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예 배를 부여잡고 웃기까지 했다.이를 본 주민기는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은서 때문에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고, 괜히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용히 가림판을 올렸다.곽승재는 자신의 협박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고은서를 바라봤다.휘어진 눈가에는 물기가 살짝 묻어 있었고 살짝 붉게 물든 얼굴에는 불만도, 차가움도, 심술도, 싫은 기색도 없이 명랑한 미소만 남아 있었다.그녀의 하얀 손목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잡혀 있었고 그녀의 따뜻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분명 화가 났던 곽승재는 이상하게도 분노가 사그라드는 대신 갈증과 열기가 밀려왔다.그는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고은서의 앵두 같은 입술을 보자 그녀의 온몸을 끌어당겨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그녀가 벗어나지 않도록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부터 위쪽을 꽉 눌러 밀착시켰다.갑작스러운 키스에 고은서는 당황스럽고도 화가 났다.하지만 곽승재의 두 팔이 쇠붙이처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벗어날 수 없었다.그는 옆으로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녀의 입안을 헤집는 동시에 그녀를 들어 올려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이 야릇하고 친밀한 자세에 고은서는 너무 화가 나서 목구멍으로 소리를 냈다.“읍!”그녀는 필사적으로 손을 빼서 곽승재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곽승재의 힘은 평소보다 더 강했다.그는 저항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온몸을 의자 등받이에 밀어붙였다.주민기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대체 여기 왜 왔을까.집에서 편히 쉬면서 고양이와 놀았을걸.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제압당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체격과 체력의 격차 때문에 그녀는 곽승재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띠링띠링, 귀염둥이 전화 왔어요~”바로 그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고 시끄러워서인지, 아니면 이성이 돌아와서인지 곽승재는 결국 공격을 멈췄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물리칠 힘이 없었기에 숨을 헐떡이며 낮게 말했다.“전화 받아야 해.”술에 취해 붉게 물든 곽승재의 눈동자에는
곽승재에게 이렇게 고약한 취향이 많다는 걸 왜 전에는 몰랐을까?그 순간, 고은서의 전화벨이 끊겼고 곽승재는 다시 그녀를 꽉 껴안았다.“안 받아도 되네...”고은서가 그를 때리려는 순간 칸막이가 내려가며 주민기가 시선을 내리고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대표님, 백 이사님께서 대표님 휴대폰이 꺼져 있다면서 할 얘기가 있으시답니다.”곽승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주민기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고, 고은서는 짜증스럽게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백유미의 부재중 전화였다.백유미는 정말 곽승재의 행방을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까지 연락을 하다니.“무슨 일이야?” 곽승재는 옷깃을 잡아당기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승재야, 목소리가 왜 그래, 술 많이 마셨어?”백유미가 걱정하자 곽승재는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무슨 일이야?”“여기로 올 수 있어? 만나서 얘기해. 내가 거기로 가도 되고. 급한 상황이라 전화로는 얘기하기 어려워.”곽승재는 고은서를 흘깃 쳐다보았고, 그녀의 작은 얼굴은 이 순간 다시 낯설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내가 갈게.”그렇게 말한 뒤 곽승재는 전화를 끊었다.“차 세워, 택시 타고 갈래.”고은서가 눈치껏 말했지만 곽승재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숨결에는 아직도 술 냄새와 취기가 묻어났다. “기사님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우리가 택시 타고 가면 돼.”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내자 곽승재는 눈빛이 어두워지면서도 차를 세우게 했다.곽승재와 주민기가 모두 차에서 내린 후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밤 식당에서 서인수를 본 것에 대해 말하며 서인수의 사생활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명운 대표로서 인성에 문제가 있으면 앞으로 상장에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투자 문제에 관해서는 협조적이었던 민시후가 오케이 이모티콘을 보냈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수건으로 입술을 세게 문질렀다.곽승재 그 변태 자식이 술을 많이 마시면 미칠 줄이야!전생에는 분명
