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오늘 기분 좋으니까 그냥 봐준다.”민시후는 말하면서 고은서를 향해 걸어갔다.반면 곽승재는 고은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그녀가 무언가라도 말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그러나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민시후 손에서 가방을 건네 들며 재빨리 탑승 입구 걸어갔다.“갑자기 왜 그렇게 빨리 걷는 거야?”민시후가 그녀를 쫓아가며 소리쳤다.곽승재는 홀로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하지만 세 사람 다 비즈니스 좌석이어서 서로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곽승재가 눈앞에 나타났다.비즈니스 좌석 수량이 제한되어 있는 탓에 고은서는 자리를 바꿀 수도 없었다. 심지어 민시후가 옆에 앉아있어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와의 대화를 피하기 위해 아예 좌석을 뒤로 눕히고 잠을 청했다.서운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고은서가 눈을 뜰 때쯤 비행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다.민시후는 찌뿌둥한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난 너랑 회사 일을 토론하려고 네 좌석을 업그레이드 시켜준 거야. 그런데 넌 완전 꿀잠 자고 있던데?”고은서는 기지개를 켜면서 답했다.“미안. 그런데 나도 말했잖아. 오늘부터 내 휴식일이라고. 분명히 날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민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를 보면서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머리는 새 둥지냐? 이미지 관리 좀 해. 대체 어딜 봐서 널 여자라고 생각하겠니?”“네가 뭐라고 굳이 힘들게 네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해?”고은서가 반박했다.두 사람이 한창 티키타카 하고 있을 때 곽승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이를 본 민시후는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하긴. 우리가 처음 만난 사이도 아닌데 뭐. 네 이런 모습 말고도 다른 모습도 많이 봐왔는데 확실히 지금 이미지 관리를 해보았자 이미 너무 늦은 것 같긴 해.”민시후의 속셈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더는 반박하지
고은서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전에 민시후랑 밥 먹을 때마다 곽승재가 각종 이유로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했던 게 떠올랐다.그녀 또한 이번에도 똑같은 수법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도 별로 민시후랑 함께 판다 기지에 가고 싶지 않았는지라 그를 설득해 보내려고 했다.“형이야? 그래도 한 번 돌아가 보는 게 어때? 시찰은 며칠 미루면 되잖아.”고은서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상대방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방금 전보다 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시후, 날이 갈수록 더 버릇없게 구는 거 아니야? 지금 그 여자 때문에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데도 돌아오지 않겠다는 거야?”“내가 버릇없이 군 게 한두 날이야? 차라리 내가 철들길 원하는 게 더 어리석은 거지.”민시후는 호통치고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고은서가 그를 계속 설득하려고 할 때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민시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 너 지금 날 보내고 곽승재랑 단둘이 데이트하려고 하는 거지? 그딴 생각은 지금이라도 접는 거 좋을 거야.” “날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갑자기 질투하는 것처럼 왜 이래? 사람 오해하게 만들지 마. 그리고 난 너희 집안 사람들에게 찍혀서 내 평범한 일상을 망치면서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기 싫어.”고은서의 솔직함에 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지금 나랑 선을 긋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어.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기사를 막긴했으나 이미 다 알고 있거든.”‘다 알고 있다고? 그러면 안 되는데. 송민아가 민시후한테 약혼을 없던 일로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내거든 민씨 집안 사람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지금이라도 모든 사실을 토로하면 믿어줄까?”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단호하게 답했다.“소용없을걸.”“...”“고은서, 지금 다들 내가 너 없으면 못 산다고 믿고 있어. 어때? 만족해?”민시후가 물었다.‘뭘 만족한다는 거야? 난 그저 그때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말해봤을 뿐인데 일을 이렇게 만든 진짜 범인은 너잖아.’고
고은서가 방 하나를 더 요구할 때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갑자기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오늘 방이 다 만원이어서 드릴 수 있는 빈방이 없네요.”고은서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저녁 시간도 아닌데 빈방이 없다고요?”직원은 이 호텔이 판다 기지 부근 호텔이어서 거의 매일 만원이라고 전했다.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말했다.“다른 호텔로 가.”민시후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답했다.“힘들어 못 가겠어. 그냥 네 방에서 하룻밤 보낼게.”“아니. 넌 안 힘들어. 그리고 이런 무리한 요구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그에게 신분증을 던져주면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에게 다른 호텔에 방을 잡아주면 가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그녀가 주변 호텔에 다 연락해 물어보았지만 최근 아기 판다를 만질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이 생기면서 판다 기지를 찾는 사람도 같이 늘어 다 빈방이 없다고 했다.“민 대표님, 설마 이곳으로 오기 전에 비서한테 미리 방 잡아두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일부러 이러는 거죠?”