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당연히 곽승재가 한 짓이겠지.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아마 끊임없이 연락 올 거야.”아버지의 연락을 받은 그는 부득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택시 불러줄 테니까 너 혼자 가. 굳이 내가 같이 가줄 필요 없잖아.”“두 시간이란 시간을 나한테 투자하면 이틀 동안 심지어 더 많은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될 텐데 설마 내가 계속 네 곁에 붙어있길 바라는 거야?”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이건 그냥 답정너잖아.’고은서는 당연하게도 두 시간으로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얻는 걸 선택할 것이다.‘민시후가 가면 곽승재도 더는 내 곁에 있을 이유가 없겠지. 그렇게 되면 나도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거야.’민시후가 비서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끊어달라고 부탁할 때 고은서는 먼저 중식집 밖으로 나갔다.여시은은 중식집 앞에 있는 잔디밭에서 만년필 하나를 들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있었다.고양이가 이리저리 뛰면서 그녀의 손을 물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온화한 목소리로 만년필을 물라고 고양이를 달랬다.여시은은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검은 긴 생머리가 어깨 위에 자연스레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고양이를 달래는 그녀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그러다 갑자기 고양이가 그녀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땅에 떨어뜨렸다.그러나 그 만년필을 피뜩 들여다본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갖고 있던 만년필이었다.전에 곽승재의 물건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두고 소중히 여기던 고은서는 그 만년필이 곽승재가 평소에 쓰던 만년필이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은서 씨.”그녀의 시선을 감지한 여시은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고은서도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호텔로 갈 거예요? 아니면 여기서 쿠아랑 더 놀아주고 갈 거예요?”“당연히 호텔로 가죠. 마침 쿠아도 배고파하는데 잘됐네요.”여시은이 고양이를 안고 고은서를 향해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전에 몇 번이고 물어봐도 날 놀리면서 안 알려주더니 이번엔 진짜 알려주려는 건가?’“이유가 뭔데?”고은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알고 싶으면 같이 뒷좌석에 앉아줘. 그래야 말하기 편하잖아.”민시후가 껄렁거리며 말했다.망설임도 잠시, 고은서는 이내 뒷좌석에 올라탔다.그녀는 민시후와 곽승재 사이의 모순에 관해 너무 알고 싶었다.게다가 차에 기사도 있었고 민시후가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물론 기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알고 있는 민시후는 사람을 함부로 대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민시후도 그녀를 따라 뒷좌석에 앉았다.문을 닫은 후 민시후는 폰을 꺼내 그녀와 함께 셀카 한 장을 찍고 누군가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어딘가로 음성메시지를 보내며 깐족댔다.“곽 대표, 봤지? 고은서가 날 공항까지 데려다주면서 심지어 나랑 같이 앉기 위해 뒷좌석에 탔다니까. 당신은 날 못 이겨.”‘왜 갑자기 진지하게 슬픈 감정에 젖어있는 것처럼 곽승재 얘기를 먼저 꺼내냐 했더니 곽승재랑 내기 한 거였어?’“그만 쳐다봐. 나도 곽승재한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잖아.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아까 둘이 만나서 내기하자고 했어?”고은서가 눈이 휘둥그레서 물었다.방금 전, 민시후가 짐을 가지고 내려가려고 할 때 차마 이렇게 쉽게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부러 곽승재를 찾아가 그녀가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거라 하면서 도발했던 것이다.“고은서 이젠 당신 차에 앉으려고도 안 하지? 그런데 어쩌나, 내 차에는 엄청 잘 앉는데. 내가 직접 운전할 때면 내 옆 조수석에 앉아주고 내가 뒷좌석에 앉을 때면 또 나랑 같이 뒷좌석에 앉아주고 하는데.”그는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곽승재를 보면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을 보탰다.“왜? 못 믿겠어? 그럼 기다려. 내가 증명해 보일 테니까.”지금 이 시각, 민시후는 고은서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답했다.“내
민시후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항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내 착각인가? 왜 뒷모습이 쓸쓸해 보이지? 아니야. 쓸쓸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하루종일 이리저리 날뛰면서 다른 사람을 놀리지 못해 안달이나 하는 사람을 내가 왜 걱정하는 거야.’그녀는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프론트 데스크 직원에게 그녀의 방에 누구도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곽승재가 전보다 많이 변하긴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고은서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갔다.그날 저녁, 고은서는 꿀잠을 잤다.이튿날,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조식 먹으러 내려갔다.때마침 여시은도 조식 먹으러 내려왔다. 그녀는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올리 묶은 채 어제와 같이 고양이 이동장을 메고 있었는데 청순하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여시은은 고은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은서 씨, 좋은 아침이에요!”“시은 씨, 쿠아도 좋은 아침이에요.”고은서가 쿠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인사했다.아침 식사 후, 고은서는 아기 판다를 볼 생각에 들떠있었다.“시은 씨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여시은은 고은서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저야 좋죠. 마침 저도 아기 판다 보러 가려고 했어요.”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며 호텔 문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오늘 정장 대신 세련된 일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남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훤칠한 몸매와 뛰어난 얼굴을 가진 그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관광버스 앞에 서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의사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지?’“은서야.”곽승재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걸어왔는데 그의 손에는 판다 키링이 쥐어져 있었다.“호텔에서 판매하길래 네 가방에 달면 좋을 것 같아서 하나 샀어.”곽승재가 말하면서 그녀의 가방에 달아주려고 했다.“괜찮아. 나 스스로 하나 사면 돼.”고은서가 그의 손을 피하
