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씨 집안의 일은 무진에게 맡기는 게 확실히 더 타당할 터.그에 대해 안금여 또한 이견이 없었다.원래 오늘 방문한 것도 무진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였다.그렇게 차를 한 잔을 나눈 뒤, 안금여가 돌아갔다.바쁜 가운데 잠시 짬을 낸 집사가 거실에 앉아 있는 무진에게 다가왔다.“도련님,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무진의 입은 그리 까다롭지 않은 편이었지만, 집사는 매번 조리법을 바꾸어 영양이 풍부한 음식들을 만들어 주려 했다.매번 물어본 후에야 주방에 신선한 식재료를 준비하게 하고, 또 몸을 보양하는 음식을 만들게 했다.무진이 바로 대답했다.“샤브샤브.”‘샤브샤브?’집사는 의아했다.‘도련님이 한 번도 드셔 본 적이 없는 것인데?’또 나이가 들어 귀가 약해진 게 아닌가 의심했다.메뉴를 말한 무진은 집사가 여전히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또 뭔가?”“아닙니다, 도련님. 다시 한 번 확인하겠습니다. ‘샤브샤브’, 맞으십니까?” 무진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특히 ‘샤브샤브'를 강조하며 물었다.“응.” 무진이 조용히 대답했다.왠지 언짢은 듯한 기운을 느낀 집사가 잠시도 지체 않고 얼른 주방으로 달려 갔다.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성연은 식탁에 올려진 샤브샤브 용 화로를 보고 눈썹이 찌푸려졌다.“오늘 저녁, 이거 먹어요?”화로 옆에 앉아 있는 무진은 블랙 셔츠 차림이었다.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인간계의 화식은 먹지 않는 듯, 김이 무럭무럭 나는 샤브샤브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잘 먹는다고 해서.”무진의 대답에 성연이 벙 쪘다. 잠시 후,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누구한테 들은 거예요? 이런 엉터리 정보라니. 가끔 한 번씩 먹으면 몰라도, 두 끼 연달아 먹으면 누가 견디겠어요?”점심에 서한기와 먹었던 것도 아직 소화가 안되어 위가 불편한 느낌이었다.그런데 의외로 무진이 성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식기를 세팅하게 했다.팔
무진이 묻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래, 성연이 집에 돌아와 공부 비슷한 걸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성연은 무진의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괜찮아요. 어차피 나도 할 생각 없고.”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손건호는 속으로 의심스러웠다.‘숙제도 안 하고, 완전 낙제생 아냐? 그런데 만점을 받았다고? 정말 우리 보스가 돈 주고 만든 거 아니야?’ 무진이 성연을 보며 진지하게 질문했다.“공부에 관심도 없으면서, 왜 굳이 학교에 가서 자?”성연이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자신의 본분을 다 해야지.”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손건호의 입에서 물음이 튀어나왔다.“무슨 본분요? 잠자는 본분?”기분 나쁘다는 듯이 성연이 손건호를 흘겼다.“청춘을 체험하는 거지.”보건실에서 서한기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물론 되는 대로 지껄인 것이 분명하지만.성연에게 당한 손건호는 정말 말로는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성연의 말을 들은 무진은 입술 끝을 올린 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게임 조종기를 내려놓은 성연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주방에 가서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 왔다.막 거실로 들어가려던 순간, 무진이 언뜻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주방에 가 요구르트 하나를 더 꺼내 왔다.TV 앞으로 걸어간 성연이 요구르트를 무진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잘하는 지 볼래요? 요구르트도 가져다주잖아요.”무진이 요구르트를 들어 올렸다.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요구르트는 아직 차가웠다. 손으로 잡으니 물방울도 맺혔다.아연실색한 손건호가 멍하니 성연을 쳐다보았다. ‘아니, 우리 보스에게 요구르트를 주다니.’‘요구르트, 저거 어린애들이나 먹는 거잖아. 우리 보스가 저걸 마시겠어?‘아예 싫어할 걸?’성연의 손에 들린 요구르트는 곧 빈 병이 되었다. 그런데 무진이 여전히 들기만 한 채 꼼짝도 않자 성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왜요? 먹기 싫어요?”계속 말이 없자, 성연이
