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기까지 했다.이를 본 주민기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은서 때문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고, 괜히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용히 가림판을 올렸다.곽승재는 자신의 협박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고은서를 바라봤다.휘어진 눈가에는 물기가 살짝 묻어 있었고 살짝 붉게 물든 얼굴에는 불만도, 차가움도, 심술도, 싫은 기색도 없이 명랑한 미소만 남아 있었다.그녀의 하얀 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고 그녀의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분명 화가 났던 곽승재는 이상하게도 분노가 사그라드는 대신 갈증과 열기가 밀려왔다.그는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고은서의 앵두 같은 입술을 보자 그녀의 온몸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녀가 벗어나지 않도록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부터 위쪽을 꽉 눌러 밀착시켰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고은서는 당황스럽고도 화가 났다.하지만 곽승재의 두 팔이 쇠붙이처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옆으로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의 입안을 헤집는 동시에 그녀를 들어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이 야릇하고 친밀한 자세에 고은서는 너무 화가 나서 목구멍으로 소리를 냈다.“읍!”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서 곽승재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곽승재의 힘은 평소보다 더 강했다.그는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온몸을 의자 등받이에 밀어붙였다.주민기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여기 왜 왔을까.집에서 편히 쉬면서 고양이와 놀았을걸.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제압당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체격과 체력의 격차 때문에 그녀는 곽승재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띠링띠링, 귀염둥이 전화 왔어요~”바로 그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고 시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이성이 돌아와서인지 곽승재는 결국 공격을 멈췄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물리칠 힘이 없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낮게 말했다.“전화 받아야 해.”술에 취해 붉게 물든 곽승재의 눈동자에는
곽승재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향이 많다는 걸 왜 전에는 몰랐을까?그 순간, 고은서의 전화벨이 끊겼고 곽승재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안 받아도 되네...”고은서가 그를 때리려는 순간 칸막이가 내려가며 주민기가 시선을 내리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백 이사님께서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다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답니다.”곽승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민기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고, 고은서는 짜증스럽게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백유미의 부재중 전화였다.백유미는 정말 곽승재의 행방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까지 연락을 하다니.“무슨 일이야?” 곽승재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승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많이 마셨어?”백유미가 걱정하자 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무슨 일이야?”“여기로 올 수 있어? 만나서 얘기해. 내가 거기로 가도 되고. 급한 상황이라 전화로는 얘기하기 어려워.”곽승재는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 순간 다시 낯설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내가 갈게.”그렇게 말한 뒤 곽승재는 전화를 끊었다.“차 세워, 택시 타고 갈래.”고은서가 눈치껏 말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숨결에는 아직도 술 냄새와 취기가 묻어났다. “기사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우리가 택시 타고 가면 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내자 곽승재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도 차를 세우게 했다.곽승재와 주민기가 모두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식당에서 서인수를 본 것에 대해 말하며 서인수의 사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명운 대표로서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상장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투자 문제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던 민시후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수건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곽승재 그 변태 자식이 술을 많이 마시면 미칠 줄이야!전생에는 분명