고은서의 물음에 민시후는 껄렁대며 답했다.“이런 작은 일까지 내가 직접 신경 써야 해? 아니면 지금이라도 네가 직접 물어보든가.”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왜 물어봐? 비서가 잘못을 저지른 게 네 책임이지 내 책임이야? 길바닥에서 자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그러나 민시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면서 말했다.“너무 야박한 거 아니야? 그럼 난 어쩔 수 없이 네 호텔 방 앞에서 이불 깔고 자야겠네. 누가 물어보면 여자친구한테 쫓겨났다고 하지 뭐.”“제 방을 저분한테 주세요.”고은서가 화를 내려고 할 때 차가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는 깨끗한 옷차림에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같은 비행기랑 같은 목적지, 심지어 호텔까지 같은 호텔이라고?’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의 스케줄을 알고 일부러 따라온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러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뻔했다.여자는 괜찮다는 듯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여시은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Y 국 연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 당시 저희 아버지랑 얘기 나누고 있을 때 제가 실수로 곽 대표님과 부딪히면서 곽 대표님 몸에 술을 쏟은 적이 있어요.”곽승재는 한참 고민 끝에 끝내 기억해냈다.“여 대표님 딸 맞나요?”“네. 그래도 저희 아버지가 은근히 이름 있나 봐요. 그래도 기억해줘서 고마워요.”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곽 대표님, 혹시 방이 모자라나요? 제가 마침 방 두 개를 예약했는데 하나 드릴게요.”여시은의 애교 섞인 목소리는 다른 사람과 달리 반감이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도 귀엽게 생기고 몸도 작고 가녀려서 저도 모르게 보호해주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방 두 개를 예약한 원인이 따로 있을 텐데 저희가 민폐 끼치는 거 아닌가요?”고은서가 물음에 여시은은 웃으면서 답했다.“괜찮아요. 쿠아 데리고 왔는데 혹시라도 저랑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불편해하면 다른 방에 혼자 있게 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적응능력이 엄청 강해서 별문제 없이 저랑 잘 지내고 있어요.”여시은은 말하면서 자신의 크로스백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뽀송뽀송한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를 쏙 내밀었다.고은서의 얼굴에는 이내 화색이 돌았다.“전에 구한 그 고양이인가요? 너무 귀여워요.”“맞아요. 발을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가서 처치했거든요. 그래서 걷기 시작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요.”여시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고양이는 사람을 무서워하긴 했으나 고은서의 손길은 피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야옹거리며 애교까지 부렸다.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고양이의 머리를 몇 번 더 어루만졌다.쿠아를 좋아하는 고은서를 보며 여시은은 그녀에게 제안했다.“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밥이라도 먹지 않을래요?”마침 민시후랑 곽승재를 혼자 마주하기 싫었던 고
고은서는 아예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하고 여시은에게 물었다.“우리 다른 테이블로 갈까요?”그러나 여시은은 재밌다는 듯 사양했다.“괜찮아요. 떠들썩하고 재밌고 좋은데요.”‘완전 팝콘각으로 생각하면서 흥미진진해 하는 거 같은데.’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분위기가 어색하긴 했지만 주문은 예상 밖으로 순리롭게 진행되었다. 여시은이 매운 음식을 별로 먹지 못했기에 안 매운 음식도 함께 주문했다.음식들이 하나둘씩 오르기 시작했고 네 사람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얼마 후 여시은은 배부르다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옆에서 끊임없이 야옹거리는 쿠아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이내 세 사람만 남게 되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앉은 고은서는 무언의 압력을 느꼈다.곽승재는 매운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어떤 음식이 맛있고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꿰뚫고 있었다.그는 별로 먹지도 않고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심지어 고은서에게 티슈를 건네주거나 물을 건네주는 등 다정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곽 대표, 서비스가 끝내주는데? 차라리 웨이터로 재취업하는 건 어때? 연말 랭킹 1위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 같은데.”민시후가 옆에서 비아냥거렸다.곽승재는 그를 힐끗 쏘아보고는 계속 고은서를 위해 음식을 짚어주었다.바로 이때, 민시후의 핸드폰이 울렸다. 곽승재를 도발하던 그는 행동을 멈추고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나 배불러.”다른 한 편 고은서는 곽승재의 행동을 제지했다.“매운 음식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배불러?”곽승재가 물었다.“입맛이 별로 없어서. 의사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시간 낭비는 그만하고 내일 의사 만나고 곧바로 해성으로 돌아가.”고은서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전에 나한테는 시간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그 이유가 민시후랑 여행하기 위해서였어? 민시후가 너 때문에 다친 내 상처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야?”곽승재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내