성연을 한 번 쳐다본 뒤,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그러지. 내일 내가 데리고 갈게.”내리 뜬 그의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이 서렸다 사라졌다.엠파이어 하우스에 처음 왔을 때부터 무엇에 대해서도 강한 욕망을 내비치지 않았던 아이였다.그런데 유독 회사 얘기만 나오면 감정의 기복이 커졌다.성연이 어떤 목적을 띠고 회사에 가고 싶어한다는 걸 무진은 한눈에 파악했다.‘다만, 송성연의 목표는 강씨 집안의 뭐지?’무진이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갔다.다음 날 오후, 무진은 성연을 데리고 회사로 갔다.옅은 파란색의 베이비 돌 드레스를 입은 성연은 귀 양 옆으로 머리를 작게 말아 올린 후, 긴 머리를 등 뒤로 내리고 있었다. 크고 동그란 눈을 반짝거리니 진짜 앙증맞아 보였다.성연이 생각하기에, 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는 안금여는 분명 회사에 있을 것이다.안금여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메스꺼움을 참고 일부로 순진해 보이게 단장했다.성연이 휠체어를 밀며 무진이 가리킨 곳으로 갔다.회사 내에는 강무진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회사에 왔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안금여의 사무실로 갔다.무진이 전화를 걸어 방문을 알린 후부터 안금여는 계속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성연을 본 안금여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다정하게 성연의 손을 잡은 채 소파로 이끌었다.“성연아, 무진이가 힘들게 하지는 않아? 무진이 집에서 지내는 건 익숙해졌고?”안금여는 반가움을 숨기지 못한 기색이었다.이런 다정한 인사와 말투는 살아생전 외할머니의 말투와 똑같았다. 순식간에 코끝이 매워진 성연이 애써 눈물을 참아 내며 대답했다.“할머니, 저 잘 지내요. 잘 먹고 잘 자고요. 아무 문제없는 걸요.”“그럼 됐다. 만약 무진이가 못되게 굴면 이 할머니한테 말하거라. 이 할머니가 혼내 주마!” 안금여가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도대체 저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무진이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을 학대하는 기벽은 없답니다, 할머니.’가볍게 콧방귀를 뀐
비서가 성연을 데리고 가장 아래층부터 안내하기 시작했다.그룹 건물의 매 층마다 별도의 티 룸과 화장실이 있었다.사내 직원 식당은 웬만한 호텔 레스토랑에 비견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또 일부러 가까이 가서 보니, 주방에서는 거의 매주 다른 식단들을 준비했다.이게 끝이 아니었다. 건물 인테리어에 쓰인 자재들도 최상급이다.바닥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건물 로비는 2층까지 트여 있고 복도와 이어진 전면창으로 북성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건물 전체를 둘러본 성연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강씨 집안 WS그룹의 규모와 그 호화로움에 감탄했다.매년 WS그룹에 들어오려고 그 많은 인턴들이 머리를 쥐어 싸매는 것도 당연했다.강씨 그룹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매우 높지만, 그만큼 직원 대우가 좋았다.그리고 들어오기만 하면 거의 철밥통이다.뒷짐을 진 채 비서의 곁에서 유유히 걸으며 그룹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모퉁이를 도는데 정면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성연이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넓은 건물 안에서 하필 딱 저 놈과 마주치냐? 정말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정장 차림의 강진성은 막 사무실에서 나왔는지 손에 서류 한 부를 들고 있었다.성연을 발견한 강진성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다. ‘여기에서 송성연을 만나다니, 재수없게.’강진성은 성연 옆에 서 있던 비서를 향해 화를 내며 질책했다.“회사 규정을 잊었습니까? 이 회사가 개나 소나 다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까?”성연이 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개와 소는 누굴 말하는 거예요?”순간 말문이 막힌 강진성이 깨달았다는 듯이 무거운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너는, 네가 정말 강씨 집안의 손자며느리라고 생각하는 거냐?”매번 성연을 난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제가 당하니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며칠 못 본 사이에 이 계집애 이빨이 더 날카로워진 듯하다.회사는 송성연이 절대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곳이 아니다.‘오늘은 반드시 송성연 저 것에게 본때를
강진성은 결국 성연을 욕 보이는 데 실패하고 분기탱천해서 떠났다.안금여의 비서는 계속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안금여 측의 사람으로, 강씨 집안 전 회장이 있을 때 키운 사람이었다. 이후 줄곧 안금여 회장을 보좌해 왔기에, 자연히 둘째, 셋째 일가의 그 음흉한 속셈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그러니 평소 회사에서 위세 떨기 좋아하던 강진성이 무참히 깨지는 장면에 속이 시원해지는 게 당연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는 것도 무지 힘들었다.그녀는 이 어린 사모님이 정말 대단하다 싶었다.‘보통 사람이 아니야.’강진성을 만난 뒤, 성연은 단번에 회사 구경할 기분이 사라졌다.이따가 강씨 집안의 또 다른 사람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큰집 본가를 제외한 강씨 집안 사람들은 마치 미친 개처럼 사람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물고 뜯으려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성연은 한가하게 말다툼이나 할 시간이 없었다.“돌아가요.” 