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향이 많다는 걸 왜 전에는 몰랐을까?그 순간, 고은서의 전화벨이 끊겼고 곽승재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안 받아도 되네...”고은서가 그를 때리려는 순간 칸막이가 내려가며 주민기가 시선을 내리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백 이사님께서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다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답니다.”곽승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민기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고, 고은서는 짜증스럽게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백유미의 부재중 전화였다.백유미는 정말 곽승재의 행방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까지 연락을 하다니.“무슨 일이야?” 곽승재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승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많이 마셨어?”백유미가 걱정하자 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무슨 일이야?”“여기로 올 수 있어? 만나서 얘기해. 내가 거기로 가도 되고. 급한 상황이라 전화로는 얘기하기 어려워.”곽승재는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 순간 다시 낯설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내가 갈게.”그렇게 말한 뒤 곽승재는 전화를 끊었다.“차 세워, 택시 타고 갈래.”고은서가 눈치껏 말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숨결에는 아직도 술 냄새와 취기가 묻어났다. “기사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우리가 택시 타고 가면 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내자 곽승재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도 차를 세우게 했다.곽승재와 주민기가 모두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식당에서 서인수를 본 것에 대해 말하며 서인수의 사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명운 대표로서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상장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투자 문제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던 민시후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수건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곽승재 그 변태 자식이 술을 많이 마시면 미칠 줄이야!전생에는 분명
성아연이 보낸 사진이었다.지난번 성아연이 백유미에게 찾아가 한바탕 따진 후 고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성아연이 사진을 보낸 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아 고은서는 바로 삭제를 클릭하고 번호를 차단했다.[저기요, 꼭 받아요.] 주인혁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결국 돈을 받았다.[저기요, 요즘 바빠요? 왜 연습하러 오지 않아요?]주인혁이 물었다.며칠 동안 고은서는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바빠서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일이 좀 많아서 바빴어요.]주인혁은 고은서에게 수고했다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고, 재밌다고 느낀 고은서가 몇 개를 저장하고는 주인혁의 인스타를 찾아봤다.다채로운 일상을 보내는 그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 밴드 활동도 하는 등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었다.고은서는 다소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젊음과 열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그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녀를 언급했고 클릭해 보니 전에 성아연을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던 단톡방이었다.성아연은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며 그녀를 태그했다.고은서가 슬쩍 보니 사진 속에는 사람 없이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면 한 그릇과 꿀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일부러 그랬는지 소파에 놓인 파란색 셔츠가 찍혔다.고은서에겐 익숙한 옷이다, 곽승재가 오늘 입었던 그 옷.장소도 낯설지 않았다, 백유미가 사는 곳.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고은서가 전화를 받자 성아연의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랑 SNS 다 차단했어?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곽승재가 뭐라고 해? 나 혼자 한 일이라고 말하랬잖아. 정 안 되면 나랑 해결책 생각해 보면 되지 왜 혼자 끙끙 앓아!”고은서는 대답하기 싫어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렸고 역시나 성아연이 덧붙였다.“방금 보낸 사진 그 망할 년이 인스타에 올린 거야. 역겨운 글까지 쓰길래 댓글로 욕했더니 바로
