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아연이 보낸 사진이었다.지난번 성아연이 백유미에게 찾아가 한바탕 따진 후 고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성아연이 사진을 보낸 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아 고은서는 바로 삭제를 클릭하고 번호를 차단했다.[저기요, 꼭 받아요.] 주인혁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결국 돈을 받았다.[저기요, 요즘 바빠요? 왜 연습하러 오지 않아요?]주인혁이 물었다.며칠 동안 고은서는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바빠서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일이 좀 많아서 바빴어요.]주인혁은 고은서에게 수고했다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고, 재밌다고 느낀 고은서가 몇 개를 저장하고는 주인혁의 인스타를 찾아봤다.다채로운 일상을 보내는 그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 밴드 활동도 하는 등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었다.고은서는 다소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젊음과 열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그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녀를 언급했고 클릭해 보니 전에 성아연을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던 단톡방이었다.성아연은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며 그녀를 태그했다.고은서가 슬쩍 보니 사진 속에는 사람 없이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면 한 그릇과 꿀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일부러 그랬는지 소파에 놓인 파란색 셔츠가 찍혔다.고은서에겐 익숙한 옷이다, 곽승재가 오늘 입었던 그 옷.장소도 낯설지 않았다, 백유미가 사는 곳.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고은서가 전화를 받자 성아연의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랑 SNS 다 차단했어?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곽승재가 뭐라고 해? 나 혼자 한 일이라고 말하랬잖아. 정 안 되면 나랑 해결책 생각해 보면 되지 왜 혼자 끙끙 앓아!”고은서는 대답하기 싫어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렸고 역시나 성아연이 덧붙였다.“방금 보낸 사진 그 망할 년이 인스타에 올린 거야. 역겨운 글까지 쓰길래 댓글로 욕했더니 바로
...하루를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저녁에 민시후 측에서 소식이 들려왔다.“서인수 일로 시끄럽게 됐어요. 만나서 얘기하죠.”“네, 주소 보내줘요.”민시후가 보낸 주소는 술집이었다.매번 프라이빗 클럽 아니면 술집이라 전생에 그가 사업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걸 몰랐다면 방탕한 노름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차를 몰고 술집으로 간 고은서는 2층에 있는 부스에서 민시후를 발견했다.이 순간 술집에는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고, 2층엔 다른 사람도 없이 방음이 잘 되는 자리에 앉으니 꽤 조용한 느낌이었다.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에 얹고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지만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없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테이블에는 술과 차, 과일과 간식 등이 있었고 고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소파에 앉아 매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좋아, 그렇게 해. 결과 나오면 알려줘.”얼마 지나지 않아 민시후가 전화를 끊었다.“서인수 쪽에서 뭘 알아냈어요?” 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민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서류를 하나 던져주었다.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외에 서인수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과 어젯밤 상황까지 담겨 있었다.서인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머리가 좋았고 배운 술 제조법으로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사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갔다.서인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자주 기부하며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소녀가 바로 그 보육원 출신이었다.“쓰레기!” 이걸 본 고은서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선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일단 욕하지 말고 뒤에 계속 봐요.” 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은서가 뒤를 펼쳐보니 서인수가 호텔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진이었다.어제 서인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몸매 좋은 여자였다!“이거 어젯밤에 찍은 건데 왜 그쪽에서 막지 않았죠?”민시후는
민시후는 고은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은서 씨,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그 사람을 도와주면 명운은 걱정 없다니까요?”“하지만 인성도 저급하고 하는 짓도 악랄한데 이건 투자 은행에 큰 리스크에요. 상장했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돈은 어디서 벌어요?”민시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서인수는 평소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겠죠. 이번 일만 덮으면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큰 위험은 없죠. 있다고 해도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크잖아요. 이 바닥에 있으면서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 볼만하잖아요?”민시후의 가벼운 태도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니까 제 의견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셨군요.”민시후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은서 씨 지금 제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지금 충분히 그쪽 존중해주고 있는데.”고은서는 민시후의 나른하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협업을 제안한 이후 민시후는 협업 자체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이제 민시후는 명운을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는 더욱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제 제안은 없던 걸로 하죠. 