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일부러 뺨 이야기를 꺼냈다.그녀는 민시후가 당황해하며 곽승재 이야기를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말할 줄 알았지만 민시후는 잘생긴 얼굴을 앞으로 내밀며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때려도 돼.”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왼쪽이 너무 잘생겨서 못 때리겠어?”고은서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민시후가 얼른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그럼 오른쪽 때리면 되겠다.”고은서는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됐어. 얼굴이 너무 두꺼워서 때리면 손 아플 것 같아.”민시후가 자기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럼 내 손 빌려줄게. 그러면 네 손은 안 아플 거 아니야.”고은서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야. 매번 예상을 벗어나네.’고은서는 나중에 상황을 보며 처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때리지 않고 임시 보관하기로 했다.죽을 다 먹고 난 뒤 민시후는 고은서를 라이트문 아파트까지 데려다주었다.데려다준다는 표현보다는 같이 왔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민시후는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었기에 고은서가 운전해서 온 것이다.차를 주차하고 나니 민시후의 운전기사는 이미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운전기사도 왔으니 이제 그만 가. 내일 회사에서 보자.”고은서가 민시후에게 인사를 건넸다.“뭐가 그렇게 급해? 평소엔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더니...”민시후가 아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너 더 보고 싶단 말이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민 도련님. 며칠 동안 나 안 보고도 잘 살던데?”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답했다.“잘 못 지냈어. 매일 너무 보고 싶었어. 전화도 몇 번이고 들었다가 다시 비서한테 던졌다니까? 은서야, 어떡해. 네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아.”민시후는 진지한 표정을 한 채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그가 꼭 애정을 갈구하는 큰 강아지 같아 고은서는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며 민시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알았어. 며칠 동안 힘들게 지냈다는 거 믿어줄게. 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고은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곽승재는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 그의 눈동자에는 분노, 질투, 고통 그리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그 시선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위압적이었다.고은서는 점점 더 두려워졌다.곽승재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그의 감정이 폭발 직전임을 의미했다.얼마 전 만났을 때 그녀가 민시후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던 모습 그리고 조금 전 민시후가 보내온 보고 싶다는 문자를 목격했으니 지금의 곽승재는 건드리기 어려운 상태였다.고은서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곽승재, 너 술 많이 마셨어. 주민기한테 연락해서 기사 불러줄까?”곽승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싸늘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눈빛은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 깊고 어두웠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면 그는 정말로 폭발할 수 있었다.힘으로 보나 속도로 보나 곽승재와 비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뒤로 더 물러서며 곽승재를 부드럽게 타이르려 했다.“곽...”말을 꺼내려는 순간 곽승재가 갑자기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짝!고은서는 그가 또다시 강제로 자신을 안으려 한다고 생각해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때렸다.맑고 높은 소리와 함께 그녀의 손바닥이 곽승재의 얼굴에 닿았다.곽승재는 그러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겁에 질린 고은서의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곽승재의 뺨을 내리쳐 잘생긴 그의 얼굴에 손자국을 남겼다.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곽승재의 표정은 폭풍 전야의 먹구름처럼 어두워졌고 가슴은 거칠게 오르내리며 그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눈에 띄는 분노가 그의 이성을 집어삼킬 듯했다.고은서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너... 너 뭐 하려는 거야!”그녀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곽승재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어둡고 사납게 빛나는 두
