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백씨 집안 회사가 파산하는 건 이미 확정된 일이었고 백유미도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얼마 후, 고은서와 민시후는 공항에 도착했다.기사는 주차한 후 두 사람의 짐을 VIP 휴식실까지 옮겨주었다.체크인하려고 할 때 고은서는 유성준의 전화를 받았다.‘설마 백유미가 괜히 자기 집안 사업이 망하려고 하니까 다시 고씨 집안 사업에 손을 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오빠, 무슨 일이세요?”“며칠 전에 준 커스텀 향수 관련 자료 봤어? 혹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는가 해서 연락한 거야.”유성준이 그녀에게 전화 한 이류를 말했다.“떠오른 아이디어가 몇 가지 있긴 한데 그래도 구체적인 건 본인을 직접 만나봐야 할 것 같아요.”유성준은 퍼퓸 제작을 부탁한 고객이 요 며칠 사이에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일주일 후에야 가능하다고 이실직고했다.“은서야, 요즘 들어 부쩍 바빠진 것 같은데 건강도 챙기면서 해야 해.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유성준이 그녀를 관심했다.고은서는 약간 어색한 말투로 답했다.“그냥 놀러 가는 김에 당지 현장 시찰도 하려고요. 너무 힘들진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혼자 갔어?”유성준의 물음에 고은서는 옆에 껄렁하게 앉아있는 민시후를 보면서 답했다.“아니요.”고은서는 구체적으로 누구랑 가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유성준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았다.그는 고은서에게 안전 주의하고 해성으로 돌아오면 다시 연락하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너 인기 많다? 새로운 구애자야?”고은서는 어이없어하며 답했다.“민 도련님, 우리가 이런 작은 일까지 서로 알려줄 정도로 친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민시후는 화내는 대신 일부러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만 원한다면 난 매일 회보해 줄 수 있는데.”“아니, 거절할게.”“...”두 사람이 한창 티키타카 하고 있을 때 직원 한 분이 다가
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곽승재가 서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과 셔츠를 차려입은 채 차가운 표정을 하고 그녀와 민시후를 바라보고 있었다.‘곽승재가 여기에 왜 있는 거지?’어제 성아연 일 때문에 연락했을 땐 공항으로 온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그러다 갑자기 며칠 전에 그가 호텔에서 함께 의사 보러 서운으로 가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하필 오늘에 우리랑 같은 목적지로 간다고? 설마 같은 비행기에까지 앉는 건 아니겠지?’“어머, 곽 대표님도 서운에 가시는 거예요?”민시후가 웃으면서 도발하듯 물었다.곽승재는 그를 무시한 채 고은서한테로 다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늘 시간 없다고 하지 않았어?”고은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오늘 내가 서운으로 간다는 걸 알고 일부러 우리랑 똑같은 티켓을 끊은 거야?”세 사람은 서로 물음만 제기할 뿐 그 누구도 서로의 물음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따라서 분위기는 점점 팽팽해져만 갔다.탑승 입구에 다른 여객들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미모가 하도 눈에 띄어 저도 모르게 사람들의 눈길이 그들한테로 쏠렸다. 사람들은 세 사람의 관계를 추측하면서 수군거렸다.고은서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싫어 먼저 입구로 걸어갔다.민시후도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곽승재가 갑자기 고은서의 가방을 빼앗아갔다.“곽승재, 지금 뭐 하는 거야?”민시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내 와이프 가방은 내가 대신 들어주면 돼.”곽승재가 그를 쏘아보며 답했다.그러자 민시후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곽 대표님,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저 고은서의 전남편일 뿐이야. 대체 누가 당신 와이프라는 거야?”“전남편도 남편이야. 그럼 넌 무슨 신분으로 자꾸 고은서한테 질척거리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서로 아이까지 가졌던 사이야. 네가 보건댄 내가 무슨 신분으로 보여?”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그들 옆으로 지나가던 여객들도 그가 내뿜는 한기를 느꼈다.“저기 봐봐. 저 두
“됐어. 오늘 기분 좋으니까 그냥 봐준다.”민시후는 말하면서 고은서를 향해 걸어갔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가 무언가라도 말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시후 손에서 가방을 건네 들며 재빨리 탑승 입구 걸어갔다.“갑자기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야?”민시후가 그녀를 쫓아가며 소리쳤다.곽승재는 홀로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하지만 세 사람 다 비즈니스 좌석이어서 서로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곽승재가 눈앞에 나타났다.비즈니스 좌석 수량이 제한되어 있는 탓에 고은서는 자리를 바꿀 수도 없었다. 심지어 민시후가 옆에 앉아있어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와의 대화를 피하기 위해 아예 좌석을 뒤로 눕히고 잠을 청했다.서운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고은서가 눈을 뜰 때쯤 비행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민시후는 찌뿌둥한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난 너랑 회사 일을 토론하려고 네 좌석을 업그레이드 시켜준 거야. 그런데 넌 완전 꿀잠 자고 있던데?”고은서는 기지개를 켜면서 답했다.“미안. 그런데 나도 말했잖아. 오늘부터 내 휴식일이라고. 