성아연이 보낸 사진이었다.지난번 성아연이 백유미에게 찾아가 한바탕 따진 후 고은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성아연이 사진을 보낸 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아 고은서는 바로 삭제를 클릭하고 번호를 차단했다.[저기요, 꼭 받아요.] 주인혁은 또 메시지를 보냈다.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고은서도 고집부리지 않고 결국 돈을 받았다.[저기요, 요즘 바빠요? 왜 연습하러 오지 않아요?]주인혁이 물었다.며칠 동안 고은서는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바빠서 연습하러 갈 시간이 없었다.[일이 좀 많아서 바빴어요.]주인혁은 고은서에게 수고했다는 이모티콘을 잔뜩 보냈고, 재밌다고 느낀 고은서가 몇 개를 저장하고는 주인혁의 인스타를 찾아봤다.다채로운 일상을 보내는 그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음악 밴드 활동도 하는 등 밝고 긍정적인 소년이었다.고은서는 다소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젊음과 열정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그때 단톡방에서 누군가 그녀를 언급했고 클릭해 보니 전에 성아연을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던 단톡방이었다.성아연은 단톡방에 사진을 보내며 그녀를 태그했다.고은서가 슬쩍 보니 사진 속에는 사람 없이 테이블 위에 먹음직스러운 면 한 그릇과 꿀물 한 잔만 놓여 있었다.일부러 그랬는지 소파에 놓인 파란색 셔츠가 찍혔다.고은서에겐 익숙한 옷이다, 곽승재가 오늘 입었던 그 옷.장소도 낯설지 않았다, 백유미가 사는 곳.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고 고은서가 전화를 받자 성아연의 불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은서, 무슨 일이야, 내 연락처랑 SNS 다 차단했어? 저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곽승재가 뭐라고 해? 나 혼자 한 일이라고 말하랬잖아. 정 안 되면 나랑 해결책 생각해 보면 되지 왜 혼자 끙끙 앓아!”고은서는 대답하기 싫어 그녀의 다음 말만 기다렸고 역시나 성아연이 덧붙였다.“방금 보낸 사진 그 망할 년이 인스타에 올린 거야. 역겨운 글까지 쓰길래 댓글로 욕했더니 바로
...하루를 초조하게 기다린 끝에 드디어 저녁에 민시후 측에서 소식이 들려왔다.“서인수 일로 시끄럽게 됐어요. 만나서 얘기하죠.”“네, 주소 보내줘요.”민시후가 보낸 주소는 술집이었다.매번 프라이빗 클럽 아니면 술집이라 전생에 그가 사업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걸 몰랐다면 방탕한 노름꾼으로 생각했을 것이다.차를 몰고 술집으로 간 고은서는 2층에 있는 부스에서 민시후를 발견했다.이 순간 술집에는 잔잔한 음악만 흘러나왔고, 2층엔 다른 사람도 없이 방음이 잘 되는 자리에 앉으니 꽤 조용한 느낌이었다.민시후는 긴 다리를 테이블에 얹고 여전히 나른한 표정이지만 주변에는 예쁜 여자들이 없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테이블에는 술과 차, 과일과 간식 등이 있었고 고은서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알아서 소파에 앉아 매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좋아, 그렇게 해. 결과 나오면 알려줘.”얼마 지나지 않아 민시후가 전화를 끊었다.“서인수 쪽에서 뭘 알아냈어요?” 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민시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서류를 하나 던져주었다.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외에 서인수에 대한 자세한 인적 사항과 어젯밤 상황까지 담겨 있었다.서인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유난히 머리가 좋았고 배운 술 제조법으로 장인의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아내와 결혼한 뒤에는 사돈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해 나갔다.서인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자주 기부하며 많은 명성을 얻었는데 어제 함께 술을 마시러 온 소녀가 바로 그 보육원 출신이었다.“쓰레기!” 이걸 본 고은서는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자선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짓을 하다니!“일단 욕하지 말고 뒤에 계속 봐요.” 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은서가 뒤를 펼쳐보니 서인수가 호텔에서 한 여자를 데리고 있는 사진이었다.어제 서인수를 ‘삼촌'이라고 부르던 몸매 좋은 여자였다!“이거 어젯밤에 찍은 건데 왜 그쪽에서 막지 않았죠?”민시후는
민시후는 고은서를 향해 피식 웃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은서 씨, 지금이 절호의 기회예요. 그 사람을 도와주면 명운은 걱정 없다니까요?”“하지만 인성도 저급하고 하는 짓도 악랄한데 이건 투자 은행에 큰 리스크에요. 상장했다가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돈은 어디서 벌어요?”민시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서인수는 평소에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에요. 안 그랬으면 이런 걸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겠죠. 이번 일만 덮으면 다시는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을 테니 큰 위험은 없죠. 있다고 해도 리스크가 클수록 이익도 크잖아요. 이 바닥에 있으면서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 볼만하잖아요?”민시후의 가벼운 태도에 고은서는 콧방귀를 뀌었다.