성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작은 사모님, 구경 더 하지 않고요?” 비서의 물음에 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성연을 데리고 안금여의 사무실로 돌아왔다.안금여의 사무실에는 아주 큰 소파가 하나 있었다.마침 딱 성연이 바로 눕기 좋을 정도였다.소파에 기댄 성연이 비서에게 말했다.“여기서 나랑 같이 있을 필요 없어요. 가서 일 하세요. 난 신경 쓰지 말고요. 여기서 혼자 게임하면서 기다리면 돼요.”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세요. 제 사무실은 바로 옆에 있습니다.”말을 끝낸 비서가 곧장 나가며 친절하게 문을 닫아주었다.부드러운 소파에 누워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성연은 귀를 세워 문밖의 동정을 엿듣는 것도 잊지 않았다.비서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자, 성연은 일어나 책상 뒤로 갔다.안금여의 컴퓨터 모니터가 아직 켜져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데스크톱으로 들어갔다.컴퓨터 시스템을 켜려고 키보드 몇 개를 눌렀다.그런데 암호가 설정되어 있어 비밀번호가 필요했다.입술을 오
안금여가 멍하니 무진을 보며 소리 내어 물었다.“왜?”이 회의는 무진이 요구해서 참석한 것이다.그런데 회의가 아직 절반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나간다고 하니,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회의 중 퇴장 또한 무진이 처음으로 요구한 것이다.안금여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드리웠다.무진은 답이 없었다.오히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강일헌이 웃으며 빈정거렸다.“사촌 형님이 회사를 다녀 보셨어야지 말이지요. 확실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요? 매번 와서 숫자나 채우고. 앞으로 이런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강무진의 몸 상태로는 진작 강씨 그룹에서 배제됐어야 했다.‘걸핏하면 발광하는 미친 놈이 뭘 알겠어?’‘아니 할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매번 데리고 들어오시지?’‘진흙으로 담을 쌓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도대체 할머니가 이렇게까지 애쓸 만한 가치가 있느냔 말이지.’‘맞아, 큰집에도 이제 저 미치광이 병자 하나랑 할머니만 남았어.’‘미친 놈 간신히 아직 쓸 만 한 거야.’‘쯧쯧, 정말 불쌍해서.’두 눈을 부릅뜬 강운경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일헌을 정시한 채 차가운 음성으로 일갈했다.“너는 말이 많구나. 수완이 좋다면서, 어째서 회사를 위해 일하는 건 안 보여? 만약 네 할아버지가 아니면, 네가 여기에 앉을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강일헌은 정말 자신이 가진 진짜 능력이 없는 놈이었다. 그야말로 회사에서 머리 수만 채우는 잉여인간인 것이다.평소에도 대충대충 일하기 일쑤다. 둘째 할아버지의 권위 때문에 회사 누구도 감히 화 내거나 말하지 못할 뿐이다.‘나쁜 짓도 수없이 했지.’‘이런 인간이 어떻게 무진에게 큰 소리치는지, 부끄럽지도 않은지.’‘저들도 알아야 해, 무진이…….’강운경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 충동적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당분간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강운경의 말에 한참동안 붉으락푸르락 하던 강일헌이 입꼬리를 잡아당기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비꼬았다.“사촌 형님
무진이 사무실 안을 한 바퀴 휘이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사무실이 이처럼 커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의 알반지를 돌리며 휠체어를 조작해 옆 사무실로 갔다.“내 아내는?”마침 티 룸에서 커피를 들고 나오던 차였는지, 비서의 손에 든 커피에서는 여전히 김이 나고 있었다. 무진의 말을 듣자마자, 비서가 바로 대답했다.“사모님은 사무실에 계십니다.”그런데 비서의 대답이 나왔을 때, 성연이 밖에서 들어왔다.비서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어, 안에 계시지 않았습니까?”그녀가 왔을 때, 분명 문이 잘 닫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성연이 자연스럽게 설명했다.“방금 커피를 끓이러 갔을 때, 향낭을 찾으러 나갔어요. 아까 밖에서 떨어트린 것 같아서요. 찾으러 나갔다 지금 오는 거예요.”비서는 의심하지 않았다.업무가 바빠서 매 순간 성연을 살피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성연이 다시 안금여의 사무실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비서 언니, 뭐 먹을 거 있어요? 배가 좀 고픈데요.” 성연이 홀쪽해진 배를 더듬었다. 아침을 조금 먹었더니 지금 배가 항의하고 있었다.“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져 준비해 오겠습니다. 뭐 드시고 싶은 게 있어요?”비서가 얼른 대답했다. 없어도 만들어 줘야 할 판이다.어린 사모님이 입을 열었다.“그냥 아무거나 먹으면 돼요. 무진 씨는요? 뭐 먹고 싶어요?” 성연이 무진을 보며 물었다.사무실 안 무겁게 팽팽하던 공기가 어느새 성연에 의해 가벼워졌다.무진은 줄곧 성연을 관찰 중이었다.상당히 침착한 모습의 성연이 자리에 앉아서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맞다, 당신, 회의 끝났어요?”무진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회의 내용은 알아듣지도 못해.”이미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무진은 회의실에서 휴대폰으로 전송되었던 ‘비상 상황’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그때,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비서가 언뜻 보이자 무진이 입을 열어 지시했다.“담백하고 간단한 음식들로 몇 가지