경계하는 고은서의 모습을 바라보며 곽승재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소용돌이쳤다.그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끝내 모든 말을 삼키고 말았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방어적인 모습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자료를 건넸다.고은서는 자료를 받으면서 곽승재가 이제까지 빈손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 민시후의 메시지를 보느라 정신이 팔렸었고 곽승재가 옆에 있다는 것도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곽승재가 건넨 자료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고은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곽승재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워 고은서는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곽승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비상문을 열고 자리를 떴다.고은서는 그 자리에 서서 곽승재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곽승재는 술을 꽤 많이 마셨는지 발걸음이 다소 흔들렸고 뒷모습은 처량해 보이기도 했다.이내 비상 통로는 고요해졌고 하얀 센서 등의 불빛과 공기 중에 떠도는 은근한 술 냄새만 남아 있었다.곽승재가 완전히 떠난 뒤에야 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시후 때문에 적잖이 자극을 받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 의외네...’비상구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 고은서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자료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박지연은 당직이어서 집에는 고은서뿐이었다.바로 그 때문에 감정을 알 수 없는 곽승재를 마주하며 고은서는 집에 들어가는 것도 망설였다.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은 뒤 고은서는 소파에 앉아 곽승재가 건넨 자료를 펼쳤다.그녀는 자료가 제인 프로젝트와 관련된 것일 거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안에는 며칠 전 민시후가 여씨 가문 파티에서 누군가에 의해 함정에 빠졌던 사건에 대한 조사 보고서가 적혀 있었다.보고서에는 그날 밤 민시후가 심씨 성을 가진 여자에 의해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가 적혀 있었고 이 모든 일을 뒤에서 꾸민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후의 형, 민시현이었다.고
박지연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아직 우리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민시후가 나 때문에 가족들과 대립하게 된다면 왠지 미안할 것 같아.”“미안해할 필요 없어. 민시후가 가족들과 대립하는 건 그 사람의 선택이야. 그가 뭘 하든 네가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박지연은 마치 연애 전문가처럼 조언을 이어갔다.“나는 민시후를 좋게 생각하지만 결국 선택은 너한테 달렸어. 민시후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면 받아들이고 망설여진다면 더 생각해 봐. 사랑은 감동이나 죄책감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박지연의 말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문득 물었다.“그런데 지연아, 너 혹시 요즘 육현석이랑 다툰 거야? 너희가 전화하거나 영상통화하는 걸 못 본 것 같아서.”박지연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맞아. 싸웠어.”고은서가 이유를 묻자 며칠 전 민시후와 관련된 사건 때문에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육현석은 민시후가 겪은 일이 과거에 본인이 자초한 문제라며 동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고 박지연은 민시후가 억울하게 당한 상황이라 충분히 이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두 사람은 서로 설득하지 못했고 결국 다툼이 벌어진 것이었다.다행히 육현석은 박지연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먼저 사과했다.“사과받았으면 된 거 아니야? 왜 아직도 기분 안 풀었어?”고은서가 물었다.“그가 그냥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사과한 것 같아서 그래.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거든.”“지연아, 누가 옳고 그른 건지는 잠시 접어두고 너 육현석 대하는 태도가 이전 온 선생님을 대하던 때보다 훨씬 당당해진 것 같지 않아?”박지연은 잠깐 멈칫했다.“육현석이 네 감정을 먼저 생각해 주고 네 마음을 이해해 주니까 너도 마음에 있는 말을 가감 없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우린 항상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육현석이 네 감정을 먼저 신경 써 주니까 네가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거야.”박지연은 조용히
박지연은 방금 전 고은서의 말에 화가 많이 가라앉아 있던 터라 육현석의 진심 어린 표정을 보고 마음이 더 부드러워졌다.“다음에도 또 그러면 어쩔 건데?”박지연은 일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육현석은 약간 긴장한 채로 순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시는 안 그럴게.”“푸흣.”박지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좋아. 용서해 줄게.”박지연의 화사한 미소는 마치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웠고 육현석은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박지연이 갑자기 어색해하며 물었다.“뭘 그렇게 봐?”육현석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네가 너무 예뻐서.”누구나 예쁘다는 칭찬을 좋아했지만 같은 말이라도 육현석에게서 들으니 박지연은 더욱 기뻤다.박지연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내가 예뻐서 나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박지연이 물었다.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전부는 아니야. 네 밝고 활기찬 모습, 너의 따뜻함과 솔직함. 그 모든 게 좋아.”육현석은 술기운에 용기를 낸 것인지 박지연의 살짝 붉어진 귀를 보며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지연아, 나 정말 너 많이 좋아해. 나한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우리 사귀자.”그 순간 간호사 스테이션에는 아무도 없었고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박지연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간질거렸다.머릿속에서는 이성을 유지하라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충동적으로 굴고 싶었다.“그래.”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육현석은 갑자기 찾아온 행복스러운 순간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지연아, 정말 고개를 끄덕인 거 맞지? 나랑 사귀겠다는 거 맞지? 나 너무 행복해.”육현석이 그 어느 순간보다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얼른 승재 형한테 연락해야지. 아, 아니다. 먼저 인스타부터 올려서 여자 친구 생겼다고 자랑해야지.”“여자 친구? 제가 뭘 놓친 거예요?”그때 같이 야간 근무