사업가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선이 없는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 인성이면 확실히 같이 일할 필요가 없죠!”말을 마치고 고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민시후가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잠깐만요.”고은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어떻게 곽승재와 그의 절친 백유미를 상대하려고 그래요?”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조사하고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그쪽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민시후는 차갑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으니 법을 어기더라도 혼내줘야지!”민시후의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조폭 같은 기세와 가까이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경솔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민시후와 협업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그가 태도를 바꾸어 정말로 납치한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곽승재가 그녀를 싫어하는 정도로 봤을 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피해? 어디 피할 수 있나 보자!”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2층은 민시후가 전부 대관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누가 그 여자를 건드려!”고은서가 깨진 술병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민시후의 목을 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다!착각일까, 그녀를 보는 순간 곽승재의 눈빛이 걱정으로 번뜩였던 건?“이야, 곽 대표 딱 맞춰 오셨네. 아직 연락도 안 보냈는데 벌써 오셨어.”민시후의 조롱에도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긴 다리를 뻗어 고은서의 옆으로 다가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가자.” 곽승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지만 민시후의 경호원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곽 대표,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냥 가려고?” 민시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났고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이 내 아내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듣고 싶네.”말하는 사이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민시후 곁으로 다가왔다.수적으로나 힘으로나 민시후 쪽이 분명 열세였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경호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곽 대표가 준비를 많이 했네.”민시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술집 주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이미숙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감기 걸리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오늘 밤 자신을 도와준 게 떠올랐다.배은망덕할 수는 없으니 고은서는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분명 도련님이 올라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는 줄 알고 이미숙은 안도하며 기다렸다.곧 다시 나온 고은서의 손에 얇은 담요가 들려 있었다.“여기요.”이미숙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 부축해서 올라오게 하시지 않고요? 이런 날 소파에서 자면 추워서 병 걸리기 쉬워요.”“아픈 고양이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쉽게 얼어 죽겠어요?”고은서는 얇은 담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기 담요 있으니까 가서 덮어주면 돼요.”고마운 건 이 정도면 되지.이미숙은 망설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사모님, 이거 의자에 깔고 발로 밟던 거 아니에요?” 고은서는 집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면 의자를 밟고 뛰어다니거나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두었던 것이다.“괜찮아요, 안 더러워요. 여기에 여분의 담요도 없어요.”이미숙은 침대와 의자에 놓인 예쁘고 깨끗한 여러 개의 담요를 슬쩍 바라보았다.“이건 다 내가 아끼는 건데 어떻게 곽승재한테 줘요!”고은서가 품에 껴안았다.“하지만...”“없어요, 없어” 고은서가 재촉했다.“이게 제일 나아요. 아주머니, 빨리 가져가세요!”“...”...다음 날 점심때, GS 그룹대표 사무실.판주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기는 사장님의 미간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시면 일단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부르세요.”곽승재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육현석의 모습이 보였다.그를 본 육현석이 오바스럽게 달려왔다.“형, 드디어 만났네! 어제 하루 종일, 오늘 오전 내내 기다렸어. 정말 대통령보다 더 바쁘네!”육현석
“고은서, 이게 그렇게 난감해할 문제야?”고은서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비록 어이없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선물 가격에는 요구가 있어?”고은서가 다시 확인했다.‘너무 비싸면 주기 싫은데.’“없어. 성의 없는 선물만 아니면 돼. 고은서, 너도 고씨 집안 아가씨잖아.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인색한 게 뭐가 어때서? 전생에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손에 돈만 있었으면 그렇게 하찮게 남은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그녀는 이번 생만큼은 돈을 아끼며 살 생각이었다.그런데 이런 말을 민시후한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알겠어. 내가 진짜 진심을 다해서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할게.”“당연히 그래야지.”민시후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답했다.고은서는 이 틈을 타 원지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의문스러움을 말했다.그녀가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해서일까, 민시후는 아주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걱정하지마. 