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기도 전에 길가에 피어 있는 난초에 이끌려 몸을 숙이고 냄새를 맡았다. 고은서는 꽃향기가 너무 좋아서인지 순식간에 이마가 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순간 그녀의 머리와 주변은 햇살에 둘러싸여 있었고, 가녀린 작은 얼굴이 하얀 난초 앞에 가까이 가자 곽승재는 꽃과 사람 중 누가 더 아름다운지 순간 분간할 수 없었다.저도 모르게 멍하니 자신의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찍었다.오후 반나절의 자유 시간이 지난 후 연회가 시작되었고 20여 명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분위기는 꽤 화기애애했다.전미자와 숙부님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라 참석한 청년, 중장년층에 비해 기력이 떨어지셔서 일찍 자리를 뜨셔야 했다.곽승재는 삼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고은서는 할머니가 차에 타는 것을 도왔다.차가 사라지는 것을 본 고은서는 돌아가서 곽승재와 다정한 척 연기하기 싫어서 주위를 돌아다녔다.장막이 깃들고 정원 잔디밭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이 켜져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고은서는 방 근처 작은 대나무 숲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쪽보다 더 조용하고 한적한 이곳은 방 바깥에 경호원 같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고은서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던 중 마른 체구의 남자가 젊고 앳되어 보이는 여자 몇 명과 함께 방 쪽으로 걸어오며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오늘 거물급 손님이 오셨으니 잘 모셔야 해. 안 그러면 너희들 가만 안 둬!”그중에 몸매 좋은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몸이 좀 안 좋은데 술은 안 마시면 안 될까요?”“헛소리 집어치워! 술 마시는 게 뭐가 어때서? 너희들이 이렇게 비싼 휴대폰을 쓰고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는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 서 대표님께 잘 보이면 앞으로 팔자가 핀다고!”‘서 대표’라는 말을 들은 고은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들어선 방을 바라보았다.마침 문이 열렸고 방 안에는 두세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모두 상석에 앉은 살집이 있는 남자에게 술을 따르며 공손한 모습이었다.어딘가 낯이 익은 그 남자는 그가 최근
고은서는 자신에게 되뇌었다.또다시 멍청하게 저 미모에 홀려선 안 된다.고은서는 곽승재를 차갑게 바라보았다.“왜 여기 서 있어, 사람 놀라게!”곽승재는 화를 내는 대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할머니 배웅한다면서 여긴 왜 왔어, 한참 찾았잖아...”고은서는 그가 내뱉은 말과 표정에서 술에 취한 것을 확신했다.평소 고고하고 날카로운 그가 이렇게 무디게 반응하며 자신을 찾았다는 끔찍한 말도 할 리가 없었다.지난 생에도 그가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있었는데 집에 오면 침대에 누워 잠만 자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고은서는 다소 마음을 내려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민기에게 연락해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했다.“알겠습니다 사모님.”주민기가 전화를 끊었다.“여기 왜 왔냐고, 아직 대답 안 했어.” 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대답을 재촉했다.고은서는 박지연이 술에 취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기에 실랑이를 벌이지 않고 대답했다.“답답해서 좀 걸었어.”“왜 답답한데?” 그녀를 바라보는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는 안개가 낀 듯 몽롱했지만 묻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고은서는 생각했다. 곽승재의 이 멍청한 모습을 찍어서 200억 정도 당길 수 있지 않을까?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본 곽승재는 오히려 손을 뻗어 그녀를 감쌌다.“왜 아무 말도 안 해?”“곽승재, 이거 놔!”고은서가 벗어나려고 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팔을 더 단단히 감싸며 기분 나쁜 듯 말했다.“예의 없게, 이젠 오빠라고 부르지도 않네. 지금 한번 불러봐.”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웃기면서도 마음이 저릿했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곽승재, 술 먹고 미친 척하는 게 재밌어?” 고은서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아니면 내가 요즘은 매일 쫓아다니지 않아서 적응이 안 돼?”오빠는 무슨, 예전에 그렇게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닐 땐 신경이라도 썼나.미간에 누구 하나 끼여 죽일 기세로 인상을 팍 쓰고 이제 와서 오빠라
고은서는 곽승재가 평소의 말투와 태도로 돌아온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속이려고 술에 취한 척한 거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곽승재를 뒤로한 채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다.은은한 향기가 스쳐 지나가며 고은서의 뒷모습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곽승재는 육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LH그룹 걸프 프로젝트의 협력 제안서 기각.]그는 육현석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보스가 너무 취한 것이 걱정된 주민기는 운전기사와 함께 레스토랑으로 그를 데리러 갔고 운전기사보고 기다리라고 한 뒤 주민기는 고급스러운 방문으로 걸어갔다.