의논 끝에 이 임무는 온승준이 담당한 인턴에서 맡겨졌다.그녀는 온승준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온승준은 오늘도 야근 중이었다.그는 사무실에서 진단서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는데 퇴근 후 쉬러 가야 했을 인턴이 그를 다시 찾아왔다.망설이며 말하려다 마는 표정을 하는 설민희를 보고 펜을 쥐고 있던 온승준이 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나요?”설민희는 헛기침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용감히 완수하기로 했다.그녀는 단톡방의 한 사진을 온승준에게 열어 보여주며 용기 내 말했다.“온 선생님, 외과 간호사님한테 들었는데 수간호사 박지연 님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대요.”갑자기 들은 소식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아니면 사진을 보고 자극을 받은 건지 온승준 손에 들려있던 펜촉이 힘에 눌려 부러졌다.설민희는 숨을 죽이며 조금 전까지 평온하던 온승준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멍해진 모습에 눈치만 살폈다.온승준은 이미 넋이 나간 채 자신이 들은 사실과 본 사진을 부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설민희는 대충 답을 알겠다는 듯 급히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한편 박지연은 육현석과 사귀기로 했다는 사실을 고은서에게 알렸다.고은서는 몹시 놀랐지만 그보다 더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고은서와 잠시 장난을 주고받은 후 박지연은 전화를 끊었다.조금 전 육현석이 날아갈 듯이 기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인스타에 올릴 거라며 사진을 찍자고 고집부리던 행동을 떠올리자 박지연은 마음이 달콤해졌다.박지연은 사랑 앞에서는 항상 용감했다.그녀도 육현석에게 호감이 있었기에 용감히 그 마음에 응해보기로 했다.만약 서로 맞지 않으면 헤어지면 될 일이고 적어도 용기 내 함께 해 봤으니 후회는 없을 것이었다.인생은 짧다.지나간 과거에 얽매어 자신을 괴롭힐 필요도 과거의 실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잠시 생각을 하던 박지연은 육현석과 손을 맞잡을 사진을 꺼내 보며 이번엔 자신도 당당히 인스타에 공개하기로 했다.사진과 함께 올릴 멘트를 작성하던 중 옆에 있던 간호사가
지난번에 이미 명확히 온승준의 마음을 거절했었기에 박지연은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런 말을 하지 마. 우리 사이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 당신이 나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좋아한다는 감정보다는 나한테 익숙해져서 그래. 다른 사람과 새롭게 맞춰가는 게 더 귀찮고 번거로울 테니까.”온승준은 본능적으로 반박하려 했지만 사실 박지연이 곁에 있는 게 익숙해져 다른 사람을 찾기 싫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게다가 박지연은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이혼 후 당신이 부적절한 행동을 많이 해서 나한테 많은 폐를 끼쳤어. 앞으로는 주의 좀 해줘. 당신 때문에 현석 씨가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해.”그 말을 들은 온승준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박지연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 그녀는 늘 상대방을 위해 모든 걸 배려하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승준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문제의 원인이 될 날이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승준 씨, 나도 당신한테 사과할 게 있어.”박지연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예전에 당신한테 결혼을 제안했을 때 당신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건 아닌지 먼저 물어봐야 했어. 유혜린 씨가 남자 친구를 사귄다는 사실에 자극받아 나랑 급하게 결혼하는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 결혼 하지 않았을 거야.”박지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2년 넘는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유혜린 씨도 돌아왔고 아직 당신한테 마음이 남아 있으니 앞으로 행복하길 바라.”“그 소식에 자극받아서 너랑 결혼한 거 아니야.”온승준은 드디어 말할 기회를 찾았다.“당시 유 닥터랑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어. 유 닥터한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고. 만약 L 국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유 닥터를 기억조차 못 했을 거야. 당신과 결혼한 건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야. 당신의 밝음과 용기가 참 매력적이었어.”박지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사
“고마워, 승준 씨.”...다음 날 고은서는 MQ에 들렀다.여시은이 맞춤 주문한 향수가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여시은은 직접 상품을 수령하고 잔금을 지불했다.그녀는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며 고은서와 유성준 그리고 관계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최근 MQ 업무량이 급증하여 유성준이 자리를 비울 수 없어 고은서가 여시은과 함께 식사하러 나섰다.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은 집들이 파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고은서에게 사과했다.그녀는 자신이 고용한 가사도우미들은 모두 새로 채용된 사람들이며 그렇게 쉽게 매수당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고은서는 이 일이 여시은과 무관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 여시은의 친구들이 그녀에게 지나치게 친절하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맞춤 향수를 제작하겠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붙잡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여시은은 집주인으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 곁에서 있으며 자리를 지켰다.