내가 조사해볼게.”고은서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았다.저녁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지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너 민시후한테 남다른 감정 품고 있는 것 같은데.”“남다른 감정?”“문제가 생기면 민시후한테 다 얘기해주잖아. 민시후를 엄청 신임하고 있는 것 같은데.”“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신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이렇게 신임해 본 적 있어? 이 일을 곽승재한테도 알려줄 거야?”“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곽승재랑 백유미 사이 관계만 생각해도 이런 일을 곽승재한테 얘기할 리가 없잖아. 전에 여러 번 내 편을 들어줬다고 해도 백유미는 여전히 잘살고 있잖아.’“이거 봐. 이렇게 중요한 일을 곽승재한테는 안 알려주면서 민시후 하나만은 엄청 굳게 믿고 있잖아. 이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도 있다는 표현이지.”박
원지훈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백씨 기업 책임자도 누나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상대방 측에서 계약서를 수정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내더라도 계약을 실행하지 않겠다면서 아무튼 손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면서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다니까요.”고은서는 이 계약을 이대로 망치는 걸 원치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어야만 백씨 기업을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상대방에서는 대체 왜 그러는 거지?’원지훈은 자신도 모른다면서 요즘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또 행여나 백유미한테 들키기라도 할까봐 부사장을 함부로 설득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직접 상대방을 찾아가서 이러는 원인을 캐내는 거예요. 그래야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원지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내가 더 고려해보고 이틀 후에 정확한 답을 줄게.”“저도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와서 저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게다가 중요한 건 더 끌다가 백유미한테 들킬까 봐 걱정이에요.”원지훈이 조급해하며 말했다.“저 백씨 가문을 빨리 망가뜨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잃게 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알겠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말 이 일 때문에 이상하게 군 거라고?’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 동물원 수속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지금 시간 있어? 네 사인이 필요한데 내가 데리러 갈게.”이 일에 관해 고은서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냈다.“내가 생각해 봤는데 동물원을 나 혼자 경영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그래서 안전하게 ZY 그룹 명의로 하는 건 어때?”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내가 부담 가질 필요도 없잖아. 행여나 망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
‘전에 은혜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로 쓸데없는 생각은 이미 접은 줄 알았는데 왜 또 구질구질하게 은혜한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고은서는 고은혜를 위안하면서 더는 원지훈이랑 애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끄러우면 그저 무시하라고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최근 원지훈이랑 두 번 정도 통화했는데 별로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백승엽도 해외 전문가한테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지만 골든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기나긴 치료료정을 거치고도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백유미는 회사 징벌을 받고 원래 자리는 내놓았지만 여전히 판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범가온 말로는 요즘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보낸다고 한다.백씨 기업에서 밀고 있는 프로젝트도 아직까지는 흠을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지훈이 예상 밖으로 일을 너무 쉽게 해결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백유미도 자신을 엿먹인 사람이 민시후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있는다고? 원지훈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나한테는 반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원지훈한테 연락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원지훈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원지훈이 긴장해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뻔뻔한 성격을 가진 그는 고은서와 대화할 때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지만 그의 말투로부터 항상 거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얼마 전에 전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찔리는 곳이라도 있나?’고은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너 은혜한테 고백했다며?”“저도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여자애 중에서 제일 좋은 거 어떡해요. 그저 기회라고 달라고 그런 거예요. 게다가 누나도 저에 관해 거의 꿰뚫고 있잖아요. 저 은혜한테 진짜 진심이에요. 절대 전처럼 이상한 생각 품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게 있다던 건 뭔데?”고은서가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전에 네 어머니가 엄청 훌륭한 퍼퓨머라고 하시면서 너도 네 어머니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하시던데 혹시 비슷한 사례를 들어본 적 있냐 해서. 승연이를 안정시킬 향을 제작해줄 수 있을까?”그러나 고은서는 이런 일을 오늘 처음 듣는 것이었다.퍼퓸 제작도 상응한 난도가 있는 법. 보편적인 커스텀 향수라면 고객들이 말해주는 요구에 따라 시도해보겠지만 곽승연의 상황은 어찌 손을 댈래야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곽승연 씨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무얼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약간 곤란할 것 같아.”