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차갑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으니 법을 어기더라도 혼내줘야지!”민시후의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조폭 같은 기세와 가까이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경솔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민시후와 협업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그가 태도를 바꾸어 정말로 납치한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곽승재가 그녀를 싫어하는 정도로 봤을 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피해? 어디 피할 수 있나 보자!”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2층은 민시후가 전부 대관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누가 그 여자를 건드려!”고은서가 깨진 술병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민시후의 목을 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다!착각일까, 그녀를 보는 순간 곽승재의 눈빛이 걱정으로 번뜩였던 건?“이야, 곽 대표 딱 맞춰 오셨네. 아직 연락도 안 보냈는데 벌써 오셨어.”민시후의 조롱에도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긴 다리를 뻗어 고은서의 옆으로 다가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가자.” 곽승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지만 민시후의 경호원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곽 대표,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냥 가려고?” 민시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났고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이 내 아내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듣고 싶네.”말하는 사이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민시후 곁으로 다가왔다.수적으로나 힘으로나 민시후 쪽이 분명 열세였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경호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곽 대표가 준비를 많이 했네.”민시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술집 주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이미숙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그가 감기 걸리든 말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던 찰나, 곽승재가 오늘 밤 자신을 도와준 게 떠올랐다.배은망덕할 수는 없으니 고은서는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분명 도련님이 올라와 편히 주무실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는 줄 알고 이미숙은 안도하며 기다렸다.곧 다시 나온 고은서의 손에 얇은 담요가 들려 있었다.“여기요.”이미숙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은서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 부축해서 올라오게 하시지 않고요? 이런 날 소파에서 자면 추워서 병 걸리기 쉬워요.”“아픈 고양이도 아니고 어디 그렇게 쉽게 얼어 죽겠어요?”고은서는 얇은 담요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여기 담요 있으니까 가서 덮어주면 돼요.”고마운 건 이 정도면 되지.이미숙은 망설이며 담요를 받아 들었다. “사모님, 이거 의자에 깔고 발로 밟던 거 아니에요?” 고은서는 집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별다른 할 일이 없을 때면 의자를 밟고 뛰어다니거나 오르내리는 것을 좋아해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담요를 덮어두었던 것이다.“괜찮아요, 안 더러워요. 여기에 여분의 담요도 없어요.”이미숙은 침대와 의자에 놓인 예쁘고 깨끗한 여러 개의 담요를 슬쩍 바라보았다.“이건 다 내가 아끼는 건데 어떻게 곽승재한테 줘요!”고은서가 품에 껴안았다.“하지만...”“없어요, 없어” 고은서가 재촉했다.“이게 제일 나아요. 아주머니, 빨리 가져가세요!”“...”...다음 날 점심때, GS 그룹대표 사무실.판주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주민기는 사장님의 미간에서 피곤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다.“대표님, 몸이 안 좋으시면 일단 쉬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저 부르세요.”곽승재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육현석의 모습이 보였다.그를 본 육현석이 오바스럽게 달려왔다.“형, 드디어 만났네! 어제 하루 종일, 오늘 오전 내내 기다렸어. 정말 대통령보다 더 바쁘네!”육현석