‘서로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닌데 여시은이 정말 나를 중요하게 여기나?’“은서 씨, 민시후 씨 언제 시간 되시는지 한번 봐주세요. 꼭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 정중히 사과드리고 싶어요.”여시은이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사실 시은 씨랑은 상관없는 일이니 굳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그러나 여시은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아니에요. 저희 집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제가 책임져야죠.”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그럼 민시후한테 물어보고 다시 말씀드릴게요.”“좋아요. 연락 기다릴게요.”여시은과 식사를 마친 고은서가 ZY 그룹으로 향하는 길에 송민준에게서 연락이 왔다.고은서는 조금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송민준은 그녀에게 찻집에서 만나자고 하며 누군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그 말에 고은서는 곧 누가 그녀를 찾고 있는지 짐작했다.곽승재가 준 자료에 따르면 민시현은 송민준을 통해 그 여자를 찾았다고 했다.
행사 주최 측의 관계자가 다가오자 업계 인사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었다.송민준 역시 곽승재와 여시은을 알아본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곽 대표님까지 참석한 걸 보면 오늘 시상식 규모가 꽤 크네요.”고은서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 곽승재가 여시은과 함께 다가왔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얼마 전까지는 그 인플루언서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나?’온라인에서는 곽승재가 마재경과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는 기사까지 돌고 있었다.‘정식적인 자리라서 파트너로 데려오지 않은 건가?’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여시은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은서야, 송 대표님.”여시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이전에 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송민준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고은서는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시은 씨.”“우리 서로 이름 부르기로 했잖아. 왜 또 이렇게 거리감 두는 거야?”여시은은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은서야, 혹시 내가 곽 대표님이랑 같이 온 걸 보고 오해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답했다.“시... 아니, 시은아.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줘.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알았어. 장난이야.”여시은이 밝게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사실 아빠가 시상자로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온 거야. 곽 대표님도 오늘 시상자여서 목적지도 같은 김에 같이 판주 투자은행에서 출발했어.”“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세요. 전 가서 민아 좀 보고 올게요.”송민준이 자리를 떠나자 여시은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은서야, 송 대표님도 너 좋아하는 거지? 개업식에서 너 대신 페인트도 맞았잖아. 그렇게 재빠르게 움직인 걸 보면 평소에도 너한테 꽤 신경 쓰고 있다는 뜻 아닐까?”민시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날 좋아하는 사람이 뭐 그렇게 많겠어. 송 대표님은 그냥 파
송민아의 시선을 따라가던 고은서는 송민준을 발견했다.금테 안경을 쓴 그는 연회색 정장에 같은 계열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으며 늘씬한 체형에 절제된 기품이 감돌았다.그는 마치 귀족 신사처럼 성숙하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오빠도 이 시상식에 초대받은 거야?”송민아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송민준의 주변에는 이미 몇몇 업계 인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송민아의 존재를 알게 되자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고은서를 발견한 송민준은 곧 송민아와 함께 그녀에게 다가왔다.“은서 씨, 해성에서 선정한 젊은 리더상 후보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축하합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부드러웠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짧게 답했다.“감사합니다.”“오빠, 지난번에 게임 어플 업체 몇 군데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오늘 현장에 와 있어?”송민아는 못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게임사는 보편적으로 핵심 개발진 몇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팀이었기에 자체적으로 테스트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일부 플랫폼에서 사전 테스트를 진행해야 했다.프로젝트의 테스트 업무를 맡고 있는 송민아로서는 출시 전부터 충분한 마케팅과 시장 반응을 끌어내 좋은 시작을 열고 싶었다.송민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오늘따라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구나?”“도와줄 거야, 말 거야?”송민아는 살짝 투덜거렸다.“동생이 부탁하는 데 당연히 도와야지.”송민준은 자연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은서 씨도 같이 가실래요?”시상식이 시작되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던 터라 고은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업체 관계자들은 송민준의 체면을 봐서 적극적으로 협조할 뜻을 밝혔고 송민아는 그들과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며 테스트 관련 사항을 논의했다.고은서와 송민준은 옆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민준 씨,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지난번 저희 삼촌 일도요.”“문제는 해
