 생각은 어때?”소희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답했다.[그럼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형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형부만큼 언니한테 잘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요.][만약 저라면 그 정도 잘못은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소희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고, 혹여나 이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머뭇거렸다.다행히 이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괜히 별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거네?”[언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소희가 급히 해명했지만, 이서는 한사코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 씨,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희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소희 씨의 솔직한 생각인 거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니, 결론도 다를 수 있어. 난 소희 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잘 생각해 볼게.”소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나나가 나섰다. [언니, 아시다시피 저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아요.]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에 맡기라고...?”‘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하도훈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게 아니고, 그때까진 고민할 시간이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