분명히 날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민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보면서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머리는 새 둥지냐? 이미지 관리 좀 해. 대체 어딜 봐서 널 여자라고 생각하겠니?”“네가 뭐라고 굳이 힘들게 네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해?”고은서가 반박했다.두 사람이 한창 티키타카 하고 있을 때 곽승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이를 본 민시후는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하긴. 우리가 처음 만난 사이도 아닌데 뭐. 네 이런 모습 말고도 다른 모습도 많이 봐왔는데 확실히 지금 이미지 관리를 해보았자 이미 너무 늦은 것 같긴 해.”민시후의 속셈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더는 반박하지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에 민시후랑 밥 먹을 때마다 곽승재가 각종 이유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던 게 떠올랐다.그녀 또한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도 별로 민시후랑 함께 판다 기지에 가고 싶지 않았는지라 그를 설득해 보내려고 했다.“형이야? 그래도 한 번 돌아가 보는 게 어때? 시찰은 며칠 미루면 되잖아.”고은서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상대방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방금 전보다 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 날이 갈수록 더 버릇없게 구는 거 아니야?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데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야?”“내가 버릇없이 군 게 한두 날이야? 차라리 내가 철들길 원하는 게 더 어리석은 거지.”민시후는 호통치고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가 그를 계속 설득하려고 할 때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너 지금 날 보내고 곽승재랑 단둘이 데이트하려고 하는 거지? 그딴 생각은 지금이라도 접는 거 좋을 거야.” “날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갑자기 질투하는 것처럼 왜 이래? 사람 오해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난 너희 집안 사람들에게 찍혀서 내 평범한 일상을 망치면서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기 싫어.”고은서의 솔직함에 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지금 나랑 선을 긋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기사를 막긴했으나 이미 다 알고 있거든.”‘다 알고 있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송민아가 민시후한테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거든 민씨 집안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토로하면 믿어줄까?”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단호하게 답했다.“소용없을걸.”“...”“고은서, 지금 다들 내가 너 없으면 못 산다고 믿고 있어. 어때? 만족해?”민시후가 물었다.‘뭘 만족한다는 거야? 난 그저 그때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봤을 뿐인데 일을 이렇게 만든 진짜 범인은 너잖아.’고
고은서가 방 하나를 더 요구할 때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갑자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오늘 방이 다 만원이어서 드릴 수 있는 빈방이 없네요.”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저녁 시간도 아닌데 빈방이 없다고요?”직원은 이 호텔이 판다 기지 부근 호텔이어서 거의 매일 만원이라고 전했다.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말했다.“다른 호텔로 가.”민시후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힘들어 못 가겠어. 그냥 네 방에서 하룻밤 보낼게.”“아니. 넌 안 힘들어. 그리고 이런 무리한 요구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그에게 신분증을 던져주면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에게 다른 호텔에 방을 잡아주면 가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그녀가 주변 호텔에 다 연락해 물어보았지만 최근 아기 판다를 만질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이 생기면서 판다 기지를 찾는 사람도 같이 늘어 다 빈방이 없다고 했다.“민 대표님, 설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비서한테 미리 방 잡아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이러는 거죠?”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껄렁대며 답했다.“이런 작은 일까지 내가 직접 신경 써야 해? 아니면 지금이라도 네가 직접 물어보든가.”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왜 물어봐? 비서가 잘못을 저지른 게 네 책임이지 내 책임이야? 길바닥에서 자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그러나 민시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면서 말했다.“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그럼 난 어쩔 수 없이 네 호텔 방 앞에서 이불 깔고 자야겠네. 누가 물어보면 여자친구한테 쫓겨났다고 하지 뭐.”“제 방을 저분한테 주세요.”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는 깨끗한 옷차림에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같은 비행기랑 같은 목적지, 심지어 호텔까지 같은 호텔이라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의 스케줄을 알고 일부러 따라온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러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뻔했다.