“육현석 부모님은 언제 만나볼 생각이야?”고은서는 박지연이 이 문제를 너무 오래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예전에 어머님은 한 번 뵌 적 있잖아. 꽤 온화하고 좋은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맞아. 부드럽고 친절하셨어.”박지연은 소파에 기대며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하지만 그때는 여자 친구 신분으로 간 게 아니었잖아. 어머님 입장에서 나는 그냥 낯선 사람이었다 보니 예의상 친절하셨을 수도 있어. 근데 내가 여자 친구로서 찾아가면 혹시라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지?”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은서야, 사실 나 좀 무서워. 현실에서 부모님들이 아들의 연인이 이혼녀라는 걸 쉽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어. 게다가 육현석처럼 집안 조건이 좋은 경우라면 더하겠지. 더 좋은 선택지도 많은데 겉으로는 허락한다고 해도 정말 진심일까 싶어.”박지연의 걱정도 완전히 기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은서는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동료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그 동료의 시어머니는 밖에서 교양 있고 온화한 분이어서 다른 사람들은 고부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혼하고 보니 실제로는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고 했다.겉으로는 며느리를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 괴롭혀 주변 사람들은 모두 시어머니 편만 들었고 결국 동료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만약 육현석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이라면 박지연은 앞으로 다시는 연애나 결혼은 거들떠보지 않을지도 몰랐다.“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고은서는 여전히 육현석 부모님이 그런 분들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육현석만 봐도 알잖아. 아들도 바르게 잘 키우셨으니 믿을 만한 분들이실 거야.”박지연은 고은서의 손을 자기 눈 위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기다려볼래. 우리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잖아. 너무 서두를 필요 없어.”고은서는 그녀의 고민을 이해하며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지연아, 혹시 다른 일 해볼 생각은 없어?”박지연은 그녀의 손을 치
곽승재는 여시은을 흘끗 쳐다보며 무심하게 말했다.“말 그대로예요.”여시은은 대화가 재밌는 듯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설마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 소문들이 사실이었던 거예요? 곽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생겼다던데요?”곽승재는 얼마 전 여시은과 한 번 만나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지 직접 물었었다.여시은은 담담하게 인정하며 예전에 Y국에서 열린 연회에서 여재훈이 일부러 자신을 데려갔다는 사실을 밝혔다.원래는 여재훈이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지만 여시은이 실수로 곽승재에게 술을 쏟아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 못했다고 했다.이후 서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아직도 부모님들 입에서만 오르내리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몰랐다.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십을 캐묻는 여시은을 보며 곽승재는 더 이상 대화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도착했네요. 회의실로 가죠.”여시은은 보통 부잣집 아가씨들처럼 까탈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상황을 잘 파악하는 편이라 곽승재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채자 곧바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알겠습니다. 대표님.”...고은서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박지연은 이미 집에 와 있었다.그녀를 본 박지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왜 나보다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곽승재를 데려다준 일을 이야기했다.“도대체 왜 그래? 곽승재랑 거리 두고 싶어 했잖아. 그런데 왜 또 굳이 먼저 나서서 데려다줬어?”박지연은 말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고은서, 설마 곽승재가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보고 질투라도 한 거야? 아직도 곽승재를 못 잊은 거 아니야?”고은서는 바로 박지연에게 눈을 흘겼다.“제발 상상은 멈춰줘.”“그럼 왜 그랬는데?”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고은서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곽승재가 곽현수랑 주주들에게 약점을 잡힌 것도 결국 우리 삼촌 때문이잖아