이때 보스는 방의 벤치에 앉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를 부르려던 찰나 고은서가 한 손에 수건을, 다른 한 손에는 무언가 수건 밑으로 감추고 식탁에서 보스 곁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주민기는 눈치껏 입을 다물고 고은서가 수건으로 보스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고은서의 다정함에 감탄하기도 전에 그녀가 다른 한 손에 있는 물건을 ‘실수로’ 보스의 옷 안쪽에 던지는 것을 보았고, 그 물건이 피부에 닿자 보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 움직임이 너무 커서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승재야, 괜찮아?” 사모님 중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엇, 옷이 왜 젖었어, 바지도...”여인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그의 셔츠와 바지에 쏠렸다.파란색 셔츠에는 젖은 자국이 몇 군데 있었고 바지의 민망한 부분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어처구니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두 암묵적으로 침묵을 선택했다.그도 바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얼굴이 새까맣게 상기된 채 차가운 눈빛으로 고은서를 노려보았지만 고은서는 걱정스럽고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당, 당신 술 정말 많이 마셨나 봐. 그걸... 못 참은 거야?”그녀는 일부러 민망한 단어를 생략했다.“그래도 괜찮아, 창피해할 필요 없어!” 고은서
이젠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기까지 했다.이를 본 주민기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은서 때문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고, 괜히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용히 가림판을 올렸다.곽승재는 자신의 협박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고은서를 바라봤다.휘어진 눈가에는 물기가 살짝 묻어 있었고 살짝 붉게 물든 얼굴에는 불만도, 차가움도, 심술도, 싫은 기색도 없이 명랑한 미소만 남아 있었다.그녀의 하얀 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고 그녀의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분명 화가 났던 곽승재는 이상하게도 분노가 사그라드는 대신 갈증과 열기가 밀려왔다.그는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고은서의 앵두 같은 입술을 보자 그녀의 온몸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녀가 벗어나지 않도록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부터 위쪽을 꽉 눌러 밀착시켰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고은서는 당황스럽고도 화가 났다.하지만 곽승재의 두 팔이 쇠붙이처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옆으로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의 입안을 헤집는 동시에 그녀를 들어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이 야릇하고 친밀한 자세에 고은서는 너무 화가 나서 목구멍으로 소리를 냈다.“읍!”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서 곽승재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곽승재의 힘은 평소보다 더 강했다.그는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온몸을 의자 등받이에 밀어붙였다.주민기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여기 왜 왔을까.집에서 편히 쉬면서 고양이와 놀았을걸.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제압당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체격과 체력의 격차 때문에 그녀는 곽승재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띠링띠링, 귀염둥이 전화 왔어요~”바로 그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고 시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이성이 돌아와서인지 곽승재는 결국 공격을 멈췄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물리칠 힘이 없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낮게 말했다.“전화 받아야 해.”술에 취해 붉게 물든 곽승재의 눈동자에는
곽승재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향이 많다는 걸 왜 전에는 몰랐을까?그 순간, 고은서의 전화벨이 끊겼고 곽승재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안 받아도 되네...”고은서가 그를 때리려는 순간 칸막이가 내려가며 주민기가 시선을 내리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백 이사님께서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다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답니다.”곽승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민기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고, 고은서는 짜증스럽게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백유미의 부재중 전화였다.백유미는 정말 곽승재의 행방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까지 연락을 하다니.“무슨 일이야?” 곽승재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승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많이 마셨어?”백유미가 걱정하자 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무슨 일이야?”“여기로 올 수 있어? 만나서 얘기해. 내가 거기로 가도 되고. 급한 상황이라 전화로는 얘기하기 어려워.”