...하루를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저녁에 민시후 측에서 소식이 들려왔다.“서인수 일로 시끄럽게 됐어요. 만나서 얘기하죠.”“네, 주소 보내줘요.”민시후가 보낸 주소는 술집이었다.매번 프라이빗 클럽 아니면 술집이라 전생에 그가 사업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걸 몰랐다면 방탕한 노름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차를 몰고 술집으로 간 고은서는 2층에 있는 부스에서 민시후를 발견했다.이 순간 술집에는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고, 2층엔 다른 사람도 없이 방음이 잘 되는 자리에 앉으니 꽤 조용한 느낌이었다.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에 얹고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지만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없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테이블에는 술과 차, 과일과 간식 등이 있었고 고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소파에 앉아 매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좋아, 그렇게 해. 결과 나오면 알려줘.”얼마 지나지 않아 민시후가 전화를 끊었다.“서인수 쪽에서 뭘 알아냈어요?” 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민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서류를 하나 던져주었다.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외에 서인수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과 어젯밤 상황까지 담겨 있었다.서인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머리가 좋았고 배운 술 제조법으로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사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갔다.서인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자주 기부하며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소녀가 바로 그 보육원 출신이었다.“쓰레기!” 이걸 본 고은서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선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일단 욕하지 말고 뒤에 계속 봐요.” 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은서가 뒤를 펼쳐보니 서인수가 호텔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진이었다.어제 서인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몸매 좋은 여자였다!“이거 어젯밤에 찍은 건데 왜 그쪽에서 막지 않았죠?”민시후는
민시후는 고은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은서 씨,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그 사람을 도와주면 명운은 걱정 없다니까요?”“하지만 인성도 저급하고 하는 짓도 악랄한데 이건 투자 은행에 큰 리스크에요. 상장했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돈은 어디서 벌어요?”민시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서인수는 평소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겠죠. 이번 일만 덮으면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큰 위험은 없죠. 있다고 해도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크잖아요. 이 바닥에 있으면서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 볼만하잖아요?”민시후의 가벼운 태도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니까 제 의견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셨군요.”민시후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은서 씨 지금 제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지금 충분히 그쪽 존중해주고 있는데.”고은서는 민시후의 나른하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협업을 제안한 이후 민시후는 협업 자체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이제 민시후는 명운을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는 더욱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제 제안은 없던 걸로 하죠. 사업가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선이 없는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 인성이면 확실히 같이 일할 필요가 없죠!”말을 마치고 고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민시후가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잠깐만요.”고은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어떻게 곽승재와 그의 절친 백유미를 상대하려고 그래요?”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조사하고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그쪽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민시후는 차갑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으니 법을 어기더라도 혼내줘야지!”민시후의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조폭 같은 기세와 가까이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경솔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민시후와 협업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그가 태도를 바꾸어 정말로 납치한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곽승재가 그녀를 싫어하는 정도로 봤을 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피해? 어디 피할 수 있나 보자!”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2층은 민시후가 전부 대관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누가 그 여자를 건드려!”고은서가 깨진 술병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민시후의 목을 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다!착각일까, 그녀를 보는 순간 곽승재의 눈빛이 걱정으로 번뜩였던 건?“이야, 곽 대표 딱 맞춰 오셨네. 아직 연락도 안 보냈는데 벌써 오셨어.”민시후의 조롱에도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긴 다리를 뻗어 고은서의 옆으로 다가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가자.” 곽승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지만 민시후의 경호원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곽 대표,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냥 가려고?” 