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한 번쯤 오해한 게 뭐가 어때서. 곽승재도 널 몇 번이고 믿지 않으면서 나무랐잖아.”박지연이 곽승재를 향한 불만을 토로했다.“백유미 말만 들으면서 네 말은 들어주지도 않았잖아. 그리고 백유미가 다칠 때마다 네 탓이라면서 널 비난한 게 한두 번이야?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니까. 곽승재도 한 번쯤 억울한 일을 당해봐야지. 그저 벌 받는 거라고 생각해.”고은서는 일부러 곽승재한테 벌을 주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어젯밤 민시후가 여자랑 같이 누워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곽승재의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그리고 아침에 민시후에 관한 스캔들이 갑자기 퍼지기 시작한 데다가 또 곽승재가 어젯밤에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이미숙한테서 전해 듣게 되면서 이내 그가 배후에서 여론을 조종하고 있다는 틀린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이어 분노에 눈이 먼 고은서는 자신이 곽승재를 오해한 건 아닌지를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 않고 GS그룹으로 달려가 그를 비난했던 것이다....송민준의 새 사무실.민시후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그의 맞은편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었다.“시후야,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나 있어?”송민준은 태연자약하게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어젯밤 그 여자랑 아는 사이지?”민시후는 송민준을 향해 사진 몇 장을 던지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송민준은 사진을 힐끗 보고는 덤덤하게 답했다.“모르는 사람이야.”“정말 모르는 사람이야?”민시후는 새 사진 몇 장을 더 보여주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캐물었다.“그럼 이건 뭔데?”찻집 로비 CCTV 동영상에서 캡처한 사진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찻집으로 들어가는 송민준의 모습과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은 찻집에 들어선 그 여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사진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제 사업 파트너 만나러 찻집에 들른 건데. 내가 카페나 술집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한 찻집을 더 선호한다는 거 너도 잘 알고 있잖아...”“말 돌리지 마.”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송민
그러나 민시후는 송민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쓸데없는 말로 얼버무릴 생각하지마.”민시후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웠다.“얼마 전에 고은서랑 밥 먹을 때도 송민아를 데리고 우리 앞에 나타났잖아. 그리고 이번에 날 모함하려고 든 이 여자도 십분 간격을 두고 당신이랑 똑같은 찻집에 나타났어. 그리고 전에 고은서랑 옥방에서도 만났다며. 이 많은 일이 다 우연이라고? 그게 말이 돼?”“시후야, 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잖아.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거야?”송민준은 단아한 자세로 자리에 앉은 채 나긋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그리고 자꾸 고은서 씨 얘기를 하는데 설마 내가 고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야? 예쁘게 생긴 건 인정할게. 민아를 친구로 사귀면서 잘 지내는 걸 봐서는 의리도 있고 사람도 꽤 괜찮아 보였어. 하지만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게다가 하마터면 네 매형이 될 뻔한 사람인데 내가 왜 네가 좋아하는 여자를 넘보겠어.”송민준이 차근차근 설명했다.“레스토랑에서 만나고 옥방에서 만난 건 정말 다 우연이야. 어제도 진짜 파트너 만나러 간 거고. 이런 이유로 날 의심한다는 게 너무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민시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젯밤의 일은 여러모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그래서 민시후는 그 여자가 송민준이랑 같은 찻집에 나타났다는 걸 조사해내자마자 순간 송민준이 꾸민 일이라는 직감이 들었다.평소에 만나기도 어려웠던 사람이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는 게 너무 의심스러웠다.그 여자가 자신의 행적을 숨김없이 말했더라면 그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그러나 그녀가 행적을 숨기려 하는 바람에 일이 범상치 않다는 게 수면 위로 드러났다.“어젯밤 일 나도 전해 들었어. 그런데 내가 널 해칠 이유가 없잖아. 민아도 이젠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굳이 손해를 보면서 이런 모험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은서 씨도 명석한 분이어서 널
웨이터가 도로 나오면서 고은서에게 전했다.“민 도련님께서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할 얘기가 있으시면 내일 사무실에 하라고 하십니다.”고은서는 웨이터의 말을 무시한 채 바로 룸 안으로 들어갔다.“민시후, 나와 봐.”그녀는 곧장 민시후 앞에 다가가 말했다.그는 한창 친구들과 재미나게 놀고 있었는데 마침 주사위로 승부를 가릴 때라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하하. 민 도련님, 확실한가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시지 그러세요. 이번 판엔 저희도 만만치 않은데 말이에요. 지게 되면 이 상에 있는 술을 절반은 혼자 다 마셔야 해요.”“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열기나 해.”“좋아요. 민 도련님이 원한다면 우리 같이 열도록 해요. 원하는 만큼 다 마시게 해드릴 테니까요.”“하나, 둘, 셋...”“민시후!”같이 주사위를 공개하려던 찰나, 스피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말 안 들려? 당장 나랑 나가서 얘기 좀 해.”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다 마이크가 있는 쪽으로 쏠렸는데 그 자리에는 아주 단아한 옷차림을 한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그녀는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민시후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민 도련님, 이 이쁜 아가씨는 누구예요? 설마 여기까지 민 도련님 따라온 거예요?”옆에 있던 부잣집 도련님 한 명이 물었다.“역시 우리 민 도련님 매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이렇게 이쁜 아가씨도 쫓아오고 말이야.”“그러니까. 생김새랑 기질만 봐서만 웬만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나은 것 같은데.”“다 닥쳐.”민시후는 한마디 호통을 치고는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고은서도 마이크를 내려놓고 따라 나갔다.“무슨 일인데?”민시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물었다.복도의 등이 예상 밖으로 밝은 덕분에 민시후의 얼굴이 꽤 잘 보였는데 그는 평소처럼 껄렁대며 웃는 대신 일부러 그녀를 멀리하는 듯한 서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요즘 왜 회사에도 안 나오고 내 전화도 안 받는 거야?”“진 비서한테서 못 들었어? 나 요즘 바빠.