“그러니까 제 의견은 물어볼 생각도 안 하셨군요.”민시후는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은서 씨 지금 제가 결과를 알려주고 있잖아요. 지금 충분히 그쪽 존중해주고 있는데.”고은서는 민시후의 나른하고도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협업을 제안한 이후 민시후는 협업 자체보다는 그녀의 행동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이제 민시후는 명운을 혼자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존재는 더욱 무의미해졌다.“그렇다면 제 제안은 없던 걸로 하죠. 사업가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라면 옳고 그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선이 없는 사람이었네요. 그 정도 인성이면 확실히 같이 일할 필요가 없죠!”말을 마치고 고은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민시후가 그녀를 불렀다.“은서 씨 잠깐만요.”고은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민시후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정말 이 기회를 포기할 생각이에요? 미래에 합류하지 않고 어떻게 곽승재와 그의 절친 백유미를 상대하려고 그래요?”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조사하고 자신의 속셈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민시후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기에 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그쪽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살 구멍은
민시후는 차갑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았으니 법을 어기더라도 혼내줘야지!”민시후의 세상 무서울 게 없다는 조폭 같은 기세와 가까이 다가오는 경호원들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마음속으로 후회가 밀려왔다.경솔했다. 전생의 경험을 통해 민시후와 협업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조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지금 그가 태도를 바꾸어 정말로 납치한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곽승재가 그녀를 싫어하는 정도로 봤을 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고 신경 쓴다고 해도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피해? 어디 피할 수 있나 보자!”민시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2층은 민시후가 전부 대관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해도 소용이 없었다.“누가 그 여자를 건드려!”고은서가 깨진 술병을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눌지 민시후의 목을 노리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곽승재다!착각일까, 그녀를 보는 순간 곽승재의 눈빛이 걱정으로 번뜩였던 건?“이야, 곽 대표 딱 맞춰 오셨네. 아직 연락도 안 보냈는데 벌써 오셨어.”민시후의 조롱에도 곽승재는 그를 무시하고 긴 다리를 뻗어 고은서의 옆으로 다가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괜찮아?”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가자.” 곽승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고은서에게 같이 가자고 손짓했지만 민시후의 경호원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곽 대표, 상황이 정리되기도 전에 그냥 가려고?” 민시후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났고 곽승재의 짙은 눈동자가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나도 당신이 내 아내를 납치하려던 이유를 듣고 싶네.”말하는 사이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민시후 곁으로 다가왔다.수적으로나 힘으로나 민시후 쪽이 분명 열세였다.고은서는 곽승재가 경호원까지 데리고 올 줄은 몰랐다.“곽 대표가 준비를 많이 했네.”민시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이 술집 주
곽승재는 그를 무시했다.아래층에서는 주민기가 마무리하고 뒤따라 술집을 나섰다.고은서는 서둘러 곽승재의 손을 뿌리쳤고 곽승재는 표정이 살짝 바뀌더니 차갑게 말했다.“네 차 키 기사한테 주고 넌 내 차 타고 가.”고은서는 의심스러웠다.“내가 차 갖고 온 걸 어떻게 알았어?”곽승재가 퉁명스러운 어투로 대꾸했다.“장님도 아니고 이렇게 눈에 띄는 색깔과 번호판을 어떻게 못 봐!”“...”고은서의 마세라티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색상은 화끈한 붉은색에 번호판은 그녀의 이름 약자와 생일을 조합해 만들었다.평범하지는 않았지만 곽승재의 말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았다.기사는 이미 차에서 내렸고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키를 건네며 알아서 조수석에 앉았다.곽승재가 시동을 걸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 시간에 여긴 왜 왔어?”GS그룹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도 아니었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전에 네가 왜 민시후 술집에 오고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지 말해.