“고은서가 좀 귀찮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그러면 안 되지 않아?” 육현석이 묻자 곽승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나가.”마침 비서가 차를 가져왔고 육현석이 아부하며 그에게 건넸다.“형, 차 마시고 목 좀 축여.”곽승재는 마침 목이 불편해 물을 받아 마셨다.“헤헤, 형은 내가 왜 왔는지 알잖아!”비서가 나가자 육현석은 동정심을 유발하며 이렇게 말했다.“걸프 프로젝트 우리 집 영감탱이가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형이 기각하면 난 몇 달, 아니 올해 내내 자유가 없어. 분명 회사로 끌려가서 공부시킬 거라고!”“마침 내 귀도 조용할 수 있겠네.”“형 이러면 안 돼.”육현석이 울먹이며 징징거렸다.“학교 다닐 때 형이랑 민시후가 싸우면 누가 달려가서 도와줬어?”“발차기 한 번에 피 줄줄 흘리면 쓰러진 너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질뻔했을 때?”“... 그래도 형에 대한 내 의리는 인정해 줘야지!”곽승재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다시 상세하게 제안서 만들어. 직접 만들고 직접 설명해.”육현석이 울상을 지었다.“내가 어떻게 해!”“그럼 네 의리 챙겨서 아버지 회사로 가서 일해.”“해, 바로 할게!”멘탈 하나는 갑이었던 육현석은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다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형,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바람피우면 안 돼. 아니면 내가 고은서한테 내가 말해서 형 빨리 포기하게 만들까?”곽승재는 육현석을 노려보았다.“당장 나가,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는 내 사무실에 발도 들이지 마.”‘이 형 기분이 왜 이렇게 왔다 갔다 해?’고은서를 언급할 때마다 화를 낸다는 건 분명 떨쳐내지 못해 짜증이 난 거겠지.“알았어, 형. 바로 갈게.”육현석은 사무실을 나서기 전 이렇게 덧붙였다.“걱정하지 마, 난 항상 곁에서 형 편이 되어줄 테니까!”곽승재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쓸 기운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은서는 정오 무렵 낮잠에서 깨어났다.어젯밤 도아름에게 서인
박지연은 카메라 앞에 서 있고, 그 뒤로 그녀의 남편이 손에 든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다정한 사진이라기엔 아쉬웠지만 박지연은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고은서는 달콤한 휴가를 방해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도아름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 오후에 시간 되시면 같이 스파나 가실래요? 명운 쪽의 일을 재촉하려는 게 아니라 새로 오픈한 샵이 아주 좋다고 들어서 같이 가보고 싶어서요.]고은서는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 건방진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어서 서인수에 대한 도아름의 태도를 살펴본 다음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잠시 후 도아름이 답장을 보냈다.[그래요.]고은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아름과 약속을 잡고 샵 주소를 보냈다.그때 이미숙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아주머니, 어차피 둘밖에 없는데 같이 먹어요.”이미숙은 고은서가 전보다 훨씬 소탈하고 친근하게 대하니 자연스레 거절하지 않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어제 밤새 소파에서 주무셨어요. 아침에 나가보니 기침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는데 감기 걸린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미숙이 말하자 고은서는 짧게 대꾸할 뿐 맛있게 밥을 먹었다.“...” 왜 사모님이 더 이상 도련님에게 애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이미숙이 덧붙였다.“사모님, 도련님께 전화해서 일찍 오시라고 하는 건 어때요? 오전에 여사님께서 사모님보고 도련님 약 드시는 거 감독하라고 하셨어요.”곽승재가 약 먹는 걸 감독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아주머니, 약은 다 됐어요?”고은서가 묻자 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불에 끓이고 있으니까 도련님 오시면 바로 드실 수 있어요.”“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어요. 약은 제때 마셔야 효과가 있죠. 아주머니, 한 그릇 챙겨주세요. 제가 곽승재한테 가져다줄게요.”샵은 GS그룹과 같은 방향이었고 아직 도아름을 만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았기에 고은서는 가는 길에 곽승재의 표정을 즐길 생각이었다.어쩌면 체면이 깎인 곽승재가 분노에 휩싸여 이혼 서류에 사인할지도 모른
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예전처럼 짜증을 내는 대신 진지하게 물었다.“곽승재랑 친하죠, 그럼 그쪽이 설득해 볼래요?”육현석이 오만하게 말했다.“난 당연히 형이랑 친하지만, 그쪽 좋아하라고 형 설득할 수는 없어요.”“아니요, 그 사람 이혼 서류에 사인하도록 설득하자는 얘기예요.”“난 절대… 엥?”육현석은 고은서가 계속 애원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지금 뭐라고 한 거지?“이혼 서류? 형이 그쪽이랑 이혼해요?”“정확히 제가 그 사람과 이혼하려는 거예요.”고은서는 보온병을 육현석의 손에 밀어주며 정정하고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 사본을 꺼내며 말했다.“어떻게든 사인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이건, 난...” 육현석은 충격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이혼을 원하는 사람이 왜 고은서가 된 걸까, 왜 그녀는 이혼 서류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걸까!그때 육현석은 갑자기 고은서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번뜩 정신이 들었다!형의 사무실에 있던 담요에서 똑같은 냄새가 났다.