민시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났고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이 내 아내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듣고 싶네.”말하는 사이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민시후 곁으로 다가왔다.수적으로나 힘으로나 민시후 쪽이 분명 열세였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경호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곽 대표가 준비를 많이 했네.”민시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술집 주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에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졌고 심지어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그런 반응에 백유미는 당황하며 울분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똑바로 서서 부드럽게 사과를 건넸다.“승재야, 어쨌든 오늘 일은 내 잘못이야. 벌이든 욕이든 내가 다 감수할게.”이 정도 설명이면 백유미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기에 곽승재는 더 이상 문제를 추궁하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한 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서인수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모함이 아니라면 투자 계획을 철회해.”백유미가 서둘러 답했다.“걱정 마, 이미 사람들을 시켜서 확인하는 중이니까. 정말 문제가 있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그만둘 거야.”곽승재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미간을 어루만졌다.“별일 없으면 나가.”백유미는 곽승재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채고 슬쩍 떠보았다.“승재야, 너무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머리 좀 주물러줄까? 아빠가 머리가 아플 때마다 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아빠가 나 마사지 잘한다고 칭찬했어.”“됐어.” 곽승재는 거절했다.“기사한테 나 데리러 오라고 해.”백유미는 부드럽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하룻밤 지내는 게 어때, 어차피 내일 아침에 서인수 관련해서 회의해야 하잖아. 굳이 왔다 갔다 할 필요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거절했다.“아니.”고은서가 또 무슨 말썽을 피우면 더 이상 감당할 기운이 없다.백유미의 얼굴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최근 들어 고은서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오늘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고은서에게 절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곽승재는 항상 자신의 일에 엄격했고 명운처럼 중요한 프로젝트를 절대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 그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일을 뒤로 미루고 며칠 전 성아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쳐 망신을 준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부러 그녀를 피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규칙적이던 생리가 이번 달은 불규칙해졌다. 일주일이나 늦춰진 건 둘째치고 여태 한 번도 아픈 적 없었던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몸에 이상이 있는 걸 눈치챈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한 뒤로 자연스레 건강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결국 고은서는 가방을 챙겨 나와 차에 타서 기사에게 근처의 산부인과로 가달라고 말했다.아랫배가 자꾸 은근하게 아파 고은서는 가는 내내 손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차에서 내렸을 때 코를 쿡 찌르는 과일 썩은 냄새에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고은서는 병원에 들어가서 재빨리 진료 접수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산부인과 층이라 그런지 역시 여성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진료 접수도 했겠다, 고은서는 그저 복도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생각처럼 빠르지 않은 진료 속도에 조금 답답해진 고은서는 사람이 적은 앞쪽으로 가서야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서는 복도에 소음이 아까보다 커진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여자들의 “잘생겼다”, “키 엄청 크네”와 같은 감탄 소리도 들었다.산부인과에도 남자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같이 온 가족들이었다.‘남자도 같이 온 가족이 있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감상을 해도 되는 거야?’고은서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체 남자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산부인과에서 여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오는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고은서가 금방 몸을 돌렸을 때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고은서의 앞에 나타났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곽승재의 뒤를 따른 건 사복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남자 두 명이었다.고은서는 잠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잔뜩 어리둥절해 있었다. 고은서의 환각이 아니라면 곽승재가 정말 산부인과에 나타난 것이다.“따라와!”곽승재는 고은서가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그 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고은서를 비상계단으로 데려갔다.“왜 이러는 거야, 곽승재. 왜 또 멋대로