성연이 웃으며 말했다.“강진성이 나한테 뭘 어쩌겠어요? 내가 그 사람에게 뭘 어떻게 안 했으면 된 거지.”성연 앞에서 쩔쩔매던 강진성의 모습을 떠올린 안금여의 비서가 실소를 금치 못하며, 잠시 전에 있었던 상황을 무진에게 설명했다.“도련님, 못 보셔서 그렇지, 셋째 도련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셨어요. 사모님, 정말 대단하세요.”무진의 눈에도 웃음기가 어렸다.“당하지만 않으면 돼.”좀 늦은 시각, 회의를 끝내고 회장실로 돌아온 안금여는 곧장 성연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다 앉혔다.“성연아, 오늘 어땠니? 시간 즐겁게 보냈어?”“네, 재미있었어요, 할머니. 비서 언니가 세심하게 살펴 줬어요.” 성연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서를 칭찬했다.“즐거웠으면 됐다.”안금여와 성연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동안, 금세 오후가 되었다.식사를 위해 미리 음식점에 자리를 예약해 두었던 안금여가 성연과 무진을 데리고 나갔다.소담하면서도 운치가 뛰어난 음식점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한복 차림으로 서빙을 하는 직원들이 매우 독특했다.예약한 룸에 들어가 막 자리에 앉을 때, 강운경이 들어왔다.강운경은 전과 다름없이 마치 심사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연을 주시했다.“모두 한 가족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편하게 식사하자.” 자리에 함께한 딸과 손자 부부를 바라보며 안금여는 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예전부터 내 손자 무진이는 언제쯤 손녀며느리를 데려오게 될까, 하고 늘 생각했었다.그렇게 오매불망하며 마음을 졸였더랬는데.드디어 손자 며느리를 본 것이다. 이제 증손자까지 얻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터.무진과 성연의 지금 분위기를 보면, 증손자도 조만간 보지 않을까 싶다.물론 성연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조급할 필욘 없겠지만.미리 주문한 음식들이 곧바로 테이블에 올라왔다.식사하는 동안 말을 삼가 해야 한다는 가풍 없는 강씨 집안이다 보니, 안금여와 강운경은 나직한 음성으로 업무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오늘 회의와 관련된 중
공항 입국 게이트.암담한 눈빛의 성연은 걸음도 부자연스러워서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이 상황을 본 예민주는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인 모양이네. 정신을 좀 차리게 해야겠어.’이렇게 생각하고 곧바로 은침으로 성연의 허리에 있는 혈을 찔렀다.순간 아픈 표정을 드러냈지만, 곧 눈빛이 되살아난 성연이 고개를 돌려 예민주를 바라보았다.“막내 사매? 여기가 어디야?”성연이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걸 듣자 예민주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드러냈다.‘보아하니, 내가 연구해서 만든 독이 그래도 썩 효과가 좋은 것 같네.’사람의 인식을 혼란스럽게 한 뒤 인식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이 독은, 여민주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비로소 성공한 것이다.그 실험 대상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F국의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언니, 이제 귀국했으니까 곧 무진 오빠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진 오빠가 보고싶죠?” 예민주는 차근차근 설명했다. 약은 성연이 무진을 완전히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예민주의 계획은 전혀 시행할 수가 없다.‘그래, 한 걸음씩 차근차근 해야 해.’ 예민주의 인내심은 대단했다.“응, 무진 씨가 내 남편이니까 두려워할 필요 없어. 무진씨가 잘해 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운성시에서 살면 돼.” “더 이상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스승님이 너를 잘 보호하라고 당부하셨어!”지금 성연은 더 이상 예전의 성연이 아니라 이미 완전히 변했다. 성연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기억들과 지시가 박혀 있었다.그래서 예민주에 대한 말투는 더없이 온화했다.“응, 언니가 정말 잘해 주시는 걸요! 언니가 외국에 와서 나를 찾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거기에 갇혀 있었을 거예요. 언니가 제게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예요!”예민주는 마음속으로는 그야말로 통쾌하게 웃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주 선량한 척 가장하면서 묵묵히 성연의 기억을 강화하고 있었다.예민주가 설계한 기억 속에서 성연은 어제 오후 3시에