희미했지만 그는 같은 향기라고 확신했다.그렇다면 형이 주우라고 한 담요도 고은서 것이고, 전날 형이 심적으로 괴로워했던 것도 고은서 때문이라고?“전 못 받아요!”고은서가 이혼 합의서까지 자신의 품에 밀어 넣으려는 것을 본 육현석은 불에 덴 듯 펄쩍 뛰며 피했다.“전 그쪽 도와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잖아요!”그렇게 말한 뒤 육현석은 고은서에게 보온병을 다시 돌려주며 그대로 도망쳤다.“...”합의서를 가방에 넣고 고은서는 계속해서 로비로 걸어갔다.프런트 직원은 여느 때처럼 따뜻하게 그녀를 맞이했고 안내하는 사람 없이 그녀는 혼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프런트에서 알렸는지 주민기는 그녀의 등장에 놀라지 않았고 곽승재가 안쪽 사무실에서 쉬고 있다고 알려주었다.고은서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곽승재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소파 등받이에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썹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마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
고은서는 박지연이 깜짝 놀라는 소리에 덩달아 소스라치게 놀랐다.“뭘 알아냈는데 이렇게 놀라는 거야?”박지연이 다급히 대답했다.“여시은이 대놓고 너를 겨냥하는 건 어쩌면 곽승재 때문만이 아니라 여 대표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고은서는 잔뜩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는 박지연을 쳐다봤다.“잘 생각해봐. 여시은은 자기보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네가 여 대표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으니까 못마땅한 거야.”박지연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말을 이어갔다.“여시은은 너한테 불리한 일들을 계속 꾸며서 네 이미지를 망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여 대표님도 너를 싫어하게 되겠지. 여시은이 제일 바라는 건 아마 여 대표님 앞에서 네 이름을 거론만 해도 대표님이 질색하는 거일 거야!”고은서는 여시은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여 대표님은 여시은의 아버지야. 여시은을 끔찍이 사랑하고 여시은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여 대표님은 그냥 날 아끼는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런 마음에서 나한테 더 잘해주는 거라고 해도 어떻게 딸을 대하는 태도랑 비교하겠어. 여시은이 고작 이런 거로 날 못살게 군다는 건 좀 억지 아닌가?”박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의 말도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설마 네가 자기보다 예뻐서?”“...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해내지 않아도 돼.”“억지로 생각해내다니! 여자의 질투심만큼 무서운 게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곽승재랑 여 대표님은 모두 너한테 친절하고 게다가 자기보다 예쁜데 질투가 안 나는 게 더 어렵지. 아마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널 제대로 밟아버리고 싶을 거란 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잠깐 말을 잃었다.“너 현석 씨랑 같이 있더니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난 것 같아.”“이게 왜 쓸데없는 상상이야. 여시은이 여태 널 물고 질척거리면서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네가 의도치 않게 여시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너한테 복수를
여시은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물론이지!”카페를 나온 고은서는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내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시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시은의 배경이 워낙 큰지라 당장 대항하기 어려웠다.고민 끝에 고은서는 KK에게 전화를 걸어 여시은의 요 며칠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로 향하던 그녀는 앞쪽에서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재훈이 전날 곽승재도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들인 걸까?딸의 일에 여재훈은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고은서가 멍때릴 때 곽승재도 그녀를 발견했다.한 걸음 머뭇거리던 곽승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녀의 냉담함을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카페로 향했다.운전기사가 대기 중이었던 차에 몸을 실은 고은서는 카페 창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의젓한 자태의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여재훈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여시은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각도로 인해 곽승재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여재훈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선명하게 보였다.