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곽승재는 지난번 사고 전에도 고은서에게 이 질문을 했었고 그때 고은서는 아직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했었다. 이젠 친해졌다는 건가?당연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판주를 상대하려고 민시후와 함께 손잡으려고 했다는 걸 알려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동업이 성사됐다면 곽승재의 화를 돋우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둘 사이가 틀어졌고 민시후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이었기에 자존심 때문이라도 말할 수 없었다.고은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제때 구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슨 사이든 당신한테 설명할 이유 없어.”인정이나 다름없는 말에 곽승재는 화가 치밀었다.“고은서, 너 유부녀라는 거 잊지 마.”고은서는 비웃으며 반격했다.“그럼 당신은 백유미네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샤워할 때 유부남인 거 안 잊었어?”대체 어쩌다 샤워했다는 말이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늘 백유미에 관
곽승재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으며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내 아내의 신분이 짓밟히는 게 아니면 내가 네 일에 이렇게 신경 썼겠어?”그럴 줄 알았다.2층으로 올라갈 때 그의 눈빛에서 보였던 그 걱정도 같은 이유였겠지.예전처럼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또다시 곽승재에게 끌려다닐 테니까.고은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내 일에 참견하기 싫으면 빨리 이혼 서류에 사인해. 내가 말했잖아, 사인 안 하면 후회할 거라고!”“너...”곽승재는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고 고은서는 그가 말하기도 전에 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그런데 곽승재도 차에서 내려 시커멓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소리를 지르든 말든 운전석에 밀어 넣고 안전띠까지 매주었다.“예원 별장으로 바로 돌아가. 내 차에 위치추적기가 있으니까 말 안 들으면 할아버지 모셔 올 거야.”곽승재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차 문을 거칠게 닫았다.“...”미친놈.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엑셀을 밟았다.예원 별장으로 돌아온 고은서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소파에 쓰러졌다.그녀의 직감은 정말 아무 소용이 없었다.무의식적으로 민시후의 방탕함이 피상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현실이 다시 머리를 강타했다.협업은 뒤로 하고 지금 문제는 도아름에게 서인수에 대해 말할지 말지였다.같은 여자로서 당장이라도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부부 사이의 문제고, 그녀를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있을지도 몰랐다.또한 서인수가 한 모든 일을 알고도 눈감아 주는 걸지도 몰랐다.고은서는 의견을 묻기 위해 박지연의 전화번호를 찾다가 그녀가 오늘 이미 L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휴대폰을 내려놓으며 고은서는 머리가 조금 아팠다....곽승재는 판주 투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했다.“대표의 불량한 품행은 향후 상장에 큰 리스크인데 그 정도 상식도 없습니까?”곽승재가 차가운
민시후는 송민준과 찻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맑은 하늘에 눈 부신 햇살, 날씨가 참 좋았다.민시후는 기사 대신 직접 하늘색 스포츠카를 운전했다.고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띄는 스포츠카를 보며 말했다.“민 도련님, 패션 워크 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레스토랑 가는 것뿐인데 굳이 이렇게 눈에 띄는 차를 운전해야 할까요?”“그냥 평범한 스포츠카일 뿐인데 어디가 눈에 띈다는 거야? 잔말 말고 얼른 타. 내가 직접 운전한다는데 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민시후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고은서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탔다.스포츠카가 유독 눈에 띄기는 했지만 길에 차들이 적었던 탓에 다행히도 너무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중에 ZY 그룹 근황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곽승재가 ZY 그룹을 타깃으로 삶고 짓누르려고 할 때 민시후가 제때 빠르게 대응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영향을 받았다.“허 교수님 쪽에 의약 프로젝트가 아주 순리롭게 진행되고 있어. 후기도 꽤 괜찮고. 연구소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민시후는 회사 일을 얘기할 때만은 진지했다.“대리권도 네가 쟁취해 온 거니까 융자에 관한 일도 네가 책임지고 잘 해봐.”