담배를 빼앗긴 민시후는 어쩔 수 없이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며 놀았다.그는 방금전에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천천히 뱉어내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 그날 밤 나한테 실망감을 느끼지 않았어?”“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면서 고개를 저었다.“네가 술 마시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그러자 민시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내가 다른 여자랑 알몸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분노와 실망감도 느끼지 않은 게 고작 날 믿기 때문이라는 거야?”고은서는 그의 미소가 약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민시후는 이내 헛웃음을 쳤다.“만약 곽승재가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곽승재가 가슴에 다른 여자한테 긁힌 손톱자국을 하고 그 여자랑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는데 이유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아마 과거의 고은서였다면 울부짖으면서 달려들어가 따졌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목격하고도 홱 돌아 나가버릴 가능성이 더 컸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가 자신에게 이런 물음을 물어보는 이유를 알아차렸다.‘내 반응이 너무 평온해서 오해하고 있는 건가?’고은서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민시후는 그녀가 지금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만약 곽승연이었다면 넌 아마 화를 내며 달려가 싸대기를 날리고 울면서 달아났겠지.”민시후는 고은서 대신 답하면서 담뱃갑 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그날 저녁 모함당한 건 맞아. 하지만 그 또한 내가 자초한 거야. 내가 전에 그 여자들을 건들지만 않았으면 걔네도 이런 일로 날 성가시게 만들진 않았겠지.”담배 연기 때문에 민시후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스캔들이 퍼지면서 사람들도 다 날 당해도 마땅하다고 평가하더라. 전에 여자들과 노는 걸 하도 좋아해서 말이야.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도 이런
고은서가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너 진짜 바보야? 내가 믿는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로 너에 관한 생각이 바뀌겠어?”“맞아. 나 바보야.”민시후가 다시 능글맞은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은서야, 나 좀 더 혼내 줘.”고은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급할 거 없잖아. 그보다 며칠 동안 왜 날 피한 건지 말해줘. 포기할 생각이었다면 왜 그냥 솔직히 말하지 않은 거야?”민시후는 내심 찔려하며 답했다.“네가 신경 쓸까 봐 그랬어. 나도 신경이 쓰였거든. 속으론 이제 너한테 더 이상 매달리지 말아야지 했는데 미련이 남아서... 하루라도 더 시간을 끌고 싶었어. 네가 정말 나한테서 마음을 돌렸다면 자연스레 실망스러워하며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다니 정말 다정하고 특별하네.”“은서야, 미안해.”민시후가 이쁜 눈을 반짝이며 정중하게 사과했다.“다음에는 그러지 않을게.”고은서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말했다.“다음이 또 있어?”“아니! 없어.”민시후가 고은서의 손을 조심스레 맞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아무리 정신을 잃었다고 해도 립스틱 자국은 상대방이 손으로 묻힌 건 아닐 거야. 정말 괜찮아?”민시후의 긴장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의 마음은 또다시 약해졌다.‘자신만만하고 거침없던 사람이 내 앞에서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하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 이렇게 비굴해지는 걸까?’복도 조명이 민시후의 요염한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의 눈빛은 반짝였고 머리 위로는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고은서가 발을 살짝 들고 민시후의 입에 입맞춤하고는 이러면 다른 사람의 흔적이 없어진다고 하려던 찰나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방은 이쪽입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두 명의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두 사람은 바로 곽승재와 송민준이었다.두 사람은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었는데 한 명은 차가운 분위기
민시후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지만 고은서의 충동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그녀는 조금 전 행동을 이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민시후가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민시후, 미안해.”“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다 눈치 없이 지금 나타난 저 두 사람 때문이지.”민시후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이건 나중에 두 배로 받아낼 거야.”고은서가 이마에 전해지는 따스한 감촉에 고개를 들자 민시후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신속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갑자기 배가 고프네. 얼른 뭐 좀 먹으러 가자.”그는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고은서는 멍하니 서 있었다.‘설마 민시후가 부끄러워하는 건가? 늘 다른 여자를 옆에 끼고 사랑을 장난처럼 여기던 사람이?’...VIP 룸 안에서는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곽승재는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고 모든 잔을 통쾌하게 비워냈다.곽승재처럼 주량이 세지 않았던 송민준은 우아한 태도로 술잔을 비워내며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상업계 유명 인사가 이렇게 친근하게 행동하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몇 차례 술을 비운 후 자리에는 취기가 돈 사람이 많아졌다.