성아연이 보낸 사진이었다.지난번 성아연이 백유미에게 찾아가 한바탕 따진 후 고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성아연이 사진을 보낸 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아 고은서는 바로 삭제를 클릭하고 번호를 차단했다.[저기요, 꼭 받아요.] 주인혁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결국 돈을 받았다.[저기요, 요즘 바빠요? 왜 연습하러 오지 않아요?]주인혁이 물었다.며칠 동안 고은서는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바빠서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일이 좀 많아서 바빴어요.]주인혁은 고은서에게 수고했다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고, 재밌다고 느낀 고은서가 몇 개를 저장하고는 주인혁의 인스타를 찾아봤다.다채로운 일상을 보내는 그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 밴드 활동도 하는 등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었다.고은서는 다소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젊음과 열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그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녀를 언급했고 클릭해 보니 전에 성아연을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던 단톡방이었다.성아연은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며 그녀를 태그했다.고은서가 슬쩍 보니 사진 속에는 사람 없이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면 한 그릇과 꿀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일부러 그랬는지 소파에 놓인 파란색 셔츠가 찍혔다.고은서에겐 익숙한 옷이다, 곽승재가 오늘 입었던 그 옷.장소도 낯설지 않았다, 백유미가 사는 곳.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고은서가 전화를 받자 성아연의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랑 SNS 다 차단했어?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곽승재가 뭐라고 해? 나 혼자 한 일이라고 말하랬잖아. 정 안 되면 나랑 해결책 생각해 보면 되지 왜 혼자 끙끙 앓아!”고은서는 대답하기 싫어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렸고 역시나 성아연이 덧붙였다.“방금 보낸 사진 그 망할 년이 인스타에 올린 거야. 역겨운 글까지 쓰길래 댓글로 욕했더니 바로
...하루를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저녁에 민시후 측에서 소식이 들려왔다.“서인수 일로 시끄럽게 됐어요. 만나서 얘기하죠.”“네, 주소 보내줘요.”민시후가 보낸 주소는 술집이었다.매번 프라이빗 클럽 아니면 술집이라 전생에 그가 사업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걸 몰랐다면 방탕한 노름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차를 몰고 술집으로 간 고은서는 2층에 있는 부스에서 민시후를 발견했다.이 순간 술집에는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고, 2층엔 다른 사람도 없이 방음이 잘 되는 자리에 앉으니 꽤 조용한 느낌이었다.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에 얹고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지만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없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테이블에는 술과 차, 과일과 간식 등이 있었고 고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소파에 앉아 매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좋아, 그렇게 해. 결과 나오면 알려줘.”얼마 지나지 않아 민시후가 전화를 끊었다.“서인수 쪽에서 뭘 알아냈어요?” 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민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서류를 하나 던져주었다.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외에 서인수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과 어젯밤 상황까지 담겨 있었다.서인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머리가 좋았고 배운 술 제조법으로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사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갔다.서인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자주 기부하며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소녀가 바로 그 보육원 출신이었다.“쓰레기!” 이걸 본 고은서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선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일단 욕하지 말고 뒤에 계속 봐요.” 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은서가 뒤를 펼쳐보니 서인수가 호텔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진이었다.어제 서인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몸매 좋은 여자였다!“이거 어젯밤에 찍은 건데 왜 그쪽에서 막지 않았죠?”민시후는
민시후는 고은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은서 씨,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그 사람을 도와주면 명운은 걱정 없다니까요?”“하지만 인성도 저급하고 하는 짓도 악랄한데 이건 투자 은행에 큰 리스크에요. 상장했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돈은 어디서 벌어요?”민시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서인수는 평소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겠죠. 이번 일만 덮으면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큰 위험은 없죠. 있다고 해도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크잖아요. 이 바닥에 있으면서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 볼만하잖아요?”민시후의 가벼운 태도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니까 제 의견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셨군요.”민시후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은서 씨 지금 제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지금 충분히 그쪽 존중해주고 있는데.”고은서는 민시후의 나른하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협업을 제안한 이후 민시후는 협업 자체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이제 민시후는 명운을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는 더욱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제 제안은 없던 걸로 하죠. 