고은서는 박지연이 깜짝 놀라는 소리에 덩달아 소스라치게 놀랐다.“뭘 알아냈는데 이렇게 놀라는 거야?”박지연이 다급히 대답했다.“여시은이 대놓고 너를 겨냥하는 건 어쩌면 곽승재 때문만이 아니라 여 대표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고은서는 잔뜩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는 박지연을 쳐다봤다.“잘 생각해봐. 여시은은 자기보다 뛰어나고 능력 있는 네가 여 대표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으니까 못마땅한 거야.”박지연은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말을 이어갔다.“여시은은 너한테 불리한 일들을 계속 꾸며서 네 이미지를 망치고 싶은 거야. 그러면 여 대표님도 너를 싫어하게 되겠지. 여시은이 제일 바라는 건 아마 여 대표님 앞에서 네 이름을 거론만 해도 대표님이 질색하는 거일 거야!”고은서는 여시은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여 대표님은 여시은의 아버지야. 여시은을 끔찍이 사랑하고 여시은이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주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 여 대표님은 그냥 날 아끼는 후배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런 마음에서 나한테 더 잘해주는 거라고 해도 어떻게 딸을 대하는 태도랑 비교하겠어. 여시은이 고작 이런 거로 날 못살게 군다는 건 좀 억지 아닌가?”박지연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은서의 말도 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설마 네가 자기보다 예뻐서?”“... 특별한 게 떠오르지 않으면 억지로 생각해내지 않아도 돼.”“억지로 생각해내다니! 여자의 질투심만큼 무서운 게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곽승재랑 여 대표님은 모두 너한테 친절하고 게다가 자기보다 예쁜데 질투가 안 나는 게 더 어렵지. 아마 생각하면 할수록 분해서 널 제대로 밟아버리고 싶을 거란 말이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잠깐 말을 잃었다.“너 현석 씨랑 같이 있더니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난 것 같아.”“이게 왜 쓸데없는 상상이야. 여시은이 여태 널 물고 질척거리면서 놓아주지 않는 이유는 딱 두 가지야. 네가 의도치 않게 여시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너한테 복수를
여시은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물론이지!”카페를 나온 고은서는 마음속 답답함을 털어내려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여시은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여시은의 배경이 워낙 큰지라 당장 대항하기 어려웠다.고민 끝에 고은서는 KK에게 전화를 걸어 여시은의 요 며칠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로 향하던 그녀는 앞쪽에서 곽승재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여재훈이 전날 곽승재도 경찰서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불러들인 걸까?딸의 일에 여재훈은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었다. 고은서가 멍때릴 때 곽승재도 그녀를 발견했다.한 걸음 머뭇거리던 곽승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녀의 냉담함을 떠올리고는 아무 말 없이 카페로 향했다.운전기사가 대기 중이었던 차에 몸을 실은 고은서는 카페 창문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의젓한 자태의 곽승재가 예의 바르게 여재훈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서 여시은이 달콤하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각도로 인해 곽승재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여재훈의 만족스러운 미소는 선명하게 보였다.여재훈은 자신의 미래 사윗감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박지연은 고은서와 여시은이 경찰서까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유일로 직접 찾아왔다.“이런 큰일을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박지연이 물었다. “어떻게 현석이에서 듣게 해.”고은서가 대답했다. “크게 문제 되지 않았고 이미 해결됐어.”“경찰서까지 간 게 큰 문제가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빨리 말해봐!”고은서는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박지연에게 설명했다.박지연은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시은 씨가 진짜 네 앞에서 고양이를 학대했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뿐만이 아니야. 지난번 쿠아가 건물에서 떨어진 것도 그녀가 한 짓이야. 그래서 쿠아가 볼 때마다 여시은을 두려워하는 눈치더라고.”“그 여자 정말 변태야!”박지연이 분노를 표출하며 말했다. “여씨 가문도 대
여시은은 고급 맞춤 제작인 샤넬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클러치 백을 든 채, 얼굴엔 여전히 달콤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그녀가 무표정으로 쿠아를 찌르던 장면이 떠오르자 고은서의 가슴속에서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아빠.”여시은이 여재훈을 부르고 나서 이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은서 씨도 계셨네요.”전날의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그녀의 말투엔 평소의 친근함이 사라지고 호칭도 서먹한 ‘은서 씨’로 돌아왔다.가식적인 친절을 가장하는 여시은보다 이렇게 냉정한 모습이 오히려 고은서에겐 더 나았다. 적어도 속이 덜 뒤집혔으니까.“시은아, 지금 은서 씨와 다 설명했어. 네가 쿠아를 정말로 아껴서 절대 일부러 다치게 한 게 아니라고.”여재훈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다툰 건 분명 네 탓이 더 많을 테니 네가 은서 씨에게 사과해.”여시은은 입술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아빠, 제가 팔꿈치도 다쳤는데 그래도 제 잘못이 더 커요?”여재훈이 꾸짖듯 말했다. “은서 씨가 얼마나 차분하고 예의 바른 분인데, 네가 화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니?”“시은아, 네가 해성에서 친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항상 아빠한테 은서 씨를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특별히 마련한 거야.”여재훈이 달래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소한 일로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안 되지. 사과만 하면 이 일은 지나가.”여시은은 마치 설득당한 듯 고은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은서야, 미안해. 화 풀어줄 수 있겠니?”고은서는 여시은과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전날 사건에 곽 회장이 개입했다는 게 확인됐다. 본인은 상관없었지만 곽 회장이 다시 고씨 집안을 겨냥할까 봐 그게 두려웠다. 게다가 여재훈이 직접 만나 중재를 시도한 것만 해도 이미 양보한 거나 다름없었다. 설사 지금 여시은과 대립해도 여시은은 전혀 피해 볼게 없었다.겉보기에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적어도 여재훈에게는 좋은 인상을 남길