그 와중에도 곽승재는 여전히 태연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송민준은 곽승재 옆에서 우아하게 잔을 들고 그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곽 대표님, 오늘 이 자리 곽 대표님께서 연 대표님께 말씀드려서 저를 부르신 거죠?”곽승재는 부정하지 않고 맑은 유리잔을 들어 안에 담긴 갈색 액체를 한 번에 비웠다.“연 대표님 ST 그룹과 협력한 적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해성 시장에 진출하려 하고 마침 송 대표가 해성에 있으니 또 다른 협력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송민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ST 그룹과 협력한 사람은 셀 수조차 없이 많습니다. 연 대표님께서 직접 자기소개를 한다고 해도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죠. 제가 여기에 온 건 연 대표님께서 곽 대표님도 온다고 했기 때문이에요.”곽승
“곽 대표님, 저는 그냥 평범한 사업가일 뿐입니다. 해성에 온 것도 단순히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함인데 곽 대표님이랑 시후의 끊임없는 의심에 견디기 어렵네요.”송민준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앞으로 궁금한 점이 있거나 제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아는 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추측하거나 근거 없이 의심하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죄송하지만 곽 대표님. 저는 일정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송민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는 주민기가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대표님, 확인해 보니 송 대표님은 해외 유학 이력이 없습니다. 대표님처럼 대학 졸업 전에 회사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송 대표님과 백유미 씨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경제적인 거래나 통화 기록도 없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곽승재의 예상대로였다.곽승재가 송민준을 의심하는 이유는 연 대표가 ST 그룹과 협력한 적이 있다는 점에서였다.또한 송민아의 가정부가 누군가에게 매수당해 고은서에게 약을 먹이려고 한 행동 때문이었다.이 두 가지를 종합해 곽승재는 송민준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만약 그의 소행이 아니라면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비즈니스 만남이었을 것이고 송민준과 관련이 있다면 앞으로 경거망동하며 고은서를 위협하지 말라는 경고였다.곽승재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육현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형, 어디야? 술이나 마시자.”육현석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나 너무 힘들어. 지연이한테 민시후의 스캔들을 얘기한 뒤로 지연이가 나한테 화가 잔뜩 나서 대꾸도 안 해줘.”곽승재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육현석이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형, 나 진짜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들은 대로 얘기했는데 지연이는 내가 강 건너 불구경한다고 생각하나 봐. 심지어 날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니까! 민시후가 고생하는 걸 보며 솔직히 속
고은서는 일부러 뺨 이야기를 꺼냈다.그녀는 민시후가 당황해하며 곽승재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민시후는 잘생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때려도 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왼쪽이 너무 잘생겨서 못 때리겠어?”고은서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민시후가 얼른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그럼 오른쪽 때리면 되겠다.”고은서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얼굴이 너무 두꺼워서 때리면 손 아플 것 같아.”민시후가 자기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럼 내 손 빌려줄게. 그러면 네 손은 안 아플 거 아니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야. 매번 예상을 벗어나네.’고은서는 나중에 상황을 보며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때리지 않고 임시 보관하기로 했다.죽을 다 먹고 난 뒤 민시후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데려다준다는 표현보다는 같이 왔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민시후는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었기에 고은서가 운전해서 온 것이다.차를 주차하고 나니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이미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운전기사도 왔으니 이제 그만 가.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은서가 민시후에게 인사를 건넸다.“뭐가 그렇게 급해? 평소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니...”민시후가 아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너 더 보고 싶단 말이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민 도련님. 며칠 동안 나 안 보고도 잘 살던데?”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잘 못 지냈어. 매일 너무 보고 싶었어. 전화도 몇 번이고 들었다가 다시 비서한테 던졌다니까? 은서야, 어떡해.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민시후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그가 꼭 애정을 갈구하는 큰 강아지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민시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알았어. 며칠 동안 힘들게 지냈다는 거 믿어줄게. 하지만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