사업가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선이 없는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 인성이면 확실히 같이 일할 필요가 없죠!”말을 마치고 고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민시후가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잠깐만요.”고은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어떻게 곽승재와 그의 절친 백유미를 상대하려고 그래요?”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조사하고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그쪽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민시후는 차갑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으니 법을 어기더라도 혼내줘야지!”민시후의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조폭 같은 기세와 가까이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경솔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민시후와 협업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그가 태도를 바꾸어 정말로 납치한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곽승재가 그녀를 싫어하는 정도로 봤을 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피해? 어디 피할 수 있나 보자!”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2층은 민시후가 전부 대관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누가 그 여자를 건드려!”고은서가 깨진 술병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민시후의 목을 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다!착각일까, 그녀를 보는 순간 곽승재의 눈빛이 걱정으로 번뜩였던 건?“이야, 곽 대표 딱 맞춰 오셨네. 아직 연락도 안 보냈는데 벌써 오셨어.”민시후의 조롱에도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긴 다리를 뻗어 고은서의 옆으로 다가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가자.” 곽승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지만 민시후의 경호원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곽 대표,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냥 가려고?” 민시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났고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이 내 아내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듣고 싶네.”말하는 사이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민시후 곁으로 다가왔다.수적으로나 힘으로나 민시후 쪽이 분명 열세였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경호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곽 대표가 준비를 많이 했네.”민시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술집 주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민시후를 본 고은서는 약간 놀랐다.‘북성으로 가서 오늘 해성에 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생각에 잠겨 있을 사이 민시후는 이미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그리고 그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보았다.민시후의 얼굴에 뚜렷한 불쾌감이 떠올랐다.“곽 대표, 왜 어디나 다 당신이 있는 걸까?”곽승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그 말은 그대로 돌려줘야겠는데?”“곽 대표, 지나간 버스는 다시 잡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민시후는 곽승재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며 말했다.“은서에게 잘해줬다면 전 남편이 될 리가 없었겠지?”곽승재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얼굴이 굳어졌고 차가운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렸다.“늦었어. 돌아가.”고은서는 두 사람이 또 다툴까 걱정되어 곽승재에게 한마디 하고는 차 문을 닫으며 이혁재에게 말했다.“아저씨, 출발해 주세요. 운전 조심하시고요.”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곽승재는 차창 너머로 나란히 서 있는 고은서와 민시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였고 그 광경에 눈이 시려왔다.어쩌면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시려지는 듯했다.그는 당장 차에서 내려 고은서를 안아 들고 예원 별장으로 데려가 다시는 민시후와 못 만나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은서가 자신을 더 미워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셔츠 목 부분의 단추를 풀었지만 여전히 숨이 막혀온 그는 외투를 벗으려다 포켓에 든 돈을 건드리게 되었다.문득 고은서가 치료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넬 때의 냉랭한 표정이 떠올랐다.마치 남을 대하듯 선을 긋는듯한 모습이었다.고은서도 그가 원하는 것이 돈도 치료비도 아닌 그녀의 미소 혹은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민시후를 도와 진실을 밝힌 것도 자신이 그렇게 비열하지 않다는 것을 고은서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였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속에서 그의 이미지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듯했다.곽승