고은서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에 박지연한테서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백유미에게 맡길 예정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는지 의문스러웠다.그녀는 궁금증을 덜기 위해 민시후에게 물었다.“곽승재 아버지가 얼마 전에 귀국하셨는데 회사 일에 참여하려 했다가 곽승재한테 거절당했다고 하더라고. 아마 이번 일도 곽승재가 아버지 건의를 거절하고 직접 내린 결정일 거야.”‘그렇구나. 그런데 회장님이신 자기 아버지랑 맞붙는 거 보아서는 아마 두 사람도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고은서는 이내 민시후 아버지가 전에 편찮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아버지는 괜찮으셔?”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민시후는 피곤하다는
백유미는 자신이 누군가의 함정에 걸려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사람 시켜 조사중이니 곧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너도 말했다시피 이미 일은 발생했고 손실도 점점 더 커지고 있어. 이 말인즉슨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야. 프로젝트가 대박 나면 넌 명예랑 돈을 얻고 망하면 너랑 아무 상관이 없다? 일이 그렇게 쉬울 것 같아?”백유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프로젝트 서류에 사인한 사람은 너야. 그리고 회사 최고 결책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너고. 어떤 일이 발생하든 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네 인생은 여기서 끝이야. 너랑 네 엄마 감방으로 보내서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게 만들 거야.”원지훈은 백유미가 화난 김에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가 그를 하늘 정상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만큼 다시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데요?”원지훈이 물었다.백유미는 독사처럼 살기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며 말했다.“돈은 당연히 감당하지 못할 테고. 그런데 그 대신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방금전까지 덤덤하던 원지훈도 점점 섬뜩해졌다.“무슨 일인데요?”“당연히 이 손해를 메꿀만한 일이지.”원지훈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이 일을 별 탈 없이 해주면 이번 손해는 그냥 넘어가 줄게. 혹은 네 엄마랑 함께 죽을 때까지 감방에 들어가 있든가. 한 가지만 선택해. 삼 일 줄게. 사흘 후에 확답을 주지 않으면 너도 어떤 후과가 있을지 알고 있을 거야.”백유미는 말하고 이내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범가온이 부랴부랴 룸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지훈아, 괜찮아? 유미가 또 너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날 나가 있으라고 한 거지?”그러나 원지훈은 대답 대신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지금 음식이 넘어가?”범가온은 호통치고는 슬쩍 문 쪽을 바라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네가 계약 체결할 때 따로 돈 받
“고은서 눈에 네가 들어오기나 하겠어?”백유미는 곽승재도 사랑하지 않은 고은서가 원지훈을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믿지 않았다.“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곳이 어디가 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거예요? 게다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면 왜 저를 위해 음식까지 주문해주면서 저를 먼저 찾아오겠어요?”“그래, 유미야. 지훈이가 옛날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어. 지방에서 살 때도 여러 여자애들이 얘가 좋다고 쫓아다녔는데 창업한 이후로 더 많은 여자들이 지훈이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나 한다니까.”범가온은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백유미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리고 원지훈에게 캐물었다.“고은서가 오늘 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뭔데?”원지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너무 오래 못 봤다고 밥 사준다고 만나자 했는데 시간 없다고 했어요.”백유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예전의 그녀였다면 지금 원지훈이 하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고은서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변해버렸다. 전에는 툭 건들기만 하면 펄쩍 뛰면서 화내는 사람이었는데 요즘 따라 곽승재가 무슨 일을 해도 전혀 관심 없는 태도를 보였다.심지어 민시후와 무척 가까이 지냈는데 아이가 곽승재의 아이라고 해도 두 사람이 호텔로 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재 원지훈과 연락을 맺고 있다는 게 너무도 수상했다.‘곽승재의 이목을 끌고 그에게 새로운 인상을 남기려는 수단인 건가?’“설마 이미 고은서에게 들킨 건 아니지?”