여재훈은 자신의 미래 사윗감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박지연은 고은서와 여시은이 경찰서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로 직접 찾아왔다.“이런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박지연이 물었다. “어떻게 현석이에서 듣게 해.”고은서가 대답했다. “크게 문제 되지 않았고 이미 해결됐어.”“경찰서까지 간 게 큰 문제가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말해봐!”고은서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박지연에게 설명했다.박지연은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시은 씨가 진짜 네 앞에서 고양이를 학대했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뿐만이 아니야. 지난번 쿠아가 건물에서 떨어진 것도 그녀가 한 짓이야. 그래서 쿠아가 볼 때마다 여시은을 두려워하는 눈치더라고.”“그 여자 정말 변태야!”박지연이 분노를 표출하며 말했다. “여씨 가문도 대
여시은은 고급 맞춤 제작인 샤넬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클러치 백을 든 채, 얼굴엔 여전히 달콤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녀가 무표정으로 쿠아를 찌르던 장면이 떠오르자 고은서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아빠.”여시은이 여재훈을 부르고 나서 이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은서 씨도 계셨네요.”전날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그녀의 말투엔 평소의 친근함이 사라지고 호칭도 서먹한 ‘은서 씨’로 돌아왔다.가식적인 친절을 가장하는 여시은보다 이렇게 냉정한 모습이 오히려 고은서에겐 더 나았다. 적어도 속이 덜 뒤집혔으니까.“시은아, 지금 은서 씨와 다 설명했어. 네가 쿠아를 정말로 아껴서 절대 일부러 다치게 한 게 아니라고.”여재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다툰 건 분명 네 탓이 더 많을 테니 네가 은서 씨에게 사과해.”여시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아빠, 제가 팔꿈치도 다쳤는데 그래도 제 잘못이 더 커요?”여재훈이 꾸짖듯 말했다. “은서 씨가 얼마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분인데, 네가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시은아, 네가 해성에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항상 아빠한테 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특별히 마련한 거야.”여재훈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소한 일로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안 되지. 사과만 하면 이 일은 지나가.”여시은은 마치 설득당한 듯 고은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은서야, 미안해. 화 풀어줄 수 있겠니?”고은서는 여시은과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날 사건에 곽 회장이 개입했다는 게 확인됐다. 본인은 상관없었지만 곽 회장이 다시 고씨 집안을 겨냥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게다가 여재훈이 직접 만나 중재를 시도한 것만 해도 이미 양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설사 지금 여시은과 대립해도 여시은은 전혀 피해 볼게 없었다.겉보기에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적어도 여재훈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길
“여재훈 씨.” 고은서가 다가가 부르자 여재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은서 씨, 어서 앉아요.”여재훈의 표정에서 고은서는 그가 질책하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대화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앉자 여재훈은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으면서 주문하라고 했다.바쁜 오전 일과를 보낸 후라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재훈과의 교류도 꽤 에너지 소모가 필요할 것 같아 고은서는 평소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 두 가지를 주문했고, 꿀 프렌치토스트를 보자 추가 주문했다.프렌치토스트가 나오자, 고은서는 꿀을 조금씩 발라 먹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여재훈은 약간 의아해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꿀을 위에 뿌리는데, 은서 씨의 방식은 좀 특이하네요.”고은서가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프렌치토스트에 꿀을 이렇게 바르셨어요. 달콤함이 골고루 스며든다고 하셨는데 저도 어머니와 같은 습관이 몸에 배었네요.”이 말을 들은 여재훈은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사색에 잠겼다. 고은서는 꿀을 다 바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었다. 여재훈과 한 조각 드셔볼지 물으려는 순간, 혼이 나간 듯한 그의 표정을 발견했다.고은서는 자신이 먹는 데에만 너무 열중한 것 같아 죄송함을 느꼈다. 여재훈이 딸의 문제를 논하고자 마련한 자리인데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실례했어요.” 