고은서는 조향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때로는 너무 늦어져 집에서 자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은 작았다.나아가 고은서는 지난번 곽승재를 이유 없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은서가 승낙하자 운전기사는 다시 곽승재를 설득하며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곽승재는 그제야 천천히 차에 올라탔고 차 안으로 밤공기와 담배 향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그는 고은서 옆에 앉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곽승재의 운전기사는 차 문을 닫고 고은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이혁재는 바로 출발했고 차는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차 안에서 곽승재는 먼저 고은서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또한 그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 차가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지 동승한 것처럼 보였다.“지난번 민시후와 관련된 일은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었어. 오해해서 미안해.”복수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잘못도 제때 인정하는 것이 고은서의 원칙이었다.지난번 GS 그룹에서 그녀는 시시비비도 제대로 가리지 않고 곽승재를 비난했고 며칠 전 그가 찾아왔을 때도 오해하여 그에게 손찌검까지 했다.고은서의 충동임이 틀림없었다.그녀의 사과를 들은 곽승재는 살짝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현금 뭉치를 꺼냈다.“이거 받아.”지난번 M 국에서 노숙자에게 쫓기고 나서 고은서는 현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졌고 마침 쓸모가 생겼다.곽승재는 그녀가 내민 돈을 보고 눈빛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치료비에 대한 보상이야.”그녀는 곽승재를 몇 번이나 때렸고 비록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지만 약이라도 발라야 했을 테니 보상으로 돈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곽승재의 차분했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은서, 이렇게 대충 넘어가려고?”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아니면?”고은서는
고준석은 고은서의 불쾌한 표정을 알아채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승재가 먼저 약속 잡고 나랑 바둑 두러 온 거야.”고은서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그 사람 집에 자주 와요?”‘전에는 이렇게 한가해 보이지 않더니...’고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일주일에 한두 번은 와. 바쁘면 안 와도 된다고 했는데 나랑 바둑 두는 게 좋다며 굳이 오더라. 심지어 네가 싫어할까 봐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더라.”‘내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온다고?’고은서가 더 말하려는 순간 곽승재가 이미 집 안으로 들어섰다.곽승재는 그녀를 보고 약간 놀라는 듯했지만 곧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는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할아버지, 저 왔어요.”곽승재는 고준석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승재 왔니? 앉아라.”고준석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번에도 녹차로 줄까?”“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고준석 옆 의자에 앉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할아버지, 저는 조향실에 좀 있다가 올게요.”“과일차 마시고 싶다며? 지금 아주머니가 준비하고 있어.”“준비되면 조향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주세요.”고은서는 말을 마치고 거실을 떠났다.“애도 참.”고준석이 한숨을 내쉬며 곽승재에게 말했다.“승재야, 은서 원래 저런 성격이니까 네가 이해해 줘.”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깊은 눈으로 고은서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고준석은 곽승재가 고은서를 붙잡으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은서의 마음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몫이지.’최근 곽승연을 위해 조향한 아로마 캔들의 효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기분도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인 터라 고은서는 이를 더 개선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 있었고 어깨를 주무르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곽승재는 이미 떠나고 고준석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은
“백유미가 먼저 자살 시도를 하고 곽승재는 그 후에 수술을 받았는데 그런 졸렬한 변명이 통할 거로 생각하나?”박지연은 아무렴 믿지 않을 거라는 표정을 지었다.육현석이 머쓱한지 코를 만지며 답했다.“승재 형 그 얘기 할 때 꽤 슬퍼 보였어. 난 거짓말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정말 친동생보다 더 친한 사이네.”육현석과 박지연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시작했고 그 사이 도아름은 생각에 잠겨 있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도아름은 T 국에서 고은서가 겪었던 일과 백유미의 몇몇 추문 그리고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은서야, 괜찮아?”도아름은 고은서가 슬퍼하는 줄 알고 걱정스레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곽 대표가 일부러 너를 슬프게 하려 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 그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은서야, 화해를 강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야. 난 네가 막다른 길에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긍정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돼.”고은서가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저도 알아요.”전생에 곽승재에게 자신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상관없었다.하지만 그가 싸늘한 말투로 죽고 싶으면 죽으라고 말한 건 사실이었고 그녀도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아름 언니, 저 회사 차리면 주주로 들어오실래요?”도아름은 흔쾌히 승낙했다.“우리 명운을 알아보고 투자했으니 나도 참여해야지.”“나도 참여하게 해 줘!”육현석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나도 할래. 난 그냥 주주로만 있을게. 경영이나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그 정도로 날 믿어도 돼? 혹시 손해 보면 어쩌려고?”“그럴 리가! 난 네가 큰돈을 벌 거라는 예감이 들어!”“그럼 네 말대로 되길 빌게!”식사를 마친 후 고은서는 육현석에게 박지연을 데려다주라고 했고 그녀는 도아름과 함께 명운으로 가서 전문가들과 회사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간단