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알겠어.”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위안해주려고 하다가 이내 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을 도로 삼켰다.“별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응.”고은서는 자신의 차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곽승재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전미자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은서는 갔어?”전미자의 물음에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부러 시간까지 짜내서 돌아와서는 왜 또 그렇게 덤덤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브로치는 왜 주민기가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전미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할머니,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대요. 심지어 제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싫어해요. 제 모든 행동이 고은서 눈에는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요.”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전에 잘해주라고 할 때 잘해줄 것이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지금 둘 사이가 이렇게 된 게 알고 보면 다 네 탓...어휴.”전미자는 풀이 죽은 곽승재를 보면서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사람도 집안도 다 괜찮은 여자애 한 명이 있다고 나한테 널 대신 설득해 달라고 하던데 진짜 더는 기회가 없다 싶으면 한 번 만나봐.”“저 절대 다른 사람이랑 결혼 안 해요! 정략결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고요.”곽승재가 결연한 태
고은서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미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은서야, 승재가 너한테 준 건데 그냥 가져. 아무튼 전에도 선물 한 번 사주지 않았잖아. 그저 너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그녀의 말에 고은서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아니에요, 할머니. 전에도 많이 받았어요. 액세서리도 포함해서요.”비록 그녀가 직접 산 것들이지만 곽승재의 카드를 긁었으니 어찌 보면 그가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서운에서도 그녀에게 판다 팔찌를 선물한 적이 있다.“하나라도 더 가지면 뭐 어때.”그러나 전미자는 이내 무언갈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승재한테 직접 돌려주는 대신 왜 나한테 가져온 거야? 승재가 또 널 화나게 했어?”“아니요. 그저 우리 사이에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는 게 알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한창 얘기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그 엔진 소리 곽승재 차 엔진 소리였어?’그날 저녁 곽승재가 그녀에게 뺨을 맞은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이 시간에 할머니 집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곽승재가 거실로 들어왔다.그는 평소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남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고 고은서를 무시한 채 전미자한테만 인사했다.“할머니.”“너 이 자식! 넌 은서가 안 보여? 인사할 줄도 몰라?”전미가 그를 비난했다.곽승재는 그제서야 고은서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브로치 돌려주러 온 거야. 네 선물 받는 게 난처하대.”전미자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넌 선물을 은서한테 직접 줄 것이지 왜 택배를 보내고 난리야.”“저도 잘 몰랐어요. 그냥 경매가 끝난 후 주민기한테 맡겼어요.”전미자는 덤덤한 곽승재를 보면서 순간 말
곽승재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그는 두 사람 사이가 이대로 끝났다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뒤돌아 떠났다....그 후로 거의 두 주일 동안 곽승재는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민시후도 회사 일로 바삐 보내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그사이 고은서는 송민아를 데리고 제인 제약 투자 계약서를 완성했고 자세한 부분도 여러 담판을 거쳐 수정했다.이젠 정식으로 사인하고 계약을 체결만 하면 됐다.주인혁은 백주 앰버서더에 관한 계약서를 체결하기 위해 명운에 왔다가 그녀와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쌍방은 목적이 아주 명확했고 계약도 순리롭게 체결되었다.고은서는 주인혁과 밥 먹으러 가면서 도아름과 주인혁의 매니저까지 함께 가자고 불렀다.밥 먹을 때 매니저는 요즘 들어 주인혁한테 엄청 많은 요청이 들어온다면서 팬덤도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한창 상승기라서 스캔들만 나지 않는다면 엄청 대박 날 애예요.”고은서는 매니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자선 파티 때 주인혁이 그녀를 엄청 많이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준 정장까지 입었는데 매니저도 은근슬쩍 눈치를 챈 모양인 것 같았다.그는 행여나 두 사람에 관한 스캔들이 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저도 주인혁이 자신의 꿈을 꼭 실현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사리 분별도 잘할 거예요.”고은서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주인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꼭 정상에 오르겠다고 약속했다.“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게요.”레스토랑에서 나오면서 도아름이 고은서를 보며 장난삼아 입을 열었다.“은서 씨, 저 남자애가 지키고 싶다고 한 사람이 은서 씨 맞죠?”고은서도 주인혁이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전에 한 번 도와줬었는데 그 일로 제 이미지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밖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딱 봐도 민시후에 관해 물으려고 찾아온 거겠지.’그러나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모르는 척 그를 무시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이내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웃 사람들이 소음 소리를 참지 못하고 신고를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관리 인원이 찾아와서 그를 제지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일부러 그들 앞에서 불쌍한 척했다.