“여재훈 씨.” 고은서가 다가가 부르자 여재훈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고은서 씨, 어서 앉아요.”여재훈의 표정에서 고은서는 그가 질책하려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대화를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앉자 여재훈은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으면서 주문하라고 했다.바쁜 오전 일과를 보낸 후라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재훈과의 교류도 꽤 에너지 소모가 필요할 것 같아 고은서는 평소 좋아하는 커피와 디저트 두 가지를 주문했고, 꿀 프렌치토스트를 보자 추가 주문했다.프렌치토스트가 나오자, 고은서는 꿀을 조금씩 발라 먹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본 여재훈은 약간 의아해하더니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꿀을 위에 뿌리는데, 은서 씨의 방식은 좀 특이하네요.”고은서가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프렌치토스트에 꿀을 이렇게 바르셨어요. 달콤함이 골고루 스며든다고 하셨는데 저도 어머니와 같은 습관이 몸에 배었네요.”이 말을 들은 여재훈은 무언가가 떠오르는 듯 사색에 잠겼다. 고은서는 꿀을 다 바르고 한입 베어 물었다. 정말 맛있었다. 여재훈과 한 조각 드셔볼지 물으려는 순간, 혼이 나간 듯한 그의 표정을 발견했다.고은서는 자신이 먹는 데에만 너무 열중한 것 같아 죄송함을 느꼈다. 여재훈이 딸의 문제를 논하고자 마련한 자리인데 음식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실례했어요.” 고은서는 프렌치토스트를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저를 찾으신 건 시은이의 일을 말씀하시려는 건가요?”여재훈은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가 한입 베어 먹은 프렌치토스트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먼저 드세요. 서두를 필요 없어요.”고은서는 더는 먹기만 할 수는 없어 대답했다. “제가 전날 공원 벤치를 걷어차서 따님을 넘어뜨린 점은 인정해요. 하지만 시은이가 쿠아를 다치게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에요.”“경고를 하시려는 건지, 아니면 제가 시은이를 모함한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서 후회
고은서는 본래 고은혜를 놀려보려던 참이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은혜가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친절하아양을 떨며 “성준 오빠, 그거 내려놓으세요! 제가 할게요!”라고 하는 통에 고은서는 할 말을 잃었다.전생에서는 고은혜가 비록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고은서와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마음에 꾸밈이 없었기에 원지훈에게 속아 그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번 생에서 자매 관계가 개선되자 고은서는 그 부분이 약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이렇게 순진무구해서 여전히 사기당하기 쉬운 것은 아닐까?......변호사로부터 피드백을 받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변호사는 고양이가 확실히 스트레스 반응을 보였으나, 조사 결과 하인이 학대하며 약물을 주입한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하인도 직접 시인했다고 한다. 고양이 입술의 상처는 외부 물체에 의한 것이지만, 좋아하는 음식을 급하게 먹다가 실수로 다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여시은의 반려묘인 쿠아가 평소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것은 펫숍 직원들도 증명할 수 있었다. 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 남들 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쿠아를 사랑하는 척하던 여시은이, 알고 보니 고양이를 학대하고 모든 책임을 하인에게 전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물며 고은서 자신도 예전에는 여시은이 쿠아를 진심으로 아낀다고 느꼈으니 말이다.변호사는 추가로, 여시은이 팔꿈치 부상을 당한 사건에 대해 고은서의 ‘무심코 한 실수’라는 이유를 사용했으며 공원에 CCTV가 없고 목격자도 없어 상해죄를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한 곽 회장님이 이미 소식을 접하고 연락해 온 사실을 전하며, 최선의 결과는 양측 화해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왔다. 고은서는 더 이상 여시은이 쿠아를 학대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쿠아를 여시은에게서 구출해 낼 수는 없을까?이때 고은서의 전화기에 여재훈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변호사와의 통화를 마치고, 고은서는 여