곽 대표라는 호칭을 들은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룸 밖에서 매니저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곽승재를 예의 있게 안내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고 안에는 간단한 흰 셔츠를 매치해 섬세하고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곽승재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고은서는 지난밤 그에게 손을 댄 일을 떠올리며 시선을 피했다.“승재 형?”육현석도 곽승재를 발견하고 꽤 놀란 듯 그를 불렀다.곽승재는 육현석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물었다.“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지연이 친구들 만나러 왔어. 형도 아는 사람일걸? 도아름 씨라고.”육현석이 도아름을 소개했다.고가승재는 그제야 박지연과 도아름을 바라보며 예의 있게 인사했다.“지연 씨, 도 대표님.”박지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도아름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곽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랑 같이 식사하실래요?”도아름이 곽승재를 초대했다.“그래. 형. 어차피 모르는 사람도 없고 같이 먹자.”육현석도 맞장구를 쳤다.곽승재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는 고은서에게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답했다.“됐어. 고객과 약속이 있어서.”말을 마친 곽승재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으며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지연아, 은서야. 나 정말 형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 나도 형이 여기 고객 만나러 올 줄은 몰랐다고.”곽승재가 자리를 뜨자 육현석은 곧바로 해명했다.“정말?”박지연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육현석은 진지하게 답했다.“정말이야. 너랑 은서가 승재 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런데 왜 굳이 일부러 불러서 분위기를 흐리겠어?”고은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박지연이 답했다.“그래. 이번엔 믿어 줄게.”“걱정하지 마, 지연아. 네 허락 없이 먼저 승재 형을 부르는 일은 없을 거야.”육현석이 맹세하자 박지연은 그의 태도에 만족해하며 답했다.“우리도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고은서도 절친한 친구로서 초대 명단에 포함되었다.저녁 무렵, 육현석이 차를 몰고 그녀들을 데리러 왔다.평소보다 더 격식 있는 차림을 한 육현석을 보고 고은서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육현석, 안 지 꽤 오래됐는데 이렇게 정식적인 복장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육현석은 박지연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어쨌든 여자 친구의 친구를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이미지 신경 써서 좋은 인상 남겨야지.”고은서는 이전까지 육현석이 놀고먹는 것만 좋아하고 일에 관심 없는 부유한 집 자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곽승재와 사이가 좋았기에 전생에 그녀는 그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지만 육현석은 항상 그녀를 피했다.그러나 환생하고 나서 더 이상 그에게 잘 보이려 애쓰지 않자 오히려 육현석이 그녀와 곽승재의 사이를 돕기 위해 많은 조언을 해줬다.그래서 고은서에게 육현석은 EQ가 뛰어나고 여성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하지만 육현석이 박지연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자신이 편견이 있었음을 느꼈다.육현석은 박지연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의 모든 행동은 EQ가 아닌 마음을 따른 결과였다.“너는 항상 멋졌어. 아름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박지연이 육현석을 위로했다.“지연아, 너도 항상 이뻐.”육현석도 칭찬으로 답했다.“그만 좀 해! 여기 아직 사람 있잖아.”고은서가 닭살 돋은 팔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난 그냥 혼자 운전해서 갈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있다가 정말 닭이 되겠어.”박지연이 가볍게 헛기침했다.“그만하고 같이 가자.”육현석이 신사답게 두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었다.“아가씨들, 타시죠.”도아름과의 약속 장소는 해성에서 특색있는 한식당이었다.도착 후 박지연은 도아름에게 정식으로 육현석을 소개했다.육현석은 예의 바르게 도아름과 악수하며 선물을 건넸다.“나는? 왜 나는 선물이 없어?”박지연이 얼른 육현석을 감쌌다.“두 사람은 자주 만나면서 무슨 선물이야.”고은서가 불만을 터트렸다.“박지연 씨, 지금
모진 말로 밀어내려 했음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는 민시후의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감동했다.그만큼 민시후가 감정을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고은서는 그가 가족과의 갈등을 일으킬까 봐 걱정되었다.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이어 남은 가족들까지 멀어지는 걸 고은서는 보고 싶지 않았다.민시현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면 두 형제간의 다툼은 불가피할 것이다.그래서 고은서는 결국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민시후, 네 형이 나를 찾아온 건 맞아. 하지만 나한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고 오늘 너한테 얘기한 건 모두 내 결정이야. 예전에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쫓아다녔는지 너도 잘 알잖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아. 