곽승재는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 순간 다시 낯설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내가 갈게.”그렇게 말한 뒤 곽승재는 전화를 끊었다.“차 세워, 택시 타고 갈래.”고은서가 눈치껏 말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숨결에는 아직도 술 냄새와 취기가 묻어났다. “기사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우리가 택시 타고 가면 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내자 곽승재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도 차를 세우게 했다.곽승재와 주민기가 모두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식당에서 서인수를 본 것에 대해 말하며 서인수의 사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명운 대표로서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상장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투자 문제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던 민시후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수건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곽승재 그 변태 자식이 술을 많이 마시면 미칠 줄이야!전생에는 분명
성아연이 보낸 사진이었다.지난번 성아연이 백유미에게 찾아가 한바탕 따진 후 고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성아연이 사진을 보낸 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아 고은서는 바로 삭제를 클릭하고 번호를 차단했다.[저기요, 꼭 받아요.] 주인혁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결국 돈을 받았다.[저기요, 요즘 바빠요? 왜 연습하러 오지 않아요?]주인혁이 물었다.며칠 동안 고은서는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바빠서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일이 좀 많아서 바빴어요.]주인혁은 고은서에게 수고했다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고, 재밌다고 느낀 고은서가 몇 개를 저장하고는 주인혁의 인스타를 찾아봤다.다채로운 일상을 보내는 그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 밴드 활동도 하는 등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었다.고은서는 다소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젊음과 열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그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녀를 언급했고 클릭해 보니 전에 성아연을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던 단톡방이었다.성아연은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며 그녀를 태그했다.고은서가 슬쩍 보니 사진 속에는 사람 없이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면 한 그릇과 꿀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일부러 그랬는지 소파에 놓인 파란색 셔츠가 찍혔다.고은서에겐 익숙한 옷이다, 곽승재가 오늘 입었던 그 옷.장소도 낯설지 않았다, 백유미가 사는 곳.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고은서가 전화를 받자 성아연의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랑 SNS 다 차단했어?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곽승재가 뭐라고 해? 나 혼자 한 일이라고 말하랬잖아. 정 안 되면 나랑 해결책 생각해 보면 되지 왜 혼자 끙끙 앓아!”고은서는 대답하기 싫어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렸고 역시나 성아연이 덧붙였다.“방금 보낸 사진 그 망할 년이 인스타에 올린 거야. 역겨운 글까지 쓰길래 댓글로 욕했더니 바로
...하루를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저녁에 민시후 측에서 소식이 들려왔다.“서인수 일로 시끄럽게 됐어요. 만나서 얘기하죠.”“네, 주소 보내줘요.”민시후가 보낸 주소는 술집이었다.매번 프라이빗 클럽 아니면 술집이라 전생에 그가 사업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걸 몰랐다면 방탕한 노름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차를 몰고 술집으로 간 고은서는 2층에 있는 부스에서 민시후를 발견했다.이 순간 술집에는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고, 2층엔 다른 사람도 없이 방음이 잘 되는 자리에 앉으니 꽤 조용한 느낌이었다.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에 얹고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지만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없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테이블에는 술과 차, 과일과 간식 등이 있었고 고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소파에 앉아 매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좋아, 그렇게 해. 결과 나오면 알려줘.”얼마 지나지 않아 민시후가 전화를 끊었다.“서인수 쪽에서 뭘 알아냈어요?” 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민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서류를 하나 던져주었다.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외에 서인수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과 어젯밤 상황까지 담겨 있었다.