백유미가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원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원지훈은 약간 당황하긴 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뭐가 들켰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누나랑 친한 사이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심심해서 고은서 앞에서 누나 얘기를 꺼내겠어요? 게다가 사람 뒷조사하는 거에 능하잖아요. 의심되면 조사해보면 될 거 아니에요.”나중에 조사는 해볼 것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갑자기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비서는 선 자리에 그댈 얼어붙었다.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어두운 얼굴빛을 하고 서 있었다.“대... 대표님, 제가 그 뜻이 아니라...”“그럼 무슨 뜻인데?”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내가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해 보이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라는 뜻이 아닌가?”‘갑자기 쓰레기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 거지? 내가 하는 얘기랑 완전 다른 얘기잖아.’비서는 말문이 막혔다.“대표님, 인혜 씨는 그 뜻이 아니라...”옆에서 보고 있던 주민기가 마지못해 대신 설명하려고 할 때 곽승재가 그를 쏘아보았다.“너도 이번 달 보너스 취소야!”‘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 보너스까지 취소하는 거야?’주민기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레스토랑 룸.원지훈이 룸으로 들어갔을 때, 룸 안에는 차가운 표정을 한 백유미와 범가온이 앉아있었다.테이블에는 여러 음식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누구도 입을 대지 않은 듯했다.“유미야, 우리 지훈이 화내지 마. 이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해. 지훈이가 널 배신할 리가 없어.”범가온은 백유미에게 끊임없이 사과했다.반면 백유미는 걸어들어오는 원지훈을 혐오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지훈아, 왜 이제야 왔어. 얼른 유미한테 설명해. 요즘 회사 일로 바삐 보낼 뿐, 유미를 배신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원지훈은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가 앉으면서 말했다.“누나, 또 왜 그러는 거예요? 밥 먹자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밥 같은 소릴 하고 있네. 너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백유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사진 한 뭉치와 여러 서류들을 원지훈을 향해 던지면서 말했다.“너 대체 고은서랑 무슨 사이야? 고은서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이유는 또 뭐고?”원지훈이 서류와 사진을 들고 확인해 보니 그중에는 오늘 그가 고은서 사무실을 찾아간 모습과 전에 고은서와 복싱관에서 만난 모습이 찍혀있었다.이외에도 그가 고은서에게 연락했던 통화기록과 그녀가 그를 위
곽승재는 무표정한 얼굴에 차가운 시선을 하고 있었다.고은서는 어젯밤 곽승재가 앞으로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자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고은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어차피 모르는 사람인데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곽승재는 계속 백유미에게 여지를 주면서도 나랑 이혼하기 싫다는 모습을 비췄잖아. 그렇게 보면 쓰레기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잖아.’“대표님, 조리실 구경해 보실 건가요?”누군가가 곽승재에게 물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답변을 듣지 못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이 사라진거로 봐서는 일행이 자리를 떴다고 생각했다.“주인공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험담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박지연이 물었다.고은서는 박지연을 향해 눈을 흘기며 답했다.“들으면 듣는 거지 뭐. 난 험담한 게 아니라 사실을 얘기한 거야.”“GS 그룹에서 시찰 나오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곽승재가 직접. 은서야, 혹시 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고은서는 바로 부정했다.“아니야.”박지연이 말했다.“그래도 인연인가 보네.”“그런 인연은 필요 없어.”곽승재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깨진 상황에서 고은서는 더 이상 박지연을 설득하지 않았다.박지연은 언제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했다.또한 사람이라는 게, 남을 설득하는 것은 쉬워도 정작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여있을 때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법이었다.마치 전생의 고은서와 곽승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GS 그룹 대표실에서 주민기는 곽승재에게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감지했다.요즘 곽승재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화를 누르며 가엾은 직원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았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곽승재는 갑자기 병원 실사를 진행하겠다고 일정을 변경했다.실사를 마치고 돌아온 곽승재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대표실 전체에 한파가 닥친 듯했다.비서가 서류를 챙겨