고은서는 또 한 번 곽승재의 변화를 느꼈다.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그리고 호텔 로비에서도 민시후와 함께 있는 그녀를 전처럼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다.방금전에 다시 시작하자고 일련의 약속을 한 것도 너무 뜻밖이었다.과거의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그의 눈빛을 보아서는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아마 전생의 그녀였다면 혹은 금방 환생한 그녀였다면 이런 말을 듣고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의 고은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안 돼.”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곽승재는 순간 눈에 띄게 실망해 했다.“은서야,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 당신이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뭘 안다고 그래?”고은서가 헛웃음을 치면서 말했다.곽승재는 순간 자괴감 때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알고 있어. 내가 다 보상해줄게.”‘아니,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또다시 거절했다.“필요 없으니까 내 가까이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은서야...”“뭐야? 고백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민시후가 걸어오면서 비아냥거렸다.“민시후!”종일 참고 있던 곽승재의 분노가 끝내는 폭발했다.“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회사를 똑같은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그러나 민시후는 무서워하기는커녕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ZY 그룹뿐만 아니라 차라리 북제에 있는 민씨 가문 전체를 망가뜨리지 그래? 더 재밌을 것 같은데.”“내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곽승재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겠지. 사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인 GS그룹의 곽 대표에겐 아주 쉬운 일이겠지.”민시후가 비꼬는 듯한 말투로 그를 약 올렸다.“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날 북제로 돌려보내려고 한 것 같던데. 형한테서 전화가 오지 않나, 나중엔 아버지한테서 직접 전화가 오고 말이야. 왜? 고은서가 나한테 잘해주니까 겁나?”
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당연히 곽승재가 한 짓이겠지.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아마 끊임없이 연락 올 거야.”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그는 부득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택시 불러줄 테니까 너 혼자 가. 굳이 내가 같이 가줄 필요 없잖아.”“두 시간이란 시간을 나한테 투자하면 이틀 동안 심지어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될 텐데 설마 내가 계속 네 곁에 붙어있길 바라는 거야?”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이건 그냥 답정너잖아.’고은서는 당연하게도 두 시간으로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는 걸 선택할 것이다.‘민시후가 가면 곽승재도 더는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렇게 되면 나도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야.’민시후가 비서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끊어달라고 부탁할 때 고은서는 먼저 중식집 밖으로 나갔다.여시은은 중식집 앞에 있는 잔디밭에서 만년필 하나를 들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었다.고양이가 이리저리 뛰면서 그녀의 손을 물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만년필을 물라고 고양이를 달랬다.여시은은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검은 긴 생머리가 어깨 위에 자연스레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달래는 그녀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그러다 갑자기 고양이가 그녀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땅에 떨어뜨렸다.그러나 그 만년필을 피뜩 들여다본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갖고 있던 만년필이었다.전에 곽승재의 물건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두고 소중히 여기던 고은서는 그 만년필이 곽승재가 평소에 쓰던 만년필이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은서 씨.”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여시은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고은서도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호텔로 갈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쿠아랑 더 놀아주고 갈 거예요?”“당연히 호텔로 가죠. 마침 쿠아도 배고파하는데 잘됐네요.”여시은이 고양이를 안고 고은서를 향해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전에 몇 번이고 물어봐도 날 놀리면서 안 알려주더니 이번엔 진짜 알려주려는 건가?’“이유가 뭔데?”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알고 싶으면 같이 뒷좌석에 앉아줘. 그래야 말하기 편하잖아.”민시후가 껄렁거리며 말했다.망설임도 잠시, 고은서는 이내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녀는 민시후와 곽승재 사이의 모순에 관해 너무 알고 싶었다.게다가 차에 기사도 있었고 민시후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물론 기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민시후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민시후도 그녀를 따라 뒷좌석에 앉았다.문을 닫은 후 민시후는 폰을 꺼내 그녀와 함께 셀카 한 장을 찍고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음성메시지를 보내며 깐족댔다.“곽 대표, 봤지? 고은서가 날 공항까지 데려다주면서 심지어 나랑 같이 앉기 위해 뒷좌석에 탔다니까. 당신은 날 못 이겨.”‘왜 갑자기 진지하게 슬픈 감정에 젖어있는 것처럼 곽승재 얘기를 먼저 꺼내냐 했더니 곽승재랑 내기 한 거였어?’“그만 쳐다봐. 나도 곽승재한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잖아.