“제 아내가 저한테 화나서 저를 쫓아냈거든요.”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관리 인원들은 그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대화로 푸시고 얼른 문 여세요. 이웃 주민들도 휴식해야지 않겠습니까.”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파트 관리 인원 두 명과 셔츠만 입은 채 외투를 손에 들고 있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곽승재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서 있었는데 턱에 있는 상처까지 더하니 얼핏 보면 진짜 아내랑 싸우다 집에서 쫓겨난 남편 같았다.‘밥 먹을 때까진 괜찮더니 아까 아파트 단지 밑에서 둘이 또 싸운 거야?’“제 남편 아니에요. 일을 처리하기 전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요? 그리고 보안 좀 강화하세요.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막 들여서 되겠어요?”고은서가 관리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관리 인원 두 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세요. 제가 담당자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원래도 곽승재를 보자마자 그의 범상치 않은 기품에 주눅이 들었던 관리 인원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내가 아주 확실하게 말한 것 같은데. 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고은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고은서, 너 정말 민시후 좋아하는 거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역시나 또 민시후였어.’“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우읍!”그러나
민시후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약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송민아와의 약혼을 무효로 하면서 각종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내 탓도 있는데.’“민시후, 나...”“쯧, 고은서, 이거 봐. 끝내는 나랑 말을 걸 거면서.”민시후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민시후, 너 진짜!”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한때 격투기를 배웠는지라 주먹의 힘이 꽤 셌는데 그녀는 민시후가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시후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너 괜찮아?”고은서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민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제발 이상한 짓 좀 그만해.”“고은서, 왜 자꾸 내가 장난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편견 버리고 나 좋아해 주면 안 돼?”민시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은서야!”바로 이때, 곽승재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곽승재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더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얼른 돌아가.”그녀는 민시후한테 한마디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민시후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고은서가 널 싫어하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야? 이미 이혼한 주제에 그만 좀 집착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적어도 고은서는 날 싫어하지 않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스읍!”민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의 주먹이 먼저 날려왔다.곽승재는 방금전에 민시후가 룸에서 고은서한테 자신에게 기대라 할 때부터 그를 패고 싶었다.그런데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한테 시비까지 걸다니.
고은서는 민시후와 곽승재가 건넨 음식을 먹는 대신 야채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민시후는 살짝 불만을 표했다.“고은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그러자 민시후는 금방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알았어. 그만할 테니까 많이 먹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민시현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무표정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식사가 끝날 때까지 민시현은 민시후와 그녀의 사이를 묻지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현이 이미 그녀의 상황을 알아보고 민시후와의 관계도 얼마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늘 이 자리는 커플이라고 생각되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민시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자리네.’어차피 정말 민시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민시현이 어떤 행동을 하던 고은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고은서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종업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민시현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은서 씨, 시간도 아직 이른데 차 한 잔 하시면서 입가심하시죠.”“됐어! 그만 해! 저녁 내내 가면 쓰고 있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고은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민시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그냥 고은서랑 곽승재 사이를 나한테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거잖아. 미리 얘기하는데 난 그런 것들 신경 안 써. 나는 고은서가 좋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랑은 상관없어.”“너!”하지만 민시후는 민시현이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고은서의 가방을 들고 입을 열었다.“가자.”건물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고은서는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이번 식사는 정말 숨 막힐 뻔했다.“배 안 불렀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다시 먹으러 갈까?” 민시후가 차 문을 열며 물었다.“배불러!”고은서가 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