하룻밤 사이에 연운그룹은 완전히 무너졌다. 연계진 회장은 탈세 문제로 구속되었고, 많은 부문의 책임자들도 잇달아 사직했다. 인터넷의 여론이 폭발하면서, 주가는 이튿날에도 어김없이 또 다시 20%나 폭락하며 하한가를 기록했다.회장 대행인 조수경도 이미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도저히 국면을 만회할 수가 없었다. 진교철과도 연락을 시도했지만 결국 진교철은 여전히 나서지 않았다. 심지어 대리인을 시켜서 연운그룹에 한 투자마저 철회했다.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조수경도 재빨리 연운그룹과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수경은 오후에 바로 회장 대행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그룹 전체가 이미 완전히 끝장이 났다. 게다가 여러 여직원들의 고소에 직면해 있어서, 탈세 문제뿐만 아니라 성범죄 문제와도 엮여 있었다.이 보도를 접하면 당연히 즐거운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지금 무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커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그 7 명의 임원들 사건이 무진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그래함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이른 아침에 전화를 건 그래함은, 성연의 상황을 확인하려 했지만 줄곧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래서 무슨 사고가 생길까 봐, 어젯밤에 성연과 짜고 거짓말을 했다고 무진에게 빨리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무진은 비로소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성연의 핸드폰으로 연달아 전화를 걸었지만 줄곧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소리만 들렸다.손건호와 서한기에게 반드시 단서를 찾으라고 지시한 뒤 지금 보고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곧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손건호의 전화였다.얼른 전화를 받은 무진이 다급하게 물었다.“소식이 있어?”[보스, 사모님의 종적을 찾았습니다. 어제 오후 3시 비행기로 F국 프로방스로 갔습니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추적하기 위해서 제가 이미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그래, 어서 가.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보고하고. 하지만 반드시 은밀히 해야 해. 실혼전에서 틀림없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거야!” 무진은 당황
완전히 놀란성연은 멍한 상태가 되었다.실혼전의 캐서린을 마주해도 지금처럼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너 정말 예중천 스승님의 딸이 맞아? 왜, 왜 이렇게 하려는 거야?” 질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예민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수잔이 주는 커피를 받으면서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선배, 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언니에게 그렇게 많이 가르쳐 줬어요. 언니도 은혜에 보답해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언니가 강무진 씨를 양보한다면, 아주 간단하게 은혜에 보답하는 게 되겠지요!”“웃기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안 돼!”이를 악문 성연의 눈빛에는 살기도 확고하게 배어 있었다.“언니는 안 죽어도 돼요! 그리고 언니가 죽는다면 소용이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언니가 순순히 양보하는 거예요! 나하고 강무진 씨가 행복해야 지내는 모습을 봐야지요.” “그리고 언니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언니가 키우게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갑자기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때 다시 내게 줘도 돼요.”예민주의 말투는 마치 농담을 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성연은 예민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놀라서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수잔은 마치 로봇처럼 성연에게 홍차를 가져다주었다.“송성연 씨, 차 드세요!”“예민주, 네가 말한 계획들이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 그 7명의 임원들이 없어도 내 남편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어.” “그리고 강씨 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해치겠다는 그런 말을 하니 더 터무니가 없지.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넌 스승님의 딸도 아니면서 왜 딸이라고 사칭한 거야?”성연의 거듭되는 질문에 갑자기 화가 난 예민주는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변했다.“나를 화나게 해서 더 많은 사실을 드러내게 만들겠다는 거지요! 좋아요, 그럼 내가 아예 말해 줄게요.” “예전에 강무진 씨 부모님 죽음은 우리 예씨 가문과 관계가 있어요. 강씨 가문이 우리 예씨 가문에게 빚진 거지요! 알겠어요?”“내가 강씨 가문의 모든