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아까 둘이 만나서 내기하자고 했어?”고은서가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방금 전, 민시후가 짐을 가지고 내려가려고 할 때 차마 이렇게 쉽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부러 곽승재를 찾아가 그녀가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라 하면서 도발했던 것이다.“고은서 이젠 당신 차에 앉으려고도 안 하지? 그런데 어쩌나, 내 차에는 엄청 잘 앉는데. 내가 직접 운전할 때면 내 옆 조수석에 앉아주고 내가 뒷좌석에 앉을 때면 또 나랑 같이 뒷좌석에 앉아주고 하는데.”그는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곽승재를 보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보탰다.“왜? 못 믿겠어? 그럼 기다려. 내가 증명해 보일 테니까.”지금 이 시각, 민시후는 고은서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내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
이메일 알림 소리가 울리자 온승준이 압축 파일을 열고 비디오를 재생했다.어머니의 말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지만 박지연이 독신으로 살아도 다시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온승준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그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며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고은서는 조수연이 온 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을 들었다.고은서는 화내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낯으로 와서 너한테 난리 치는지 모르겠네? 다음에는 그냥 신고해 버려.”박지연은 이미 화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응. 다음엔 바로 신고할게.”고은서는 박지연을 몇 번 쳐다보며 물었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지금 나 얕보는 거야? 그런 사람 주위에 많아. 더 심한 사람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에는 시어머니니까, 중간에 낀 온승준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좀 존중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욕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고은서는 박지연의 태도에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좋네. 제대로 정신 차린 거 맞네. 응원해.”박지연은 그 칭찬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점점 더 감탄했다. 이혼 이후 박지연은 한 번도 온승준이나 그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이혼한 날 밤 잠시 울고 소리 지른 후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거나 마음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박지연의 말에 따르면 전에 발생한 일은 모두 허상으로 그 누구도 허상을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날 밤, 박지연은 온승준에게서 온 사과 문자를 받았다.[어머니 대신 사과할게. 앞으로는 다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거뒀다.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고은서는 먼저 ZY 그룹에 들러 송민아와 몇 가지 업무를 마친 뒤 민시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은서는 우연히 여시은을 마주쳤다.여시은은 비서
온승준이 급히 자신의 어머니를 막아섰다.“뭐 하시려는 거예요?”조수연이 분노하며 말했다.“쟤 상사한테 가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냐고 따지려고.”“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온승준이 목소리를 높이자 조수연은 더 화를 내며 말했다.“승준아, 엄마한테 무슨 말투야? 박지연 때문에 나랑 또 싸우려고? 너 그 여자가 우리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잊은 거야? 박지연이 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얘기했는지 기억 안 나? 굳이 이혼하겠다고 난리 쳐서 이혼했으면서 왜 또 뒤꽁무니 쫓아온 거야!”온승준이 짜증 내며 말했다.“지연이도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연이에게 잘해준 거 없어요.”“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분노로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뭘 못해 줬는데? 네 아내로서 널 돌보고 시부모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게다가 그런 학력과 직업으로 우리 집에 시집온 걸 감사해야지!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말대꾸하고. 미리 얘기하는데 나랑 네 아버지는 박지연이 다시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거 절대로 반대다.”온승준이 싸늘한 말투도 답했다.“지연이도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해요. 이제는 저랑 말도 잘 안 한다고요.”“마침 잘됐네. 이제 박지연한테 그만 굽신거리고 얼른 이전에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 혜린이도 싫으면 엄마가 성격 좋고 집안 좋은 여자들 소개해 줄게.”“어머니!”온승준이 조수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다른 여자는 싫어요. 직장도 그만두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정말 저를 위한다면 아버지랑 같이 와서 지연이한테 사과해 주세요.”“우리가 사과하라고?”조수연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과를 받아!”온승준은 더 이상 조수연과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간호사실에서 동료들에게 일을 맡기고 옷을 갈아입은