“곽승재보다 더 나쁜 놈이잖아!”고은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백유미가 약물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곽승재는 그녀가 다친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었다.하지만 온 닥터는 박지연의 상처를 봤으면서도 그녀를 혼자 병원에 보냈다.“네 시어머니도 너무해! 널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고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자기 아들이 힘들까 봐 다친 며느리를 혼자 병원에 가게 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아들 첫사랑한테는 친절하게 굴면서 며느리한테는 밥하라고 시키는 게 정말 시어머니가 할 짓이야?”이미 화를 냈던 건지 박지연은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시어머니는 항상 날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으셨잖아. 그런 사람이 내가 다쳤다고 해서 신경 쓸 리가 없지.”“더 나쁜 건 온 선생님이야! 네게 다정하지도 그렇다고 네 편을 들어주지도 않고 무슨 일이든 너한테 얘기조차 안 하잖아.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디는 거야!”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지연아, 너도 온 선생님 그냥 차 버려! 우리 둘이 지내면 되잖아. 남자는 필요 없어!”박지연은 억지로 웃으며 답했다.“너도 알잖아. 속상하긴 해도 남편 얼굴만 보면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아.”“단지 성격이 차갑고 딴짓 안 한다면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첫사랑이 작정하고 돌아왔잖아. 안 그래도 어중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인데 뭘 더 버티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네가 다친 이 며칠 동안 네 상태에 관해 물어본 적 있어?”“의사잖아.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있으니까 물어봐도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게다가 요즘 학회가 많아서 바쁘거든. 얼굴 마주 볼 시간도 별로 없어.”“결국 물어본 적 없다는 얘기네?”화가 난 고은서가 저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바빠서 다친 아내 상태를 물어볼 시간은 없으면서 첫사랑이랑 쇼핑하고 커피 마실 시간은 있나 보네.”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말을 밖으로 뱉은 고은서는 곧바로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이미 입 밖으
박지연의 안색이 확연히 어두워졌다.그녀는 팔을 살짝 뒤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요리하다가 실수로 데었어. 이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검진받으러 왔다며? 같이 있어 줄게.”고은서는 직감적으로 박지연과 온 닥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대화하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박지연의 말에 따랐다.고은서는 잘 회복하고 있었다.전에 옥상에서 떨어지며 생긴 부상도 별 탈 없이 회복 중이었다.“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뭐라도 좀 먹을까?”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도 거절하지 않았다.“식당에 가자. 당직이라서 얼른 가봐야 해.”“그러자.”병원 식당은 환한 조명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곳곳에 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병원 환경 좋네.”고은서가 칭찬하자 박지연이 답했다.“평소에는 이렇게 깔끔하지 않아. 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 몇 개 지어준다며 시찰 나온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이 좀 나아진 거야.”‘GS 그룹에서 병원에 새 건물을 지어준다고?’“네 덕일지도 몰라. 너 전에 여기 입원해 있을 때 곽승재가 자주 왔었잖아. 병원 측에서도 그 틈에 후원을 요청하기도 쉬웠겠지.고은서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전에 병원장이 곽승재와 관련된 일은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지시가 생각났다.‘후원 때문이었네.’박지연이 식판을 두 개 받아 와서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지연아, 이제 말해줄 수 있지 않아? 온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고은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전에 온 선생님께서 해외에서 만났던 그 여자가 같은 병원에 온 거야?”박지연은 부인하지 않았다.