“도대체 날 찾아서 뭘 하겠다는 거야? 조건이 있으면 그냥 말해.” 두려움을 떨치고 정신을 차린 성연은 자신도 모르게 분노가 치솟았다.분노한 성연이 소리치자 예민주가 냉소를 터뜨렸다.“마주 보고 있어야 얘기하기도 편해요. 앉아요!”예민주는 여전히 얼버무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모든 건 자신의 수중에 있다는 듯이.성연은 거실로 돌아와서 예민주의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잔이 성연에게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송성연 씨, 홍차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커피를 원하십니까?”성연은 정말 깜짝 놀랐다. 겉으로는 전혀 무해해 보이는 이 여자가, 불과 몇 초 전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기에!‘어떻게 감정을 이렇게 신기하게 바꿀 수 있지?’‘이 성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정신이 좀 이상한 것 같아.’예민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성연 씨에게는 홍차를 한 잔 주세요. 임산부라서 커피를 마시는 건 적합하지 않아요!”‘헐!’성연은 정말 멍해졌다.“날 조사한 거야?”“언니가 내 선배인데 당연히 언니의 일에 더 신경을 써야지요.” 예민주의 눈빛은 정말 사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내가 임신한 사실은 지금까지 무진 씨하고 서한기만 알고 있어. 할머니와 고모에게도 아직까지 알리지 않았는데, 아득히 멀리 있는 예민주가 알고 있다니!’자신의 비밀을 예민주가 훤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자, 성연은 완전히 충격에 휩싸였다.“됐어요! 언니 표정이 이렇게 다채로운 걸 보니 내 목적도 달성한 모양이군요. 이제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겠어요!”갑자기 미소를 거둔 예민주의 단호한 눈빛에는 냉혹함까지 엿보였다.“그래! 나도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불원천리 날 찾아왔는데, 나나 무진 씨를 내버려둘 리는 없겠지?”원래 막내 사매라는 호칭에 성연은 어느 정도 친근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을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 또는 적으로 생각해야 했다.“그 7 명의 임원을 무사
성연은 문득 예민주의 나이에 의문이 들었다.‘외모는 확실히 나보다 두세 살 어리게 보여. 갓 대학교에 입학한 청순한 아가씨처럼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어린 모습이야.’그러나 겨우 10여 분 동안 접촉하면서 성연은 이따금씩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막내 사매는 앳된 외모 속에 무서운 영혼을 감추고 있어.’다시 자리에 앉아서 예민주를 쳐다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WS그룹의 미래 업무를 담당해야 할 7명의 고위 임원들이 예민주의 부하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것 만이 7명의 임원들이 예민주의 지시에 따라서 잇달아 여기 프로방스로 온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너무 놀랄 필요 없어요. 언니가 세상 일을 전부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먼저 아침부터 먹어요! 그리고 나서 언니한테 어떻게 해야 WS그룹을 구하고 남편을 도울 수 있는지 알려 줄게요!”수잔이 아침 식사를 하나씩 내왔다. 빵과 우유, 그리고 약간의 치즈로 아주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다.그러나 지금 성연은 전혀 입맛도 없어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요구를 빨리 말하는 것이 좋겠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그 7명의 임원들을 WS그룹으로 돌려보낼 거야?”예민주는 들은 체 만 체하며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이 X이 일부러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거야?’성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이제 7 명의 임원이 사라진 이유를 알았어. 그 사람들이 정말 예민주의 부하라면, 그럼 더 이상 WS그룹으로 돌아가게 할 필요도 없어.’‘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야.’자신의 실력에 대해서 성연은 여전히 자신이 있었다. ‘은침을 날려서 예민주를 제압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그러나 예민주가 나를 그렇게 쉽사리 풀어줄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숨겨진 위험이 있을 거야.’잠시 생각하면서 성연은 사방을 쓸어보았다.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하인들과 수잔만 남아 있을 뿐 다른 경호원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것도 계산하기 어렵겠죠. 어떻게 똑똑히 계산할 수 있겠어요.”