박지연도 온승준을 발견하고는 고은서에게 말했다.“병실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래.”그때 온승준이 박지연을 불렀다.“지연아.”“두 사람이 얘기해. 난 먼저 들어갈게.”“은서 씨.”온승준이 고은서를 부르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평소 불필요한 교류는 하지 않는 온승준이 이렇게 먼저 나한테 말을 건넨다고?’“지연이 동료들에게서 들었는데 은서 씨 친구가 다쳤다면서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온승준이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고은서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방으로 향했고 박지연은 온승준을 차분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심장외과 쪽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잠깐 들러봤어.”온승준은 박지연이 기분 나빠 할까 봐 해명했다.“그럴 필요 없는데. 온 선생님 업무도 바쁜 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온승준은 말문이 막혔지만 다시 한번 물었다.“그동안 병원에 없던데 괜찮아?”“무슨 일 있었으면 출근도 못 했겠지?”박지연은 약간 짜증이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온 선생님, 다른 일 없으면 가. 난 아직 할 일이 많아서.”온승준은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병원에서 근무한 지 반달이 넘었지만 그는 박지연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겨우 마주쳤지만 박지연이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요 며칠 박지연이 연차를 냈다는 사실도 그녀의 동료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었다.이전의 박지연은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모두 그에게 공유했었다.하지만 박지연은 이제 그녀의 세상에서 온승준이라는 사람을 지우기라도 한 듯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온승준이 먼저 연락하려 했지만 번호도 차단당한 듯했다.온승준은 겨우 만난 박지연과 이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친구랑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온승준은 겨우 타당한 이유 하나를 찾았다.이혼 전날 밤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
“얼른 와서 은서랑 인사하지 않고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전미자가 말했다.장순이 과일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갔다.곽승재는 느린 걸음으로 그녀들 앞으로 다가왔다.그는 고은서를 어두운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본 뒤 입술을 약간 움직였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요 며칠 뭐하면서 지낸 거야? 왜 이렇게 병든 고양이처럼 힘이 없어 보여?”전미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할머니, 제가 T 국에서 사고를 당했는데 승재는 저를 도와주려다가 다쳤어요.”고은서가 솔직하게 말했다.“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으니 너무 다그치지 말아 주세요.”‘은서를 도와주고도 은서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니. 내가 모르는 일들이 더 많이 있었겠네.’전미자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몰래 한숨을 쉰 후 더 이상 곽승재를 질책하지 않았다.“할머니, 저 친구가 아직 병원에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저녁은 가서 먹을게요.”곽승재가 돌아오지 않은 줄 알고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했던 고은서였지만 그가 돌아오자 고은서는 그와 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전미자는 다시 한번 나서 고은서를 잡으려 했다.“주방에도 다 준비했는데 먹고 가. 급한 거 아니잖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제안은 감사하지만 먼저 가볼게요.”전미자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은서야, 시간 나면 자주 와.”“네. 할머니, 다음에 봬요.”말을 마친 고은서가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곽승재가 말하자 고은서는 싸늘한 어조가 아닌 평소와 다름없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괜찮아. 넌 좀 쉬어.”곽승재는 그 말에 다시 한층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지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그저 고은서가 밖으로 나갈 때 뒤따라 나갔다.고은서가 차키를 누르자 곽승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은서야, 어깨는 이제 괜찮아졌어?”고은서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평온하게 답했다.“응, 괜찮아.”말을 마친 고은서가 운전석에 앉으려 했다.“민시후를 돌보려고 병원에 급하
고은서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승재랑 이혼할 때 급해서 제때 돌려드리지 못했어요. 오늘 마침 시간이 나서 가져왔어요.”“은서야, 이건 할머니가 너한테 준 선물이야. 그걸 돌려주면 이 할머니가 섭섭하잖니?”전미자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말했다.“할머니 마음은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이건 원래 미래 손자며느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잖아요. 그런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담긴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이것도 저 대신 곽승재한테 전해 주세요.”지난번 곽승재가 가져갔던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 하자 전미자는 대략적인 상황을 짐작한 듯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은서야, 할머니는 너와 승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승재가 또 너를 실망하게 했겠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날 너무 어려워하지 말렴. 이 목걸이는 손자며느리를 위한 게 아니라 너에게 준 선물이야.”전미자가 말을 이었다.“너처럼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승재와의 결혼 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겠지. 할머니도 다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가 승재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로 생각한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네가 힘들 걸 알면서도 네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고은서는 전미자의 따뜻한 말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아요. 곽승재랑 결혼한 건 제 고집이지 할머니랑 상관없는 일이었잖아요. 목걸이를 돌려드리는 것도 할머니랑 거리를 유지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목걸이가 할머니에게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건 부적절한 것 같아서예요.”“뭐가 부적절하다는 거야? 너도 1년 넘게 내 손자며느리로 살았잖니. 내가 준 선물을 돌려주면 내가 얼마나 속상하겠니?”그 말에 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말했다.“할머니께서 제가 주시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그래야지.”전미자는 다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보며 말했다.“이건 승재가 네가 좋아한다고