여자는 괜찮다는 듯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여시은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Y 국 연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 당시 저희 아버지랑 얘기 나누고 있을 때 제가 실수로 곽 대표님과 부딪히면서 곽 대표님 몸에 술을 쏟은 적이 있어요.”곽승재는 한참 고민 끝에 끝내 기억해냈다.“여 대표님 딸 맞나요?”“네. 그래도 저희 아버지가 은근히 이름 있나 봐요. 그래도 기억해줘서 고마워요.”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혹시 방이 모자라나요? 제가 마침 방 두 개를 예약했는데 하나 드릴게요.”여시은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도 귀엽게 생기고 몸도 작고 가녀려서 저도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방 두 개를 예약한 원인이 따로 있을 텐데 저희가 민폐 끼치는 거 아닌가요?”고은서가 물음에 여시은은 웃으면서 답했다.“괜찮아요. 쿠아 데리고 왔는데 혹시라도 저랑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불편해하면 다른 방에 혼자 있게 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적응능력이 엄청 강해서 별문제 없이 저랑 잘 지내고 있어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자신의 크로스백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뽀송뽀송한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고은서의 얼굴에는 이내 화색이 돌았다.“전에 구한 그 고양이인가요? 너무 귀여워요.”“맞아요. 발을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처치했거든요. 그래서 걷기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요.”여시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긴 했으나 고은서의 손길은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애교까지 부렸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머리를 몇 번 더 어루만졌다.쿠아를 좋아하는 고은서를 보며 여시은은 그녀에게 제안했다.“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지 않을래요?”마침 민시후랑 곽승재를 혼자 마주하기 싫었던 고
고은서는 아예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여시은에게 물었다.“우리 다른 테이블로 갈까요?”그러나 여시은은 재밌다는 듯 사양했다.“괜찮아요. 떠들썩하고 재밌고 좋은데요.”‘완전 팝콘각으로 생각하면서 흥미진진해 하는 거 같은데.’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분위기가 어색하긴 했지만 주문은 예상 밖으로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여시은이 매운 음식을 별로 먹지 못했기에 안 매운 음식도 함께 주문했다.음식들이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고 네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얼마 후 여시은은 배부르다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서 끊임없이 야옹거리는 쿠아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이내 세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고은서는 무언의 압력을 느꼈다.곽승재는 매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어떤 음식이 맛있고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꿰뚫고 있었다.그는 별로 먹지도 않고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심지어 고은서에게 티슈를 건네주거나 물을 건네주는 등 다정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곽 대표, 서비스가 끝내주는데? 차라리 웨이터로 재취업하는 건 어때? 연말 랭킹 1위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은데.”민시후가 옆에서 비아냥거렸다.곽승재는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바로 이때, 민시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곽승재를 도발하던 그는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나 배불러.”다른 한 편 고은서는 곽승재의 행동을 제지했다.“매운 음식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배불러?”곽승재가 물었다.“입맛이 별로 없어서. 의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내일 의사 만나고 곧바로 해성으로 돌아가.”고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나한테는 시간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이유가 민시후랑 여행하기 위해서였어? 민시후가 너 때문에 다친 내 상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