벨 소리를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폰을 꺼내려고 했다.그러다 갑자기 자신이 얼마 전에 벨 소리를 바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바로 이때, 옆에 있던 곽승재가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약간 의아했다.‘곽승재가 내가 녹음한 벨 소리를 사용한다고?’그녀는 그가 이미 삭제한 줄로만 알고 있을 뿐 저장해놓고 이렇게 당당하게 사용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전에는 그렇게 애원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이젠 나도 쓰지 않는 벨 소리를 갑자기 바꾼다고?’고은서는 이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곽승재가 전화를 끊자마자 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벨 소리 지워.”그러나 곽승재는 침묵으로 자신의 태도를 표시했다.“대체 어쩌자는 거야? 은서라고 다정하게 부르면서 내가 녹음한 벨 소리를 사용하면 내가 감동하면서 생각을 바꿀 것 같아?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이런 쓸데없는 일은 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일로 내가 생각을 바꾸는 일은 없을 테니까.”고은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널 어떻게 부르든 무슨 벨 소리를 사용하든 다 내 자유야. 너는 간섭할 권리가 없어. 그리고 감동 받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 진심을 전달하고 싶었을 뿐이야.”“어떤 진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너에게 위협적인 존재인 민시후를 돌려보내는 거?”“민 회장님이 편찮으신 건 사실이야. 그리고 난 그저 이 사실을 민시후 형한테만 이 사실을 알렸을 뿐, 나머지는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더는 곽승재와 다투고 싶지 않았던 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아기 판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지금 민시후 때문에 화내는 거야?”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며 물었다.그의 물음에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답했다.“당연한 거 아니야?”“민시후 너랑 안 어울려.”곽승재는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 끝에 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민시후가 나랑 안 어울린다고? 그럼 누가 나랑 어울리는데? 설마
심지어 아기 판다를 안는 시간도 십 분 이내로 제한되어 있었다.그러나 짧디짧은 십 분이라고 해도 뽀송뽀송하고 포동포동한 아기 판다를 만질 수 있다는 거에 고은서는 만족하고 있었다.아기 판다는 고은서의 품에 앉아 그녀가 쥐여준 사과 조각을 야금야금 먹었다.고은서는 아기 판다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얼굴을 아기 판다 몸에 대고 비볐다.곽승재는 그녀의 곁에 서서 폰을 들고 이 순간을 대신 기록해주고 있었다.고은서는 눈이 반달 모양이 될 정도로 기뻐하며 웃고 있었다. 비록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곽승재는 그녀가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특히 아기 판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옆에서 보고만 있던 곽승재도 따라 기분이 좋아졌다.십 분이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로 지나가 버렸다. 고은서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아기 판다를 사육사한테 돌려주고 밖으로 나왔다.“진짜 너무 귀엽지 않아?”밖으로 나온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기쁨을 곽승재와 공유했다.“특히 사과 먹을 때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 있는 걸 한 입씩 바꿔가며 먹는 거 봤어? 그 작은 손으로 사과를 입에 넣으려고 하는 모습이 왜 저리도 귀여운지.”곽승재도 옆에서 직접 보고 심지어 동영상까지 찍었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아기 판다 흉내를 내는 고은서를 보자 또 남다른 기분이었다.그는 고은서에게 그녀가 판다보다 더 귀엽다고 알려주고 싶었다.그러나 이 말을 한다고 해도 아마 돌아오는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일 뿐일 것이다.그는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더 보고 싶으면 한 번 더 봐도 돼.”고은서는 확실히 그러고 싶었다. 곽승재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예약 명액이 원래도 제한되어 있었고 그녀가 한 번 더 들어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괜찮아. 아무튼 내일 것도 예약했으니까 내일 다시 오면 돼.”이후 오후 내내 기분이 좋아진 고은서는 기지