유성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다만 내가 항상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고은서는 유성준이 몇 년 동안 자신을 좋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자기 뜻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그는 계속 기다릴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미안해하며 말했다.“죄송해요. 성준 오빠. 이미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약속했어요.”고은서의 솔직한 말에 유성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살짝 쓸쓸하게 변했다.“네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주 훌륭한 사람이겠지.”...오후, 고은서는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전미자가 생일에 선물해 준 에메랄드 펜던트 목걸이, 그리고 그녀가 전미자를 위해 직접 조향한 캔들을 챙겨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차 속도를 늦췄다.저택의 정원 입구에는 인공 폭포와 연못이 있는 조형물이 있었고 연못에는 녹색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그때 연못 가장자리에서 한 가냘픈 소녀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그녀의 뒤에서는 가정부가 그녀를 설득하고 있었다.“아가씨, 이제 들어가세요. 바람이 차요. 감기라도 걸리실까 봐 걱정됩니다.”가정부의 호칭을 듣고 고은서는 그녀가 곽승재의 여동생 곽승연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곽승재가 전에 말하길 그녀는 어떤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재발했고 약간 폐쇄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다.‘어머니께서 귀국하셔서 전문의를 찾으러 오신 걸까?’연못 가장자리에 쪼그리고 앉은 곽승연은 가정부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연못 속의 초록색 잎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가정부는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고은서는 차를 세우고 걸어 내려갔다.“사모님.”가정부는 고은서를 보자 예전과 같은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저는 이제 곽승재랑 이혼했어요. 이제 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네요.”고은서가 곽승연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저러는 거예요?”가정부는 그녀가 산책하러 나왔다
이때 민시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고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감정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고은서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간 흔들렸다.고은서는 민시후가 겉으로는 가볍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을 내세우며 곽승재와 대립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민시후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거야.’단순히 오빠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유성준과 달리 민시후의 진심 어린 고백은 고은서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켰다.하지만 고은서는 새로운 감정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말했다.“민시후, 시간을 좀 줘.”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고은서, 그 말을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지?”고은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이제 국 마실 거야?”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럼, 물론이지.”박지연은 이 소식을 듣고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기세로 기뻐했다.“은서야, 드디어 마음을 정리했구나.”박지연이 기뻐하며 말을 이었다.“안 되겠어. 이 소식을 육현석에게 알려서 곽승재와 너를 다시 만나게 하려는 노력은 하지 말라고 해야겠어.”“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말아 줄래?”고은서가 박지연을 말렸다.“내가 민시후의 마음을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건 육현석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야. 굳이 그 사람한테 알릴 필요 없어.”육현석에게 알리는 것은 곽승재에게 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백유미 일 때문에 그와 감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비록 박지연은 당장 육현석에게 이 소식을 알려 곽승재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알았어. 말 안 할게.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고은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다음 날 고은서는 고씨 가문으로 향했다.유성준도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왔다.“은서야, 너 요즘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