내 결정이 아니라면 아무도 나를 강요할 수는 없어.”민시후는 고은서의 말을 이해했다.민시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기사 보낼 테니 타고 가. 나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바래다주진 못하겠다.”말을 마친 민시후는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뭐 하려는지 바로 눈치채고 외쳤다.“민시후, 형 찾으러 가지 마. 내 결정은 그 사람과 아무 관계도 없어.”하지만 민시후는 대답 없이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은서는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민시현의 번호가 없었던 고은서는 고민 끝에 송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서 씨?”송민준은 약간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민시현을 찾으러 갈 수도 있다고 하며 상황을 설명했다.“송민준 씨, 민시현 씨한테 민시후 좀 막을 수는 없는지 연락 좀 해주세요.”송민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단호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연락드릴게요. 소식 있으면 알려드리겠습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송민준은 약속대로 먼저 연락을 해왔다.“어제 시후는 아버지한테 불려서 북성으로 갔어요. 오늘도 해성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거예요. 은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가 겉으로는 시후한테 엄한 듯해 보여도 속으로는 많
민시후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고은서는 미소 지었다.“늘 생각해 온 일이야. 다만 ZY에서 프로젝트를 몇 개 더 완성하고 경험과 자금을 충분히 쌓은 후에 말하려고 했어.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명운도 상장을 앞두고 있고 제인 제약 계약도 체결되었잖아. 내 손에 새로운 프로젝트로 없으니 준비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아.”“잘됐네. 마침 백씨 가문 산업 중에 금융 관련 사업도 있었으니 이번 인수 절차가 끝나면 네가 이어받아서 함께 운영하면 되겠다.”민시후가 제안했으나 고은서는 정중히 거절했다.“백씨 가문 산업은 ZY 그룹 프로젝트야. 내가 혼자 독점하는 건 아닌 것 같아.”“백씨 가문을 파산시킬 수 있었던 건 네 덕이야. 난 그냥 인수를 도와주려고 한 거지 ZY 그룹에 합병시킬 생각은 없었어.”그 말에 고은서는 약간 감동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ZY 그룹에서 손을 댔으니 당연히 가져가야지. 이전에 약속했던 대로 비율에 따른 수익만 나눠줘.”고은서의 단호한 태도에 민시후는 한발 물러서며 인수가 완료된 후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이로써 두 사람은 잠정적으로 합의를 보았다.“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게 이것 때문이야?”이때 강바람이 불어와 물결이 일렁였다.고은서는 반짝이는 강 건너편의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민시후, 앞으로 한동안 많이 바빠질 거야. 그래서 일 외의 것에 신경 쓸 시간은 없을 것 같아.”“그래서?”민시후가 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고은서가 시선을 돌려 민시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답했다.“그래서 이전에 약속했던 건 지키지 못할 것 같아.”“잠시만이라는 거야? 아니면 이대로 끝이야?”민시후가 묻자 고은서가 잠시 멈칫하다 답했다.“이대로 끝내자. 우리 다시 친구 해.”“고은서, 며칠 전만 해도 나를 믿는다고, 나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민시후의 목소리에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고은서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내가 무슨 일을 숨기겠어.”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그럼 곽승재가 왜 계약 체결 현장에 안 왔는지 생각하고 있는 거야?”판주 투자은행이 이번 계약에 끼어든 건 곽승재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민시후도 이 점을 못마땅해하며 신경 쓰고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달래길 바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 내가 곽승재를 생각하고 있다고 쳐.”고은서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고은서, 너!”민시후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왜 화를 내? 네가 먼저 얘기 꺼낸 거잖아.”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고은서는 끝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런 대답 듣기 싫으면서 왜 먼저 말을 꺼내는 거야? 말하고 나서 스스로 감당도 못 하면서 자업자득 아니야?”민시후는 고은서가 농담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의 얼굴을 잡고 마구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민시후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은서야, 나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곽승재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과거가 부러울 뿐이야.”‘그게 부러워할 만한 일인가?’고은서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과거는 많지만 아름다운 건 없었어.”고은서는 모든 복잡하고 어두운 감정들을 털어내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곽승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마침 웨이터가 음식을 내오자 고은서가 다시 말했다.“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먹자.”대화 이후 고은서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민시후는 고은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음식은 정교하고 맛있었고 강변 야경은 아름다웠다.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웨이터가 후식으로 디저트를 가져오자 고은서는 얼른 한입 베어 물었다.달콤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맛이었다.“은서야, 나한테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