고은서는 프렌치토스트를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저를 찾으신 건 시은이의 일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여재훈은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가 한입 베어 먹은 프렌치토스트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먼저 드세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고은서는 더는 먹기만 할 수는 없어 대답했다. “제가 전날 공원 벤치를 걷어차서 따님을 넘어뜨린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시은이가 쿠아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에요.”“경고를 하시려는 건지, 아니면 제가 시은이를 모함한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서 후회
고은서는 본래 고은혜를 놀려보려던 참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은혜가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친절하아양을 떨며 “성준 오빠, 그거 내려놓으세요! 제가 할게요!”라고 하는 통에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전생에서는 고은혜가 비록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마음에 꾸밈이 없었기에 원지훈에게 속아 그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번 생에서 자매 관계가 개선되자 고은서는 그 부분이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이렇게 순진무구해서 여전히 사기당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변호사로부터 피드백을 받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변호사는 고양이가 확실히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으나, 조사 결과 하인이 학대하며 약물을 주입한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하인도 직접 시인했다고 한다. 고양이 입술의 상처는 외부 물체에 의한 것이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급하게 먹다가 실수로 다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여시은의 반려묘인 쿠아가 평소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것은 펫숍 직원들도 증명할 수 있었다. 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남들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쿠아를 사랑하는 척하던 여시은이, 알고 보니 고양이를 학대하고 모든 책임을 하인에게 전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물며 고은서 자신도 예전에는 여시은이 쿠아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느꼈으니 말이다.변호사는 추가로, 여시은이 팔꿈치 부상을 당한 사건에 대해 고은서의 ‘무심코 한 실수’라는 이유를 사용했으며 공원에 CCTV가 없고 목격자도 없어 상해죄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한 곽 회장님이 이미 소식을 접하고 연락해 온 사실을 전하며, 최선의 결과는 양측 화해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왔다. 고은서는 더 이상 여시은이 쿠아를 학대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쿠아를 여시은에게서 구출해 낼 수는 없을까?이때 고은서의 전화기에 여재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고은서는 여
고은서는 서연정에게 어제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다치게 했고 두 사람이 다툰 것만 언급했을 뿐, 다른 세부사항은 말하지 않았다. 여시은은 곽 회장이 마음에 들어 하는 며느릿리감이었기에, 고은서가 사모님 앞에서 그녀를 헐뜯는 건 뒤에서 고자질하는 것 같아 왠지 꺼려졌다. 고은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서연정은 사정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묻지 않았다.“승재 아버지는 여씨 가문과의 혼사를 반드시 성사하려고 해. 여씨 가문 편을 드는 건 회장님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니, 회장님의 태도는 신경 쓰지 마.”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곽 회장의 태도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단지 곽 회장이 다시 고씨 가문을 표적으로 삼을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아침 식사 후, 서연정은 곽승연과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곽승연은 예상대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언니, 자주 찾아와도 돼요?”떠나기 전 곽승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전화하면 내가 마중 나갈게.”약속을 받은 곽승연은 서연정과 함께 떠났다.고은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MQ의 근황과 삼촌 내외의 상황을 물어보자, 유성준은 모든 게 정상적이며 삼촌이 최근 의사결정 시 독단적이지 않고 직원들과 상의한다고 답했다. 이 말에 고은서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은서 씨, 지난번 시은 씨가 향수 제작을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유성준이 묻자, 고은서는 그가 걱정할까 봐 이미 완성했고 문제없다고 둘러댔다.“성준 오빠, 커피 좀 끓여줘! 내가 만든 건 맛이 하나도 없어!”전화 너머에서 고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시만, 난 지금 은서랑 통화 중이야.”유성준은 온화하게 응답했다.“그래? 그럼 나도 통화할래!”곧바로 고은혜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언니, 왜 성준 오빠에게만 전화하고 나한텐 안 해?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고은서는 일부러 놀리며 말했다. “네가 MQ 모든 업무를 책임