고은서는 서연정에게 어제 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다치게 했고 두 사람이 다툰 것만 언급했을 뿐, 다른 세부사항은 말하지 않았다. 여시은은 곽 회장이 마음에 들어 하는 며느릿리감이었기에, 고은서가 사모님 앞에서 그녀를 헐뜯는 건 뒤에서 고자질하는 것 같아 왠지 꺼려졌다. 고은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서연정은 사정이 이렇게 단순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만 묻지 않았다.“승재 아버지는 여씨 가문과의 혼사를 반드시 성사하려고 해. 여씨 가문 편을 드는 건 회장님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니, 회장님의 태도는 신경 쓰지 마.”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곽 회장의 태도에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단지 곽 회장이 다시 고씨 가문을 표적으로 삼을까 봐 걱정될 뿐이었다.아침 식사 후, 서연정은 곽승연과 함께 가자고 제안했고 곽승연은 예상대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언니, 자주 찾아와도 돼요?”떠나기 전 곽승연이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전화하면 내가 마중 나갈게.”약속을 받은 곽승연은 서연정과 함께 떠났다.고은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MQ의 근황과 삼촌 내외의 상황을 물어보자, 유성준은 모든 게 정상적이며 삼촌이 최근 의사결정 시 독단적이지 않고 직원들과 상의한다고 답했다. 이 말에 고은서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은서 씨, 지난번 시은 씨가 향수 제작을 부탁했던 건 어떻게 됐어?”유성준이 묻자, 고은서는 그가 걱정할까 봐 이미 완성했고 문제없다고 둘러댔다.“성준 오빠, 커피 좀 끓여줘! 내가 만든 건 맛이 하나도 없어!”전화 너머에서 고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시만, 난 지금 은서랑 통화 중이야.”유성준은 온화하게 응답했다.“그래? 그럼 나도 통화할래!”곧바로 고은혜가 전화를 받아 말했다. “언니, 왜 성준 오빠에게만 전화하고 나한텐 안 해? 너무 편애하는 거 아냐!”고은서는 일부러 놀리며 말했다. “네가 MQ 모든 업무를 책임
고은서는 이런 일에 맞서 그 누구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방금 여시은과의 썰전을 끝낸 고은서는 곽승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변호사까지 데려와 날 도왔는데 이번엔 그냥 참고 넘어가자.’고은서는 눈치 있게 화제를 바꾸려 했다.“여시은 집안 하인에 관해 조사한 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그러나 곽승재는 조금 전에 고은서가 했던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고은서,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일은 절대 너더러 날 다시 사랑해달라고 도와준 게 아니야.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승연이까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너 자신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나서지 않거든 절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곽씨 집안 사람들 때문에 날 도운 거였어?’고은서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답했다.“힘들었겠네. 내가 한 가지 방법을 알려줄까? 다음부턴 입으로만 알았다 하고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돼.”“...”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라이트문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면서 곽승재한테 말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 마재경 씨가 다쳤다던데 얼른 가서 간호해줘.”고은서는 곽승재랑 올라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가 곽승연을 핑계로 자꾸 자신의 집에 드나드는 것도 싫었다.그래서 일부러 마재경에 관한 얘기를 꺼내며 그를 자극했다.아니나 다를까, 고은서의 말을 들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내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다가 쌩하고 떠났다....이튿날, 인터넷에서는 곽승재가 저녁에 마재경을 보러 병원으로 갔다는 기사가 떴다.스캔들 기사에 관심이 없던 곽승연도 우연히 보게 되었다.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오빠는 분명히 언니를 좋아하는데 왜 인터넷에서는 오빠가 이 언니랑 같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오빠랑 언니는 이미 이혼한 사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누굴 좋아하든 누구랑 함께 있든 다 오빠의 선택이라는 거지. 언니랑 상관없는 일이야.”두 사람이
“R국에 있는 계좌인데 누가 이체했는지는 알 수 없더군요.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하인의 아들이 갑자기 거금을 받았다는데 정말 우연일까요, 여시은 씨?”여시은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눈이 휘둥그레졌다.“곽 대표님, 설마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곽승재는 부인하지 않았다.여시은은 이내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격동해 하며 반박했다.“저 아니거든요! 곽 대표님, 은서 씨를 도우려 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를 모함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대체 뭐죠? 계속 이러시면 저도 아버님을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곽승재는 아주 담담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전에 은서랑 함께 물에 빠진 걸 보았다는 직원 한 명을 찾았는데 은서가 밀어서 빠진 게 아니라 여시은 씨가 은서를 잡아당기면서 같이 빠진 거라고 하던데. 이건 증거가 확실하죠?”옆에서 듣고 있던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정말 목격자를 찾은 거야?’농장은 면적이 하도 커서 다른 레스토랑처럼 웨이터가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다.고은서는 어렴풋이 당시 물에 빠지고서야 소식을 접한 직원들이 달려온 걸 기억하고 있었다.‘목격자는 대체 어떻게 찾은 거지?’곽승재의 말을 들은 여시은은 씩씩거리면서 호통쳤다.“증거가 확실하다뇨? 이건 명백한 모함이에요. 그 사람 누구예요? 지금 당장 마땅한 벌을 받게끔 고소할 거예요.”그리고 이내 뒤돌아 변호사한테 말했다.“합의가 불가능하다면 그냥 조사하게 내버려둬요. 고은서 씨의 고의상해죄는 끝까지 추궁하도록 하고요.”‘반응을 보아서는 목격자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네.’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얼마든지 추궁해 보세요.”이를 본 곽승재는 더는 여시은과 대화하지 않고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번 일을 전적으로 맡겼다.고은서는 경찰을 도와 사건 경과를 기록했다.쿠아는 경찰서에 있다가 곧 감식 센터로 보내질 예정이었다.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시간도 꽤 늦어졌다.곽승재는 고은서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