고은서는 또 한 번 곽승재의 변화를 느꼈다.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그리고 호텔 로비에서도 민시후와 함께 있는 그녀를 전처럼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다.방금전에 다시 시작하자고 일련의 약속을 한 것도 너무 뜻밖이었다.과거의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그의 눈빛을 보아서는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아마 전생의 그녀였다면 혹은 금방 환생한 그녀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안 돼.”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곽승재는 순간 눈에 띄게 실망해 했다.“은서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당신이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뭘 안다고 그래?”고은서가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순간 자괴감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알고 있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으니까 내 가까이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서야...”“뭐야? 고백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걸어오면서 비아냥거렸다.“민시후!”종일 참고 있던 곽승재의 분노가 끝내는 폭발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회사를 똑같은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그러나 민시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ZY 그룹뿐만 아니라 차라리 북제에 있는 민씨 가문 전체를 망가뜨리지 그래? 더 재밌을 것 같은데.”“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겠지. 사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GS그룹의 곽 대표에겐 아주 쉬운 일이겠지.”민시후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그를 약 올렸다.“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날 북제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 같던데. 형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나, 나중엔 아버지한테서 직접 전화가 오고 말이야. 왜? 고은서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겁나?”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
행사는 공원에서 진행됐다.이미 무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는 다양한 게임 부스와 음료, 간식들이 마련되어 있었다.고양이 가방과 케이지 대여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었다.고양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고은서와 여시은은 쿠아를 안고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SNS에 게시했다.행사는 즐길 거리가 풍부하고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고은서와 여시은은 고양이를 키우는 여러 친구와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또한 많은 고양이 아빠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다른 사람들에게 안긴 고양이 혹은 기품 있어 보이거나 귀여워 보이는 고양이에 비해 쿠아는 평범한 축에 속했다. 어쩌면 이 행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평범한 믹스묘인데 다쳐서 털도 완전히 자라지 않아 쿠아의 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였다.심지어 케이지에 있는 길고양이들보다도 평범해 보였다.하지만 여시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피곤해 보이는 쿠아를 품에 안고 행사장을 둘러보았다.고은서는 그런 그녀를 따라다니면서도 은근히 주변을 살폈다.여시은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풀리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었다.하지만 행사 내내 별다른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고 여시은은 그저 평소처럼 고양이를 구경하며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어머나! 저 남자 좀 봐. 너무 잘생겼어.”그때 여자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키도 크고 손도 예술이다! 저 손으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그러니까 말이야! 저 남자가 들고 있는 케이지 속 고양이가 되고 싶다.”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곽승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평소와 달리 짙은 회색 캐주얼 차림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고양이 케이지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얼마 전 그가 입양한 새하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차가운 이상의 남자와 작고 보들보들한 새끼 고양이의 조합
쿠아의 이마 한쪽에는 털이 빠져 있어 붉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전에는 부드럽고 포동포동했던 쿠아는 이제 털도 엉망이 되고 마른 데다 전보다 겁도 더 많아져 있었다.고은서가 손을 뻗자 쿠아는 긴장한 나머지 털을 바짝 세우고 낮게 경고하는 소리를 냈다.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입을 벌릴 때 보니 이가 하나 빠져 있었고 예전에 다쳤던 입가에는 흉터가 남아 있었다.그녀의 고양이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쿠아가 지난번에 떨어져 다친 이후로 점점 더 겁이 많아졌어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해요. 저도 좋아하는 간식을 많이 줘서야 겨우 가까이 갈 수 있었어요.”여시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쿠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래서 오늘은 바깥에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도 시키고 친구를 한 마리 골라주려고요. 그러면 덜 외롭지 않을까 해서요.”여시은의 손길에도 쿠아는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사납게 굴었다.여시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은서 씨, 일단 차에 타요. 차 안에 간식 있어요.”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차 안에서 쿠아에게 간식을 줘도 진정되지 않았고 계속 뒷자리로 물러나며 발톱을 날카롭게 세웠다.