고은서는 이런 일에 맞서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방금 여시은과의 썰전을 끝낸 고은서는 곽승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변호사까지 데려와 날 도왔는데 이번엔 그냥 참고 넘어가자.’고은서는 눈치 있게 화제를 바꾸려 했다.“여시은 집안 하인에 관해 조사한 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그러나 곽승재는 조금 전에 고은서가 했던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고은서,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일은 절대 너더러 날 다시 사랑해달라고 도와준 게 아니야.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승연이까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너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나서지 않거든 절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씨 집안 사람들 때문에 날 도운 거였어?’고은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답했다.“힘들었겠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까? 다음부턴 입으로만 알았다 하고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라이트문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면서 곽승재한테 말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 마재경 씨가 다쳤다던데 얼른 가서 간호해줘.”고은서는 곽승재랑 올라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가 곽승연을 핑계로 자꾸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것도 싫었다.그래서 일부러 마재경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그를 자극했다.아니나 다를까, 고은서의 말을 들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쌩하고 떠났다....이튿날, 인터넷에서는 곽승재가 저녁에 마재경을 보러 병원으로 갔다는 기사가 떴다.스캔들 기사에 관심이 없던 곽승연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빠는 분명히 언니를 좋아하는데 왜 인터넷에서는 오빠가 이 언니랑 같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오빠랑 언니는 이미 이혼한 사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누굴 좋아하든 누구랑 함께 있든 다 오빠의 선택이라는 거지. 언니랑 상관없는 일이야.”두 사람이
“R국에 있는 계좌인데 누가 이체했는지는 알 수 없더군요.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하인의 아들이 갑자기 거금을 받았다는데 정말 우연일까요, 여시은 씨?”여시은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곽 대표님,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곽승재는 부인하지 않았다.여시은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격동해 하며 반박했다.“저 아니거든요! 곽 대표님, 은서 씨를 도우려 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를 모함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대체 뭐죠? 계속 이러시면 저도 아버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곽승재는 아주 담담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전에 은서랑 함께 물에 빠진 걸 보았다는 직원 한 명을 찾았는데 은서가 밀어서 빠진 게 아니라 여시은 씨가 은서를 잡아당기면서 같이 빠진 거라고 하던데. 이건 증거가 확실하죠?”옆에서 듣고 있던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정말 목격자를 찾은 거야?’농장은 면적이 하도 커서 다른 레스토랑처럼 웨이터가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은서는 어렴풋이 당시 물에 빠지고서야 소식을 접한 직원들이 달려온 걸 기억하고 있었다.‘목격자는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곽승재의 말을 들은 여시은은 씩씩거리면서 호통쳤다.“증거가 확실하다뇨? 이건 명백한 모함이에요. 그 사람 누구예요? 지금 당장 마땅한 벌을 받게끔 고소할 거예요.”그리고 이내 뒤돌아 변호사한테 말했다.“합의가 불가능하다면 그냥 조사하게 내버려둬요. 고은서 씨의 고의상해죄는 끝까지 추궁하도록 하고요.”‘반응을 보아서는 목격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얼마든지 추궁해 보세요.”이를 본 곽승재는 더는 여시은과 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번 일을 전적으로 맡겼다.고은서는 경찰을 도와 사건 경과를 기록했다.쿠아는 경찰서에 있다가 곧 감식 센터로 보내질 예정이었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시간도 꽤 늦어졌다.곽승재는 고은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