“뻔뻔한 건 너지.”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용서한다고 해?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잖아. 그냥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내니 갑자기 사랑에 빠진 척 후회하는 척하면서 나를 붙잡고 늘어진 거잖아. 네가 그렇게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했겠어!”“너...”“곽 대표님, 은서야.”곽승재가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할 때 갑자기 밖에서 여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리자 서류를 품에 안은 여시은이 차 밖에 서 있었다.그녀는 평소처럼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복장 대신 정장에 가까운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고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고은서가 바라보자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은서야, 아빠가 나를 판주 투자은행 쪽에 보내서 곽 대표님 비서를 하게 됐어. 보고 배우라고 보내신 거지. 오늘도 회의가 있어서 내려와서 일정 조율하려고 곽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 할 얘기가 남았으면 먼저 올라가서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릴게.”여시은은 배려 깊은 척 말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일이 우선이죠. 좌천된 몸인데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죠.”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온 건가?’판주 투자은행은 GS 그룹에서 인수한 투자은행에 불과했다.그룹 대표였던 그가 여기로 왔다는 건 단순한 강등이 아니라 사실상 유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방금까지 곽승재에게 쏟아냈던 분노가 가라앉고 죄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GS 그룹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그런데 이제 본사에 남을 수도 없게 됐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곽승재는 이미 차에서 내려 로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여시은은 바로 따라가지 않고 고은서를 향해 미안한 듯 미소 지었다.“은서야, 우리도 오래 못 봤네. 요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오늘은 일이 있어
사람을 부르려던 곽승재가 고은서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곽승재의 새까만 눈동자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고 날렵한 얼굴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고은서는 갑자기 사과할 용기가 사라졌다.“못 들은...”“판주 투자은행.”못 들은 걸로 하라던 고은서의 말에 목구멍에서 맴도는 사이 곽승재는 무심한 어조로 목적지를 말했다.이미 태워주겠다고 말한 이상 고은서도 이제 와서 무를 수 없었다.“타.”고은서는 운전석에 탔고 곽승재는 뒷좌석에 탔다.‘날 대놓고 기사 취급하네?’고은서는 앵두 같은 입술을 꼭 다물고 차를 출발시켰다.차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고은서는 운전에 집중했고 곽승재는 핸드폰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뀐 순간 고은서는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가 마침 곽승재의 시선과 맞닥뜨렸다.그의 눈동자 속에는 뭔가 반짝이고 있는 듯했지만 차 안이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흐린 조명 덕분에 그의 이목구비가 더욱 깊고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의 모습은 마치 신이 직접 조각한 완벽한 작품 같았다.그런 곽승재를 오래 봤던 탓에 고은서는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볼 때마다 신의 불공평함을 새삼 느끼곤 했다.빵!신호등이 바뀌었고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고은서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액셀을 밟았다.“회사 일은 지연에게서 들었어. 미안해.”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고은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곽승재는 코웃음을 흘리듯 낮고 냉소적인 소리를 냈을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차 안의 공기는 다시 싸늘해졌다.그렇게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판주 투자은행 빌딩 앞에 도착했다.고은서는 차를 건물 앞에 세웠다.“재경이가 비록 인플루언서이긴 하지만 계략 있는 애는 아니야. 생각하는 대로 내뱉는 것뿐이니 지연 씨한테 괜히 건드리지 말라고 해줘.”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고은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곽승재를 돌아보았다.“지연이가 왜 재경 씨를 곤란하게 해?”곽
도아름은 씩 웃으며 말했다.“그만큼 진지해졌다는 뜻이겠지. 지연이 육현석 부모님 만나본 적 있어?”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현석이는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지연이가 자꾸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안 가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지연이가 육현석 부모님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도아름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생각이 많은가 보네. 이럴 때는 누가 설득해도 소용없을 거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자신감을 찾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야.”고은서는 도아름의 말에 공감했다.박지연은 이미 한 번 시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결혼을 경험한 적이 있어 육현석이 아무리 안심시켜도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확실히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은서야, 곽 대표랑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뭔가 평소랑 다르네.”도아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잠시 침묵하던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아름 언니, 이유는 말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곽승재가 GS 그룹에서 쫓겨난 건 나 때문이에요.”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도아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너무 자책하지 마. 