서인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머리가 좋았고 배운 술 제조법으로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사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갔다.서인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자주 기부하며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소녀가 바로 그 보육원 출신이었다.“쓰레기!” 이걸 본 고은서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선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일단 욕하지 말고 뒤에 계속 봐요.” 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은서가 뒤를 펼쳐보니 서인수가 호텔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진이었다.어제 서인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몸매 좋은 여자였다!“이거 어젯밤에 찍은 건데 왜 그쪽에서 막지 않았죠?”민시후는
민시후는 고은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은서 씨,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그 사람을 도와주면 명운은 걱정 없다니까요?”“하지만 인성도 저급하고 하는 짓도 악랄한데 이건 투자 은행에 큰 리스크에요. 상장했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돈은 어디서 벌어요?”민시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서인수는 평소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겠죠. 이번 일만 덮으면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큰 위험은 없죠. 있다고 해도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크잖아요. 이 바닥에 있으면서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 볼만하잖아요?”민시후의 가벼운 태도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니까 제 의견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셨군요.”민시후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은서 씨 지금 제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지금 충분히 그쪽 존중해주고 있는데.”고은서는 민시후의 나른하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협업을 제안한 이후 민시후는 협업 자체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이제 민시후는 명운을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는 더욱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제 제안은 없던 걸로 하죠. 사업가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선이 없는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 인성이면 확실히 같이 일할 필요가 없죠!”말을 마치고 고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민시후가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잠깐만요.”고은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어떻게 곽승재와 그의 절친 백유미를 상대하려고 그래요?”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조사하고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그쪽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송민아가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이전에 병원에서 영양사 붙여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병원을 나가버리셔서 그럴 겨를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했어요.”봉투를 만져본 고은서는 안에 돈이 두툼하게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천만 원은 족히 될 법했다.송민아는 고은서가 돈이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조금 당황한 듯 말했다.“최근 오빠가 카드를 다 막아버려서 현금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적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카드가 풀리면 나중에 더 줄게요.”고은서가 봉투를 돌려주며 단호하게 말했다.“괜찮아요. 민아 씨가 저지른 일도 아니니 굳이 보상해 줄 필요 없어요.”송민아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물었다.“정말 절 믿으시는 거예요? 제가 한 건 아니지만 진숙희는 제 가정부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은서 씨를 해친 건 저 때문이잖아요. 혹시 제가 뒤에서 시킨 거라고 의심하지는 않아요?”고은서가 웃으며 답했다.“민시후가 그러더라고요. 민아 씨는 그럴 머리도 그럴 용기도 없다고요.”송민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댔다.“시후 오빠가 말하는 건 다 믿는 거예요?”송민아의 모습에 고은서는 자신과 민시후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설명은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어쨌든 민아 씨와 무관하다고 믿어요.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돈은 챙기고 나가보세요.”하지만 송민아는 고은서에게 돈을 밀어주며 말했다.“받으세요. 은서 씨가 받아야 빚진 기분이 덜할 것 같아요.”고은서는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며 무심히 물었다.“가정부는 북성에서 민아 씨 따라 해성에 온 거예요?”송민아는 고은서가 왜 묻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전부터 절 돌봐주시던 분이에요. 제가 해성에 온다고 하니 따라온 거죠.”“그럼 민아 씨 오빠도 가정부랑 꽤 친하겠네요?”고은서가 다시 물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 오빠는 따로 살고 있어서 제 집에는 거의 오지 않거든요. 근데 그건 왜 물어요?”송민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냥 궁금