예민주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닫았지만 성연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그래서 내친 김에 아예 예민주에게 반문했다.“그럼 사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세어 보기라도 했어?”예민주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시원스럽게 대답했다.“세어 봤지요.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동안 제가 배운 게 변변치 않아서 사실 환자를 도와준 적이 없어요! 한 사람도 없어요!”말을 마친 예민주의 얼굴에는 잠시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성연은 멍해진 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예민주가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이 떨어진다 해도 의술을 배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조금 전 손가락 사이에 은침을 끼우는 수법만 해도 정말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거야.’‘그래서 예민주의 말 뜻은 도대체 뭐야?’갑자기 성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자기도 모르게 방금 전에 수잔이 벌벌 떨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뼛속에서 발산되는 공포에 떨던 모습은 예민주가 수잔을 어느 정도로 참혹하게 다뤘는지 말해 주기에 충분했다.‘게다가 수잔은 예민주를 주인이라고 불렀어. 애완동물한테나 주인이 있는 거지.’‘그럼 예민주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건, 줄곧 다른 사람을 징벌하는데 의술을 사용했기 때문인 거야?’‘심지어, 사람들을 해치거나?’성연은 눈동자조차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멍하니 예민주를 보면서 마음속으로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언니가 이제야 눈치채신 모양이네요? 호호,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세요. 제가 배운 건 원래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의술이 아니었어요.” 예민주는 성연의 추측을 시원스럽게 확인해 주었다.게다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히 평범한 표정이었다.그 말을 들은 성연은 경악하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예전에 스승님은 국내외에서 최고의 신의로 여겨지면서 엄청난 명성을 얻으셨어.’‘스승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고,
예민주가 차에서 내리자 성연은 바로 멍해졌다.예민주는 세련되고 예쁜 퍼프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오똑 솟은 코, 역동적인 두 눈은 서양 인형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선명한 붉은 입술에 일부러 양갈래로 땋아서 예쁜 느낌을 주는 머리카락.‘이런 모습은 흡사 동화 속의 공주와도 같은 모습이야.’‘나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지만 앳된 느낌은 없어. 옅은 파란색 눈동자는 오히려 차분한 느낌이 가득해.’성연은 깜짝 놀랐다. 여러 면에서 예민주가 스승의 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스승님과 닮은 부분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다만, 그 푸른 눈동자에 성연은 좀 놀랐다.‘예민주가 뜻밖에 혼혈이야?’“언니, 드디어 언니를 만났네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예민주는 곧장 성연의 앞으로 걸어갔다. ‘미소를 지을 때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는 스승님과 정말 닮았어.’“이제 당신이 내 사매라는 걸 인정할 수 있겠네요. 사매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스승님의 딸이잖아요. 예민주 씨!”성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예의를 갖춰 화답했다.그리고 위아래로 예민주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러자 마음속에 갑자기 뭔지 모를 느낌이 더 생겼다.이 막내 사매는 겉으로는 귀엽고 단순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연은 왠지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다.마치 더없이 존귀한 존재인 예민주가 구름 위에 서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그래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결국 제게도 의술을 좀 물려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분명히 언니의 막내 사매라고 할 수 있어요. 저도 이 호칭을 좋아하니까, 더 이상 저한테 말을 높이지 마시고 그냥 사매라고 저를 부르세요!”웃으면서 손을 뻗은 예민주가 성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그러나 순간 바로 뒤로 물러난 성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예민주를 주시하며 냉담하게 말했다.“뭘 하려는 거야?”“역시 선배답네요. 제 은침은 손가락 사이에 숨겨져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육안으로 볼 수 없어요. 그래도 언니는