그녀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보름 전에 발령받아서 왔어. 전에 오기로 했던 사람이 국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 여자로 교체됐다고 하더라고.”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렸다.“온 선생님께서 이 사실을 계속 너한테 숨겼던 거야?”박지연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 사람은 바로 박지연의 남편 온 닥터 였다.온 닥터 옆에는 가녀린 여자 한 명도 함께였다.그 둘은 캐주얼한 차림에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있었는데 어디론가 함께 가려는 듯한 모습이었다.‘지연이가 선생님께서 많이 바쁘시다고 했는데... 발에 불이 날 정도로 바쁘다던 사람이 왜 다른 여자와 카페에 나타난 거지?’고은서는 비록 그 여자를 본 적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으로 고은서는 그 여자가 온 닥터의 첫사랑일 것으로 생각했다.‘지연이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어 고은서는 생각을 이어 나갈 겨를 없이 얼른 핸드폰을 꺼내 재빨리 사진 한 장을 찍었다.뒤차의 재촉에 서둘러 출발하면서 고은서는 백미러를 통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이전에 박지연이 온 닥터에게 물었을 때, 그의 첫사랑은 같은 병원으로 발령받지 않았다고 했었다.‘온 선생님께서 거짓말하신 건가? 아니면 내 직감이 틀린 걸까? 평범한 동료나 친구인 걸까?’두 사람은 단지 카페에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뿐 특별히 친밀하거나 부적절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후 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그녀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지연아, 병원에 있어? 재검진받으러 가려고 하는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병원에 있긴 한데 당직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즘 별일 없지?”고은서는 박지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없이 느껴졌다.두 사람은 고은서가 외할아버지 집에 있는 동안 연락한 적이 없었다.박지연은 고은서가 이혼했단 사실도, 요양 중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평소 박지연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고은서는 통화만으로 박지연의 기분을 가늠하기 힘들었다.“만나서 얘기하자.”전화를 끊은 고은서가 병원으로 향했다.박지연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 몇몇 간호사들이 고은서를 알아보고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지난번
원지훈은 굽히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내팽개쳤다.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고은서는 그를 흘깃 보더니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내 목적이 뭔지 너도 잘 알겠지. 협조해. 이 위기에서 널 구해줄게. 네 삶은 지금보다 더 빛나게 될 거야.”원지훈은 고은서의 말을 믿지 않았다.이미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는 같은 실수를 다시 범하고 싶지 않았다.고은서가 웃으며 말했다.“지훈 씨, 똑똑한 사람이잖아. 아니면 백유미도 지훈 씨를 선택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그 생각은 안 해봤어? 지금 상태로 고은혜는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야. 물론 회사도 지키기 어렵겠지. 백유미가 지훈 씨가 횡령했다는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한 신뢰도 깨져서 앞으로 도움은 기대할 수 없겠지. 정말 이대로 모든 걸 잃고 싶어?”원지훈은 잠시 망설였다.그동안 풍족하게 살며 누렸던 시간이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얼마 못 누리고 이 모든 게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하지만 고은서를 믿어도 될까?’고은서는 원지훈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말했다.“지훈 씨, 우리 사이에는 이익 관계가 없잖아. 지훈 씨가 고은혜에게 실질적인 행동을 해서 피해준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 목표는 오직 백유미뿐이지 지훈 씨랑은 상관없어.”이어 고은서가 말을 이어가며 원지훈을 설득했다.“지훈 씨, 당신은 잃을 게 없어. 이번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당신은 백유미의 버린 패가 될 뿐이야. 나랑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아?”원지훈이 그녀의 말에 흔들렸다.“뭘 원해요?”“걱정하지 마.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고은서가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지금 당장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틀 동안 시간 줄 테니 잘 생각해 봐. 이건 선착금이야. 내 제안을 받아들이든 말든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돼.”원지훈은 아직 백유미와 완전히 틀어진 상태가 아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돌아설 가능성도 있었다.하여 고은서는 바로 목적을 밝히는 대신