그러나 큰소리를 치던 고은서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끝내는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진주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진주처럼 이쁘고 소중히 여기는 존재라는 뜻이에요. 비록 듣자마자 탄복할 만한 이름은 아니지만 기억하기 쉽잖아요. 게다가 진주라는 이름이 여자애한테 엄청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고은서가 진지하게 말했다.옆에 있던 곽승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좋네. 그 이름으로 해.”“저도 우리 집 쿠아 이름처럼 엄청 좋은 것 같아요!”여시은도 맞장구를 쳤다.직원들은 당연하게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이름을 확정한 후 직원은 고은서에게 기념증서를 증여하면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알려주었다.그중에는 직접 사육사를 통해 아기 판다의 성장 근황을 알 수 있는 혜택과 수시로 현장에 보러 올 수 있는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은서는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어준 판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매우 좋았다.“은서 씨, 곽 대표님, 괜찮으면 카톡 아이디 알려주세요. 방금전에 찍은 사진이랑 동영상 보내드릴게요.”여시은이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러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고은서와 달리 곽승재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저는 필요 없으니까 은서한테만 보내시면 돼요.”“그래요.”고은서의 카톡을 추가한 후 여시은은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곽승재에게 건네주었다.“곽 대표님, 이거 돌려드릴게요. 기회가 없어서 계속 못 돌려줬어요. 그렇다고 저녁에 곽 대표님 방 문을 두드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마침 생각났을 때 돌려드리려고요.”하지만 곽승재는 담담하게 거절했다.“그저 만년필뿐인데 굳이 돌려주지 않아도 돼요.”“혹시 쿠아가 물었다고 꺼리시는 건가요? 그럼 제가 새 만년필을 장만해서 회사로 보내드릴게요.”“괜찮습니다.”곽승재가 또 한 번 사양했다.이를 본 여시은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나온 지 한참 되는데 쿠아가 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서 먼저 돌아가 볼
고은서는 그가 건네주는 물을 받지 않았고 여행 체험에 당첨된 일도 묻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바꾸고 박지연에게 온승준에 관해 물었다.“온승준은 세미나로 간 후로 연락 있어?”“어제 전화 왔는데 바빠서 못 받았어.”박지연이 답했다.“그리고?”“없어. 이게 다야. 나도 다시 연락하지 않았고 온승준도 다시 연락 오지 않았고.”“결정은 내렸어?”박지연의 고은서의 물음에 한참 침묵하면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혼할 거야. 그런데 이혼하고 나면 남남이 된다고 생각할 때마다 아쉽긴 해. 하지만 더 잡고 있어 보았자 의미가 없잖아. 요즘 직장 일 때문에 바삐 보내다 보니까 결혼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곤 해. 이제부터 일에만 몰두하려고.”고은서는 박지연의 선택을 지지했다.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여전히 물병을 들고 선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날씨가 엄청 좋았는데 밝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곽승재를 비추면서 남다른 분위기를 조성했다.‘왜 갑자기 외로워 보이는 거지?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고은서는 곽승재의 외모에 취해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자신에게 주의를 줬다.“난 힘들어서 먼저 호텔로 돌아가서 쉴게.”고은서는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관광버스를 타고 혼자 호텔로 돌아갔다.그녀는 폭신한 침대에 누워 자신의 인스타를 확인했는데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눌러주었다.그 밑엔 민시후의 댓글도 달려있었다.[판다 하나 입양한 걸 가지고 입이 귀에 걸렸네.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모아서 내가 동물원 하나 차려줄게.][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해성에 동물원이 이미 충분하게 많아서요. 차라리 보너스 상금을 더 두툼하게 넣어주세요.]고은서는 민시후의 댓글을 답장해준 후 새로 고침 버튼을 눌렀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인스타를 올린 지 일 분도 안 됐을 때 곽승재가 그녀와 똑같은 인스타 내용을 업데이트해 올린 걸 발견했다.그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고 다 그녀의 단독
송민준은 문자로 이전에 부탁했던 백씨 가문 산업과 관련된 일을 처리했음을 알려왔다.비록 민시후에게서 사전에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고은서는 송민준의 문자를 받고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건넸다.[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민아에게 듣기로는 친구가 되셨다면서요? 은서 씨 모습을 보고 정신 차렸는지 열심히 일하겠다고 하네요. 이전에 민아는 시후의 아내가 되어 현모양처가 되는 것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날도 오네요. 정말 놀라워요. 부모님께서도 아시면 기뻐하실 거예요. 은서 씨, 앞으로도 도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네. 감사해요. 민준 씨.]고은서는 송민준과 예의상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다른 요청은 하지 않았다.송민준이 그녀를 도운 건 송민아의 가정부 진숙희 때문이긴 하지만 송민준 정도의 사람이라면 고은서와 백유미 사이의 갈등을 모를 리 없었다.처음 송민준을 끌어들일 때는 시험해 보려는 마음이었다.하지만 결과가 나왔으니 더 이상 그에게 다른 도움을 청할 생각은 없었다.원지훈의 전화를 받고, 송민준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고은서는 피곤함이 몰려왔다.그녀는 더 이상 곽승재의 인스타를 신경 쓸 힘도 없었다.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울리는 화재 경보음에 고은서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복도에서도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하지만 해성 호텔에 있을 때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터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신하기 전에 함부로 나가기가 망설여 진 고은서였다.내선 전화를 들고 프런트에 문의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곽승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안에 있어? 빨리 문 열어!”동시에 고은서의 핸드폰 화면에 곽승재의 연락이 떠올랐다.“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전화를 받으며 물었다.“화재 경보가 떴어. 빨리 나와!”고은서는 화재라는 말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내선 전화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 곽승재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