그날 이후 예중천은 정식으로 성연을 제자로 받았다.정식으로 스승님을 모시는 예를 갖춰서 스승님에게 차를 대접하고 절을 했다. 예중천도 마찬가지로 성연에게 봉투를 하나 줬다.봉투 안에는 80만 원이나 들어 있었다. 이 돈으로 성연은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추가로 구입했고 자신의 옷과 신발도 샀다. 그리고 예중천에게 자주 고기를 대접하기도 했다.예중천은 성연의 집을 보수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성연은 방에서 지내고 예중천은 물건이 쌓인 창고에서 아무렇게나 지냈다.수많은 시간 동안 성연은 모든 약초의 이름과 조제 배합 방법을 외우고, 약을 달이고 침을 놓는 방법을 끊임없이 학습했다.그 시간은 아주 단순한 즐거움이었다. 성연은 이런 걸 배워서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몰랐지만, 스승은 줄곧 성연에게 이 기술들이 실전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그 뒤로 마을 사람들은 일단 대수롭지 않은 병이 생기면 점점 성연에게 진료를 의뢰하기 시작했다. 계속 연습하면서 성연의 의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심지어 지방의 언론 매체들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그때는 이른바 소녀 신의를 방문해서 취재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성연은 매일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서 이에 응하지 않았다.결국 이장을 찾아간 성연은 앞으로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게 한다면, 마을 사람들의 병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마을 사람들도 머리가 잘 돌아갔다. 이런 공짜 의사가 정말로 가 버리면 큰일이라고 생각해서, 외부인이 함부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그날이 될 때까지.스승님은 성연에게 이미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스승님 자신은 평생 절대 놓칠 수 없는 원수와 줄곧 맞서야 한다고!그때 성연은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다만 스승님이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 목이 쉬도록 울었다.사부님은 마지막으로 의학 서적들을 모두 성연에게 건네주면서 당부했다.“잘 배워두도록 해라. 이 책들은 네가 보관하거라. 앞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때 다시 내게
밤새 성연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어릴 때의 기억들을 떠올렸다.예전에 성연이 스승을 만났던 그날,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억수처럼 퍼부어서 마을 사람들은 외출도 하지 못했다. 빗속에서 한 사람이 비틀거리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지팡이가 없었더라면 이미 쓰러졌을 것이다.어린 성연은 모습을 보고 나쁜 사람이 온 줄 알고는 깜짝 놀랐다.그러나 그 사람이 마침내 진창길에 쓰러지자, 용기를 낸 성연은 우비를 입고 뛰어갔다.처음에는 정말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스승님의 얼굴 반쪽에는 이미 진흙이 가득 묻은 채 진창 속에 잠겨 있었다. 얼굴은 온통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남루한 옷차림이어서 거지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몇 번이나 소리쳐 깨우면서 설마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하자 두려워진 성연은 재빨리 마을 이장님 댁으로 달려갔다.비록 아직 세상 물정은 몰랐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장님이 마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성연은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결국 이장님을 불러낼 수 있었다.‘이장님은 아마도 스승의 생김새가 희고 멀끔해 보이자, 시골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있는 도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보수를 좀 챙기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이장님이 자기 친척을 불러서 결국 스승님을 구할 수 있었지.’‘뜨거운 죽 한 그릇과 작은 장작불이 결국 스승님을 다시 살려낸 거야.’얼굴의 진흙도 떼지 못한 스승은 성연과 눈빛이 부딪치자 미소를 지었다.“네가 날 구했지, 그렇지?” 예중천이 물었다.어색해진 성연은 이장만 보면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하지만 이장이 바로 사실을 얘기했다.“이 아이가 당신을 발견한 뒤에 나를 불렀어요.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당신을 데려온 겁니다. 당신은 도시 사람 같은데 어떻게 이런 시골 마을까지 오게 된 겁니까?”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중천은 손을 뻗어 너덜너덜한 옷 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 낡아서 헤진 지폐 몇 장을 꺼냈다.만 원짜리가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