곽 대표도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나름의 계획이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는 걸 믿어.”도아름의 말에 고은서는 오히려 더 죄책감을 느꼈다.사실 고국성의 일은 그리 급한 상황이 아니었다.하지만 하루라도 미루면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곽현수의 계획을 따른 것이었다.결론적으로 곽승재에게 가장 큰 죄를 지은 건 그녀였다.“물론 마음이 정 불편하면 곽 대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며 오해 풀어.”고은서는 고민스러웠다.사과는 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녀가 직접 함정을 만들고 약까지 먹인 후 여자를 들여보냈으니 오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박지연이 육현석에게 연락했던 탓인지 자리를 마칠 때쯤 육현석이 데리러 왔다.고은서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박지연과 육현석만 남겨두고 떠났다.도아름도 기사가
여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히 알죠. 곽 대표님 전 부인이 아주 아름답다는 소문은 늘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뵈니 그 말이 헛되지 않았네요.”고은서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마재경은 말을 마친 후 조금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이런 부탁을 드리는 게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곽 대표님의 습관과 취향을 좀 더 알고 싶어서요. 은서 씨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고은서는 여자가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적극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곽승재가 가만히 놔두니까 자신감을 얻은 걸까?’“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네요.”고은서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저도 곽 대표님의 습관이나 취향을 잘 모르거든요.”여자는 난처한 기색을 표했고 곽승재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돼.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곽승재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다시 생기가 되살아났다.“정말요? 곽 대표님, 저한테 너무 다정하신 거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는 애교가 넘쳤고 딱 적당한 정도의 달콤함이 섞여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곽승재도 예외는 아니듯 그의 시선이 마재경을 향했다.“넌 착하고 얌전하잖아.”여자는 더욱 부끄러워하며 웃었다.반면 고은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티 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진짜 구역질 나네.”박지연이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여긴 여성 요가 회원 클럽인데 저 역겨운 남자는 어떻게 들어온 거야?”박지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마재경은 바로 곽승재를 감싸며 말했다.“곽 대표님은 저 때문에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게다가 예약할 때 이미 물어봤고 남성 동반도 가능하다고 했어요.”박지연이 반박하려 하자 고은서가 급히 그녀를 말렸다.“지연아, 우리 그냥 가자.”도아름도 적절한 타이밍에 곽승재에게 실례할게요라고 한 마디 남긴 후 세 사람은 화단 근처 테이블로 이동했다.곽승재는 마재경을 데리고
송민아에게 회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고은서는 책상에 앉아 진형서가 준 자료를 펼쳤다.대충 훑어보니 그 안에는 여시은의 기본 정보가 담겨 있었다.여시은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출산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이후 그녀의 아버지인 여재훈이 그녀를 데리고 귀국해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여시은은 오랜 시간 강성에서 생활했으며 가끔 여재훈과 Y 국에 머물기도 했다.생활 반경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고 친구나 동료들 외에도 어머니의 오랜 친구였던 한 여성이 자주 찾아와 돌봐주곤 했다.여시은과 곽승재가 처음 만난 건 한 사교회 자리였으나 이후 별다른 교류는 없었다. 하지만 여재훈과 곽현수가 Y 국에서 사업적 거래가 있어 여시은은 이미 오래전부터 곽현수를 알고 있었다.자료에서 보면 여시은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다.대학 시절 가볍게 만난 두 사람이 있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헤어졌다.‘그렇다면 여시은이 전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핑계였던 걸까? 그녀가 곽승재와의 결혼을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곽현수 때문일까?’고은서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송민아가 와서 재촉했고 그녀는 자료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잠궜다....저녁 무렵 고은서는 업무를 마치고 박지연을 픽업해 도아름을 만나러 갔다.오늘은 세 여자의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명운 주류가 상장된 이후 도아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오랜만에 시간을 비워 나온 만큼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세 사람은 함께 여성 전용 요가 센터로 향했다.센터에서는 요가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시거나 꽃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었다.세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명상 요가를 한 세션 진행했다.몸을 충분히 이완시킨 후 개방형 라운지에서 음료를 마시려던 차에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곽승재와 최근 그와 열애설이 난 인플루언서였다.곽승재는 검은색 캐주얼 셔츠를 입고 있었고 외투는 한쪽 팔에 무심하게 걸쳐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