보다 못한 고은서가 말했다.“시은 씨, 제가 쿠아를 안고 있을 테니 직접 먹여볼래요?”여시은은 흔쾌히 수락했다.“좋아요.”쿠아를 조심스레 안아 무릎에 올릴 때 보니 쿠아는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쿠아의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자 쿠아는 서서히 진정했고 한참 지나자 피곤했는지 눈도 감아버렸다.“은서 씨는 정말 인기가 많네요. 구애자도 많은데 쿠아까지 은서 씨를 좋아하네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쿠아를 계속 쓰다듬으며 무심히 말했다.“시은 씨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미 좋아하시는 분이 있으셔서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는 것뿐이겠죠.”여시은은 한순간 멍하니 있더니 이내 깔깔 웃었다.“은서 씨, 제가 했던 농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어요. 그때 은서
“어떻게 알았어?”민시후가 조금 우쭐해하며 말을 이었다.“설마 내 일정 몰래 캐고 다니는 거야? 몰래 하지 않아도 돼. 비서에게 매일 일정을 너한테 보내라고 할게.”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그를 노려보았다.“며칠 전 진 비서가 나한테 전화한 거 잊은 거야? 네가 하루하루 더 바빠져서 토요일에도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진 비서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했어?”민시후는 불만스러운 듯했다.고은서는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네가 따로 시킨 게 아니라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있겠어?”들킨 민시후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했다.ㄴ“나는 그렇게 자세히 말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내가 빈둥거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만 전하라고 했다고.”고은서는 약간 야윈 듯한 민시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은서야, 네가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얘기하면 나 발이 안 떨어져.”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그 후 이틀 동안 고은서는 게임 회사 프로젝트를 챙기는 한편 동료들과 다른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들도 논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회사에 운전기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두 사람은 운전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필요할 경우 보디가드 역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은서가 게임 회사 쪽에 도착해 보니 골목과 아파트 단지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보안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 있었다.“어떤 사람이 사비로 설치한 거예요.”게임 회사 직원이 설명했다.“이 낡은 아파트에는 관리자조차 없어서 CCTV 달아달라는 신청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반려됐거든요. 다행히 이번에 누군가가 사비를 들여 설치해 줬어요. 아니었으면 기대도 못 했겠죠.”“사비를 들여서 이런 공익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요?”고은서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어떤 그룹 대표라고 하던데요? 성이 뭐더라, 곽이었나? 고였나? 그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선행을 해도 이름을 남기거나 과시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 신기해요.”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
민시후의 의문에 고은서는 솔직하게 답했다.“여시은을 떠볼 기회를 찾고 싶어서.”“뭘 떠보고 싶은데?”고은서가 차분히 설명했다.“예전에 여시은이 나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그런데 해성에 온 지도 꽤 됐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보통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예전의 그녀가 곽승재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의 민시후가 그녀에게 그러하듯이 하루라도 빨리 상대를 보고 싶어 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초조하거나 그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좋아하는 사람에 관하여 얘기할 때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이 자신의 감정을 모르고 있다고 하기도 했다.“그래서 난 여시은이 곽승재와의 정략 결혼설을 막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일 거로 생각해.”고은서는 차분히 분석했다.“첫째, 여시은이 그 소문을 이용해 좋아하는 남자가 긴장하고 다가오도록 유도하는 것. 둘째는 여시은이 좋아하는 사람이 곽승재일 가능성이야.”처음 서운에서 만났을 때 여시은은 곽승재를 한눈에 알아봤다.여시은이 1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봤다고 했지만 곽승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그에 반해 여시은은 술자리에서의 일을 너무나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어쩌면 그때부터 곽승재에게 마음이 있었을지도 몰랐다.민시후는 고은서의 추측을 부정하는 대신 물었다.“너는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여시은이 처음부터 곽승재를 좋아했다면 나를 경쟁자로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여시은이 지금껏 보인 호의도 진심이 아닐 확률이 높지. 그리고 어젯밤 일도 여시은이 했을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지.”민시후는 그녀의 말을 듣고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은서야, 너 말이야. 곽승재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여자에 관해 얘기하면서도 무척 덤덤해. 이제 정말 곽승재를 완전히 내려놓은 거야? 그렇다면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고은서는 민시후를 흘겨보며 말했다.“난 지금 사랑에는 관심이 없어. 돈 버는 데만 집중할