마음속으로는 불평을 내뱉었지만 잠시 생각하던 육현석은 이내 고은서의 번호를 눌렀다.“은서 씨, 주무실 준비 하고 계신가요?”육현석은 고은서가 자신을 차단할까 두려워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고은서는 답하는 대신 되물었다.“저한테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다소 차가운 고은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육현석은 히죽 웃으며 말을 돌렸다.“별일은 없고 그냥 요즘 지연 씨가 어떻게 지내나 해서 궁금해서요.”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생긴 고은서가 되물었다.“지연이한테 무슨 일이 있을 게 뭐가 있나요.”육현석이 답했다.“며칠 전부터 연락했는데 받지 않더라고요. 오늘 연락해 보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육현석은 온전히 고은서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박지연이 평소와 다른 듯하여 고은서에게서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이유도 있었다.“무슨 일이 있긴 한데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지금은 거의 다 해결된 상태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육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속으로 어떻게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돌릴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고은서가 물었다.“지연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혹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예요?”“형수... 아니, 은서 씨. 지연 씨는 남편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희 사이에 그런 소문은 만들지 말죠.”육현석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저는 어차피 먹고 놀고 즐기기만 하는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지연 씨에게 피해가 갈 까 두렵네요.”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저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에요.”육현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곽승재에게로 옮겼다.“형이랑은 다르죠. 형은 평소에도 도도하고 엄격하고 차가워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다고 해요. 형 마음을 알 수 없다고도 하죠.”고은서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육현석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은서 씨, 조금 전 형한테서
육현석의 질문에 곽승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곽승재는 비록 고은서와 이혼했지만, 언젠가는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은서는 날 많이 좋아했어. 오 년 동안의 감정을 어떻게 쉽게 잊겠어.’하여 곽승재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려 했다.그러나 이혼 후에도 곽승재에 대한 고은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그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며 곽승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특히 유성준과 민시후가 그녀와 가까워지는 모습을 볼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예전에 주려 했던 선물도 꺼내 들며 사과하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고은서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화가 난 그는 고은서에게 자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그래서 오늘 저녁 의도적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와 그녀를 자극하려 한 것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고은서가 그에게 화낼 때 그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그녀가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하지만 방에 들어선 후, 한참 동안 기다려도 고은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곽승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이전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를 방에 들일 줄 알았지만 고은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문을 열었다.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그저 고은서가 체면 때문에 오지 못할 뿐 사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이미언을 위해 세면기기를 빌리러 왔다는 어색한 핑계를 댔다.곽승재는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면서 고은서를 자극하기 위해 이미언이라는 이름조차 지어냈다.고은서는 화가 났지만 곽승재가 다른 여자를 끼고 있어서가 아니었다.또한 과일 서빙을 온 직원 덕분에 고은서가 문을 빨리 연 이유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곽승재였다.다른 사람을 돌려보낸 뒤 고은서는 또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다.곽승재는 고은서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안고 향기를 맡은 순간 그는 저도 모르