민시후는 사무실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말했다.“어젯밤 우리가 떠난 후 타이어 수리 업체가 현장에 도착했어. 업체 사람들은 예비 타이어로 교체한 후 차를 정비소로 가져갔어. 그런데 오늘 아침 확인해 보니 네 타이어 단순히 못이나 돌을 밟아서 찢어진 게 아니었어. 누군가 일부러 찔러 손상한 거야. 게다가 꽤 깊이 베였더라.”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렇다면 어젯밤 그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계획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가?’먼저 그녀의 타이어를 망가뜨리고 두 떠돌이 남성이 꼭 지나칠 쓰레기통에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배치했다. 고은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약기운이 돌기 시작한 떠돌이들이 딱 맞춰 반응하도록 말이다.‘도대체 누가 이렇게까지 해서 나를 해치려고 하는 거지?’“타이어를 망가뜨린 사람 찾을 방법 있을까?”민시후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그 골목에는 CCTV가 없어. 뒤편은 전부 주택가라서 범인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여시은 한번 조사해 보는 건 어때?”고은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비록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어젯밤 여시은의 행동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민시후는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은서야, 우리 정말 통하나 봐. 나도 여시은이 등장이 의심스러워서 사람 시켜 조사하고 있거든.”고은서가 민시후의 말에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여시은의 이름을 확인한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핸드폰을 보여주며 말했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이게 딱 그런 경우인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대단한 배포네. 밖에서는 곽승재와 곧 정략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졌는데도 너랑은 또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말이야.”사실 고은서도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여시은은 줄곧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해 왔고 심지어 그녀와 곽승재를 이어주려고까지 했다.그러면서 곽승재와의 결혼설은 부정한 적이 없었다.여시은이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얼마든지
고은서뿐만 아니라 송민아와 송민준도 민시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살짝 놀랐다.민시후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고은서에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화려하고 싱싱한 장미를 보고 고은서는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뭐야?”민시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나 결심했어. 다시 은서 씨를 쫓아다닐 거야!”“은서 씨도 말했잖아, 어차피 1년 후에도 우리 가족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그럼 굳이 1년을 헛되이 보낼 필요 없잖아!”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자신의 거절이 오히려 민시후를 더 자극할 줄은 몰랐다.그때, 송민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민아야, 차에 고객이 선물한 체리가 있던데 가져와서 다 같이 나눠 먹자.”송민아는 오빠의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송민준은 동생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할까 봐 배려해 준 것이다. 사실 ZY그룹에 있을 때도 민시후는 고은서에게 꽃다발을 준 적이 있었기에 송민아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시후가 과거에 송민아와 약혼했던 사람이라서, 이 자리가 확실히 어색했다.“알겠어.”송민아는 더 말하지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여전히 장미를 들고 서 있던 민시후는 송민준을 발견하고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뭐야, 송 가주가 왜 또 여기 있는 거지?”송민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민아를 보러 왔다가 마침 은서 씨랑 밖에서 만났어.”민시후는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고은서에게 장미를 내밀었다.“장미가 마음에 안 들면 밑에 다른 꽃들도 준비해 놨으니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볼래?”고은서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됐어.”이 꽃 한 다발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과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아 조용히 꽃을 받아들였다.“고마워. 하지만 다음부터는 이렇게 부담스럽게 하지 마.”민시후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좋아하는 여자한테 꽃 선물하는 건 당연한 거야. 익숙해져야지!”그때 송민준이 의미심장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