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치솟던 욕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는 고은서를 끌어안던 힘을 서서히 풀며 물었다.“고은서, 네 눈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존재야?”“내가 틀린 말 했어?”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벗어나며 몇 걸음 물러섰다.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려는 듯 뒷걸음질 쳤다.“유성준과 민시후가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 소유욕이 발동한 거잖아. 잊지 마.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네가 더 이상 나한테 간섭할 자격은 없어. 그리고 곽승재. 널 사랑한 적 있다고 해서 그게 내 죄는 아니야. 그걸 핑계로 날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싸늘한 고은서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했고 큰 눈망울에는 더 이상 그를 향한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마치 그가 그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이 순간, 곽승재는 처음으로 짙은 좌절감을 느꼈다.평생 모든 일이 순조로웠고 작은 장애물 정도는 쉽게 넘기곤 했는데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이제 네 발로 나갈 건지 경찰 불러서 끌려 나갈 건지 네가 선택해.”고은서가 문을 가리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녀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고은서의 질책 어린 말에 곽승재는 더 이상 그 자리에서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어 물며 뒤돌아 나갔다.문가에 다다르자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마음속에는 잠시나마 기대가 떠올랐다.하지만 이내 등 뒤로 들려오는 건 고은서가 문을 잠그는 소리였다.곽승재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늦은 밤, 육현석은 곽승재의 연락을 받았다.“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육현석은 낮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연락 온 곽승재가 신경 쓰였다.전화기 너머에서 곽승재는 잠시 침묵했다.“형, 왜 아무 말도 없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육현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곽승재는 한숨을 내쉬며 저녁에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뭐라고? 형수님을 자극하려고 다른 여자를 데리고 형수님이 있는 호텔에 간 거야?”육
고은서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래, 도련님. 안 그래도 짧고 귀한 밤, 어서 기다리고 있는 미녀한테 가. 여기서 괜히 애먼 사람 붙잡고 있지 말고.”“붙잡긴 누가 붙잡는다고 그래?”여자는 고은서의 말을 듣자마자 반말하며 말했다.“네가 일부러 승재 씨 유혹했으니 이쪽으로 온 거겠지. 순진한 척하지 마. 여우 같은 것.”고은서는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왔다.“거기 아가씨. 눈은 장식이 아니에요. 제발 눈 똑바로 떠서 보세요. 지금 누가 힘으로 제압하고 있는지.”“네 수작일 뿐이잖아! 신경 안 쓰는 척, 무관심한 척하면서 승재 씨 소유욕을 자극하는 거지. 변변치 않은 수준은 아니네.”“꺼져!”고은서가 다시 받아치려는 순간, 곽승재가 싸늘하게 내뱉었다.“승재 씨…”곽승재의 싸늘한 말투에 여자는 금방 눈물을 글썽였다.“네 물건 챙겨서 이 호텔에서 꺼져. 다시 내 눈에 띄지 마.”곽승재는 싸늘하게 말하고는 문을 닫았다.피처 피하지 못한 여자는 어디엔가 부딪혀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곽승재가 눈살을 찌푸린 순간, 고은서는 재빨리 무릎을 들어 올렸다.하지만 아쉽게도 곽승재를 맞히지는 못했다.빠르게 반응한 그는 얼른 뒤로 물러나 고은서의 기습을 피했다.하지만 그 순간 곽승재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힘이 느슨해졌다.고은서는 얼른 힘주어 간신히 손을 뿌리쳤다.어깨를 돌볼 겨를도 없이 고은서는 곽승재를 밀치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곽승재의 스피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두 발자국도 도망치지 못해 다시 곽승재의 품에 잡혔다.“이거 놔!”화가 난 고은서가 팔꿈치로 그의 가슴을 쳤다.곽승재는 낮게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그는 오히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고은서, 네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따뜻한 곽승재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고은서는 오싹함을 느끼며 거칠게 몸부림쳤다.“움직이지 마. 내가 무슨 짓 할지 장담 못 해.”곽승재가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고은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하려 했지만 뭔
“며칠 전에 금방 낯선 사이로 지내자고 한 사람은 당신이야.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던 사람도 당신이고. 그런데 지금 대체 뭐하려는 거야?”고은서는 화난 표정을 하고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낯선 사이? 결혼하고 같이 자고 심지어 제일 친밀한 일까지 함께해온 사이인데 낯선 사이로 지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곽승재가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똑똑.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웨이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녕하세요. 주문하신 과일 가져왔습니다.”“잠시만요.”고은서는 간단히 답하고 곽승재를 째려보면서 약간 누그러든 말투로 말했다.“이거 놔. 나 아파.”곽승재는 고은서가 일부러 누그러든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경각심을 낮추고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는 계속 고은서는 제압한 채 벽에 밀어붙인 동작을 유지한 상태로 문을 열었다.“손님...”말을 하려던 웨이터는 이 장면에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잘 생기고 기품이 심상치 않은 남자가 여자의 두 손을 제압한 채 다정한 모습으로 벽에 붙어있다고? 요즘 사람들 제대로 노네.’웨이터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손님, 요구하신 과일 가져왔습니다.”고은서는 웨이터의 반응을 보자마자 점점 더 어색해졌다.“스테이크는 룸 안에 놔주세요. 그리고 와인은 준비되었나요?”그녀가 웨이터에게 과일을 놓고 가보라고 말하려고 할 때 맞은 켠 방에서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데리고 온 그 여자였다.그녀는 음식을 가져다준 웨이터와 대화 중이었다. 고은서의 시선을 느꼈는지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녀는 야릇한 동작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변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이미언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일부러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건지 한쪽 어깨를 드러낸 채 머리를 헤치고 있었는데 아주 성숙된
그러나 뜻밖으로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웨이터가 아닌 곽승재였다.방금전과 달리 그는 정장 외투를 벗고 흰 셔츠 차림이었다.수공으로 만들어진 셔츠는 그의 우월한 몸매를 두드러지게 했다. 머리 위에 있는 불빛 때문에 문에 기대고 서 있는 그는 여느 때와 달리 남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왜 또 온 거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맨발로 다녀?”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고은서는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없으면 문 닫게 좀 비켜!”곽승재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미언이가 미용 기기를 안 가져와서 그러는데, 지금 이 시간에 상가들도 다 문 닫았고 마침 너한테 안 쓴 새 미용 기기가 있다는 게 떠올라서 빌리러 왔어.”‘빌리긴 개뿔. 하다 하다 미언이라고 부르면서 내 기분 망치려고 작정했네.’“꺼져.”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하면서 문을 닫으려고 할 때 곽승재가 문틈을 비집고 방으로 들어왔다.“고은서, 물건 하나 빌려주는 게 뭐가 어때서 화를 내고 그래. 그냥 빌리지 않을게. 내일 새로운 미용 기기 한 박스 보내주면 될 거 아니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일부러 이러는 거 맞네.’고은서는 더는 곽승재랑 대화하고 싶지 않은 탓에 방 안으로 들어가 전에 그가 줬던 미용 기기를 가져와 그에게 던져주면서 말했다.“됐지. 얼른 내 방에서 나가!”그러나 곽승재는 나가기는커녕 미용 기기를 손에 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화내는지 아직 안 답해줬는데.”“당신 볼 때마다 기분 잡쳐서 그래.”“기분이 왜 잡치는 건데. 전에는 날 보는 거 좋아했잖아. 밥 먹을 때마저도 날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로.”“...”고은서는 너무 어이없는 탓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혼하기 전에 곽승재는 집으로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집으로 왔다고 해도 서재에서 회사 일을 처리할 뿐 유일하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고는 밥 먹는 시간밖에 없었다.
“지연아, 너 임신하진 않았지?”고은서가 갑자기 물었다.전생에는 이맘때쯤 박지연이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후로 간호사 일도 그만두고 몸조리를 했는데 많은 일들이 발생했었다.온 닥터가 비록 바람을 피운 건 아니었지만 유혜린과 시어머니한테 각종 시달림을 받으면서 끝내는 부부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박지연이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임신했는지 안 했는지만 답해.”고은서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박지연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안 했어. 요즘같이 있는 시간도 별로 없는데 임신할 리가 없어.”‘하긴 매일 바쁘게 보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수도 적은데 설마 임신하겠어? 전생처럼 흘러가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야.’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연아, 너 요즘 수간호사 선거 때문에 바쁘잖아. 임신할 좋은 시기는 아닌 거 같아. 꼭 피임조치 해. 알았지?”고은서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비록 전생과 스토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박지연이 전생처럼 상처투성이가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는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만으로도 충족하다고 생각한 고은서는 적어도 그녀가 임신하면서 몸에까지 상처가 되는 일은 겪지 않았으면 했다.박지연은 개인적인 일에 참여한다고 비아냥거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서가 예전처럼 별로 좋지는 않은 듯했다.“응, 알겠어.”고은서는 박지연이 이혼하기는 싫고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녀가 여러 아재 개그로 박지연의 꿀꿀한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한 덕분에 그나마 기분이 괜찮아진 듯했다.“내가 알아봤는데 곽승재가 병원으로 온 게 임시 결정한 거래. 아마 너 때문에 온 것 같은데.”박지연이 화제를 돌렸다.고은서는 곽승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곽승재 얘기하지마. 들을 때마다 기분 잡쳐.”“왜?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